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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일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

1. 성경 (요일 3:1 ~ 6)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2)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4)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5)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보라~~~~~" ;  두번째 논증은 우리의 소명에 대한 그 존엄성과 탁월성에서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누구에게나 모두 주신 영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다. 이 큰 축복은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순결하여지려는 갈망으로 불타올라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순결하게 할 수가 없다. 사도 요한은 그의 권고를 강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나타내고 있다. 그는 사랑이 주어졌다고 말할 때, 이 사랑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자의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영예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값없이 거저 주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는 참으로 정밀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무엇이 참으로 알려져야 하는가를 선포하지 않음으로 이 언어의 부정확성을 오히려 취하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할수록, 더욱 풍요하신 그의 선하심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나 타내고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 라"(롬 12: 1)고 권고한 것과 같다. 동시에 내가 이미 말하였던 것처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값없이 된 것이지, 어떤 인간적인 선행의 공적에 의하여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이라는 궤변가들의 이론은 이 말씀으로 분명히 논박이 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사는 값없이 주시는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특별히 잘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데 있으며, 또 사도 요한은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나, 선행의 공적은 그 설 자리가 없 어지고 만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보다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무조건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또, 우리의 양자됨을 성령께서 보증하여 주시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에게 어떤 선이 있다면, 그 선이 하나님의 은혜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도 요한이 우리가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말할 때, 이 용어는 의미가 없이 사용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의미 심장한 이름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우리들을 그의 자녀로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  이 시험은 비통하게도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지 못하였거나,혹은 우리 안에서 그렇게 위대한 증거를 나타내는 표적이 없을 뿐 아니라, 반대로 우리를 맹렬하게 조롱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현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추론하여 낼 만한 특별한 것이 없다.점이 바로 사단이  하나님의  이 은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즐겨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점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 사단의 공격을 격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아들들이 우리를 조롱한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못된다. 이런 경우의 실예를 우리는 이삭과 야곱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이스마엘은 조소와 조롱으로써 이삭을 박해하였고, 야곱은 에서에게서 위협과 칼의 위험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억압을 당할지라도 우리의구원은 변함이 없이 확고하다.

 

"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  사도 요한은 모든 사람들의 느낌을 나타내고 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도록 유혹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현 상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는 까마득히 못 미치고 있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티끌이며, 그림자이고, 또 항상 죽음 앞에 직면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무수한 불행 앞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영혼은 숱한 마귀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지옥을 우리 안에서 체험하고 있다. 더 필요한 것은 우리의 감성이 현세적인 사고방식에서 떠나, 우리가 사방으로 둘러싸여서 입도당하고 있으며, 아직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그 행복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결코 동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직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확신에 찬 믿음을 우리가 붙들어야 할 때인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현세적인 상태를 따라 잘못 평가하며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조건문은 임시적인 부사 '때'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타내심이 되면' 이라는 동사는 앞에 나타난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행복이 하늘 나라에 있으며, 아직은 멀고, 또 우리가 지금은 이 땅 위의 나그네로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그 결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로 표현하고 있다. 끊임없이 무수한 죽음 앞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무상한 이 땅 위의 생활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그 영생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노예들로서 천지의 자유인의 권세는 그 신분과는 아직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동사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도 바울이 골로새서 3장 3절과 4절에서 밝힌 것과 같다. "너희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연기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그의 능력의 왕국으로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할 유일의 길이며, 그리하여 약속된 영생을 우리가 인내함으로써 기다려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경솔하게 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길에서 떠난다면,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다'는 단어는 어떤 견해와는 아주 다른 믿음의 확신성을 내포하고 있는 낱말이다. 여기에서는 단순하고 일반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때가 이르면 그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을 확신하는 그 확신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광스럽게 나타날 그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달려 있지만, 그 지식 자체는 확고한 근거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와 같을"은 사도 요한은 이 말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된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머리와 지체 사이에 차이점은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밝힌 것처럼 "그리스도께서의 영광의 몸에 우리 인간의 낮은 몸을 입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태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궁극적인 목표는 순서적으로 말하여 먼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추가한 이유가 좀 약한 것 같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와 같이 만드신다면, 악한 자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볼 것이므로, 우리가 악한 자들과 함께 공통적으로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하겠다. 이것은 악한 자들도 볼 수 있는 가까운 모습이기는 하지만 악한 자들은 공포에 질려서, 그 무서운 모습에서 도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그들은 눈이 부시어 혼란을 일으키고, 마비현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악을 행한 아담이 죄의식 때문에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였던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일반적으로 모세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하고 계신다,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출 33: 20)"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타는 불과 같은 하나님의 위엄이 육체일 뿐인 약한 인간을 마치 곡식 그루터기와 같이 태워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새로와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의 형상을 새롭게 회복하셨다. 그러나 그 얼마나 적은 분량 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모든 부패를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라는 말로써 역시 설명되고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 보는 모든 것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고전 13: 12). 그렇지만 그는 우리가 눈으로 그 때 직접 보는 것과 현재의 생활을 뒷부분에서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 전체 그대로가 아니고,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인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모세의 말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의 등 때문인데(출 33:23),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너무 빛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사도 요한이 진술하는 방법이 원인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서 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역시 주의하여야 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뵈옵는 기쁨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우리의 성품이 영적이며, 천국의 불멸의 축복을 부여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분여받게 된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배받은 영광의 완전성이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크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그 부동성은 너무나 거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 뵈올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지금은 뵈을 수 없는 새롭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형태로 뵈올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과 분리된 생활을 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시인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체 그대로의 전체가 아닌, 상징으로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어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은 지금은 감추어져 보았지만 이 필멸적이며 타락한 본성의 장막이 벗겨진 다음에는 하나님 모습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상한 논증들은 생략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거스틴이 이런 이상한 논쟁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였으며, 그렇게 하고도 파울루스'(Paulus)나 폴투나투스(Fortunatus)에게 보낸 편지나, 그의 '하나님의 도성'이외의 그의 저서들 속에서 결코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태도가 우리의 말하는 화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에 관한 논증에서 아무도 이것 없이는 하 나님을 비올 수 없는 평화와 거룩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  교사도 요한은 거룩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냉각되어서는 안되는데, 이유는 우리의 행복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희망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적으로 '나타난것이 아니라, 감추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우리가 현재 우리 눈 앞에 그리스도를 직접 뵙지 못하고, 그것이 우리의 희망일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것은 순결의 가장 완전한 표본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여 순결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지극하여 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4. 죄를 짓은 자마다~~~~" ;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양자된 영예를 경시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배은망덕한 사람인가를 이미 우리에게 보여 주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신 속에는 하나님의 전하신 뜻이 담겨져 있으며, 만일 우리가 최소한 하나님께 이 은혜에 대한 상대적인 사랑을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싫어하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또한 이 속에, 우리의 그리스도께 향한 사랑이, 약속된 행복의 지연으로 말미암아 감소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를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보다는해서는 안될 죄악에 빠지기가 더욱 쉬우므로, 그는 이 잘못된 방종을 고쳐주고, 또 죄를 범하는 모든 사람은 불의하며,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아마 사도 요한 당시에도 범죄를 하고도 "우리가 죄를 짓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죄와 불법 사이에 별다른 큰 차이는 없어"라고 그들의 범죄를 이런 경박스런 태도로 경감시키려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범죄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위법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이런 경박한 변명을 묵살하고 있다. 사도 요한의 목적은 죄에 대한 증오와 공포심을 갖게 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죄라는 단어가 가볍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불법과 율법에 대한 위범은 처럼 가 법게 보아 넘길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범죄하는 사람들 모두를 불법이라고 비난함으로써 모든 죄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고,  죄란 하나님을 멸시하는 데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이 침해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견해는 스토아 철학자들의 광신적인 역설과는 전혀 다르다.

