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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11:22)

1. 성경 (고전 11:17 ~ 34)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7)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8)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19)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0)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1)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2)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3)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4)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5)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6)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7)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8)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29)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0)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1)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2)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3)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3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여기에서 그 어려움에 대한 나의 해답인데, 왜냐하면 바울이 분사와 동사를 서로 바꾼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파랑켈레인'을 ‘교훈을 주다’로 번역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명하다’ 라는 동사는 문맥에 더 적철하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하지 않겠다. 이 귀절과 이 11장 초두에서 그가 말한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도 할 수 있었다. 즉 ‘내가 너희들을 칭찬하였다는 이유로, 그 칭찬에 어떤 제한도 가할 수 없다는 생각을 너희들의 머리 속에 간직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을 책망할 일이 있고, 참으로 너희들이 질책을 받아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것이 주님의 만찬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려는 다른 죄에도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는 이유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질책을 받아야 한다 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인 언급으로 생각하도록 하자. 이 악의 특별한 결과에 대해서는 후에 취급될 것이다. 그들에 대한 바울의’ 첫번째 불평은 그들이 더욱 좋은 것을 위하여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들이 더욱 악한 것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번 것은 분명히 더 심각한 것이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어느것 으로라도 자극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람들의 단 한번의 모임은 결실이 없게 되자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기도를 드리며, 또 기적들을 칭송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를 경외하며, 우리 안에서 성장이 있을 때 우리가 거룩한 생활 속에서 발전할 때, 또 더욱 더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랄 때, 새 생활을 계속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신비의 목적은 헌신과 사랑 속에서 우리에게 실재성을 부여한다. 기도는 또한 이런 모든 일들을 하는데 효과적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 이외에도, 주님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역사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주님께서 명하신 일들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배하러 모인 군중들로부터 은혜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 대한 결과로써 더 좋은 사람으로 형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난을 받을 만한 망은(忘恩)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우리 자신이 그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고.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그 본성과 또 하나님의 임명이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오게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저희의 모임이 도리어 해로움이라”는 두번째 잘못의 문제로. 돌아간다. 이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항상 첫번째 문제의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일들로부터 이익을 이끌어 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게으름을 징계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나쁘게 되도록 버려두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게으름이 많은 타락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경우이며, 특히 이것은 사람들의 사물들이 마땅히 사용되어야 할 그런 방법으로 사물을 사용할 생각을 않는 이유 때문에 거의 불가피한 결과로써 그들은 유해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타락해 가고 있다. 

 

"18.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 있다 함을 듣고……" ; 어떤 사람들은 분쟁과 이단을 그가 간단히 말하려는 잘못 훈련된 행실(아락시아)임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그보다 더한 것을 망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무 질서를 묘사하기 위하여 어울리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은 이와같은 용어들을 그가 사용하려고 했다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이 그들의 죄의 심각성이 모든 순결한 자들에게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하여 더 준엄한 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 말들의 의미가 그것에 꼭 어울린다면, 나는 그렇게 인정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의 책망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것처럼, 그들이 조화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에 대하여 일반적인 말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누구든지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적응시키기 위한 적은 노력을 기울이기에도 사람들은 너무 자신의 일에 얽매여 있는 실정이다.

 

그것이 우리가 곧 배우게 될 특별한 남용의 뿌리이며, 그것이 허영과 오만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을 추어 올리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코 아래로 내려다 보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덕성 개발을 게을리하는 뿌리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신성 모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이와같은 신랄한 공격을 그들 모두에게 무분별하게 부과하였다고 그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는다는 불평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부분적으로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것이 단순히 뜬소문으로 그의 귀에 들린 것이 아니라, 그가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 없는 신빙성이 있는 분명한 보고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 편당, 이단에 대하여 그는 이미 말하였다. 이제 그는 더욱 사물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단 (우리 밀: 성경에는 편당으로 나타나 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첨가하여 우리는 그가 사용하는 ‘또한' 이라는 단어 로부터 , 그것이 부연의 방법 (프로스이욱세--신)에 의하여 삽입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교부들이 이단자와 분리자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또 그들이 두 용어 사이에 어떤 구별을 하였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이단이란 교리가 일치하지 않는 자들이며, 또 분파란 영적으로 거리가 먼 자들, 예를 들면, 그가 가진 원한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자, 혹은 목회자를 싫어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들과 융화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나쁜 교훈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또 질투와 교만이 거의 모든 이단의 모체가 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 두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들을 통하여 바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나는 이미 이단을 식탁, 곧 부자가 가난한 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데서 온 분파라고 설명한 그런 사람들의 견해를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혐오스러운, 어떤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견해는 제쳐놓고라도, 나는 여기서 이단과 분열을 정도의 차이를 가진, 곧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그 정도가 조금 더한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분파는 마땅히 믿는 사람들 중에 있어야 할 일치의 표지가 없는 은밀한 증오가 존재하는 곳에서 발견되든지, 혹은 이해관계로 다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존을 절실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그 자신의 태도만이 옳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는 그런 곳에서 발견된다.

 

이단은 악이 매우 급속하게, 그리고 매우 광범위하게 뻗쳐서 적의가 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또 사람들은 서로 다투는 무리들 중에 자신들도 함께 분할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주 심각하게 생각한다. 바울은 신실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분파 때문에 일어나는 어두운 분위기를 보고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은 주님께서 이와 같은 시련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이 일에 이주 다른 조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영예스러운 위로인가!  교회에서 우리가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하고 그 대신 사람들이 온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사실에서 야기되는 어떤 분열적인 징조를 보게 된다. 그럴 때에 우리가 혼란에 빠지거나 그 분열에 휩쓸려서는 안 되며, 그 반대로, 심지어 공공연하게 분파가 일어날지라도 우리는 부동의 자세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위선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될 뿐 아니라, 또 한편 신실한 사람들의 진실성도 증명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면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그런 자들의 변덕과, 선인(善人)으로 가장한 위선자들의 사기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낼 뿐 아니라, 다른 한편 "선인들의 부동성과 신실성에 대하여 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게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 다. 그러나 ‘있어야' 라는 바울의 말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 말을 사용하여 그는 이 상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금을 용광로에서 제련하듯이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분명하신 섭리에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에 만족하신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곤란한 논쟁의 근거를 우리에게 재시하거나 혹은 문명의 필연성에 대한 문제로 우리를 미궁으로 몰아 넣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많은 거짓된 사람들이 없었던 시대가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 거짓된 사람들이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또 악이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포위하였음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사단이 교회의 통일성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듬지 않은 돌을 계속 방해물로 놓을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숙명이 아니라 필요의 근원 일뿐이다.   하나님은 그의 놀라우신 지혜로  이단의 유해한 모략을 신실한 자들에게 구원이 되도록 변화시키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묘사한 ‘정칙한 자들'은 더욱 더 분명히 나타난다는 결과가 일어난다. 그것은 이와 같은 축복이 이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되는 사실이다. 그 자체가 사악일 뿐인 이 이단에게서 악이외의 어떤 것도 나올 것이 없다. 이런 축복은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사물의 본질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사단이 선택 받은 자들을 파멸시키려고 획책한 바로 그 일들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번화시키신다.

