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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3:10)

1. 성경 (엡3:1 ~ 13)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1)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2)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3)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4)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5)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6)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7)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8)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9)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0)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1)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2)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13)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이러하므로~~~~" ;  바울이 갇히게 된 것은 오히려 그의 사도직을 확인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대적자들이 틀림없이 그것을 전혀 반대적인 의미로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에게 그의 갇힘이 그의 소명 울 증명하고· 선포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투옥된 것은 오직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그가 갇혀 있어도 조금도 변합없이 확고부동하게 서 있었던 것이 이방인에게 바울이 자기가 말은 일을 열과 성의를 다해 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데 매우 좋은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한층 더 권위있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자기의 갇힌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이르기를 '나는 사신' ,(/ am an ambassador ; 한글개역 성경은 ‘갇힌자 된 나'로 번역뒤었음)이라고 했다. 세상이나 불신자들 보기에는 이것이 어리석은 자랑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엄숙하고 충실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사슬의 치욕을· 소멸할 뿐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을 최고 영광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그가 단순히  ‘나는 수인(囚人)이다' 라고만 생각했다면,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라는 생각이나 말을 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명예는 단순히 갇혔다는 이유만으로는 불일 수 없고, 오히려 갇힌다는 것은 보통 사악이나 죄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갇힌 자의 사슬은 그 품위에 있어서 모든 대사들의 지위 뿐만 아니라 왕의 관이나 홀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의의를 결정 짓는 것은 우리의 할일인 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최고로 높일 때, 사람들은 가장 치욕스렵게 여기는 일이 우리에게는 가장 영예스럽게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온 "너희 이방을 위하여" 핍박을 받으나 참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에베소 사람에게 그의 박해를 추장(推奧)하고 있다.  그 사실을 듣는 에베소 사람은 바울이 자기들을 위하여 위험과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틀림없이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2. 너희를……너희가 틀었을 터이라" ; .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동안에는 이방인의 소명(召命)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는 아무 말도 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그때부터 무엇인가 말해 왔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보고와 자기의 서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실히 그는 팔요 이상의 논의를 야기시키지 않았다. 다만 그의 반대자들의 악의가 자극함으로써 필요에 따라 자기 의 임무에 대하여 변호할 따름이었다. '경륜’은 여기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책임, 명령 또는 임명의 의미인데,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뜻은 위임이다.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  바울은 그의 사도직을 분별없이 행동해 왔으며, 그리고 지금 그가 무모하게 행동한 데 대하여 벌이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그는 그의 행동의 주동자(主動者)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신중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행한 활동을 좋게 보고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그 행동의 혁신성(革新性)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부른다. 자기가 행해 온 행위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게 인정하지 않을 때 그는 그것을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 자기에 대한 모든 비난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에베소 사람을 위해서였다. 에베소 사람으로 말하면 그들이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부름 받은 것은 확실한 하나님의 목적을 통해서였다고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당시 세상에 널리 그와 그위 행동에 대해 가해졌던 그릇된 판단이나 심술 궂온 의견에 대치하여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때문에 의심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더우기 그는 그 비밀이 계시에 의하여 자기에게 알려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들의 몽상(夢想)을 마치 하나님과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말하는 환상가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거짓 사도둘도 계시를 받았다고 자만하지만, 그들은 기만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의 진실성을 확신하고 그것을 남들에게 논증할 수도 있었다.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 이말은 그가 2장에서 언급한 내용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거냐, 아니면 일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또 다론 서신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전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대강 기록하였으되'라고 번역함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주제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고 지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후자의  해석이 더 지배적이며, 나 역시 그 견해를 따라 해석하였다. 에라스무스가  '대강' 이라고’ 옮긴 '엔을리고' 라는 말은 오히려 시간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현재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과 이미 기록한 내용 사이에 은근한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강이라는 말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으나 강조될 만한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대강 내용을 훑고 지나가는 것보다 더 간결한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점을 특히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잠시 동안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최근의 사건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귀절은 해석하기에 더 큰 어려움이 따른다. '포포로스:호저냐스네 아나기 노궁스콘테 스 노에-사이'  등인데, 에라스무스는 이 귀절을 '이 기록을 너희가 읽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번역 하였다. 그러나 나의  판단으로 볼 때 헬라어 구문법 (構文法)에서는 '아나거 노쓰케인버'를 ‘읽으라'로 번역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보다 좀 적절한 의미로는 ‘이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또는 이것을 깨달으면) 너희가 아해할 수 있으리라' 는 해석이 어떠할는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다. 문두의 접두사도 보면 전치사 '프로스 ; ~에' 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아나기노-스콘데스'를 따로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 의마는 '프로스 호'와 '카드 호'를 똑갈이 사용하여 ‘너희는 내가 기록한 것을 따라 읽음으로써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단순한 하나의 추측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가 가장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면, 이전에 사도가 에베소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유일한 서한은 아니다.  그러나 정경의 가르침은 나무나 구태의연한 것이고 부분적인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논 자들의 불경간한 냉소 가운데는 진리가 존재 할 수 없는 것아다. 우리가  이 서신을 두고 바울의 진지한 태도, 그의 주장과 관심 그의 열심과 정열, 그리고 기탄없이 형제들을 돌보는그의 친근한 성품을 옳게 평가한다면, 그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여러 곳에 편지를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갈다. 주님은 그가 그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인물로 택정한 자들을 그의 섭리대로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이와갈은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들이 충분한 증거가 되나, 그 양이 많든 적든 간에 그 기록들이 우연히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성경의 조직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 이룩되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4. 이것을……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내용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아 확실한 소명이 평신도들이나 목회자들 에게 있어서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소명은 그 자신에게 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갈다. 그는 복음을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똑같이 증거하였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한 무리들이 중상모략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믿음에서 떠나거나 흔들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웠다. 어러한 고동을 당하면서도 그는 여러번 기회 있을 때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섭리와 분부하심을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앞에서 간단히 비밀이라고 말했던 것을 이제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하늘나라에 대한 예언을 ‘그리스도의 예언하신’ 나라로 지칭하고, 그 나라의 비밀이 그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드러날 때까지 감취어져 있는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우선 ‘비밀'이라는 말을 먼져 설명하고, 그 비밀이 어째서 모든 세대들에게 알려지지 뭇했는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비밀이란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 참여한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끌려오개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 이름이 복음에 주어질 때 본 귀절의 말씀은 다론 의미도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 의 비밀이란 이방인들을 부르시기 위한 것이었고,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이룩뮐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밀이 그렇게 많이 예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앞려지지 않았다고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선지자들이 복음을 여러 곳에서 선포할 때 그의 백성들이 온 세상으로부타 모여들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앗수르나 에굽 땅에 제단이 세위졌고 가나안 사람들은 이상한 방언으로 저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방언이 참 하나님을 숭배함과 동시에 동일한 신앙고백이 되어 세계 각처에 두루 전파될 것을 미리 예언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은 동서남북으로 널리 확산되고 이 땅의 모든 나라들도. 그라스도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는 이와 같은 목적에서 증언된 사도들의 대부분의 증거들 이후에 와서 선지자들과 또한 모세로부터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선포된 예언들이 어떻게 비밀로 숨겨질 수 있었는가? 그런데도 바울은 왜 이 비밀이 감추인 바가 되었다고 단언하고 있홀까?  과연 우리는 신지차들이 그들 스스로 알지 못하는것을 말하고 의미없는 말을 선포하였다고 말할수 있을까? 
 
