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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2)

1. 성경 (엡 2:11 ~ 2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1)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2)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3)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4)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5)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6)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7)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19)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0)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1)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1.그러므로 생각하라" ;  바울은 언제나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해 가면서 문제를 분명히 밝히며 더욱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들이 부름 받기 전에 어떤 자이었던가를 상기 시키고 있다. 그때 일을 생 각하면 그들도 자기들을 자랑할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히 알게 된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화해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데  그것은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고 다른 어떤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그 첫째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즉  ‘너회가 할례받지 않은 때는 너희가 그리스도나 구원의 소망이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 인연이 없었고, 또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의 요지는 ‘그러나 이제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접 붙인 바 되었으므로 너희도 동시에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다’ 는 것이다. 그것을 상기하는 것이 무엇을 암시하며, 그것이 그 다음에 얼마만큼 효력을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육체로 이방인이요" ; 바울은 우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행한 표시였고, 무 할례는 이교인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여러가지 성례와 관련시켰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에베소 사람들이 할례 받지 않는 한 은혜에 참여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연역적으로 추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항상 성립된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의 분배에 광해서는 타당하다.  마치 ‘아담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어 버리면 영원히 살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추방되었다’라고 하는 것과 갈은 이유에서이다(창3 : 22~24). 사실은 아담이 생명나무 전체를 먹는다고 해도 단지 그것을 먹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그로부터 그런 표시를 제거하시면서 동시에 그 표시가 의미하는 내용도 제거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 할례 바로 그것이 오영의 표시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로부터 표시가 의미하는 내용을 제거하기 위하여 성별의 표시도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외적인 할례를 멸시하기 위하여 언급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이란 이 수식어가 두 가지 종류의 할례를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는 문자적인 할례를 헛되이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의 영광을 둔화시키기 위함이요, 다론 한편으로는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 그들이 둘 중 중요하면서도 또 외적 표시가 의미하는 진리를 완전히 내포하고 있는  할례를 지녔다는 것을 알고 모든 불안에서 해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의 몸에 오영의 표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육체로…~~~무할례 당'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할레를 받았기 때문에 저들의 무할례가 더 이상 저들을 방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손으로 육체에 행한'이란 이 말씀은 하나로 묶어서 읽어야 할 것은 물론이나 따로 분리해서 본다면, 할례는 첫째 육제적인 것이라 칭해지며, 그 다음에는 인간의 손에 의하여 행해지는 것이라고 읽혀질 수도 있다. 한 걸음 나아가서 바울은 이러한 할례를 마음에 시행되는 영적 할례와 대조시키고 있는데, 영적 할례에 대해서는 그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라고도 했다.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여기 이 ‘할례'라는  말은 유대인 자신을 나타내는 집합명사이거나, 혹은 문자적으로는 할례 자체를 나타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인들이 무 할례 당이라고 불린 것은 그들에게 성별 된 표시가 없기 때문에 유대인과 구벌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칭해진 것이다. 첨부된 수식어에 의하면 후자의 것이 바르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것을 택하든지 논의의 요지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인들이 지금까지 외적인 표시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행복에 대하여 필요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바울이 우선 에베소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 즉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방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약속과 소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않은 자에게 남는 것은 다만 멸망 뿐이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질서도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 것이므로,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거룩한 몸 안에 하나로 결속되겠는가?  갈은 식으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약속온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창 22 : 18)" 라고 함과 갈이 한 가지 큰 약속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없으면 모든 약속은 무익하계 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고후 1:20). 만약 구원의 계약이 없어진다면 따라서 소망도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 '디아데-카스' 가 ‘표' (表)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증서(證書) 혹은 계약서로 읽혀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엄숙히 계약하시기를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셨다. 이 언약의 증서는 모세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이스라엘 민족의 손에 특별한 보배로 맡겨진 것이다. 한편 이방인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세상에서… ..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에베소 사람이든지 다른 이방 민족이든지 그 사람들이 종교를 전혀 소유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도 없는 자" '아데오이' 라고 했을까?  분명히 말해서 무신론자 ' : 아데오스' 라는 것은 신에 대한 감정도 없고, 어쨌든 신에 대한 관념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다. 우리가 혼히 하는 대로 미신자(迷信者)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를 수는 없고, 오히려 어떠한 종교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며, 모든 종교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자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바울이 말한 것이 타당하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 신에 관한 인간의 모든 관념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우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러한 신들에 관한 사상도 경건한 신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신을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별별 종류의 예배를 다 드린다고 해도, 그들이 수많은 의식(儀式)으로 인해 피곤해지기까지 해도 실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과거 디아고라스(Diagoras) 나 그의 동료가 비난받은 그런 의미의 무신론자 (아데이스모스) 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아주 경건한 자로 자처하는 자가 그런 죄로 비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신성이 없고 다만 위조품이요, 거짓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 밖에서는 다만  '우상 뿐이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처음에 그는 에베소 사람은 그리스도가 없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도 없는 자라 하고 있다、참으로 요한이 밀:한대로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없는 것이다' (요일2·.23 ; 요이 1 : 9). 그러므로 이 길을 지키지 않는자는 ' 누구든지 참 하나님을' 떠나며,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은 어떤 사람은 ‘과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결코 나타내진 일이 없었는가?' 라고 물을는지 모론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하냐님은 이방인에게나 또 유대인에게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나타나시지 않았다' 고 대답한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 이라고 하신 것은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국민에게만 국한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자기를 통해야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올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요 14 : 6). 
 