 

크리소스톰은  '히나'를 원인이 아닌 결과를 가르치는 불변사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목적으로써, 이 목적에 의하여 사악한 일들이, 모든 일을 선으로 변화하는 그런 방법에 의하여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불경건한 자들이 그렇게 일하도록 사단의 압력을 받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의 뜻으로도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 들은 그들이 딛고 설 다리를 갖지 못한 채로 버려진 것이다. 

 

"20.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 이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주님의 만찬을 아주 남용하는 잘못에 대한 정죄로 돌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일반적인 잔치와 거룩하고 영적인 축제를 혼합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 축제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행하여질 때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한 가지 특별한 악폐가 완전히 소멸되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가장 거룩한 제도를 무(無)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만찬을 잘못 지킴으로써 성례를 모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화법(話法)으로 우리는 어떤 일이 바르게 시행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성사(成事)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뒤에서 살펴 보려던 것처럼, 무의미한 타락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없으니'하는 말을, 어떤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허락되지 않았으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분열되었으므로, 말하자면 그들이 주님의 만찬을 먹을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방금 설명한 것은 더 간단하다. 말하자면 주님의 만찬에 아무 관계가 없는 평범한 일들을 삽입한 것을 바울이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21. 잘 이는먹을 때에~~~~~~ 갖다 먹으므로" ;  그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사단이 그렇게 짧은 시간과 좁은 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것은 우리를 경고하는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오래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로든 지지를 받지 못할 때, 그것은 할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것을 정당화할 조그마한 증거도 제공하지 않을 때, 잘 확립된 관습은 얼마나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인가?  그들이 이것을 사용하게되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합법적인 것으르 생각하였다. 그때 바울은 간섭하기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의 죽음 이후에 그 입장은 어떠하였는가?  우리는 어떻게 사단이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방탕할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 교도들이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초가 되고 있다.

 

즉, 여기 고대의 무엇이 있는 데, 그것은 오래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처럼 권위 있게 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 남용이 상승할 계기를 무엇이 주었으며, 또 그것이 그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크리소스톰은 그것의 기원을 사랑의 찬치 (아포튼 아가폰)에서 취하고 있는데, 부자들이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서 빈부 사이에 아무 차별 없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그들은 후에 가난한 사람들을 재외하고.그 음식을 자기들끼리만 폭식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고대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터툴리안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제 그들은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이런 공동식사를 '아가파이'라고 곧 잘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 식사가 그들의 친밀한 사랑을 상징하고, 또 그것이 기여하는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기원이 유대인 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공통되는 희생의 의식(儀式)에 있다고 분명히 확신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보통 이런 의식을 통하여 결함을 고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 속에 그들은 계속 그들과 어떤 꼭 닮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축제를 통하여 그들의 제물을 추가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 그것은 참으로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허영과 지나친 방종, 그리고 무절제로 인하여 범죄하고 있다. 그들은 축제의 한 형식을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절제와 중용으로 훈련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몫을 서로 나누어 갖는 사실은  그것에 영적 식사의 면모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의 비용으로 음식을 먹었으며, 그들은 모두 같은 식탁에 앉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맨 처음에 이것을 속되고 타락한 습관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상태로 잘못 생각하였든지, 혹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제도가 퇴화되었든지 간에, 바울은 이 영적인 축제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일상적인 잔치와 혼합되기를 원치 않고 있다. 기부된 음식물을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또 부자가 그의 부를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 역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성례를 우리가 모독하도록 하는 어떤 것에 그런 강조를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시장하고~~~~" ; 그 상황의 한가지 나쁜 국면은 부자가 스스로 지나치게 사치스런 식생활로 인하여 어느 점에 서 그들의 극도의 가난을 가난한  자의 이(치아) 속에 내던지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바울이,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고 말할 때, 그는 그들의 불 공평을 나타내기 위하여 과장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배를 채울 만한 음식이 있는데 반하여, 다른 사람들은 육신과 영혼을 간신히 유지할 만큼 밖에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혹은 최소한 수치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미스러운 현상이며, 또 주님의 만찬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  이것은, 아무리 방금 언급된 악용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도가 그들의 관습과 축제에 얼마나 철저한 불만을 품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알도록 하여준다. 비록 한 식탁에서 함께 전 교회들이 성찬을 드는 것이 이주 만족할 만한 일로 보일지라도, 그러나 다른 한편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군중들을, 그 본질에 있어서 아주 다른 의식으 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위하여 모여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즉 우리는 교훈을 듣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적을 행하며, 믿음을 고백하고 또 종교 의식과 다른 경건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회에 모인다. 그 이외의 다른 일은 교회에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집이 있어서 그 집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을 예배드리기 위한 모임에서 행하는 것은 부적당한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 그 문제를 취급하면서 그는 이제 그들이 칭찬을 받을 만한지 그들로 하여급 생각해 보도록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명백한 악용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갈은 질문을 그들에게 제기함으로써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다. "내가 그밖에 할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은 너희들을 정죄할 근거가 없다고 말하겠느냐"  어떤 사본들은 '이 안에' 라는 말들을 다음에 나오는 동사와 이렇게 연결 하고 있다. 즉,  "내가 너희를 칭찬하랴 이 속에서 나는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 사본들에서 다른 독법이 더 흔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 그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지금까지 바울은  무엇이 잘못인가에 대하여 설명하여 왔다. 이제 그는 사태들을 수정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재도는 불변의 표준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것은 당신들이 잘못으로 빠져 드는 것 을 의 미 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 표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다시 이 표준으로 돌이키고-있는 것이 다. 이 귀절을 신중하게 연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부패를 일소하고 고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순수한 제도로 돌아가는 것임을 그것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친히 결혼에 대하여(마 19:3) 말씀하실 때 하셨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서기관들은 관습과 또한 모세가 허락한 양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친히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범할 수 없는 원리이기 때문이 다.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행할 때에, 가톨릭교도들은 우리가 성경 원문의 내용을 변경시키며 또 모든 것을 해치고 있다고 크게 항의하고 있다•