나는 바울이 한 말들이 본 주제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었다고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고 언급하고 싶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언제나 메시아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을 믿고 따른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인류 전체의 구원을 갈망하였다.  선지자 자신들은 계시의 확실성에 기초하여 예언하였는데,  구원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미결로 남겨 두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와 같은 부지현상(不知現狀)은 사도들에게서도 분명한 예를 찾아볼수 있었다. 사도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에서도 읽어보지 못했고 그들의 주님으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하던  "이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6)고  하신 말씀을 대했던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신비한 말씀이어서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상 그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 : 15)는 말씀이나 "너희가 ~~~~~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 : 8)" 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 명령을 받은 후에도 그들은 그들의 동물과 갈이 생각하던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데 대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움츠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들에게 여전히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적인 성례의식의 행사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올 혼동해서 이해했고, 계시에 눈이 어두워서 마치 베일로 갑추어전 비밀과 같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지칭한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것을 성례전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숨겨진 비밀로 있다가 차츰 성례식이 계속 반복됨에 따라 그의 비밀이 알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5 절 이제… . 나타내신 것같이~~~~~~" ; 그는 많은 족장들이나 선지자들, 그리고 거룩하게 세움을 입은 왕들이나 그밖의 어느 누구라도이 계시된 비밀을 깨달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오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우선 그가 이 지식을 다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기를 원했고 또 교회의 교사들이나 지도자들과 보조를 맞추었던것은 그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으며, 그 다음은그가 기뻐하시는자들에게 기꺼이 베풀어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계시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 몇 마디 말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함을 받게 된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어떻게 해서 이방인들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외함이었다. 이런 일은 복음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증거할 수 있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기분 상할 것이 뭇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말씀은 아직까지 한 번도 듣지 못하던 새로운 증거였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경건한 고백은 하늘로부터 온 계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놀라운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온통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는가?
  
