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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3:17)

1. 성경 (엡 3:14~21)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4)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5)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6)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7)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8)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9)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0)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4.이러하므로" ;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뿐만 아나라 그들을 위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지 고백하고, 그들이 서로 기도할 수 있도록 간구한다. 주님께서 그의 축복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시지 않는 한 그의 말씀은 잘못 뿌려진 씨앗이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과실을 맺지 못하고 그들의 노력이 주님이 바라는 성공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들이 권고하고 서로 교육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수고에 대한 결과는 주님께 간구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축복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수고할지라도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는 그 말씀은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으며, 다만 그들의 수고가 소용이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더 많은 것을 주님께 간청한다면 그만큼 그들은 더욱 진지하게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와같은 확실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펠라기우스파 (Pelagians) 들과 교황주의자 (Papists) 들은 거짓되고 혼잡한 논란을 벌인다. 그들이 비판하는 논점은 만약 성령의 은총만이 우리의 마음을 조명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과 기타의 모든 교훈은 쓸데없는 낭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님 앞에서 필요 없는 빛을 찾기 위하여, 아니면 강력하고 효과적인 교훈을 얻기 위하여 성령의 조명과 새로움을 얻으려고 귀머거리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갈은 방법으로는 주님만이 우리와 행동하실 수 있고, 그 자신의 도구를 통해서만이 그가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목회자들이 열심히 가르쳐야 할 의무이다. 바로 이것은 모든 것보다도 성도들에게 진지하게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할 제목이고, 교훈이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주님께 헌신하는 처방이 된다.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  이 귀절은 누가 아들과 아버지 양자에게 해당하는 족속인가를 나타내 준다. 나는 그 족속이 아버지에게만 해당한다고 제한시켜서 표현하고 있는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실상 또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득자들이 자랑스러운 선택으로 그것들을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유대인들이 어느 누구에게 관계 되었느냐에 대해서 사도가 암시하는 것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서로 결부시 킴으로써 우선 그들 조상의 윤곽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 다음에 사도가 원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없애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민족이 되었고 한 족속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 한 가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사들과도 한 가족(어느 누구나 다 포함된)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족속이 되었다고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적당한 해석이 못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여러가지 반론이 제기된다. 이전에 이방인이었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유대인처럼 그의 특별한 백성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한 바울의 언급들을 보면, 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밑에 있는 모든 형제들은 그분 안에서 모두가 통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족속이란 말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그리스도의 돌보심으로 거룩하게 된 백성들이라고 이해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동시에 한 아버지께 화해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방인이든 다른 족속이든지 자기들만이 거룩한 백성이고 영광 된 존재인 것처럼 주장하고 여전히 그들을 모독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든지 그들을 하나님의 족속으로 자부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다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그리고 천사들 중에서도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한 가족만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서는 각각 분산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통일을 이루는 띠가 되시는 것이다.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  여기서 바울이 가리킨 것은 하나의 표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기도하는 자가 언제나 무릎을 꿇는 것온 아니다. 그것은 다만 존경의 표시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기도 자세였다. 특벌한 경우의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진정으로 탄원하는 기도였다. 
 
"16. 그 영광의…·:.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읍시며." ;  바울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언제나 강건합이었다. 그들이 언제나 경건하여 찬양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들이 강건하여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도들이 좀 더 성장하지 않는 한 그들은 더 이상 진보할 수가 없다. 이와같은 성도들의 완전한 삶은 가장 완전한 신앙심에서 전진하기를 요구할 때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 러한 경건함의 확신은 성령이 역사하실 때, 온다고 그는 선포한다. 이러한 확신이 오는 것은 인간 자체와 어떤 가능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일어난다. 이 말은 '마치 선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으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역시 우리의 강건함은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받은 확신이 신의 은총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그가 사용한 ‘하 옵시며 ' 라는 말로 잘 확증된다. 

