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 12:12 ~ 31)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2)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3)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4)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5)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6)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7)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8)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19)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0)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1)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2)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3)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4)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5)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6)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7)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8)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29)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0)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3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 이제 바울은그가 로마서 12장 4절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 대한 직유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목적에서이다. 그는 각 사람이 자신의 소명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역에 침입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야망이나 호기심, 또 다른 어떤 이기주의적인 동기가 그들을 좋은 방향으로보다는 어떤 탐욕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은사를 각각 서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서로 결합하여야 한다고 강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은사는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돕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어떤 연합이나 결합체를 몸으로 부르는 것, 예를 들면, 국가나 정체, 그리고 국민의 집합체로 부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오래 전 과거 어느 때에 메네니우스 아그립바(Menenius Agrippa)가 로마 원로원과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로마 백성들을 화해시키려고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아그립바는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 어떤 유사성을 가전 한 우화(証2)를 들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와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단순한 국가 조직체가 아니고, 바울이 친히 덧붙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신비 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이렇다. 몸이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각각 다른 지체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지체들은 한 개체를 이루는 그런 방법으로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들은 각각 다른 은사들을 받았을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 그리스도의 이름이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대치되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 비교가 적용되었다.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는 까닭에 이 귀절은 존귀한 위로로 가득차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영예를 주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위(位) 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지체들 속에서 구별되고 인정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또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라고 말한 것처럼 , 그리스도께서 만일 그의 지체들로부터 분리된다면 그는 어떤 면에서 마치 불구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어거스틴이 그의 저술에서 정연하게 기록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풍성하게 포도를 맺게 되므로, 우리가 그를 떠나면 마른 나뭇가지들 이외 무엇이 되겠는가? 우리의 위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한분이시듯이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있다는 진리 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의 이름을 우리에게 나눠 주시는 이유이다.
"13.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 이것에 대한 증명은 세례의 효과로서 나타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가 되고 서로 지체로서 연합하기 위하여 결합되었으며, 또한 한 생명으로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공동 협력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한다. 물론 바울은 여기서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효력을 나타내는 믿는 사람들의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는 단순히 어떤 효력이 없는 상징에 불과한 의례(儀禮)일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성례를 통해서 어떤 진실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든 것을, 우리 인간 편에서 그것을 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실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적절한 투시력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례의 본질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외적인 상징에 의하여 그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덧붙이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바울은 사람들의 어떤 신분이 그가 추천하고 있는 거룩한 연합에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 두 계층의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귀절을 덧붙인 것은 아주 적절하고 시기에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계층의 사람들이 당시에 나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그들을 동등한 위치에 두기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질투의 원인이 되는 다른 상태는 특벌한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어떤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아주 완전히 떠나 독존하고 있는 데 있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이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는 한 성령을 마시도록 만들어졌다' 라고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앞에 오는 '엔 ; 안에' 과 '헨 ; 하나' 의 두 단어를 막기 위하여 바울이 매우 자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고의로 '엔' 을 '에 이스 ; 안으로'로 바꾼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같은 성령을 마셨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마시도록 되어진 그리스도의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세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성찬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나는 오히려 그가 마시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성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가 기호에 대한 비유를 암시하려고 하였다는 점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마시는 것은 분명히 세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나 찬이 성찬의 절반에 해당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난제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례에 대하여 말할 때 성경에서 제유법을 말하는 데 아주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10장에서 그는 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이 떡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우리가 찬을 나누는 것은 같은 성령을 우리가 마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찬을 마시는 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생명력 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며, 그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실 때 참으로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성령은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기 시작 하였을 때, 그들은 이미 각자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열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후 그들이 성찬을 받을 때, 그들은 모두 동시에 같은 찬을 마심으로 중생하였기 때문에, 한 걸음씩 다시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15. 만일 발이 이르되" ; 이것은 앞 문장의 발전 '에펙세르 가시아' 이거나 혹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나타낸 것인데, 바울이 몇 마디 말로 압축한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충고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다시 이 절에 있는 모든 것은 메네니우스 아그립바(MeneniusAgrippa)의 우화와 일치한다. 만일 반역이 몸 안에서 일어나서 발이 말하기를 몸의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맡은 직책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또한 발 뿐만 아니라, 위와 눈, 그리고 손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그렇게 말한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온 몸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그 논점 우월한 지체와 그보다 조금 낮은 가치의 지체들 사이를 비교하면서 각 지체들이 자신의 직무와 적절한 위치에 만족하면서 다른 부위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눈은 몸 안에서 손보다 더 영예스러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또 그 손은 발보다 조금 우월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만일 손이 어떤 다른 지체를 질투하여 자기의 역할을 포기한다면, 본성이 그 것을 용납할까? 손이 몸의 다른 지체들로부터 그 자신을 단절하려는 것을 다른 지체들이 용납할 것인가?
