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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1. 성경 (고전 12: 1 ~ 1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1)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2)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4)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5)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6)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7)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8)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9)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0)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1)

2. 묵상 (Calvin 선생주석)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 바울은 다른 분명한 잘못으로 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허식과 과시로 악용하였기 때문에, 사랑이 전혀 없었거나 혹은 사랑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바울은 이제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은사를 그렇게 풍성하게 받는 것은 그들의 형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원리를 두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이 은사의 근원이심을 지적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그 은사의 묵적에 대하여 계속 논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인간에게 온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 그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었으며, 또한 영적으로 눈이 먼 자들이었던가를 그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호의인 것이다.

 

그 낱말들에 관하여, 그가 ‘나는 여러분이 무지(無知)한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이 정의이며' 혹은 ‘여러분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또한 그 이외 다른 형태에 대하여 여러분이 무지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보충해 넣어야 한다. 그가 영적인 일들로 나타내는 영적 은사에 대해서는 후에 살펴보기로 하겠다.다음에 나타나는 내용에 두 가지 독법 (讀法)이 가능한데 , 어떤 사본은 '호티'만이 나타나 있고, 다론 사본에는 '호티'에  '호티'가 첨가되어 있다. 그들은 '호티'를 ‘그것' (that)을 설명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호티'는 ‘에'를 의미하는데, 이 독법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그 변화의 다양성은 그만두고라도 그 구조가 각각 다른 방법으로 혼동되고 있다. 완전  문자적으로 읽으면 ‘너희가 마치' 그 우상의 인도를 받는 것처럼, 말 못하는 우상을 따르면서 이방인이었던 때를 너희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설명에서, 나는 바울이 말하려는 것을 신실하게 지켰다. "말 못하는 우상"이라는 말에서 그는 그 우상들이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귀절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우매스러운가, 성령의 조명이 없었던 때를 지적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말 못하는 우상에게 놀라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찾는 데 있어서 우상보다 더 높이 승화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한 것은 참으로 인간이 짐승처럼 사단에 의하여 쫓겨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에베소서 2장 12절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는, “그 때에 너희는 하나님도 없는 이방 사람들로서 구원의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더니~~~~" 라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어쩌면 바울은 그 반대적인 것으로부터 또한 논증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보호 아래로 이끌어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따르게 하였는데도, 그들이 하나님의 지도를 자원하여 따르지 않고 과거에 사단의 지시를 쫓던 것을 더 좋아하고 그것을 더 따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낸 교훈을 지적하면서, 바울은 그것에 기초하고 있는 일반적인 성격을 띤 교훈을 주고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경험은 뭔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적인 것인데, 이를테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그 진리로 들어오기 전에 과오 속에서 방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잘뭇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참 지식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라는 결론을 역시 내리게 된다. 바울은 또한 정반대의 원인에서 그 반대적인 결론으로 논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저주 할 수 없으며, 또 다른 한편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예수님을 저주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모독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들려 드리는 것이며, 또한 그의 위엄을 찬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불신자들이 열광적인 말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진 것이 이니냐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물론 그 결과에 관한 한,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졌음이 틀림없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중생의 은사는 그것대로 다르며, 또 단순한 실제적 지식의 은사는 중생의 은사와는 별개의 것이다. 가롯 유다도 그가 복음을 전파 할 때는 그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혀를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때때로 우리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다윗이 이 은사를 갈망할 때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 라고 간구함으로써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입술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사방에서 간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사야는 아사야 6장 5절에서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하고`있다 • 

 

"4.  은사는 여러가지나"교회의 조화는, 말하자면 많은 부서들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러가지로 각각 다른 은사는  마치 음악에서 각기 다른 부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연합하여서 아름다운 한편의 곡을 연주하듯이 , 그 모든 은사들이 한 가지 동일한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사의 업무가 마치 서로 다르듯이 각각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 모두가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틀 아룬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별을 어떤 사람이 오만하게 찬탈함으로써 이 구벌을 모호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로마서 12장에서 이 은사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개개인이 자신이 가진 은사에 만족하며 또한 그 은사를 최대 한으로 개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자의로 어떤 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금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각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받았는가, 자신이 받은 몫의 본질이 무엇인가, 또 그가 무엇을 하도록 소명을 받았는지를 잘 살펴보도록 각 사람에 권고하고 있다.

 