"13.  이제는…·-·.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 우리는 여기에 동사를 보충하고 또 그것을, 다음 어귀와 연결시키면 그 뜻이 ‘이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접함을 받았느니라’가 될 것이다. 그것이 보다더 명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을 택하든지 그뜻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구원으로부터 멀리 있던 에베소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가까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던 불화의 원인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원수였던 그들을 아들로 삼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을 향하여 화해의 은혜를 서술하면서 무릇 누구든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고도 저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선택된 후사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그 대담함을 논박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과 적대(敵對)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안간사이의 평화라는 것 은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아름다운 칭호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해 안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바울은 "둘로 하나를 먄드사' 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사람을 둘로 구별한 것은 팔요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사귈 가치가 없는 존재로 생각했다. 이와같은 교만을 꺾어내리가 위해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으로 결속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약한다면,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려면, 그리스도를 그들의 중보자로 모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이방인과 한몸이 되지 않는 한 그들에게 평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이방인을 자기들의 친구로 사귀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다.' 라는 논지(論旨)가 된다. 

"14.  그는……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이 귀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은 두가지에 유의해야 한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얼마동안 이방인과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 표시로서 모든 의식(儀式)이 있었고, 그 의식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를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이방인을 아껴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교회 안에 있었고 이방인들은 교회밖에 있었기 때문에 간격이 컸던 것이다: 모세가 그의  노래 가운데서 "자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신l32:8, 9) 라고 , 말한 대로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른 백성둘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경계를 정하셨다.

 

바울이  여기에 언급한 분개심은 바로 이런데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버리시고 유대인만을 택하사 그들율 성결케 하시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오염에서 해방시킬 때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간격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유업을 밀페하기 위하여 벽(壁)처럼 의식(儀式)을 갖다 덧붙였다. 그것은 그 유업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지 않게,  또는 다론 소유와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이방인을 더욱 추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적개심도 사라지고 그 벽도 무너졌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양자된 복된 소식이 유대 나라 경계를 넘어서까지 퍼져 나감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형제가 되도록 하셨키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창9, :27)" 라는 예언을 성취하셨다.

 

이제야 바울의 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간에 막힌 담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데 결속시키는 것을 방해하여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장벽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 장벽이 무너진 방법, 즉, 그리스도가 그 육체로 말미암아, 철폐하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성을 취 하사 그리스도 자신의 몸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것이다.

