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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에베소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1. 성경 (엡2:1~10)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1)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3)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4)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6)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7)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8)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9)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0)

 

2.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너희의……축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바을은 앞에서 서술한 것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며 해명하고 있다. 그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은총을 더욱 적절하게 적용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과거 상태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적용온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너희가 전에는 잃어버린 자였다는 것과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멸망에서 건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전자와 후자를 강조하며 설명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많은 말을 포함시킴으로써 이론의 연결이 원활하계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언어상의 어려움은 있지만 의미는 분명하다.  다만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이 두 가지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언급해야 한다. 우선 그 첫째 부분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바울은 그들을 죽었던 자들”이라고 말하고, 동시에 죽음의 윈인을 "너희의  하물과 죄' 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것울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현재의 죽음인데, 그들은 벌써 그 죽음에 의해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엉적 죽음이란 영혼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면, 우리는 죽은 자로서 태어났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때까지 죽은 자로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 : 25)" 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 기회만 노리고 있는 교황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는 절반은 죽은 자라고들 한다. 그러나 주님 자신이,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아담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생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중생은 영혼의 새 생명을 말하는 것인데, 중생으로 인해 영혼이 죽온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이유없이 한 말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있는 동안도 어떤 생명이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왜냐하면 불신(不信)이라는 것도 감정이라든가 의지, 또는 기타 영혼의 기능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무손 상관이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상태에서라면 그것이 축복된 생활에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것만이 곧 참되고 유일한 생명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 밖에서는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에는 온전히 죽은 자라는 것을 마음에 굳게 명심해야 한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 바울은.한때 죄가 그들 속에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와 열매로써 증명하고 있다. 죄가 활동하여 밖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죄의 힘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세상 풍속을 좇고"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그가 언급한 죽음이 인간성의 분노나 보편적으로 만연 된 질병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 세상의 정상적인 풍속이라든가 하늘이나 땅, 그리고 공간이라는 모든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영향을 받고 있는 악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특별히 개개인 몇 사람에 대한 악덕이 아니라, 온 세상을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틀 따랐으니" ;  바울온 한 걸음,더 나아가 우리가 부패하게 되는 원인을 마귀가 우리 위에 지배권율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류를 정죄하는 데 이 이상 더 무서운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 밖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사단의 노예아며,  그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상태가 많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즐겁다 (적어도 불쾌해 하는 사람은 겨의 없다) 할지라도 그 상태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교왕주의자들이 그처럼 자주 내세우는 자유의지, 이성의 지도, 그리고 윤리적인 덕온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악마의 횡포 아래서 그들이 순결이나 거룩을 발견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이와같온 교리를 아주 나쁜 이단처럼 몹시 싫어하고 그들 자신을 면밀히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 자기 육신의 기호에 따라 사는 사람은 모두 사단의 지휘 아래서 싸우고 있다는 말은 조금도 모호한 점이 없다. 바울은 성경에서 혼히 볼 수 있는 대로 마귀를 단수로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분을 머리로 모신 것처럼, 악인들의 머리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나  악인들은 각각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불신자들을 한 집단으로 나타내기 위해 모든 사악한 자들의 주권을 하나에 돌리고 있다. 바울이 공중의 권세를 악마에게 귀속시키는 데 대해서는 제 6 장에 가서 생 각하기로 하고, 지금 여기서는 다만 마니교도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자. 그들은 마치 사단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우주에 두 가지 원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그 사상을 본문을 통해 확증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온 생각인가? 바울은 유일신 하나님께만 속한 무상(無上)의 통치권을 사단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그가 인정하는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범위 내에서 발동하는 사단의 폭정에 불과하다. 사단은 인간의 망은(忘恩)을 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리시는 사형 집행자이외의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사단은 다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강력히 역사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은.사단의 세력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단은 지존자(至尊者)위 뜻에 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행할 수 없고, 더우기 제왕( 아우 토크라토-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신앙심이 없는 자들이 사단에 의하여 범좌 하도록 교사 (敎陵)받고 있다는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째서 그들이 사단의 폭 정에 순복하고 있을까? 그것은 다만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도 밖에 있는 자들이나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사단에게 종 노릇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처런 나쁜 군주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과실온 그들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면 안된다.