"7.  이 복음을……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그 의 직분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라고 말하면서, 그의 직분과 복음의 명령을 그 자신에게 결부시켜서 적용하고있다. 그러나 바울은 복움의 정당성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자기의 직분이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혜의 선물, 즉,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포함된 은사였음을 확언한다. 그는 마치 자기가 그 직분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이 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자기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온유하신 은혜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따라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과거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無)에서부터라도 주님은 사람들을 높이 들어 쓰실 수가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도 위대한 역사가 나타난다.   
 
"8. 모든~~~~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  바울은 자기 자신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능한한 과소평가하려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높이 차켜 세우려고 한다. 이와갈은 선언으로 그는 다른 이단이 그에게 도전해 오는 것을 미리 방비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쳐놓고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선택받고 특벌한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지극히 작은자라고 고백했을 때 그가 가치있고 능력있는 것들로 비교하던 것들은 그에게서 여지없이 떠나가고 말았다. 그가 자신을 낮추어서 말했을 때 그는 가장해서 고백하지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만심에 부풀어 오를 때, 자기의 마음을 겸손으로 가장해서 드러낸다.  이 말은 그들이 결국 높아지기를 원하고 자칭 고상한 명예를 얻기 원하나 낮은 체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진정으로 그 자신을 비천한 신분으로 격하시킨다. 실로 그는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가장 비천한 자라고 고백한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 : 9)" 고 하였고,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다(덤전 1 : 15). 
 
그러나 그가 자신을 모든 자 중에 가장 낮은 자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와는 벌도로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를 살퍼 보자. 마치 그가 그 자신을 낮은 자라고 말했었다면,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데 대해 훼방은 받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이들도 그냥 그를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직이 그에게 주어졌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특별한 은사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음을 실질적으로 언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사도의 직분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유독 그가 이방인의 교사들 가운데서 독특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뽑힌 것이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전적으로 허락하신 이 무한하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보배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그는 지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고 얼마나 귀중하게 취급되어져야 하는지를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해 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갈라디아서에서도 말한 적이 있다. 분명히 그는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였지만,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된 것은 그의 명예였다.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  이것을 태초의 창조에 대한 영적인 회복으로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러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먼 것처럼,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창조는 구원의 축복 속에 포함된 중생의 부활로 이해함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누구나 이와 갈은 방법으로 창조에서 중생에 이르기까지 논쟁없이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 즉  ‘하나님 아버지로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과 이제 모든 이방인들은 똑같은 중보자에 의해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면,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고린도후서 4 장 6절에서 이와 유사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그 동일한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취셨다'고 하였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어두음을 밝히시는 것이 하나님의 임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 그가 언급했을 때, 그것은 인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돌려서 묘사했다.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  그는 여기서 앞에서의 .이상한 편견을 피하고 있다·.그리고 그는 인간이 무지하여 ,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무 가치하고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경솔한 짓을 반대하기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선포한다.  만약 하나님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감취어진 자신의 의도를 지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마치 인간들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서로를 알 수 없는 것이나 ·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것이 어째서 가장이고  속임수란 말인가?  아뭏든 인간보다는 하나님이 지혜로운 분이 아닌가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경솔합으로 인하여 우리보다 몇 배나 더 높으신 하나님의 지혜를 짓누르려고 하는 우리의 실수를 제거하자. 감추어진 것이 어째서 ‘측량할 수 없는 그라스도의 풍성' 이 되고, 비록  그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속하였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 가치를 존경하고 감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쟈해 보자.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 그는 이 말씀을 경륜이라고 불렀고 선포하였다. 왜냐하면 전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의도가 인간에게'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 마치 사도의 직분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빛 이 발하듯이 그는 여기서 '포-티 사이 판타스' 라는 적절한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10. 이제……정사와 권세들에게……" ; 이 귀절의 말씀이 천사들에게 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무리들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볼만 한 무리들에 속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정사와 권세자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지고 그쪽을 선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에는 악한 자로 알려졌던 자들이라도 그들이 사도의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가능한 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값진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은 하늘의 천사들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좇는 자들의 복음 선포에 의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일치 시켰던 구원의 복음이 없다는 것이 더욱 명백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복음은 모든 인간들에게 놀라운 구원이 될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폴위포이킬론' 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사람의 생각은 특별히 오류를 범하기가 쉽고, 전체와 혹은 개인적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 예를 들자면 유대안들의 경우에는 복음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은 이 복음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지혜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셨다.  이것은 새로운것이 아니라  제한된 인간의 능력 이상으로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지식,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자. 우리는 그것을 단지 희미하게만 알고 조금만 얻었을 뿐이다. 이방인들도 부름을 받아 하늘의 천사들을 알고 숭배한다고 하는데, 만약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그 지혜를 거절하고 무시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노룻인가!
 
