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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1:23)

1. 성경 (엡1:15 ~ 23)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5)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7)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8)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0)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1)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2)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23)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 이렇게 감사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사랑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저들에 대하여 갖는 판단의 증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것은 그들이 받은 축복, 즉 복음 안에서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서, 기뻐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공언(公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도 실로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뱌울은 믿음과 사랑으로써 기독자의 완전을 모두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 안의 믿음'  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고 안에서의 믿음의 목표요 대상이 되시기 때문이다.  또 사랑은 반드시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며 모든 사람에게까지 널리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성도에 대한 사랑이 언급 되었다. 그것은 여기서부터 순서적으로 사랑이 시작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은 또한· 여기서부터 다른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하면 힐:수록 그가 차지할 위치는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16. 너희를 인하여……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  바울이 감사 할 때는 항상 그러하듯이 그는 여기서도  덧붙여 기도하면서 더욱 진보 하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다음 두 가지는 에베소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첫째,  에베소 사람이 어떤 새로운 교리로. 이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지금 올바론 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고, 둘째로 저들이 훨씬 더 신앙의 진보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유익에 관하여 만족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령 우리에게 훌륭한 덕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진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바울이 에베소,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지혜의 영으로 이해하는 눈이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에베소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했는가 ?  아니다. 그들은 지혜로 왔다. 그러나 그들이 더욱 성령을 충만하여 마음의 눈이 더욱 더 밝아져서 이미 들은 바를 확실히, 그리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경건한 성도들의 지혜가 맑고 순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그들의 눈을 흐리계 하여 어둡게 가리우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들을 세밀하계 고찰하도록 하자.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으나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도 하나님을 모시는 그러한 인간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고  증거하신 대로이다 (요20:17).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이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예속되어 있음으로써 그의 영원한 신성이 조금도 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그분을 ‘영광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이 칭호는  전자(前者);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이라는 말에서 나은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상태에 예속시키심으로 그를 통하사 친히 우리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이다.  ‘영광의 아버지’라는 말은 히브리어 어법에 따르면 ‘영광스러운 아버지지만, 여기서 아버지와 그리스도, 이 두말을 한데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아버지’라고 해도 잘못이 없으며, ‘하나님'이라는 말을 따로 분리해서 읽어도 틀리지는 않는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 ; 이것은 소위 환유법에 의한 표현인데, 주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란 자연의 능력이나 은혜와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눈은 주께서 열어주시기까지는 소경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하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기까지는 어리석고 무식한 것 뿐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은밀한 계시에 의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밝혀주시기 까지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번역된 곳을 ‘자신을 알게 하시고'라고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아들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말씀의 진정한 의미대로 번역하고 싶다.
 
"18. 마음 눈을" ;  여기 ‘마음’이란 말은 옛 라탄어 역에 ‘마음의 눈'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헬라어 사본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온 자주 마음을 영혼의 이성적 (理性的)부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 엄격히 말해서 마음은 감정의 거소로서 영혼의 의지 또는 욕망을 일으키는 부분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더욱 통상적인 독법(讀法)을 따르고 싶다.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 . 바울은 장대한 말을 가지고 이것이 탁월함을 선포하고, 우리에게 있는 것과 비교하여 그처럼 훌륭한 것을 알기에는 우리의 힘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리고자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위대한 능력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미 나타났으며, 뿐만 아니라" 풍성히 임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소명을 계속  추구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사람들이  소명을 가볍게 여기거나 또는 소명에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이란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이요, 은사로서 화려한 찬양으로 충분히 찬양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이 귀절에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과장하여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에 관하여 말할 때, 소명은 완전히 이 세상을 초월한 문제였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를 하늘의 능력을 찬양하는 자리까지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 어떤 사람들은 단지 이 귀절을 바로 뒤에 있는 '믿는'이라는 말에만 관련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절대적인 능력과 관련시켜 소명을 더욱 확대시킨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그 절대적인 능력에 하나님의 강한 힘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하거나 혹은 이 절대적인 능력이 강력한 역사의 증거이며, 증언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 '뒤나미스;능력'란 말의 반복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첫째로 어떤 부류에 대해서는 제한되었지만, 그 다음 소명의 능력은 전체적인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소명을 알리는 것 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능력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받는 자가 되게 한 때에 나타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기 이 말씀을 순전한 과장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 즉 매일 매일 양심의 투쟁 속에서 승리하며-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여기에 사실이 아닌 말은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얼른 알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의 탁월함에 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으나, 바울이 이처럼 장대하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불신 때문이며, 다른 한 가지는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에 있어서 우리에게 제공된 보배가 얼마만큼 좋은 것인가를 충분히 평가할  수 없고, 또 참으로 그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 속에 거기에 상응 할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이 이 소명과 상반되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을 자기가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권면하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깊고 생생한 은혜의 감정에 접하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거기에 합당한 종이 못된다는 현실을 알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들이 거듭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거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특이한 세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강력한 힘이라는 것은 뿌리나무요, 효과는 그 열매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팔을 펴서 역사하실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  여기 사용된 헬라어의 동사 '에네르게-서'은 앞의 귀절에서 ‘효력' 혹은 ‘역사'라고 번역한 명사 '에네르게이아' 에서 유래한 것 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룬 효과에 의하면'  혹은 ‘그가 사역한 역사에 의하면' 이란 말이다; 내가 번역한 말도 갈은 의미이며, 또 그것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이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후 12 : 9)고 한 말씀과 같이 그것이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의 상태가 무언가 열등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들을 능가하고 있지 않는가? ·비록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 우리 속에 머물러 있으며,:또 죽음도 여전히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인다. 축복은 소망 안에 밀폐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알지 못한다. 성령의 능력은 혈과 육에는 알려지지’ 않는 것 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비참할 정도로 무수한 고통을 당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은 십자가의 약점을 깊이 감찰 할 수 있는 유일한 거울이다. 우리 마음이 의와 구원, 그리고 영광을 신뢰하려고 분기(舊起)할때에 그 마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도록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아직 사망 권세 아래 있지만, 하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지금 생명울 지배하고 계신다. 우리는  죄의 멍에 아래서 몸부림치며 끊임없는 불행에 싸여 있으며 악전고투하고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는 천지를 다스리는 최고의 주권을 장악하여 그의 적수들을 정복하고 큰 영광중에 개선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이름없이 미천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이미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존경하며, 악마나 악한 사람들도 두려워 하는 이름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선물의 결핍으로 인해 마음이 답답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스리며 분배할 것을 아버지로부터 위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며, 아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보배와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마치 거울로 보듯 그리스도 안에서 볼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  이 귀절온 ‘하나님의 우편'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다른 어느 귀절보다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능력, 즉 그의 이름으로 그가 천지의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처럼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을 때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이 앉으셨다고 기록했다며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것온 신체적인 위치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최고의 통치권율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귀절에 나오는 ‘모든 정사와 권세' 란 말이 바로 그것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 말의 전체 내용이 ‘오른편'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능력을 행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우편에 오르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상의 군주가 그의 대관에게 영예를 주어 그의 옆에 앉게 하는데서 취해진 비유이다. 하나님의 오른 편은 하늘과 땅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도의 나라와 능력은 어디에서나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하늘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것이·아니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논증은 이것과는  맞지 않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우편이 꼭 하늘에만 국한된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높이 오르사 하나님의 하늘 영광과 천사들 사이에서 영원히 복된 최고의 지위를 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  바울이 이와 같은 이름으로 천사들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천사들이 그렇게 불리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의 권력과 권세와 통치권을  행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피조물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늘 그의 이름으로 부르곤 하셨다. 그렇게 부를 때 천사들이 때로 '엘로힘 ; 신들' 이라고 호칭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름이 있으므로 다양한 직무가 천사들 가운데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세밀하게 살피고 수를 맞추고 그리고 그들의 계급을 정하는 것 둥은 단순히 어리석은 호기심일 뿐만 아니라 사악한 경솔함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어째서 그는 단순히.그들을 천사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나는 이렇게 답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와같은 칭호를 덧붙인다.
 