"몸에 붙지 이니한 것이 이니요" ;. 여기서 이 말은 다른 지체들과 관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 자체의 편의를 따라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손이 눈을 질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지체들의 봉사를 부인할 어떤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냐?' 라고 질문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육신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주의나 오해에서 생긴 질투와 부러움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나쁜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또한 그 결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를 거절하는 그런 사태가 돌발하도록 하지 않기 위하여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 ·바울은 동등하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준 후에 그 어리석은 오해를 추방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모든 지체들이 눈이 차지하고 있는 영예를 누리기를 갈망한다면, 그 결과는 팔연적으로 온 몸이 파멸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몸의 지체들이 각각 다른 기능들을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서로 봉사하지 않는다면, 몸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등하다는 것은 몸의 지체들이 차례로 끊임없는 재난을 초래하는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몸의 건강을 저해하는 것이다. 만일 몸의 한 지체가 다른 지체들을 위하여 협조하기보다는 자신의 멸망은 물론, 온 몸의 파멸을 초래하는 일을 한 다면, 그것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가 !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이것은 하나님이 제정 하신 질서에 기초한 다른 논쟁이다. 몸이 각각 다른 지체로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 지체들이 각기 다른 기능과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타당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터뜨리는 지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거인과 같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싸움을 벌이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반대함으로써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질서에 겸손하게 우리의 머리를 숙이자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이나 이유없이 각각 다른 은사를 각 지체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도움이 그 생존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조화를 이룬 배열이 폐하여지고 만다면, 그곳에는 혼동과 무질서의 괴변(怪變)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배열은 모든 것이 우리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모든 독자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도록 하여야겠다. '한 지체 (岐體)’란 말은, 어떤 변동에도 변화하지 않는 같은 집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집단의 상태를 우리의 몸에 주셨다면 그것은 무용한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바울은 모든 사건의 핵심이 바로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자주 이 주제로 되돌아오곤 한다. 즉 말하자면, 몸의 통일성은 다양한 몸의 지체들을 가짐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를 펼 것이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지체들이 기능이나 능력 면에서 각각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이 서로 연합하고 있는 그런 방법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많은 몸의 지체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연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부위로 그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각 사람들이 자신의 특별한 직무를 잘 수행 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공동이익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21. 눈이 손더러 내가 ~~~~못하리라," ; 지금까지 바울은 덜 영예로운 지체들이 몸을 위하여 그들이 해야할 책임이 무엇인가와 또 더 우월한 지체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왔다. 한편 지금은 더 우월한 지체들이 그만 못한 다른 지체들을 멸시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멸시하는 지체들이 없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은 손에 비하여 우월한 지체이지만, 그러나 눈이 손을 무용(無 用)한 지체라고 멸시하거냐 조롱할 수 없다.
"22. 이뿐 아니라 ~~~~~··도리어 요긴하고"; 바울은 또한 그 약한 지체들의 유용성에 호소하면서 논증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될 방법론이다.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부위가 사실은 머 요긴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몸 전체의 건전한 생존을 위하여서는 그 약한 부위들이 결코 멸시 받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비천한' 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뜻으로 더 '약한' 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도 그는 그에게 멸시와 비천함을 안겨주는 의미인 그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23. 우리가 멈의 멀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더욱 아름다운것을 얻고" ; 이것은 두번째 논증으로서,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도 몸 전체의 일부로서 산재해 있는 그 효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분명히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모으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이 분 명하다. 바울은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어떤 꾸미는 장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지체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또 그 지체들이 별로 나타내 보일 만하지 않지만 그 지체를 돌보는 데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지체들의 수치가 전체 몸에 대하여 어떤 불명예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그 지체의 부끄러운 부분이 고상하게 감추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장식용 덮개를 덮는 것이다.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것이 없으니." ; 그가 이미 앞에서 한 번 말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곧 하나님께서 이 조화를 이루는 배열을 하셨으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고는 생존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온 몸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모든 지체들이 나 타나는 것이 별로 명예롭지 못한 지체의 명예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그들의 관심을 기울이며, 또한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단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이런 방법으로 지체들을 지키는 균형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지체들의 불 일치가 전체 몸의 조화를 깨뜨리고 말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어떤 한 사람이 자기가 받은 은사 이상의 것을 잘못되게 선포한다면 그 전체 몸이 멸망하고 또한 자연의 질서가 깨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가 공공연하게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다.
