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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4)

1. 성경 (고전13:4 ~ 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4)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5)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6)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4.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교만하지 아니하며" ; 바울은 이재 사 랑의 효과와 또 그 열매를 보여줌으로써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 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묘사들은 .사람에 대하여 마음을 끌리게 하려는 단순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설명하고 또한 사랑의-본질을 이해하려는데 그 뜻이 있다. 그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그들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본 것과는 대조적인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도록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직접적인 방법으로 책망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그 사랑이 교회에 평화와 조화를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끈기 있게 참는 데 있다고 하였다. 사랑의 두번째 성격은 말하자면 온유와 인정이 많다는 것과 대단히 유사한 것으로써, 이것은 헬라어 풍자가 의미 하는 그대로이다(크레 -스튜에스다이 ). 세번째 성격은 모든 논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경쟁을 고치는 것이다. 그는 질투를 경쟁 속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질투가 논쟁과 대단히 닮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경쟁을 질투와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또한, 그것으로부터 조금 덜 자주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질투가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제1위가 되려고 하거나, 혹은 제1위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데 이런 곳에서는 사랑이 자랄 수가 없다.  '교만하지 아니하며'라는 나의 표현 뒤에 나타나는-헬라어는 '팬페류에스타이'이다. 에라스무스는 이 말을 '부끄럽지 않다’로 번여하였다. 그 단어 '펠페류에스다이' 가 여러가지 다른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자만 때문에 일어나는 무례한, 혹은 오만함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의미가 이 귀절에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랑을 위한 온건한 영향력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사람들을 제어하는 고삐이며, 광포하게 되려는 경향을 저지하여서 조용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사랑은교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덧 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교만으로 부풀어 있지도 않으며, 자만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도 않는다. .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 :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오만하지 아니하며'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의미를 지지하는데 있어서 그가 권위를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적절하고 일반적인 의미를 그대로 주장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의 설명은 이렇다. 즉 사랑은 무의미한 허식 속에서 기쁨을 갖는 것이 아니며,  또 공연히 크게 소란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항상 온유하고 예절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런 직설적인 방법으로 다시 한번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든 축복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교만해 있기 때문 이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이 결코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하여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을 사랑하고 들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참으로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조금도 동요 됨이 없이 철저하게 가질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진실한 고백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자기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게 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과 관심을 기울여 이웃을 돌보게 됨으로, 오직 사랑만이 그런 잘못된 성향을 고치는 유일한 치유책이 되는 것이다. 한편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라는 말은 자기만을 위하고, 완전히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이익만올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문제는 그 정의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전혀 돌보지 않거나 혹은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것은 아니며, 그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야기된 지나친 자기 사랑과 자기에게만 기울이는 관심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자기.사랑은 실제적으로 자가만을 생각하는데서 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웃을 돌보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사랑은 논쟁을 제거하는 굴레가 되며, 또 그 첫째에서 이 귀절에 나타난 두가지 진술이 나온다고 덧붙이고 있다.  온유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갑자기 화를 내지 않으며, 쉽게 논쟁이나 싸움에 휘말려 들지 않는다.

 

"7. 모든 것을 참으며" ;  바울은 이 귀절에 나타난 모든 설명을 통하여 사랑은 조급하지도 않으며 또한 악의 (惡意)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관용의 본질이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은 성실과 박애의 본질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지나치게 자기를 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잘못은 우리를 조급하고 불평하게 만든다. 그 결과로써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짐을 지기를 원하며, 동시에 어떤 방법으로든지·그들을 돕는 일을 거절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형제를 섬기게 하고, 그들의 짐을 우리 어깨에 지도록 우리를 가르치므로, 사랑은 이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된다.

 

다시, 우리는 태어나면부터 악하였던 까닭에 우리는 의심을 잘하고, 또한 거의 모든 일에서 악한 의미만을 끄집어 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신실한 태도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성으로 되돌아 가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것'이라는 언급에서 우리는 인내해야 할 것과 또한 올바른 자세를 취하여야 할 일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악을 참지 뭇하고, 우쭐거리는 말로 그 악에 동조함을 나타내 보이든지, 아니면 우리의 무관심으로 그악을 묵인함으로써 그것을 지지하게 되든지 하게 된다. 다시 이 인내는 훈련의 분량이나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제거하는것은 아니다. 인내는 인성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에 대하여도 적용된다.

 

"모든것을 믿으며~~~" :  그리스도인은 고의로 또 계획적으로 자신이 짐을 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속이기가 더 쉽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지혜와 분별력을 자기 자신에게서 일부로 제거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하얀 것에서 검은 것을 어떻게 구벌하는가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갈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판결을 하는 신실성과 인성이며, 또한 여기서 그는 이 두가지 덕이 끊임없이 서로 손을 맞잡고 협조한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악에 기초한 의심을 통하여 그의 형제를 해치는 원인이 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인이 그 자신의 친절과 좋은 성품을 통하여 형제를 믿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