"15.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  바울은 여기서 더욱 분명히 '담'이라는 비유의 말이 무엇을 의마하는가 설명하고, 자금까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외적 표시와 중거였던 의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_폐지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대체로 할례나 제사,  그리고 결례나 어떤 일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만유대인의 운명은 다른 사람의 운명과는 다르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성화의 표시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의 백십자와 적십자가 불란서인과 버건디 사람 (Burgundians) 의 구별점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바울은 다만 이방인이 더 이상 유대인과 차별이 없게 된 것은 그들이 똑같이 은혜의 교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의식이 폐했기 때문에 구별의 표시도 이미 제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임금이 지금까지 서로 불화했던 두 국민을 정복하고 자기의 통치권 아래 두며 그들이 화목하게 살기를 바랄 뿐 아니라 그들의 오랜 적대적인 기장(記章)이나 표시까지 제거하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또 마치 부채(負債)가 면제되어 채무의 증서가 파기(破棄)된 것과도 같다. 바울은 이와갈은 비유를 이것과 똑같은 문제에 관하여  골로새서 2 장 14절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 '율법'이라는 말을 '폐하였으니'라는 말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의식적인 율법에 관하여 항상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순한 생활 규칙만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여라가지 규정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논한 것은 의식적 율법에 관한 것에 불과 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율법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통용되는 교훈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결코 우리를 유대 인과 분리시키는 장벽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려 이방인은 할례나 그밖의 다론 엣 니 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아직도 그것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이 귀철에 의하여 논박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런 원리로써는 여전히 유대인과 이~~J-인 사이의 ' 중간에 가로막헌 장 벼이 남게 되며, ` 그것은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 ; 바울이 ‘자기의 안에서’라고 말한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여러가지 인간의 상위점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단일을 찾도록 한 것이다. 그들의 과거 상태는 둘이 서로 달랐지만, 이제 그리스도안에서는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한 새 사람을 지어"라고 덧붙인 것은 그러한 뜻에서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더욱 명 백히 가르친 바를 여기서는 은연중 알리고자 한 것뿐이다. 할례나 무할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외적인 것은 모두 그리스도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뿐이다. 다만 새로 지음받는 것만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전부이다(갈 6 : 15).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한 성령으로 거듭 나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만일 우라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모두 새롭게 된다면, 유대인도 ,더 이상 그들의 이전 상태를 자랑할 것이 못되며,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해서도 전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치 에베소서 1 장 23절에서 그가 서술한 바와 같다.
 
"16.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십이라" ;  바울은 우리 자신들 안에 평화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은혜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 을 확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인들도 이방안과 마찬가지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중보자 없이는 율법도 의식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누린 모든 특권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사함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은혜를 통해서만 얻출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한 몸으로'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이 이방인과의 거룩한 연합을 이를 때에만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유대인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십자가로……" ;바울은 결례를 위한 제물을 의미하기 위하여 십자가란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하는 적대적(敵對 的)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가 말소되기까지는 결코 우라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성결의 제물이 되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셨고 그로 말미암아 죄는 도말되었다.  바울이 여기서 십자가를 언급한 .또 다론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의식의 페함이 십자가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곧이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는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 즉,  ‘그라스도께서 그의 죽으 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노를 풀어드리고 아버지와 유리를 화해시켰다.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똑같이 구속하여 ' 그들울 한 무라가 되게 하셨다’로 해석된다. 나에게는 후자의  해석이 좋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 앞에 나온 그의 몸으로서 원수된 것을 멸하셨다는 부분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전 화해에 관하여 그가 가르쳐온 모든 것도 복음을 통하여 선포되지 않는 한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이 평화의 열매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제공되었다는 것을 덧붙여 말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오셨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댜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힌없이 알반적으로 주어전 복음의 선교가 그것에 대한 확실한 . 증거이다. 그태서 바울이 고린도 후서 5 장 21 철에 기록한 말씀대로 다음과 갈 사명이 따르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률 삼으셨다" 고,  말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의 직책을 맡기셨으며 화목의 말씀을 부탁하셨으니,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使臣)이며, 무엇보다도 구원의 근거가 그라스도의 죽음에 있다는 사실을 선언 한다’고 바울이 거기서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우리와  교제를 가지시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연합되었다는 문제이다. 그래서 바울은 앞에서는 그리스도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똑갈은 분이시라는 것을 서슬해 놓고, 여기서는 바울이 그들을 복음 안에 있는 친구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이 비록  율법을 가지고 있으나 오하려 복음이 필요했으며, . 또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은혜를 이방인에게 주셨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똑같이 은해에 참여할 자들로 묶어놓은 이들을 감히 인간이 분리 시킬 수 없는 것이다. ] 
 
"17. 먼데~~~~가까운 데" ;이 두말은 장소적인 거리를 말하는도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계약적인 이유로서 하나님께; 가까운 자라고 말하는 것이고, 아방인은 아무 구원의 약속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리 있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자라고 한 것이다.  
 