천사들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존재 한다는 추리는 지나치게 진보된 근거 없는 허구의 사색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남 말씀에 충실한 사역자로 임명된 그 근본 목적을 잃지 말아야한다?  만약 천사들이 하나님의 눈을 홀리기 위하여 믿음의 행실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말씀의 지배를 벗어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의 외침은 인간들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헛 수고가 될것이다. 바울이 한 말의 의미는 교회에 모여든 한결같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전에는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를 거울로 삼아 천사들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해 보자는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속에 숨겨졌던 새로운 역사의 방법을 찾도록 하자. 이와 같은 방법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는 지식으로도 그들을 향상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11. 곧……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예정은 바뀌어질 수있다는데에 반론을 제기하는자들에게 신중하게 대처하는 바울의 보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한 것이라고 세번씩이나 반복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사 규정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섭리가 법적으로 공표될 적당한 시기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문의적 (Literally) 으로 보면 ‘예정하신 뜻대 로 하시다' 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올 ‘예정하신 뜻을 이루다’라고 하고 싶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한 것은 단순한 예정의 실천만을 말했을 뿐, 만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 전 하나님의 품 속에서 그 자신이 정하신 예정까지도 이루셔야 하기 때문이다. 
 
"12.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 바울이 이 말씀에서 지적한 의미는 온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있는 영광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전 대권이다. 그 화해의 대권은 은혜의 결과에서 온다. 이것은 마치 믿음에 의하여 이방인들이 동등하게 하냐님의 현존 앞에 나갈 수 있는 것 처럼 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합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대립이 있음을 알려 준다: 그래 서 다른 연합의 방법들이 모두 배제되고,다르게 접근하려는 방법들도 막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놀라울 정도로 가치있는 교훈을 배운다: 바울은 믿음의 본질과 능력을 고상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뢰와 확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준다. 우리는 믿음의 역할과 효능에 대해서 교황주의자들과 빈번히 싸워왔던 것처럼, 그들이 말씀의 신앙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는 놀랄 것까지는 없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거짓된 사상으로 편견만 없었더라면 이 귀절에서  참으로 가치있는 믿음의 교리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로 바울은 이것을  ‘그라스도의 믿음’이라고 부르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완전 무결한 믿음이라고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우리가 조그만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지만, 대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혼동하여 잘못된 신앙을 택하는 수가 많다.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만을 가져야만 그리스도의 직분과 능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말씀하기를 먼저 확산울 가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결과로서 담대함을 얻고, 그 담대함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둘째, 우리가 그 약속 가운데 신뢰감을 가지고 머무르며 ; 세째는 우리가 담대함으로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고, 선하고 평안한 마음 가운데서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어느 누가 용기와 신념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마치 태양으로부터 빛과 열을분리시키려는 사람들과 같다. 실로 나는 이 믿음의 척도를 신뢰감으로 측정해 보려고 할 때, 그 비례는 어떤 사람은 작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크기도 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이란 그 효능이나 결실이 없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근심하고 주저하고 의심하는 것, 이러한 마음은 언재나 불신의 확실한 증거이다.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있으니 분명히 조심해야 하겠다는 이러한 견고한 신앙의 양심은 이미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의 확실한 증거이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확신을 가지고 거하게 되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고, 지옥이나 죽음 앞에 부들부듣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결과는 대개 그들이 거룩한 신을 추측하거나 모독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바울은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당히 나아가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불신앙으로부터 구별되기 때문에 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휩쓸려 다니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될 수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들은 괴롭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를 원하고 그와 자유롭게, 그리고 기꺼이 즐기려고 접근하게 된다. 우리가 이 귀절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담대함이 참된 신뢰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믿음의 담대함은 우리가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들아갈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의심하고 주저하는 자들은 야고보서 1 장 6,7절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소르본느의 어떤 궤변가들은 그들의 망설임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는지를 모르고 있다.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 …·낙심치 말라……" ; 이제 여러분들은 바울이 왜 그의 환난에 대하여 언급했는지를 처음부터 알게 될 것이다. 우선 그가 어떻게 박해를 당했는가는 성도들이 들을 때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방비해 준다. 참으로 용자(勇者)의 마음은 감방이나 죽음같은 어떠한 위기가 닥쳐 온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해 준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그가 당한 ‘환난'을 상기시켜  준다. 그들은 그로 인해 모두가 경건한 신앙의 확신을 가져왔다. 목회자가 그의 생명을 다해 그의 교훈을 확증하고 거리낌이 없을 때 그가 가르치는 성도들의 신앙은 얼마나 확신에 차 있고 능력이 충만하겠는가! 그는 분명하게 덧붙여 "너희는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라고 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확실히 모든 교회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그들의 신앙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릴만한 충분한 결실을 가져 왔으며 , 가장 훌륭한 하늘의 서약을 비준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