 

"볼순종의 아들들… " ;  바울은 히브리인의 관례를 따라 반역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했다. 불신은 항상 블순종을 동반한다. 그래서 불신은 모든 완고(頭固)의 근원이며 모체가 된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의 과거의 상태를 부당하계 비난하거나, 오만한 유대인이 이방인들을 경멸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하여 바울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동족을 그들과 다름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위선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야니고 전실한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고 말하는 바울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하고 이상히 여길른지모른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이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중생하지 뭇한 자들에게 적용한 말씀이 라고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들의 정욕적인 생활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그들의 생활이 남보기에 훌륭하게 보 일는지 몰라도 온전한 성결의 생수밖에는 부패하고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라는 바울의 정의(定義)에 주의룰 기울여야 하겠다. 이것은 육체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즉, 우리의 본성이나 이성의 이끌림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소위 인간 본성의 경향을 의미하기 때문아다. 그 다음에 ‘원하는' 이란 말이 첨가되었는데, 원하는 것이 곧 마음의 선물인 것이다. '마음' 이란 날 때부터 인간에게 있는 이성 전체를 의미 한다. '욕심'이란 이같은 비단 저속한 욕망 혹은 혼히들 말하는 성적(性的) 부분에·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고상한 것에 대해서도·말하는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도 말했듯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에 의하여 해방되기까지는 예외없이 다 죄인이라는 것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떠한 의나 구원, 그리고 어떠한 미덕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란 버림을 당한 자, 그리고 영원한 사망에 처할 자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노의 자녀' 라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유죄를 선고 받은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이나 교회 안에서 탁월한 자나 모두 다 마찬가지인데, 그것온 생태적(生來的)으로, 다시 말하면 날 때부터 곧 모태에서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온 펠라기우스파나 또 원리를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귀절이다. 모든 사람에게 날 때부터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분명히 원형 (原形)이 다. 바울은 우리가 모두 나면서 유죄 판결을 받온 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죄는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죄한 자를 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펠라기우스 파는 궤변하기를 죄가 아담으로부터 온 인류에게 미쳤지만, 그것은 원형 혹온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모방(模徹)에 의해서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마치 뱀이 독(毒)을 그 어미뱀의 뱃속에서부터 받아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입고 태어났다고 확실히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또 다른 사람들은 원죄는 실제로 죄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펠라기우스파 못지않게 바울의 말에 반대하는 자들도있다.  그러나 유죄 선고가 있는곳은 반드시 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죄한 인간에 대하여 노하시지 않고 죄에 대하여 노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 속에 있는 부패가 하나님 앞에 죄로 간주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온 항상 숨겨진 씨를 보시고 정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여기서 한 가지 유대인은 성별된 자들의 자손인데 어째서 바울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치로 진노와 저주받을 자들이라고 했을까?' 라는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여기에 대하여 ‘인간성온 누구나·'공통인데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차이는 ,다만 '하나님이 저들을 약속의 온혜에 의하여 멸망에서 건져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에 블과 하다. 또 하나님이 인간성을 주신 분이라면 어째서 우리가 날 때부터 멸망 당하지 않도록 무죄한 자로 만드시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도 있다. 나는 여가에 대하여 : ‘인간성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야고,  다른하나는 시조부터의 타락이다' 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유죄 선고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에 대하여 논한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간성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아담이 처음 창조 될 때쳐럼 그렇게 태어나는것이 아니고,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 본성을 상실한 불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  이제 재 2부가 계속되는데, 그 요점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사람 모두를 전에 얽매어 있던 멸망으로부터 건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여가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 외에 어떤 영혼의 생명도 없다 는 것을 이해 시키려 하고 있다.  그래사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질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한 것이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영교(靈交)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앞에서 바울이 말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론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앞에서 말한 죽음과 지금 말하고·있는 부활과는 서로 반대적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똑같은 영에 의하여 힘과 생기를  받는 것이므로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래서 그가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풍성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풍성하다는 것은 그 은혜를 풍부하고 장대_(壯大)하게 쏟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는 곧이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임을r 덧붙이면서, 구원의.원안을 보다 밝히 하나님의 값 없는 자비에 두고 있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움직인 유일의 이유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로 요한이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 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 : 10, 19)" 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불변사 '~~~·일지라도' (even)는 로마서 6장에서와 같이 강조하는 말이다. 