 

우리논 그들이 주님께서 제정하신제도를쇼칙 어느 정에서, 근본적인 원리에서 떠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은 천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미사가 우리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하신 만찬으로부턱 떠난 정반대되는 것이라는 사실 이상 더 분명한 것은 없다. 한걸음 더 나아 가자! 우리는 그것이 악한 증오와 결탁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수정의 필요성에 봉착해 있다. 우리의 요구는 이것이고  또,주님이 제정하신 제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역시 공통적인 표준이 되도록 바울이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두편이 모두 그것에 일치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맹렬한 항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오늘 우리 시대에 주님의 만찬에 대한 논쟁의 성격을 알고 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 ;바울은 이렇제 말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는 권위는 오로지 주주님에게로부터 온다는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든 어떤 것을 너희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왔을 때, 나는 내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인 새로운 만찬을 너희들에게 전하여 준 것이 아니며 나는 그리스도를 그 창안자로 여기고, 내가 몸소 너희들에게 전하여 준 것은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본적인 근원으로 되돌아가자"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이 만든 규칙에 우리의 등을 돌릴 때에, 그리스도의 권위 안에 확고하게 남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 시간을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축복 속에서 우리가 확고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이 절의 목적임을 우리 에게 깨우쳐주기 위해서아다. 주님은 어떤 초기의 경우에 대한 언약을 제자 들에게 위임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희생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에서 실제 적으로 이루신 그가 예언하신 내용을 사도들이 보기 전에 그들이 너무 기다 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러므로 우리가 성만찬을, 일상으로 먹는 식사를 한 후 밤에 거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것으로부터 추론하여 낸다면, 우리가 주님의 행위를 살펴볼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그가 원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한댜고 나는 대답하겠다.

 

주님 께서는 마치 곡식 위 여신 (Ceres)에게 드리는 의식(儀式)처럼 그들이 밤에 의식을 행하라고 가르칠 의향은 없으신 것 이 분명하며, 또한, 주님은 그의 백성들이 배부르게 식사를 한 후 주님의 영적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실 뜻은 없으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모방하지 않아도 될 그리스도의 그런 행위는 그가 제정하신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된다. 그것이 바로 카톨릭교도들의 교활한 논쟁을 논박 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이유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교활한 논쟁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제정하신 오직 그것만을 유지하고 보존하여야 하는 것, 곧 내가 이미 말한 내용을 피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므로 우리는 밤에 성찬을 행할 것이며 굶은 후가 아닌 식사를 한 후에 하여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런 말은 공연한 헛수고일 뿐이라고 나는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본을 따르도록 하기 위한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오히려 주님께서 행하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24. 축사하시고" ;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5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화(聖化)된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축사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  하셨다는 기록을 이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주님께서 그의  모범을 통하여 우리가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가르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축사는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들에게 그의 자비와 그의 값 없으신 구속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기를 이 축사를 통하여 간구하였으며, 또 그는 그의 본을 통하여 우리가 자주 성찬을 행하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향한 참 감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불타오르도록 우리를 격려 하시기 때문이다.

 

"때어 가라사대" ;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성례를 행하는 올바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며,  또 그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것 하나라도 가볍게 생략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대단히 필요한 것으로써 꼭 알아야 하며, 또 세심하게 관찰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떡을 떼시어 모든 재자들이 함께 먹게 하셨으며,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나누어 먹게 하신 사실을 주의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동 식탁이 마련되지 못하였을 때, 그들이 모두 빵을 함께 나누도록 초대 받지 못하였을 때, 요약하여 말하면, 신실한 자들이 서로 함께 만찬을 나누지 못할 때, 그 의식을 성찬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이 사람들을 미사에 함께 부르는가?  아마 그 해답은 그들이 무의미한 쇼를 보고 난 후, 다시 불만으로 멀리 떠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찬과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귀절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군신(軍神)의 사제들이 모인 제례(祭禮)보다도 더 이 미사에서 적응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 하실 때, 그는 마찬가지로 우리가 떡을 취하여 먹도록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의 약속을 가졌다는 데 대한 우리의 자민은 이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곧 더 관례적인 말로 표현해 본다면, 계명의 조건이었던 것처럼, 그 약속은 계명에 메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약속은, 그 조건이 성취되었을 때에만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시편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시50:15)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 약속의 성취를 탈취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함께 성찬을 나누는 문제를 알지 못하므로 그 빵을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모독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주님의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들의 자만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내 몸이니" ;  나는 우리 시대에 교회를 혼란에 빠뜨렀던 불행한 싸움들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 하며, 이 말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그렇개 하려고 한다. 나는 다만 그것들에 대한 모든 기억울 영원한 망각 속에 묻어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 말들에 대한 내 견해를 신실하고 정직하며, 또한 어떤 생략도 없이, 내가 늘 그렇게 한 것처럼 밝히려고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을 떡이라고 부르셨다. 나는 더 논쟁을 벌이지 않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앞에 분명히 보여지고 있는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보이신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그 후 즉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씀 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떡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실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떡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 그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 의미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참으로 대담한 사람이다.

 

그러면 몸이라는 용어가 떡에 적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요한이 성령을 비둘기라고 부른(요1:32)것과 같은 이유로 그 용어를 그렇게 적용시켰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우리는 일치한다. 더구나 성령의 경우, 그 이유는 그가 비둘기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라는 이름은 가시적(可視的)인 모양으로 변화되었다. 그 환유가 여기서 비슷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될 어떤 이유라도 있으며, 떡이 몸에 대한 표시이며 상징이기 때문에 몸이라는 이름이 떡에 대하여 주어질 수 없는 어떤 이유라도 있다는 것인가?  만일 어떤 사람들이 나와 견해를 달리한다면 그들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한 논쟁을 계속 불러 일으키는 말썽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서 실재성을 나타내는 이름을 기호에 적용시켰을 때, 이것이 성찬에 대하여 말하는 방법이라고 마음 속으로 분명히 확신한다. 우리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하며, 또한 환유가 왜 사용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아야겠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실재성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그것을 나타낸다는 이유 때문에 다만 기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그 실재성을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현세적이거나 혹은 세속적인 일들과의 비교를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주님의 성례와는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헤르클레스(Hercules)의 상(像)온  ‘헤르클레스’라고 블리운다. 그러나 그것은 꾸미지 않은 공허한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비둘기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명백한 보증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떡은 몸이 제시하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낸다는 그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상징을 우리에게 제시함에 있어서, 주님이 또한 동시에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속이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공허한 설명으로 우리를 바보로 만들지도 않으신다.  따라서, 나에게는 여기서 그 실재성이 기호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대낮과 같이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떡을 때는 것과 갈이, 그런 영적 능력에 관계되는 한,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여의 방식을 살펴 보아야겠다. 카톨릭교도들은그들의 화체설(化體說)교리를 우리에게 강요한다. 그들은 헌신이 일어났을 때, 그 떡의 본질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그 사건들만 남아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날조와 대조하여, 우리는 분명한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또한 성례의 그 본질을 인정한다.