가령 어떤 이름으로 호칭 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에 복종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하거나 탁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려는 것이다. 천사에 관하여 여러가지 많은 것을 상상함으르써 하나님과 참된 중보자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미신이 옛적에는 이방인에게도 있었고, 유대인에게도 똑갈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천사들의 이러한 가공적인 화영(火影)이 인간의 눈을 혼미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노력도 이 문제에 계속 일어나는 악마의 간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천사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 때문에 이 세상이 얼마나 그리스도와 멀어졌는가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한 개념도 천사에 관한 허탄한 이야기 속에 사라지지 않으면 안될 만한 사태에 이르게 된 것아다. .
 
"모든 이름 위에……" ; 여기서 ‘이름'은 ‘위대함'' 혹은 ‘탁월함'이라는 말에서 취해진 것이다. 그래서 ‘일컫는'' 다시 말해서 ‘이름지어진다’는 것은 명성을 떨친다든가 칭송 듣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라고 분명히 서술한 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하며, 또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 번창할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사야가 그리스도를 일컬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 것도 똑같은 이유이다(사9 : 6). 결국 바울은 천사와 인간의 모든 영광은 제 위치로 돌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자리를 내놓게 하여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다른 모든 영광 위에 빛 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22. 또 만물을… ..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칭호가 아니고 온 우주의 통치권을 그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의미한 머리라는 말은 최고의 권위를 의미하는 은유이다. 나는 사물의 명칭에 관하여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의 우상에 아첨 하는 자들은 그들의 심술로써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만이 머리라고 부를 때는 다른 모든 것들, 즉 천사나 인간은 지체로서 제 위치에 적당히 있어야 하며, 다른 지체에 비하여 탁월하다고 해도 역시 공통적인 갈은 머리 아래 붙어 있는 지체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회가 지상에서 그리스도외에 다른 머리를 가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머리 없는 것 '아케 팔론' 이 될 것이라고 떠들어대면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을 얻는다고 하면 교회는 불구자처럼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못된 짓들인가 !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 청종하여야 한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예속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교회의 공동체에 들 자격이 없다는 것울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치는 다만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데에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  
 
" 23. 교회는~~~~~.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그분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을 불완전한 자로 아신다는 것은 교회로서는 다시없이 영예로운 일이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 몸의 일부로 받아 주실 때, 비로소 그는 자기 몸의 전부를 소유한 것으로 여기시며, 또 그렇게 될 때, 완전한 몸을 갖춘 것으로 생각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러나 그 점을.오해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분리되면 무엇인가 불완전하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곧이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충만히 채워지며 , 또 어떤 점에서는 우리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의 빈곤이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나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완성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디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그가 무(無)에서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데 그의 자비가 더 한층 크게 나타난 것이다. 만물이라는 말올 본문의 문맥에만 국한시켜 보아도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께서 그의  뜻과 능력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시지만, 특벌히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영적 통치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을 세계 전체의 통치에 관한 말씀이라고 해도 지장될 것은 없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것은 본문의 문제에만 한정시키고 있다는 해석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