 

"5. 허물로……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삽입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은 너무나 적합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울은 은혜의 풍성함을 설명하는 것 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가지 말로 갈은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확실히 인간의 , 망은(忘恩)을 차근 차근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의 이 삽입구는필요없는 것이라고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바울이 말한 부활과 또 하늘의 자리는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은혜가 이미 우리 손에 쥐어진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옮겨질 때 일어난 상태의 변화를 더욱 찬양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하늘에 옮겨진 것과 갈은 의미를 말한다. 실로 우리의 구원은 아직도 소망 중에 가리어 있자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불멸과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직 지체에는 나타나지 않고 머리에만 나타났지만, 신비로운  연합관계로 머리와 지체가 일치되었기 때문에 은혜가 확실히 그들에게까지 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고 번역하지만,  방금 설명한 이유대로  ‘그리스도 안에' 라고 하는 편이 문맥 상더 낫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에서:넘치는 위로를 받는데 , 그것은 현제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모든 것에 관한 확실한 보증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첫 열매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7.  이는~~~~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사랑이 자비에서 솟아났다는 것을 반복하여 제시, 혹은 확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그 열매를 통하여 보여 주듯이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샤랑이 무상(無償)이라는 것을 확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되  그저 동상적 (通常的)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탁월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가 ‘그리스도'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仲裁)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여러 세대에……" ; 바울은 목적인(目的因)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에베소 교인들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수련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 목적이 옳은 줄을 앎으로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더욱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또 하나님이 놀라운 사랑의 기억을 여러 세대에 주시려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이방인이 값없이 부름 받은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을 한층 더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세에 걸쳐 기억되도록 한 것을 없에버리려고 즉각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로 인하여 우리 조상들을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하여 주신 하나님의 긍훌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깨우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이 부름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이며, 이것은  반드시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리고 자자손손에 아르기까지 전래{傳來)되어야 하며, 이것이 침묵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8 ~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  이것은 앞에서 서술해 온 것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과 자유로운 부르심에 대해 말하면서 오직 민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결론에 이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에베소 사람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 , 즉, 자유로운 사역이었으며, 다만 그들 편에 서 말한다면 그들이 이 은혜를 믿음에 의하여 받았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양편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부담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한 은혜이지 보상이냐 보수가 아니다. 따 라서 이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제공된 구원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거기에 대하여 나는 "민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우리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댜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편으로 말하면 그것은 다만 은혜요, 우리편으로 말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편의 모든.자랑스러운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니 당연히 구원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나 선한 의도, 그리고 인간이 고안한여러가지  준비라든가 또 공덕이나 보상에 관해서는 전혀 입 벌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 중에는 어느  하나도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한 몫 자랑할 만한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찬양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인간의 측면에서 볼 때 다만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을 확언함으로써 지금까자 인간이 의뢰해 온 다른 모든 방법을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안간울 빈 상태로 하나님께 데리고 간다. 그레서 비율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첨가하고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하여 인간 자산들 온 아무것도 주장하자 못하며: 다만 그들의 구원의 주로서 하나님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산물이라 ••••." ; 바울은 앞에서 고들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 것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말하며, 앞에서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야니요"라고 말 한대신 이번에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인간 편의 것은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바울의 주장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본서에서 길게 논하고 있는 요지, 즉 의가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홀에 의해서이며, 또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공뇌었으며, 어떠한 인간의 공덕으로도 말미암지 않고,  다만 믿음으로 말미암야 우리가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이 세 귀절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귀절로부타 교황파 사람들이 일부러 논의 하기를 회피 하려고 말하는 헛된 궤변, 즉 바을이 우리에게 행함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든 것을 말했는데, 그것은 의식에 관하여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그들의 주장을 쉽게 배격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기 문제가 된 것은 다만 어 떤 종류의 행위가 아니고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인간의 모든 의, 즉 인간 전체나  인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바울이 배척하고 있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아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조, 그리고 은혜와 행위와의 대조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의식에 관해서만 이의(異議j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과 대조 되어야 했을 것인가?  