 

만일 가시적(可視的)인 기호와 영적 실재사이의 유사성이 없다면, 성찬의 의미는 무엇이 될 것인가(si nu/la sit inter si~num_ visibile et rem spiritualem analogia)? 그들은 그 기호가 떡에 대한  거짓되고 사람을 잘못되게 하는 외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거짓 부랑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기호와 실체사이에 일치하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면, 그때는 그 떡이 그리스도의 참 몸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상이 아닌 참 떡이 되어야 한다.  더우기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식물(食物)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전혀, 그림이 아닌 우리를 기르는 떡의 본질인 것이다. 만일 그 실체 자체가 순수한 실체라면, 그것을 극히 간결하게 하기 위하여서 그 기호 또한 순수한 기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의 헛 소리를 반대하면서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알도록 하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으키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가 누리는 사람이 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설명한다. 나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래서 우리가 모든 그의 은혜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될 때에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견해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달은 이후이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회생 당하셨음을 우리가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 그의 육체의 일원이 되었을 때,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가 그와 일체가 되는 삶을 살고 한 본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이 되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 나는 그 말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주의를 기울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은혜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난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몸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로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참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영양가 높은 음식물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위하여 우리들의 영혼이 그의 몸의 본체에 의하여 양육을 받고 있음을 나는나타내려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육체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은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우리와 혼합될 수 없는 것이지만 정형의 중재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한가지 문제가 남아있다.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땅 위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몽은 무한하며 공간적인 지배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본질처럼 하들과 땅에 가득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매우 불합리 한 것이기 때문에 논박 할 필요조차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문제를 더 격렬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가르침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 마치 빵 속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그 빼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빵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빵이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그것을 숭배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그들이  경배하는 것이 빵인가 혹은 그 빵의 겉 모양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단호한 어조로 결코 그것이 아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려고 할 때, 빵이 있는 방 향으로 그들이 돌아선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곧 단순히 그들의 눈과 전체 몸을 돌리는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나다.  그들의 생각 전체를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만찬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눈다는 것은 어떤 지역에만 그가 임재하시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후손에게만 나타나시는 것도 아니요,  또 그리스도의 몸이 무한한 확장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하늘나라의 행위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서,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에 계시지만, 우리가 그를 계속 영접한다고 말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불합리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나누어 주는 방법은 성령의 은밀한 힘으로 나타나는데, 이 성령의 능력은 거리상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사람들을 모으는 일뿐 아니라, 일정하게 연합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배를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 이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육체적인 감각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며, 우리에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믿음이다.  내가 '믿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이 만든 어떤 종류의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믿음’에 대하여 계속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또한 그들은 여기 논하고 있는 요점에서 아주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신은 빵을 보고 있으며 그 이외의 다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빵이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아라고 듣는다. 그 말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이해하도록 주님께서 참으로 그 뜻을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을 확실히 믿도록 하자?  즉, 여러분이 전혀 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여러분을 위한 영적 양식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므로, 그의 육체가 우리의 양식이 되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심령의 은밀하고 놀라운 사역으로 이루어지며, 또한 우리의 유한한 지혜의 작은 표준으로 그것을 재려는 것은 죄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또 한편, 그 빵에 당신의 눈을 고정시키려는 그 어리석은 생각도 제거하도록 하자. 참 육체이신 그의 몸을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보존하시도록 하며, 그의 육체가 온 하늘과 땅에 편만 해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자. 당신의 잘못 된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조각 조각 찢어서는 안 되며, 또 당신의 현실적인 이해력에 따라 장소를 옮기면서 예배드리지 않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국의 영광 중에 거 하시도록 하며, 당신 자신이 하늘나라에 오르는 큰 열망을 갖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에서 그 자신을 당신에게 나누어 주시고 있다. 이 몇 가지 사상이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나의 권고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새로운 정보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너희틀 위하는" ;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떡의 분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2장 46철에 나타난 "뼈도 꺾지 말지며"라는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한 그대로 보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떡올 때는 언급을 하였다는것을 인정하면서, 떼다는말이 여기서는희생당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것은 그 단어에 대한 적절한 용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적당한 것도 또한 아니다. '뼈도 꺾지 말지며'라는 귀절이 손상을 당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보다 먼저 그렇게 심한 고통과 고뇌를 당하였으며, 그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았으므로, 앞에서 말한 뼈가 상함을 받지 않았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의미하는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약속의 둘째 부분이며, 또한 가법게 지나쳐버려서는 안될 문제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아무 말씀도 예언된 것이 없는 그런 상태에서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그의 몸이 우리를 위한 회생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첫 부분은 그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두번째 부분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었는가, 곧 구원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희생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이 적용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도 없으며 또한 그것에 따르는 은혜를 받을 수 없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성찬이 거울로 나타내어 보여주는 이유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므네-모쉬논)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인다면, 이 도움은 무의미한 것이 될것이다. 이것은 성례에만 적용된다.  왜냐하면 성례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성찬에서 주님에 대하여 무엇을 기념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우리는 곧 배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온 이 귀절에서 이런 단정을 내린다. 죽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는 성찬에 임재하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기념이란 실제로 그것이 없는 곳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문제는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성찬은 기념으로 생각하는 이런 사고 방식에 따르면 , 그리스도는 참으로 그것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를 표현하는 어떤 상징들로 우리가 직접 보고 그를 기억하도록 격려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그는 그의  거하시는 처소를 바꾸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주 하시기 위하여 그는 하늘에서 그의 몸의 효력을 내려 보내주시고 있다.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  사도 바울은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시는 사이에 시간적인 어떤 간격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만일 그 전체가 연속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면, 복음서 저자들은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떡올 떼시며, 잔을 주시는 사이에 들어갈 어떤 말씀이 꼭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신비에 관계 되지 않은 그 어떤 것을 행하시거나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성찬 집례가 혼란에 빠지거나 잘못 되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라는 에라스무스의 표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중요한 일에 있어서 그런 모호한 표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  잔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또한 떡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그가 하신 말씀, 곧, 떡은 그의 몸이라는 것을 더 간단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다시 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언약, 곧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일단 비준된 언약울  갖게 되었으며, 믿는 사람들이 그 희생 제물을먹을 때에 그것을 먹음으로써 이제 확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과 누가가 내 피로 세운 연약이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마태와 마가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같은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홀리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키기 위함이었으며, 또 이제 우리는 그 화해에 참여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그 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에서 우리는 언약과 언약의 강화된 보증을 모두 갖게 되었다. 만일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면 나는 히브리서 주석까지 언약이라는 단어나 혹은 서약이라는 낱말에 대하여 말하겠다. 그러나 성례가 ‘서약'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사람이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중거'라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상호 간에 엄숙한 의식(儀式)을 통하여 언약을 맺듯이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부당한 표현 방법이 아닌데, 그 이유는 말과 기호 사이의 관계 때문에 주님의 언약이 성례와 참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언약(foedus)이라는 술어가 우리에게 관계를 갖게하며, 또 우리를 포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례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크게 중요성을 부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성례가 언약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구원의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약속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우리가.고백하는 믿음에 대한 외적(外的)(표시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내적인 신앙생활을 도와준다. ·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톨 기념하라." ;  ' ;_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정찬에사-이중적인 기호를 제정하셨다. 하나님께서 합께 연합하신 것운,i 인 찬이 분리시키지 말토목 하자. 그러므로 찬을들조1 않고 며만 때는것은 그 티스도께사설립하신 제도를불구로 만드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그티스도 의: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가 떠올 먹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그는 또한찬도、마시라고 명령하신다. 명령울철반만 따르면서 다른 나머지 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정하신 것을' 조롱거리르 만드는 것일 분이 다;·교황의· 횡포,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갈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찬을 사람들이 못 마시게 하는 것은'의십의 여지없이 국악무도한 오만이다. 그리 스도께 서 사도들에 게 말씀하시 고 있 으며-; 일 반 성 도들에게 말씀하시 는; 것이아니라는,:그들”의 궤변은 극로루 유치하며, 또한 이 귀철로-인하여 쉽게『-논 박당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은 남녀 '구별없이 ::z.들 모두에 게, 또한 사실상 교회 전체에게 천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는 주님‘ 의 명령에 따라 이것을 그둘에게 전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갑 히 무효화하려 는 자들은 '무손 마음으로 1그들이 교훈을 받았다고 -주장할. 것 인가? 이 비열한 타락은 또한 우리들의 시대에도 완강하게 그 위세를 떨치 고 있다. 그들이 그런 찬인한방법으로 블과 칼로써 그들이 옹호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말과 굴을 이용하는「그 칠면피한 그들의 모습을 보 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다.' ' :~. ,. -.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01 잔을' 마실 때마다" ; 이제L 바울은 그 기 념을 갑사합으로 지켜야 한다는 그런 표현 방법을덧붙이고 있다• 그 기념 을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만하여서는안된다. 왜냐하면 i.:z., 요정온 그리스도 의 죽음의 능력이 우리의:마음에 깊이새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우리로_,하여금 하나님을 공적으로 찬양하도록 갑동시키어,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십에서 깨닫는 바를 증거하도록 한다 • .::i..러므로 성찬은, 만일 그렇제 1.i..말할 수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 희에서 항상 지켜야 할 일종의 기념(quoddam memoriale)이며, 또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사람둘에게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져에서, 설립하산 제도인 것 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성찬을 성만찬이라고-부르는이유아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찬을 져철하계 지키려면, 여러분은 자신이 ,1J앙고백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명십하여야 한다 • ..:

 

이것은 미사를 통해서 성찬의 본질에 무엇인가 응답하고 있다고 오만을 부리는 자들이 사실온 얼마나 경박하게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사란,무엇인가? 그들은(나는 가톨릭 교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타, 자칭 니고데모의 추종자들에 대하여 말하 고있다) 미사를 증오스러운 미신으로 가득 포장된 것으로써, 그들은 그들 의 퍼져 자세로써 그것을·승인한다고 가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 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는 이것은 어떤 종류의 방법일까?-'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이린 도움을 필요로 하므로, 바울은 그리 스도께 서 십 판하러 오실 때 까지 이 런 기여.(recordation ~m)을 항상 명십하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시 각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에 관한 어떤 상칭 올 가질 필요성아 있다. . 빼• ,·

 

"27. 그러므로 누구든지……죄가 있느니라" ;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이 신비를 받을 때에 우리에게서 감사를 받기 원하신다면, 또 주님께서 우리가 마음 속으로 그의 은혜를 깨닫고 그것을 우리의 입술로 증거하기를 원하시는데도 어떤 사람이 주님께 영광 대신 모욕을 돌린다면, 그 사람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의 명령을 멸시하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귀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합당치 않게 먹고 마지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오직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만 적용시키고, 또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어떤 부패에 국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이 항상 그렇듯이, 어떤 특별한 암시에서 일반적인 교훈으로 혹은 한 가지 실례에서 전체에게 주는 교훈으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한 가지 특별한 잘못이 있었다. 바울은 이 점을 실례로 들면서  성찬을 집례하거나 성찬을 받는  데에서 나타나는 모든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이 성찬을 모독하는 자를 결코 .준엄한 형벌없이 그냥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성찬의 순수성을 해치고, ,또 그것을 남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찬을 합당치 않게 행하는 여러 층의 정도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이유이며, 어떤 사람은 더 심각하게 범죄하는 데 반하여 다른 사람은 그보다 조금 가법게 범죄하는 차이를 드러낸다. 어떤 간음자나, 위증자, 술망나니 , 그리고 사기꾼은 한가닥 참회의 빛도 없이 그들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이와 같은 무모한 멸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잔인한 모욕의 표시이므로, 이런 사람들은 성찬을 자신의 파멸로 받고 있는 상이냐 어떤 사람들은 분명한 죄나 허물이 될만한 것을 자신에게서 조금도 발견하지못한채 성찬에 참여하는사람도있지만, 그러나 완전하고 흠없이 성찬을 받을 만한 준비를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자기 만족이나 부주의는 불경의 표이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데에 다양한 정도 차이가 있으므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가벼운 형벌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준엄한 형벌을 주시는 것이다. 