 

더구나 여기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에 있어서 감정을 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라는 단어는 아주 작은 허물까지를 다 포함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사람들이 온 마음 전체로 악을 행할 때에 그것을 죄라고 부른다. 그는 범죄에 대한 의식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을 범죄하였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들이 육체의 명에 아래 있어서, 비록 그들이 죄로부터 아직 완전히 자유함을 얻지 못하였으며, 순결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죄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들이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이 점에 대해서 곧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이 성경 귀절을 종합하여 설명하면, 죄에 빠져서  멋대로 방종 상태에 있으면서 악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참으시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불의한 자들이라고 위의 사실에서 추론하거나  결론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개인적인 허물로 범죄할 때가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고 .그들의 죄를 미워하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기울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의적인 범죄 행위나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율법이 침해를 받게 정도되는 것이다.

 

"5. 그가~~~~~나타나신바 된 그것을 너희가 아나니" : 사도 요한은 믿음이 서로 얼마나 거리가 멀며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를 다른 논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죄를 제거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임무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이 땅 위에 보내신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의 정결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속죄하시어 그들의 죄를 제거 하셨기 때문에,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요1: 29)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또 실제적으로 우리 죄를 제거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박히고, 회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욕망을 가진 우리의 육신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맥은 죄의 용서에 대하여 우리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지 않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사도 요한은 범죄를 그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라고 논증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성화로 나타내어진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개인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 지체들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곳에는 죄가 깃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범죄하 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그의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여기서 '범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하루 동안이나, 혹은 순식간에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부분적으로, 계속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죄에 대하여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이 그들 안에서 번영하고 있는 까닭에 죄는 철폐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로우며 의를 참으로 갈망하기 때문에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어진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육체의 허약성 아래 놓여있기는 하지만, 범죄하려고 하지 않으며, 사실상 죄와 투쟁하고 죄로 인하여 괴로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같이 그들 이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증거하고 있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 사도 요한은 그가 흔히 쓰는 방법으로 여기에서도 반대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만일 우리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과 지식이 모두 거짓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서, 그가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시지 않는다는 일은 결코 없다. 성령께서 그의 능력을 부어 주신다. 태양이 찬란한 광채로 어두움을 내쫓아 버리듯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추방하신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생명력이 있고 그 효력이 강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형상으로 변화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닫고 앞으로써 참 믿음을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