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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1:4)

1. 성경 (엡1:1 ~ 5)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3)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5)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 하나님의 뜻으로……사도 된 바울…" ; 형식이 똑같거나.혹은 근소한 차이가 있거나, 하여간 바울의 서신에는 어느 것이나 인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줄 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호칭 (呼稱)하고 있다. 그것은 화해의 일을 말온 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신(使 臣)이기 때문이다.  정말 ‘사도’라는 말은 특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후에 4장 11절에서 언급할 것이지만,  복음의 사역을 말은 자가 다 한결 같이 사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무나 이와갈이 명예로운 칭호를 자칭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소명을 기다릴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명만이 정당한 사역자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악한 사람의 중상을 반대하고, 또 무모한 논란의 모든 경우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라고 부론 자를 그 바로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거룩하지 않은 자는 신실하지 않은 자요, 반대로 신실하지 않은 자는 거룩하지 않은자이기 때문이다. 헬라어 사본의 대부분은 성도라는 말 앞에  ‘모든'이란 말이 빠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보완 되어야 하므로 나는 빼고 싶은 생각이 없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  그는 에베소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장엄하게 찬미하고 있다. 이 말씀온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려는 것이며, 또 충만한 은혜로 채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넘치는 은혜와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들과 그 은혜를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자들은 그들 속에 선 능력으로 역사하는 은혜를 체험하었기 때문에 그 은혜를 흐리게 하는 새로운 교의(敎義)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의 목표는 에베소 사람들이 거짓 사도로 인해 그들의 신앙이 동요하여 자기들의 소명을 의심스럽게 여기며 무언가 다른 구원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해의 위대함을 알리면서 그들을 찬송으로 무장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그는 동시에 구원의 확신은 다음과 갈은 사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구원의 사건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다 더 큰 확신을 주기 위하여 그 근원으로 인도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인데, 하나님은 그 선택에 의하여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를 양자로 선택하셨다. 그가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의 구원 받은 것은 우연적인 사태나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예정에 의하여 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온 한나님께 관한 말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한 말인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성경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는 줄 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때의 찬송을 뜻한댜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고 하는것온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시며, 우리가 행복하고 번영 하도록 은혜를 아낌없이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  실로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만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교회와 믿는 사람 하나 하나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얼마만한 큰 능력이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은 기도로써 서로를 축복하고 있다.  그러나 사제 (司祭)의 축복은 일반 사람의 기도와는 다르다. 사제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요 보증이 되는데, 왜냐하면 사제틀은 주의 이름으로 축복할 권위롭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찬송의 고백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해주시되 모든 복과 은혜로써 풍성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신령한 복……" ; ‘신령하다’는 말이 모세의 축복과 그리스도의 축복이 서로 대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율법적인 축복이 있었지만, 축복의 완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직접 천국으로 인도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실체가 나타났기 때문에 상징은 더 이상 팔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바울이 말할 때 ‘하늘에 속한'이라고 했는데, 거기에 '곳' 혹은 '것'을 덧붙여 읽어도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얼마나 훌륭한가, 즉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축복이며. 또 영생인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과연 기독교는 다른 곳에서 그가 가르치고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축복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딤전4:8). 그러나 금생에 관한 약속의 목표는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신령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신령한 축복이 그 목표인 것이다. 바울은 율법적인 복이 내포된 모든 유대교의 상징과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그리 스도가 계신 곳에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무용(無用)한 것임울 보여주기 위함이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우리의 소명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행복의 기초와 첫째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를 ‘ 복음에 참여하도록 부르셨는가, 어째서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부어주시는가,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문율 열어주시는가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셨다는 이 원리로 돌아가 설명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이 무상(無償)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이므로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존엄성이 어떻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고, 더우기 우리에게 무슨 공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궤변가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선택된 것은 우리가 이미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것이 아니고, 앞으로 자격자가 될 것을 하나남이 예견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유치한 궤변인가!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이미 상실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선 그의 선택에 의하여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해주시지 않으시면, 그뿐이지, 예견 따위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1절에서 똑갈은 논지(論旨)를 썼다.  거기서 야곱과 에서 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 나 소르본느의 어떤 궤변가는 '비록 그들이 아직 한 번도 행동한 바가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을 예견 하셨다'고 항변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같은 항변은 부패한 인간성에 대하여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다만 멸망할 재료 밖에 다른 것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선택이 값없이 되었다는 사실을 두 번째로 확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그것은 응당 우리 자신 밖에서 된 것이요, 우리의 어떤 가치가 고려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 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공덕과 인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다는 것을 바울이 말할 때,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으로서는 선택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거록하고 홀이 없게 하시려고" ;  바울은 여기서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말 하지 않고 직집적인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어떤 일이나 일은 한 가지이지만 그 한 가자 일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두 가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모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건축하는 묵표는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인 목표에 불과하다. '최종적인 목표는 그 집 안에서 편히 사는것이다.  이 귀절에서 이렇게 한 번 간단히 언급해 둘 필요를 느낀 것은 바울이 곧 다른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전혀 모순됨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 받은 최고 목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 다음 이차적인 목표는 우리의 성화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무흠(無火)함과 인간이 지닌 모든 미덕은 선택의 열매라는 결론을 짓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여기서 인간의 공덕을 중요시하는 생각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택할 만한 가치를 예견하셨다고 하면, 그가 여기서 언급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거룩하고 흠 없이 사는 것은 무릇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사는 반면 어떤 사람은 거침없이 온갖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도대체 이러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울의 말을 믿는다면 후자는 그의 부패한 본성대로 살게 내버려진 자요, 전자는 거륙함에 이르도록 선택되었다는 것밖에 다론 이유가 없다. 분명히 말해서 원인은 결과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결과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증언하고 있는 대로 선택은 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그렇다고 선택이 방종의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악한 사람들이 ‘자, 이제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자, 택함을 받았다면 멸망 받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불경건한 언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선택한 자를 부르시고 또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에 선택의 은혜와 거룩한 생활을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카다르파 사람이나 세레스탄파 사람, 그리고 도나티스파 사람이 이 말씀으로부터 추론하여 우리가 지상 생애에 있어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거론 할 것도 없다. 그러한 완성은 우리가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하여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달려 갈 길을 다 달리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 도달 할 수 없다.  예정설을 마치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처럼 생각하여 무섭게 여기고 피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예정설을 무익하고 온통 해독스러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예정설을 바울이 여기서 다룬 것처럼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며 , 또 감사하는 마음을 블러일으키도록 올바르고 진지하게 잘 다룬다면 이것보다 더 유익한 교의(敎義)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지식을 넘치게 하는 참된 샘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핑계하려고 하지만, 선택은 자신들의 어떤 주장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저들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 위험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서 예정에 관해 바울이 논한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잘 기억하도록 하자.