 

이재 이 귀철은,· 어떤 사람들이 나중에, 떠이나 찬을 합당치 않게」먹고 마시는 자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쟁을 너무 격렬하게 계속할것이라논 문제를 일으켰다 •.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려이 나 찬을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모두 합께 받는다고 말할」정도로 논쟁 에 열을 을렀으며, 또한 우리 시대도 수다스런 사람들이 최초의 ·성찬에서 베드로는유다보다조금도나온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기·대문이다. 나 는 참으로 이 문재로 사람들과 져렬하게 다룰 생각이 전혀 없다. 이런 것은 극히 지엽적인 문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선생과 갈은 태 도를 취하면서, 아무 정당성도 없이 그것이 ?-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선언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이 그 반대되는 견해에 대한 가장 보찰것없는 제의를 하면서 마치 그들이 그것을 떠맡은 것처럼 덤빌 때, 만일 우리가 전리타고 생각하는 것을 지지하는 데 대한 이유를 조용히 재시한다면, `우리는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는 원리이 며, 또한 나는그 원리에서 떠나지 않겠다. 우리가 그의 몸을 받을 때, 그 것은 죽온 몸, 곧 반웅이 없는 몸이 아니며,' 또한,그의 몸은 은혜와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분리된 몸도 아니타는것을 그원리는 나에게 확신시켜 춘다. 나는 이미 내가 말한 것울 증명하는데-~은시간을소비하지 않겠다.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력이 있는 믿음과 회개의 증거를 갖지 못한다면 또 그리스도의 성령에 대하여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가 그리스도 를받을 수 있겠는가? 그보다도 ·더 그가 사단과 최의 지배 아태 있다면 어 떻게 그가 그리스도를 받기에 합당하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한편으로는 성 찬에서 그리스도를 참되게 받으며,'동시에 합당치 못하게 받는 자들이 있다 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많은 연약한 사람들이 이 법주에 속한다. 다른 한편 나는 믿음을 단순히 복음의 역사적 사건(fidem historicam)으로 만·생각하고, 회개와 믿음에 대한 생명갑 있는 이해 없이 오직 기초로만 받 이들이는 사람들의 견해를 용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를 찢어 나눌 수 없으며, 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말하자면, 불신자들이 켜도록 생 명 없는 형태로 그들에게 주셨다는 그 불합리한 생각에 나는 무서읍울7 느끼 기 때 문이 다. 어 거 스탄은 그것 이 성 례 인 한(sacramento tenus) 악한 자들도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받았다고 말할 때 그는 이 귀철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이다. 그는 이것을 다론 귀철, 곧 다론 사도들이 떠올, 말하자-단 주님을 먹 고 있을 때(panem Dominum), 유다는 주님의 떡(panem Dominj)을 먹프 있었다고 그(어거스탄)가 가르칠 때, 그는 이것을 더욱 분평하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사성례의 효력은 사람들의 가치에 따라 좌우되는·것도 아니 며저또한하나님의 약속은 최소한 사람의 악함 때문에 손상되거나 소멀되는 것이 아니라는 반대가 일어난다.

 

나는 이 접에 동의하며, 또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선인에게와 마 찬가지로 악인에게도 주어쳤으며, 그것이 바로성례의 효과와 하나님위 싶 실성이 관계되는 모든 이유이다. 성찬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몸을 다만 상칭으로써 제시하여 악인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_ 참으로 그들에게 제공하 신 것이며, 떠온그들에게 공허한기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보 증(tessera)이다. 그들이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성례의 본질을 손상시키거나 변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바울이 한 말에서 제기되는 반론을 계속 취급하여야겠 다 .. '바울은 합당치 못한 것은 범최이다• I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분벌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속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고 있기 때 문이다’라고 말하고있다, 그러나 나는 이 결론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고들의 반대륜 떠나서라도, 그들을:·유죄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 냐하면,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전 것을 마치 길바닥에 던져서 그것을 발로 밟는 것과 갈은 그런 방법으로 모독하고 더럽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신성모독이라고부부르겠는가?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악인들에게 제시하신 것에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고, 또 그들이 그것을 받지 않는 것에 r주의를 :;l운이는 한,` 바울의 말에서 나는 아무런 어려움도 발견 하지 않는다. ’ I -, . . ....,

 

"28. 사람이 자기틀 살피고……" ; 다음의 권유는 이미 주어전 경고에서 이 끌어 낸 것이다. 만일 합당치 않게 먹는 자들이 주님의 몸과 퍼에 대하여 법최하는 것이라면, 이무도 척철하고 참.되게 준비하지 않고서는 성찬 식탁 울 대할 수 없도록 하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주의하거 나 무관십으로 인하 여 이 신성모득최에 빠지치. 않도록 조십하자. 그러나 이겨1 질문이 있~-즉 우티의 자신을 살펴보라고 바울이 말할 때 에 그.· 검사의 본질이 무엇이어야만 할까? 가톨릭 교도들은 그것이 귀옛말 로 하는 고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성찬을 받으려든 사람들은 사제에 게 그들의 모든 죄를 고백할 수 있J~r 하키 위하여 자신들의 생활을 주의깊 게 그리고 갈급한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준비 방법이다! 그러나 바울이\말하고 있는 거꼭-한 겁사는 고문(持 問)과는 거 리 가 먼 것 이 라고 나는 주창한다·

 