 

교황주의자들은 이것을 찬동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제  2 의 온사가 이미 우리에게 지불되었기 때문에 그 제 2 의 은사는 제 1 의 은사를  선하게 사용하는 데 따라서 줄수 있는 은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바울이 승인한 것같이 하나님이 주사는 선물로 이해하자. 그 뿐만 아니라 . 우리의 생각이 그렇다 하더라도 더  좋은 선물이 되도록 말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신앙은 발전할 것이고, 따라서 거듭난 자들로서 매일 매일의 생활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명백하게  강조하기 위하여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들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든지 그것은 ‘그의 풍성한 영광을 따라서'라는 히브리어 용법의 소격을 사용하였다는 데서 동등한 수식어가 되든가, 아니떤 '그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리고 그의 영광의 흡족함'이든가이다. 여기에서 ‘영광’이라는 말을 내가 l 장 6 절에서 ‘사랑하심'으로 사용한 것처럼, 나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속 사람을." ;  바울이 속사람이라고 의미하는 것은 영혼을 지적함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영혼의 영적 생명 속에 포함된 의미로 말한다. 이것은 마치 영혼 밖에는 육체가 있는것처럼 말하나, 그 영적 생명 속에는 우리의 건강과 명예와 부요와 활기찬 힘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포함되었고 또, 우리의 영은 그와같은 속 사람을 닮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 : 16) 라고  한 것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부패하나 영적 생명은 점점 더 활기찬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번창하고 뽐내기 위해서 강건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력하게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의 영혼이 존대받기률 원했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  바울은 여기서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강력한 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섣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모든 은사로 충만히 채워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이 소유한 영적 소망을 잘못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어리석은 그리스도의 꿈을 꾸고 있으며, 영적인 소망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령의 은사를 할당받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도에 따라서 모든 문제는 좌우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할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성령이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능력은 공허하고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그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요구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에 계시도록 하나님의 영적 능력을 소유하라고 권면 한다. 역시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왕좌를 그리스도께 내놓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그가 앉을 곳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은 떨리고 우리의 뇌리 속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읍시고” 라고 역시 더 큰 은혜의 효과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표현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믿음을 극찬하는 것이고, 그가 우리와 동거하게 하심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같이 동거 할 뿐만 아니 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러 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야만 그를 소유하게 되고,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로 인해 줄거워 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같이 되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믿음의 결과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실체인 그리스도와 교제한다는 것은 믿음을 떠나서는 생각해 볼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 믿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 받아서 깊이 간직하면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의 충만한 영으로 채우라고 권고한다. .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거하심의 결과에 대하여 다시 제기하고 있는데,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은혜를 아는 지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 사랑을 추구한다는 것은 침되고 가치있는 영혼의 미덕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성도들은 완전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는 이것을 두 부분으로 대조하여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두 가지 은유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게 되는지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많은 이들이 희미하나마 사랑의 빛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빛깔은 너무나 쉽게 퇴색하거나 아니면 흔들리기 쉽댜. 그 이유는 그들의 사랑이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그 사랑을 우리의 마음 속까지 깊이 뿌리를 박게 하고 견고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잘 다져전 건물의 기초나 깊이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말이다. 우리가 사랑 안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지게 하라는 말씀은 단순하면서도 참된 의미를 가지고 있댜· 우리의 기초는 혼들리기 쉽고 깊은 수링 속에 빠져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가 바울이 한 말씀을 추론한다면,  사랑은 우리 구원의 뿌리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더 이상 논급을 회피하면서 누구든지 사랑의 기초 위에서가 아니면 우리의 구원을 맛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견인불발의 강하고 굳건한 그의 사랑을 소유할 때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 바울은 여기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두번째 결과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와 갈온 사랑을 이해하거나 파악한다는 것은 믿음에서 오는 하나의 도약이다. 그는 모든 성도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최상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모든 자녀에게 가장 고상한 지혜가 되며, 오늘의 현실적인 삶에서 획득할 수 있는 축복이라고 하였다. 그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지금까지는 해석이 애매모호하였고 명료한 주석이 없었다. 어거스탄은 이 사랑의 지식을 매우 구체적으로 정교하게 해석하였지만, 주제에 대한 논급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가 추구하는 십자가의 상징을 나는 신비한 지식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아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삶을: 아루는 것은 높은 소망과 오래 참음과 지극히 겸손한 생활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정교한 사랑을 줄거위 한다.