 

"사랑 안에서 그 앞에……" ;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은 순수한 양심의 거룩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부적인 기반에 의해 속임을 받지 않으시고 믿음, 곧  마음의 진실을 보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라는 말을 하나님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그 의미는 곧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게 된 유일한 이유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을 오히려 하반절과 관련시켜 신자의 완전성은 사랑에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만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랑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요, 또 .모든 율법에 대하여 복종하는 중거이기 때문이다.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이 귀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의 비중을 더욱 더 높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값 없이 양자로 삼으심과 양자로 삼으시기 이전에 일어난 영원한 선텍에 대해 왜 그처럼 열렬하게 강조했는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보다도 더 엄숙하게 선포된 귀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귀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귀절에서는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원인이 언급되었는데, 그 네째 것은 나중에 간단히 참가되어 있다. 즉, 동력인(動力因, the efficient cause)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고, 질료인(質料因, the material cause)은 그리스도이며, 목전인(目堡混, the final cause)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말한 각원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동력인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양자로 삼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 하셨다는 전체적인 문맥에 내포되어 있다. '예정하사'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말의 순서에 좀 더 주의해야 한다. 그때는 우리가 아직 존재하기 전이다. 따라서 우리 편에는 아무런 공덕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 나 바울은 아직도 이 정도의 서술로써 만족하지 않고 ‘그의 안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물론 '엔 아우토' 이다. 그러나 '엔 아우토' 는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에 이 스 아우론' 이란 구(句)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로써 그는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 밖에서 원인을 찾으시지 않았고 다만 그의 뜻으로써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위의 내용은 다음의 말씀, 즉 ‘기쁘신 뜻대로' 란·말씀이 더욱 그 의미를 밝혀 주고 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I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외부적인 모든 원인과 비교하었기 때문에 "뜻" 이라는 말씀 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바울은 모호한 점을·전혀 남기지 않기 위해서 ‘기쁘신' 이란 대조적인 말을 쓰고있는것이다. 

 

'기쁘신' 이란 말은 분명히 인간의 공덕을 배제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시지 않고, 또 우리 인져위.어떤 가치에 의해 우 리둘관 화해하시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동기는 오직 그의 기뻐하시는 영원한 뜻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신중하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 이외에 아무것이나 생각하지 않도록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궤변론자들은 여러가지 이견들을 여기에 혼합하면서 거기에 대해 조급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끝으로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에카리토-센 엔카리티; 우리에게 거저 주사는' 란 말씀을 보충하고 있다. .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냐님께서 다른 어떤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떤 공덕이나 이유에근거한.사랑이 아니고 값없는 은총에 의한사랑이며, 또 우리를 마음에 맞는 자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영원한 선택과,지금 밝히 드러난 사랑, 곧 질료인(質料因)은 ‘그리스도'인데, 바울은.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유출(流出)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라고 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한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그는 곧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목적이어서 풍성한 은혜를 영광스럽게 찬양하는 것이라고 첨가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을 가리우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뒤엎으려는 자이다.  궤변론자들의 교훈이 바로 그런것이다. 그들은 인간 구원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