가톨릭 교도들은 그들이 몇 시 간동안스스로.고통을 당한후, 또:그들-자신의’은밀한 최를사제에게 고 백한 후 그들이 깨끗하여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울이 여기서 요구하고 있는-다론 종류의 자기 고찰로서.'~성찬을 적철하게 맞이하는 한 방법은 될 수 있다. . 이것은 당신이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하고. 안이한 방법이다. 만일 당 신이 그리스도의 이 온사로부터 겨철한 은혜를-받기 원한다면 당신은 믿음 과 회개를 수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찬에 임할 준비를 찰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자기 고찰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한다. 나는 회 개에 사랑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위한 자기 부인을 배운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단체의 증진을-위하여 온 정성을 거울인다는 것은 의십할 수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요구되 는 것은 완전한 믿음과 회개만아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곳에 서도 발견될 수 없I는· 완전에 대하여 너무 먼 거리에 있으면서, 어떤 남자나 여자에게 개인적으로 담을 쌓고 또 성찬에도 영원히 담을 쌓기 때문에 요구 픽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려는 당신의 의도에 신중하다면, ~: 만일 당신아 자신의거가천함을;力깨 닫고 겸손하여진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안에 거하게 되며 또한?이l·-성찬에 가까이 할 수 있는 합당한손님이타는사실을·학신하게 될 것이다.『당신이 그 성 찬에 합당하다고 말함으로써, 나논 설령 . 다론 면에 서 는 당신이 합당하치 못할지타도 주님께서 당신을 밖으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감 음은, 비록 그것이 불완전할지라도 합당치 못한 것을 합당한 것으로 만든다.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 바울은 ‘합당치처갛 게 먹고 마시는자는 주의 몸과'피를 범하는 죄가있느니라’고 말함으로써 뇨 밍최의 갑각성을7이미 분명하계 지적하였다. -이제 그든 형벌의 위협운 말함으로써 경고의、이유를 구들에게 밝히고 있다~ . 에냐하면l많은 사람들이 죄 그 자체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 _아니타; 、하나님의 십판을1받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 다만」불안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_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이 다론 방법으로는유익이 되는 이-응식이 그것을합당치 않게~먹는·자 들에게는 독(毒)이 되며 도한멸망의원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그가벌밝히 고 있는 접이다.

바울은 이렇게 되는 이유를밝히고’있는데, 즉 그것’은 그들이 "거룩요리.' 평법한 것이 아닌 이 주님의 몸을:분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의미-하 는 것 은 그들이 구리 스도의 거 룩한 몸을` 그들의 부정 하고 사악한 촌으혼 만 치면서 그 귀한 값을생각치 않고 마치 두가치한 것으로취급하고-있음을 나 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례를 모독한 데 대한 형벌운 지불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굴을 읽는 독자듣은 내가 조금 전에 ·말한 내용,\곧; 그들의 합당치 않음이 그 성 찬의 분배 를 방해 한다 할지 라도, 그리 스도의 몸 은 그들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명십하기 바란다. 

 

"30.이러므로 너희 중에 ...... 적지 이니히니." ;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는 문제와 이 신비를 모독하는 사람들.울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일반적인 말로 취급하면서, 바울은 바로 그 당시에 그들이 받았던 형벌에 대하여 이제 말 하고 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전영병이 창궐하고 있었는지 혹온 그들이 다 론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 모론다. 그 문제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바울의 말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훈련하시기 위하여 어떤 벌을 보 내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합당치 않게 성찬을 먹음 으로써 칭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말할 때, 그는 어떤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그가 대단히 잘 알고 있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앓으며, 또연약한 상태에 오랫동안 빠 져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써 성찬을 남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질병과 하나님의 다론 칭계로. 경고를 받고 있다는 이런 방법을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 우리의 최를 살펴 보도록 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 으시며, 또한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요하고 다양한 주제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 하고 지나가려 한다. 만일 바울 당시에, 가장 십각한 형태가 아니었던 성찬 의 남용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전노를 불러일으켰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그런 상황이 발생되었다면,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그렇게 준 업하게 프런 사람들을 형벌하시지 않겠는가? 가톨릭의 계급을 통하여 우리 는 성찬에 대한 무서운 신성모독을 발견할 분 아니라, 또한 그들 속에 촌재 하고 있는 세속적이고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다음에서 보게 된다.

 

(1) 먼처, 더러운 것을 취하고 또 돈을 모으려는 데 그것을 악용하고 있다. (2) 잔을 페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불구가 되었다. (3) 각 사람이 각각 따 로 자신의 성찬을 드는 것이 관례가 되고, 여럿이 함께 모여서 성찬을 나누 논 일이 페지되었기 때운에 그 형식이 완전히 변질되었다. (4) 성찬의 신비 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으며, 들리는 것온 모두 중얼거리는 잡음문인데 이것은 마치 마술사들의 주문과 흡사하거나, 혹은 우리 주님의 제도라기보 다 이교도들의 소름끼치논 제사같온 것이다. (5) 무의미한 일들분만 아니 라 또한 미신적인 요소들 속에 가득차 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의식(儀式) 둘이 그 속에 들어 있으며, 그것 때문에 분명히 타락한 것이다. (6) 그 속 에 희생에 관한 악마같은 날조의 요소들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 한 모독과 마찬가지 이 다. (7) 비 열한 자람들이 무것 을' 하나님,, 앞 에 속최물로서 놓았을 때, 그리고 믿음도회캐도 없이 ,이 주문(呪文)으로 인 하여 그들이 그들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제거하여 버린란고생각할 때, 그 비열한 사람들이 육적인 확신으로 술취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그 것은 찰 고안된 것이다.

 