 

그러 나 이 사랑이 바울이 지적한 사랑의 의미일까?  그의 해석은 분명히 암브로스(Ambrose)의 설명 만도 훨씬 못하다. 암브로스는 그 사랑의 면에 대해서는 아주 예리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다른 이들의 견해는 보류한다고 하다라도 나는 모든 사람들의 입장에서 단순하고 참된 진술을 승인하려고 한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한사랑의 폭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참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는 의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의 지혜를 그만큼 존중하는 것이다. 그는 마치 사람들은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그들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경향 때문에 구원의 교리와 관계없는 것을 찾으려 하고 이 사랑과 상관이 없는 것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모양의 지혜도 그것은 구원의 교리인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 귀절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계 알기 위하여 의역 (paraphrase)을 한다면, 가능하다면 그의 사랑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바르고 참되고 겸손하고 고상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완전무결한  지혜라는 것이다.

 

이 은유는 부분적인 지식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표현이고 수학적인 논리에서 취했다. 모든 사람들 거의가 이갈은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하여 육욕에 병들고 오염되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갈은 권고는 매우 가치있는 경고이다. 즉 우리를 위하여 팔요한 지식은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사랑의 욕구를 완전하게 채워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전후좌우 높낮은 데가 없이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랑의 샘물이다. 낮이나, 밤이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깊은 수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분만이 이 사랑을 갖고 계시고 우리에게 넉넉히 주실수 있다. 지나칠지 모르나 에베소교인들의 마음은 굳어져버린 상태이고 사용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한 마디로 무용지물들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한 규탄일 것이다.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저 하늘과 땅과 바다 어떤 곳을 넘고 건넌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기막힌 지혜는 얻지 못할 것이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 이와같은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서 너희의 마음을 지키신다' 고 하였다(빌 4:7). 그는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인간은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살릴수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할 수 있댜고 찬동 하는데, 회의론자 (Sophists)들은 왜 거부하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의 척도(측정 )를 인간 감정(bppreHensibne)의 지각에 더 의존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지식 (scientia) 이라고 · 주장하며, 모든 지식보다 우수하다 (notitia) 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기도가 인간을 위한 재능이었다고 하면 지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가도했다 해도 하나님은 불팔요한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신앙의 확실성이 지식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다만  그 지식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지성에서 나오는 통찰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독자들이 이 지식에 자대하여 좀 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기독교 강요의 내용들을 살펴보라.

  
"19.  그 넓이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 바울은 지금 여러가지의 의미로 사용된 내용을 한 마디 속에 포함시켜 선포한다. 그라스도를 소유한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완전성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나타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의 형상은 그들 나름대로 완전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어떤 때는 부풀었다가  어떤 때는 쇠약해지고 혹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대부분 사악하고 불신앙의 미치광이이면서도 마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동등한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바울은 이제 감사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소망을 가지라는 내용을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더구나 그가 감사하라는 목적은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의 값진 은혜를 보상하고 찬양을 드리계 하기 위해서이다.]
 
"20.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페 더 넘치도록" ;  이 말의 표현은 그들로 하여금 지나친 과욕을 부리지 말고 신앙으로 구하라는 표시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축복들이 하나님께로부타 온다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소원대로 지나치게 과욕을 부리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제한을 받게 된다

 

"능히 하실 이에게" ;  여기서는 소망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미래에 대한 언급을 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들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거나 특별한 감사를 드려야 할 터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시인해야 하고, 끝까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바울이 능히 주실 이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어떤 행위에서 나타나는 (그들이 말하는) 그런 의미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강조 한다. 성도들은 언제나 능력을 사역과 함께 결부시켜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의 능력은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과 구원을 주시는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다면 그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실 수가 있다.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확증할 수 있는 실례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영적인 효능에 의해서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바울은 확언한다. 따라서 이 영적 효능은 우리도 언제나 우리들 스스로가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모든 은사들은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이고, 그밖의 사랑과 능력도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사들이다. 우리는 이와같은 은사들로 인하여 장차에는 더 좋은 온사들을 가질 수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하게 된다. 
 
"21. 교회……예수안에서 영광이……" ; 즉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부르심으로 이방 가운데서 구출되었기 때문에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덧붙여 ‘교회 안에서'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감사해야 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교회에 널리 선포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의 은혜를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여기서 교회의 위대성을 더 강화하고· 영존시키는 해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