"평안을전하셨으니";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입으로 평안을 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도들을 통하여 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은혜의 교제로 부르기 전에 반드시 죽온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 : 24) 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거기서 기인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직 세상에 계실 때에 그의 사도들에게 그들의 첫 대사적 사명(大使的使命)을, 다하기 위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라고 하셨다(마10 : 5). .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복음을 사도들을 통하여, 말하자면 나팔을 사용하여 선포한 것이다. 제자들이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그의 명령에 의하여 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하여 그들을 권면하는 것처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만을 본다면 복음적인 신앙도 실로 약하게 보일 것이나,  사람을 하나님의 기구(器具)로 알고도 그둘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복음의 권위가 온전히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평화의 메시지이며, 그것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스럽게 그의 부성애(父性愛)를 내려주심을 친히 증거하고 계시는데 대하여 주의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복음을 제거한다면 하냐님과 인간 사이에는 전쟁과 적의만 남을 것이다. 다른 한편  복음이 고유한 효능은 양심의 평안과 고요함울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복음이 없으면, 양심은 비참하게 불안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바울은 앞에서 서술해 온 것을 지금 그 결과를 가지고 증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는 평화의 선언인 것이다. 대개 악한 자들도 깊은 잠에 빠처 아무런 번거로운 생각도 없이 점점 잘못된 개념의 평안에 의하여 자신들을 기만하는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평안은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잊어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때 뿐이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에 복음적 평화의 정의를 덧 붙여 말하고 있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평안은 양심의 우둔함에  있는 것이 아니요, 공연한 자신감이나 오만과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무지에도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멀리 떠나는 것보다도 하나님 면전에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구김없이 활짝 편 얼굴과 고요함에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그 문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곧 문이시다. 나아가서 이 문은 두 문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에게 똑같이 열려 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그의 부성적(父性的)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갈이 그의 문을 열어주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을 부가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령의 지시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고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된다. 과거 유대인은 하나님께 접근할 여러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오직 한길이 있을 뿐이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 바울은 이미 말한 대로 에베소인은 과거의 계약과는 인연이 없는 자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만을 상대하여 ‘너희 상태가 변화되었다’ 고 말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인으로부터 하나님의 교회의 시민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광을 여러 말로써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인을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라고 부르며, 다음으로 ‘하나님의 권속', 끝으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알맞게 다듬어진 돌이라고 했다. 바울이 그들에게 부여한 첫째 명칭은 혼히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교회를 한 도시에 비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전에는 속된 이교인이요, 경건한 성도들과 사귈 자격도 없는 자들이 이제는 아브라함이나 거룩한 족장들, 그리고 예언자나 왕들, 아니 천사들과도 똑같은 시민권을 가질 만큼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인가 ! 그러나 두번째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는 것이니 결코 거기에 못자않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20~21절 너희는……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에베소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 또는 성도와 갈은 시민이 되었는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도 어떻게 해서 그와 갈은 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찬사로서 세번째로 예를 든 것이 곧 그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가?  아니면 거짓 교회인가를 분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큰 위협을 내포한 오해같은 것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문제이면서도 쉽게 오류를 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시대에서도 볼수 있는 일이지만, 부당하게 거짓 교훈으로 교회의 명칭을 참칭한 자들일수록 오히려 야단스럽게 교회의 이름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러한 데 잘못 이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것이 참된 교회의 표시인가를 여기에 지적하고 있다.' 라는 말은 틀림없이 교훈에 관해서 언급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언급한 것이 족장이나 경건한 왕들이 아니고 다만 가르치는 직무를 가진 자들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한 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신앙은 이 교훈을 터로 삼지 않으면 안될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도대체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가지 발명에만 전적 의존하고 있는 자들을 우려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들이 우리가 순수한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배교자라고 반역하며 비난하겠는가? 그러나 교회가 거기에 터를 두었다고 하는 방법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만이 전체 교회를 지원하기 때문에 유일의 터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규정(規定)이요, 표준이시다.  그러나 교화가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은 교리 전파에 의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나 사도를 숙련된 건축기사'라고 부른다. 바울이 선지자와 사도로서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 이외에 어떠한 일도 하려 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을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살펴보아도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며 친히 복음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로 안정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 밖의 어떤 것에서 편히 쉬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울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이용하려고 하면 그 모든 것을 그라스도와 연관을 짓치 않으면 안된다· 또 이 본문에서는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것인가 하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 다.  그래서 이 양자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배우도록 선지자와 사도들 사이에 훌륭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여기에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갈은 터를 소유하고 또 공동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 다고 우리가 사도들을 교사로 모셨기 때문에 선지자들의 교훈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저자나 사도들의 한 목표를 향하여 같은 일을 하고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옛날 말시온파가 이 귀절에서 ‘선지자' 란 말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말시온파와 갈은 환상적인 정신을 가진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복음이 모든 것을 종결시켰기 때문에 율법이나 선지자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은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오셨다는 것과 또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말씀이 들려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울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의견을 갈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화합 자체가 모든 예언서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 우리의 믿음의 권위를 유지하는 데에 적지않은 힘이 된다. 우리의 종교의 시작이 언제부터인가를 알아보려면, 천지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교황파나 터어키 사람들, 그리 고 다른 분파의 창시자들은 그들이 참되고 순수한 종교에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의 과거를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위졌다고 주창하면서 이 영광을 베]드로에게 돌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오류를 감싸기 위해 이러한 귀절까지도 서슴치 않고 남용할 만큼 파렴치 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모퉁이 돌이라고 블리는 것울 항의하며, 교회를 떠받둘고 섰있는 들들이 많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답은 쉽다. 사도들은 여러가지 환경에 따라 거기에 상응하는 다양한 비유를 사용했지만 의미는 동일했다. 일정불변의  요인은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터를 능히 닦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터의 한 모퉁이나 혹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러면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일한 영적 건물을 세우기를 원한 것이다. 이 유대인과 이방인은 마치 분리되어 있는 두 벽과 같으나 바울은 벽 모퉁이 가운데 그리스도를 놓음으로 둘을 하나로 결합시킨 것인데, 이것이 바로 비유의 요점인 것이다;