참으로 그보다 더한 것은 그들이 마귀와 죽음에 대 항할 수 있도록 찰 무장되었다고 확신할 때, 또 하나님에 관한 한,, 그들이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받고 있다고 그렇게 그들이 확신하고 있을가비,' 그 들이 그렇게 거침없이 담대하게 범최를 하게 되며, 또한 그렇게·완고하게 되는 것이다. (8) 그 속에서는.그리스도 대신 우상이 경외를 받는다•: 간단 히 말하면, 그것은 모든 증오할 수밖에 없는것들이;그걸속에 우굴거리는 처 주의 소굴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치 정찬이 오렌 추방으로부터 되돌아오기나 한 것처럼, 다 시그것을 우리에게 회복시킨 후, 그 성찬을 본래의 순수성 그대로,찰 집 행하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은· 불경건이 도사리고 있었는 가 ! 많은 사람둘의 경우 얼마나' 많은 위선이 그들 속에 참재하고 있었던 가! 분명한 구벌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리고 무례한들과 또 꽁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그들의 테도를계속고집할때, 또한:관대하거나 촌경받을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사람들이 정상적인 사회 '관계에:관여되논 어떤 일 을하려고할때, '거기에는얼마나무서운혼란이 야기뒤었던가! 우리는아 칙도 그렇게 -많은 전쟁과, 전영병, 그렇게 많은 흉작과 재난, 그리고 참화 등이 마치 그 원인을 사실상 분명히 알지 못하듯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계속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고 침으로써 그 원인을 제거할 때까지 우리는 분명히 그 불행의 결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31.' 우리가 우리틀 살폈으면~~~~~" ; . 여기서 우리논 다른 놀랄 만한 설명을 듣게 젤다. 즉 하나님은 갑자기 우리에게 노하시거나, 우리’가 찰못하자마자 곧바로 우리를 형벌하시지 않으시며, 대개의 경우 우리가 죄에 관한 일인데 도관십울 기울이지 않거나 냉담하며, 또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하 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태만 때문에 볼가피하게 형벌하시는 것이다. 만일 우 리가 무엇보다 먼처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깊이 참회하며, 하나님 앞에 열 십히 기도하면서 또한 우리 자산의 자유 의지로 그 칭계를)받음으로써 하나 님의 전노를 감수한다면, ,우리는 우리를위협하는 그J형벌로부터 벗어나게 되거나 또는 그 형벌을검소받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믿는 사람들이츄} 회함으로써 하나님의 십판을 예방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최 석·방을 받을 수 있는치유책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정최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턴 관계에 있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형태의 업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가톨릭 교도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돗이), 즉 우리의 임의로 우리jJ-,자신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우리와-하나님의 관 계를 수정하고, 또 어느흔의미에서 우라자신을 하나님의 손길에서 5군속한다 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논 하나님의 찬 노를 풀어드릴지도모르는 보상의 성겨울 가전 그 무엇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십판에서 미라,•,빠져나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서 우리를 정제하실머는, 우리의 무갑각을 )일깨워주고 또한 회개하도록 자 국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만일..:우리,가'우티의 마음대로•·한다면 하나님 께서 우리를 향하신 구의 십판을 행하실 아무런.-이유가 없어지고 말게복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위 찰못을께닫고 회개하는 데도 계속 하나님 의 칭계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그의1 회개가 완전하무 충분하지 못해서’이아 칙도 어떤 칭계의 필요성이 더 촌제하는 것이라고 깨달아야 한다. 어떤 희 개가 하나님의 십판을 제지하기에';적절한 치유책이 되는가를 `주의깊게 살펴 보도록 하자.. 

 

"32. 우리 가 판단을 받는 것은~~~~~" ; 여기서 우리 는 많은 팔요요한 위 로를 받 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 중에서 하나님~l .. 자기에게 〉전노하시고 있 다고 생각한다면,. 그'사람은회개하도록 자극받기보다는명적으로 낙십하 여 쓰러지고 말 것이다. 구라프로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합틀에게 그의 전노를 나타내셨을 때, r~하나님은 동지에 I ::;j_의 자비를 잊지 많으시는\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계시며 또한 이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들을 형『벌하 실 때.그것은 그들의 구원운접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십을 나타내시는 것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형벌은·우리를 멸망시키;l 위한 하나님의나친노가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이 형벌은 우 리위'최를 고치는 증거이고,·.동시에'.!하나님께서 멸망받기를·원치 않으시는 뀌 자녀들의 구원을회복시키가위하여 형벌을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우리에계 무한한 위로일 수밖에 없다.

 

' 바울이 “우티로세상과 함께 최 정OE)함을 받지않게 하려하십이라”고 말할 때; 그는 두 가치 뜻을의미하고있다. 첫째로 이 제상 사람들이.-'만족하고 괴로와하지 않으면서 환락 속에 빠져 평안히 참자고 있을 때, 그들은 도살할 날을 기다리는 살짠 돼지와 갈은 촌재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십지 어는 하나님께서 태로는 불경건한 자들도 여시 회캐하도록 、그들을 칭계하시 지만.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그들을 나그네처럼 그냥 버려두시며, 그들이 그들의 최후의, 저주의 형벌의4분량을 채울 때까지 제지하지 않으시고 그대 로 타락의 길을 치닫도록 방치하여 '두신다. 그러므로 칭계를 통하여털망으 로부터 되돌이키도록 부르시돈 이 특권은 오로지 믿는 사람들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다. 둘째로 그는 이 형벌이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치유객이 역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아 일시적인 형벌을 롱하여f 제지를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한 멸망의 컬로 또한달려갈수밖에J없기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을찰 견달 수 있는 인내 력을 우리에게-『줄 분 아니라, 그의 훈련을 기쁜 마음으로`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남께 갑사를 드리게 한다• 우리에게 유익한 여러가지 방법이 있 는데, 우리가받는 형벌이 우리의 육욕을 극복하게 하며 또 하나님 앞에서 우라를 겸손하게::하는 한 우리의 형벌은 우리에게 유이한 것이 되는 것이 다. 또 그 형벌은 우리를 하나님께 순종하계 하고, 우리의 연약합을 깨닫게 하며, 또 우리의 마음에 기도의 불을 붙여주고, 뭔가 일할 의욕을 불러일으 켜 주며, 그 기간이 길든 짧든 이런 사상 속에 어떤 가혹함이 내포되어 있 을지라도이 모든 것은 영적 기쁨으로흡수되고 만다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 일반적인 교훈의 본질을취급하면서부터 이 재 바『울은 ~71-시작하였던 특벌한 실례들로 더들아오고 있다• 이제 그런 원 리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순수한 성찬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또 개개인 이 겨각 따로 성찬을 둘지 않도록 하기 위하1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성례 가 일상적인 축제와 혼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의-성찬에 적용되어 야 한다고 그가 말함으로써 끝맺 음을 하고 있 다•

 

"34.  만일·… .. 그 남은 것은 내가언제든지 같 때에 귀정하리라" ; 이것 이 왼에 어떤 다론 일들이 있었다는 것온 있음칙한 일이며, 더 좋은 변화를 위 하여 가치있는일이타고할수 있댜.' 그러나 그것들은 덜 중요하였으므로 사 도 바울은 그가 고린도 교인들을 방문할 때까지 그 수정을 연기하였다. 비 록 그런 형태의 어떤 것이 거기에i、 없는 것이 좋을지라도, 그러 나 사람이 그 현장에 있게 될 때 무엇이 팔요한가를 그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 온 그가 찾으려는 실제적인 상황의 요구에 따라, 일들을정리하기 위하여 스 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가톨릭 교도들은 또한 이것을 미사흘 방어하기 위한 방패로 삼아서 우리 에케 대항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바울이 여기서 약속하고 있는 "귀정(歸 正)하리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참으로 그가 마치 이 귀철에서 분명히 보 증한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제도를,.그 자신이 간섭하고있기나한 것처럼, 미 사가 그리스도께서〈제정하신 제도와 어떤유사성을 가지고 있는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만 외형적인 태도의 예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이 분 명하므로 그런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자.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분별력 에 속하는 일이므로 그것을 조철하면서 때와 장소, 그리고 인적(人的) 요소 들을고려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