따라서 교황파 사람들도 바울이 여기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엉뚱한 생각을 고안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최초의 은혜를 주심에 대한 언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사람의 구원 얻는 시초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 자체에 관하여 완전히 인간 전체와 인간의 모든 기능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주의자들이 그렇게 제 멋대로 확장하여 해석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들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는 이 결론에 주위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중적인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떠한 인간의 공덕이 조금이라도 평가되는  한, 반드시 인간을 자랑하는 것들이 남기 마련이다.  다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긍휼에만 온전히  찬양을 돌리지 않는다면  바울의 논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라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선물’이라는 말을 다만 믿음에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진술한 것을 다만 다론 말로 바꾸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  바울은 반대적인 ’가정은 제시하지 않고 그가 앞에서 말한 바; 즉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것이요, 우리에게는 구원 얻을 만한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선행은 모두 중생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행위 자체도 은혜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반적인 의미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고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의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의 자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믿는자들에게만 적용 된다. 비록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태어났지만 그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되어 새로운 인간으로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바울 이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서 지음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받았다는 말이며, 또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된 인생이 아니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가하고 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행이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 이상,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독자들은 사도의 말에 정중한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도움을 받았다고도 말하지 않고, 또 나중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의지가 준비되어 있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할 수 있는 대로 약화시키려는 무리가 항상 지껄이듯이 먼저 올바른 선택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여되고, 그 다음에 둘 중 자기가 원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것 은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요,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으신 것들이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선하게 되려면 하나남의 손에 의하여 지음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은 단순히 올바론 선택의 능력이라든가, 무엇인가 표현하기 어려운 준비라든가, 또 도움이라든가 하는 것들만이 아니고; 심지어 옳은 의지 그 자체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단 바울의 논의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의 의도는 인간이 구원 얻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고, 다만 하나 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지 않는 한 무(無)에 불과 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밖의 아무리 적은 것이라고 해도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돌린다면, 필경 구원 얻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이 된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십을 받은 자니"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는 전리를 해치기 위한 목적에서 이 귀절을 인용하는 자들은 실상 바울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부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헛된 줄로 알기 때문에 이러한 핑계로 슬슬 피하고 있다. 즉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것은 의 시작이 믿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중생에 의하여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새로와지며 선한 행실을 하면서 걷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믿음을 문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의에 들어 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를 성취하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들은 의를 정의하여 정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적어도 사람이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새로 지음 받았을 때라고 말한다. 이러한 오류가 얼마나 오랜 옛날부터 시작되어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을 증명하기 위한 보증으로 이 귀절을 인용한다는 것은 분명히 찰못된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숙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 것이며, 심지어 우리가 행하는 선행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순수한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면 조금 앞에서 말한 그런 사람들이 우리는 행위에 의하여 절반은 의를 가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댜면, 이것은 바울의 의도나 바울이 취급한 문제와 어던 관계가 있는가?  이렇게 된다던 첫째 무엇으로 의가 성립되는가에 대하여 토론해야 될 것 이고 또 한 가지는 결과적으로 의는 우리 자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것과 선행도 우리 자신의 고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 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일이다. 바울은 의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는 그가 주로 양심이 죄 사함을 받기까지는 결코 평안치 못하다는 점을 자세히 논했지만, 여기서는 거기에 대하여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논하고 있는 문제가 다만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 이것은 펠라기우스파가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적 교훈에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마치 바울이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하나님이 명하시며, 또 착한 삶을 살기 위한 올바론 질서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앞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문제, 죽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를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는 자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음 받고 받아 드려진 이상, 선행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준비된 것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제 무엇보다도 이렇게 하나님의 온혜가 선행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게 된다. 그래시 ‘예비하셨다’는 이 말씀을 주의깊게 읽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순서 자체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선행 때문에 우리에게 짐이 되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선행은  오래 전부터 간직해 둔 하나님의 보고(寶庫)에서 끄집어내 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 그들을 중생시키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