 

다음으로 곧이어 그는 그리스도를 건물의 어느 한 부분에 제한시켜서는 안될 것을 충분히 서술하면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라고 했다. 이것이 진리라면 베드로를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그리스도를 터라고 할 때 , 교회가 그리스도 의하여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완성된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바울 자신의 사역과 다른 사람의 사역을 비교하기 위해서 이런 구분율 한 것 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는 그의 임무는 마쳤으나 건물을 완성하는 책임은 자기 후계자에게 말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여기의 본문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화합하기 위한 화해이다. 그것이 없으면 건물이 아니며, 하나의 혼합된 덩어리에 블과하다. 중요한 조화는 신앙의 일치에 있다. 그 다음에 진보와 성장이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보하기 위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결합하지 않는 자들은 세속적인 건물은 될는지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과 공통된 접은 아무것도 없다.

"성전이 되어가고.";  다른 곳에서는 믿는 사람 개개인을 일컬어 성전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그들 전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둘 다 적절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 용납하며 거룩한 연합을 이루어 많은 것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 각 사람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합될 때 성전의 돌이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치된 단합을 이루도록 명하신 말씀이다. 
 
"22. 너희도·…·예수 안에서 합께 지어져 가느다라" ;   라틴어도 마찬가지지만 헬라어의 어미가 에매하다. 왜냐하면 명령법으로 '지어져 가라’와  서술법 으로 ‘지어져 간다’ 는 이 두 가지 번역이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나 문맥 상으로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명령법으로 번역하는 편을 더 좋게 여긴다. 그것은 나의 판단에 의하면,  바울이 에베소 사람에게 한 번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 진 이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더욱 더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세계 도처에 세우시는 새 성전의 일부가 되라고 권면한 말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령’이란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데, ` 이것온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힘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함이요, 둘째는 다른 모든 외적인 것들이나 유대적인 방법 대신 영적인 방법을 대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