 다른 한편, 여기서 그는 개개인은 그들이 가진 것을 공동체에 공헌하도록 활용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은사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각 사람이 받은 선물의 은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고 그 개인에게만 제한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이 은사가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두 귀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육체에 대하여 유추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 다론 이유를 갖기 에 아주 충분하다.  그가 말한 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그 은사들은 그것을 받은 개인 혼자 그것을 독점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다양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령은 모든 은사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 고, 또한. 모든 행위의 창설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창설자이신 하나님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성령은 같고" ;. 성령이라는 이름이 어떤 본질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거룩한 능력의 은사나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광신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귀절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이있다는것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성령이라는 이름은 분명히 은사 그 자체에 대한 환유로써 대단히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우리는 이해의 성령, 심판의 성령, 능력의 성령, 또한 절재의 성령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심판과 깨달음, 그리고 온유와 또한 한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나머지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이 은사 를 수여하고 그들에게 분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그 위력을 나타내게 하는 것도 성령의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5. 직임은·…·주는 같으며." ;  교부들은, 이 귀절들을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증거로써 아리안파(Arians)들에 대한 반박으로사용하였다. 여기서 성령이 명명(命名)되었으며, 그 다음에 주님,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칭호가 명명되었는데, 일체이시며 동일한 활동이 3위에게 해당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를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그 귀절들에 대한 이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이 아리안파를 반격하기 위한 논증으로는 이것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불안하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다’라는 말과  '주' (혹은 주님)라는 단어 사이에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배드리는 것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면에서 봉사를 하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반대 의견은 올바론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 말들이 그리스도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억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6.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하냐님은 같으니." ;  능력(재능, -기능)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나는 동사 ‘일 하다' (에네르게 인)와 관계가 있는 단어인 '에네르게-마타'로 취한다. 그것은 마치 라탄어에서 ‘결과'라는 명사가  '한 결과를 초래하다’는 동사와 일치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의 근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귀절에서 “모든 것을 모든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이라는 말씀은 하나남의 일반적인 섭리로 더듬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은사를 주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관대하심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제외한다면, 인간은 어떤 선이나 칭찬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하나님이 사단과 버림 받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라고 묻는 것은 요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은사를 그냥 버려두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은사들의 어떤 전시 효과를 위하여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사를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온 '프로스 토 쉽 페론', 즉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교회가 그 은사를 통하여 유익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나타남’은 능동태와 마찬가지로 수동태로 취급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나는 곳에 예언과 지식, 혹은 어떤 다른 은사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수동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에 어떤 은사를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실 때, 다른 방법으로는 감추어지고 또 우리가 미치지 못한 먼 곳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은 우리에게 계시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 부화를 우리에게 감추시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능동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크리소스톰의 견해는 오히려 난처하고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나타남’이라는 단어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기적에 의할 뿐이라는 그런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8.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  이제 바울은 물론 모든 은사가 아닌, 현재의 그의 목적에 충분한 특별한 은사들을 계속 열거하고 있다. 그는,  "믿는 사람들은 각각 다론 은사를 풍성하게 받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주는 은사가 무엇인지 깨닫도록하게 하자.  왜냐하면 태양이 온 대지(大地)위에 그 찬란한 햇살을 고루 고루 비추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우리에게 모두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은사의 차이에 관한 한, 지식이나 이해력, 그리고 지혜가 성경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그 은사들이 각 각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골로새서 2장 3절에 언급된 것처럼 서로 관련성 있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지식이란 거룩한 일들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지혜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은 때때로 그들 사이에 중간적인 위치를 취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지식을 어떤 실제적인 목적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 두 낱말들은 참으로 상호간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낱말들이 서로 나란히 병행하여 나타날 때, 그들 사이에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혜는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은밀한 비밀과 고차원의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9.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여기서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문맥이 곧 분명히 밝혀 주듯이, 특별한 종류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속주와, 칭의, 성화등의 전체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그런 믿음의 형태가 아니라, 기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는 그런 형태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유다도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였을 때 바로 이런 믿음을 가졌었다. 크리소스톰은 그것을 '기적에 관계된 믿음' (signorum)이라고 부름으로써 가볍게 그 차이성을 두었으며, 기독교인의 교훈(dogmatorum)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과 내가 방금 말한 해석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병 고치논 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10절".  능력 행함 혹은 다른 사람들이 표현하듯이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동일한 확신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마귀를 대적하며 또한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virtutem)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마귀들을 권위 있게 정복하고 그들을 패주시킬 때, 그것은 효과적으로 사역 하신다는 말인, '에네르게-마'로 표현되었다. 또 다른 실례들을 살펴보면, 바울이 박수(마술사)를 눈 멀게 한 일(행 13 : 11), 또 베드로가 말하는 순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즉시 땅에 '쓰러져 죽은 사건(행 5 : 1~11)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둘 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멸망시키기 위하여서는 그의 기적을 준엄하게 행하신다.나는 예언이란 낱말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시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로서, 말하자면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들을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영들 분별함"이란 뜻은 그들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입증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예라한 척도가 된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상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통찰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적 판단력은 단순히 거짓말하는 사람들이나 또 허위에 쌓인 어떤 상태에서 그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을 방지하는 것만이 아니고, 마치 그들이 선과 위선을 분별하는 어떤 표를 가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참 사역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차이점을 분별해내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각종 방언 말함~~~" ;. 이 은사는 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후자(後者)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이 상대하여야 할 사람들의 말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통역자들은 외국어를 자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들은 그 당시에는 이 언어를 힘든 노력을 통하여 혹은 그 말을 배움으로써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놀라우신 계시로 이 은사를 받은 것이다.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 ; 이 모든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잘못 되어서, 나눠 쓰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독할 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모든 부분들이 잘 혼합하여야 할 곳에서 거룩한 조화를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 아래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일하여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일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은사는 한 근원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다시 하나로 뭉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무도 자급자족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많은 은사를 받거나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을만큼 그렇게 충분하게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 다.  이것이 그가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말한 내용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받은 모든 은사를 공동 이익을 위해서 공헌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 은사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받은 온사를 자기 몫으로 만족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절연하고 혼자 살도록 하기 위하여, 즉, 어떤 개인 혼자 그 은사를 낭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은사를 주신 것은 아니다. '각각' 이라는 부사는 같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로 의지 하도록 그렇게 연결하심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을 서로 적절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특벌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뜻대로’라는 말이 능력을 나타내는 성령에 대한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성령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