"26. 만일 한 지체가고통을받으면……" ;인간의 몸에서는, 만일 한 지체가 불행을 당하면 모든 다른 지체들이 그 고통을 함께 견디는그런 류의,연이 있다. 이것은 어떤 지체가 영광을 얻게 되면 모든 지체가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서로 질투를 하거나 멸시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영광을 얻게된다'라는 것은 여기서 좋은 일이 있거나 행복한 환경을 나타내는 광의(廣意)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제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다는 이 생각보다도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각자가 모두 어느 점으로 보든지 다른 사람들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 풍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한 그들이 그것을 잃었을 때, 그는 그들과 함께 가난하게 된다.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 인간의 몸의 본질과 특성에 대하여 지 금까지 살펴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민으로서 사회의, 일원일 분.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우 리는 참으로 다른사람둘과 연관을 갖는 지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우리 모든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받은 은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닳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는 그 은사를 공익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하며, 그것을 자신에 사장(死藏)시킨 채 감추어 두어서는 안되며, 또한 그것을· 자기 개인의 사유물(私有物)인 것처럼 사용하여서도 안된다. 남보다 더 큰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만심을 갖거나 다른 사람들을 멸시 하여서도 안되며 그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거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믿는 사람들이 가진 은사는 사실상 교회에 무용한 지체와 같은 그런 사람들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빈약한 자원에 관계가 있는 열매를 맺는다. 그런 큰 은사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보다 우월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질투하지 말고 그들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들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서로를 위한 사랑과 동정(쉽파데이아)이 있고 또한 서로를 보살피는 배려가 항상 끊이지 않도록 하자. 악의나 질투, 교만, 자만, 그리고 불화로 인하여 교회가 망하지 않게 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모든 힘을 헌신에 기울여 교회를 위한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자. 이것은 부요하고 위대한 주재이다. 그러나 나는 앞에 나타난 유추가 어떻게 교회에 적용되어야하는가를 지적하는 것으로 국한하려고 한다
"자체의 각 부분이라." ; 크리소스톰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보편적인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귀절이 첨가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그것은 억지인 것 같다. 나는 한때 그것이 어떤 잘못을 지적하는 것 '유행을 따라서'라는 라탄어 관용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더 깊이 고찰할 때에 나는 오히려 그것이 바울이 이미 언급하였던 지체들 가운데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그 자신의 몫과 또 정확한 의무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지체들인 것이다. 그 문맥 자체로는 그런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여 준다. 그러므로, ‘부분적으로' '개별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라는 말들은 모두 서로 상관 관계를 가질 것이다·
이제 12장의 초두에서 바울은 ‘능력들'·Gfacult.atibi4s)에 대하여 말하였~~ 며, 이재그는 직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우리는 이런A 문제의'순서에섭서 하여 특별한 관십울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만주주님께서는〉선처占그들에게=r팔 요한 은사를 주신 후 그들을 사여 자돌로i 임 명 하고 구훈 그들이 !갑당해야}·할 왕무를 다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r이 사살께저 철대~ ... ;;아져올 부여 받저 못한 사람이 교회 일을 하려고 여지루 부르는 것은광신적인 것이며 악 령와지배를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동0J:1 줄곧~,그들이 깨닫지. :못{하고모전' 적으로나무지한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들이 성령위 .... 감동을 받았으며 하나님 의5 은밀하신 소명 을 받았다고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이서않다는 것 이다.
그러 나 사실 자연적인 순서로는 .. ::::z. .은사가 실제적인.진무보다 먼저-오는 것아댜~, 그러므로 자기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土폐~~그것윷‘공공유이을 위하여 공헌하는데 사용하여야 하며,」 바울도 이제소그렇게 그들을 일깨위 주고있는데, 즉 직무는 그들의 서로 결합을이룬 노력으로인하여 모든 사람 들이 교회를 세우고, 동시에 각 사람이 특별히 공헌을 하는 그런 방법으로 분쎄 받았다는 것이다.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 바울은 이 목록 속에 모든·종류의 직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은 실례를 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직무의 목록이 다 나타나 있는 데 이것은 교회 정치에 계속 필요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다면, 그가 그 모두를 설명하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그 귀절을 취급 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앞에서의 귀절에 관계되는 한 우리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어떤 직무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에 반하여 다른 직무는 일시적인 것이다. 그 영원한 직무는 교회 정치에 필요한 것들이다. 한편 일시직인 것들은 처음부터 교회의 기초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며, 또 이것은 얼마 후에는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교사의 직무는 재1급에 속하며 , 사도의 직무는 제 2급에 속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도들울 임명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온 세상에 두루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특정 지역이나, 교구를 할당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모든 나라와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들 속에 들어가 주님을 위한 대사로서 일하기를 원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일장한 영역, 곧 자신들의 교회를 각각 가지고 있는 목회자들과는 다르다. 목회자들은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책임으로 맡겨진 교회를 돌보는 데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목록에서 사도들 뒤에 복음 전하는 자를 포함시키고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최상위의 순서에서 선지자들로 곧장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선지자들이라는 말을 예언의 은사를 받은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풀이하고 필요할 때, 적절하게 성경 말씀을 제시하는 유일한 은사를 받은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울이 모든 다른 은사에 대하여 예언을 더 좋아하는데 그것은 예언이 교회의 더 큰 근원이며,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에 거의 적용될 수 없는 말, 곧, 교희의 큰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가 선지자의 일을 규정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가 하고 있어야 할 일들을 취급하였을 때, 그는 그가 위로와 격려, 교훈에 전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예언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우라는 선자자들이
(1) 성경에 관한 탁월한 해설자들이며, 또한
(2) 교만에 직접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지혜와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고 적절한 말씀을 주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 게 전하여 주는 사자(使者)들인 것이다. 그들과 교사들 사이의 차이점이 지적될 수 있는데, 교사들의 임무는 종교의 순수성이 교회에서 보존되도록 하기 위하여 건전한 교리(sana dogmata)를 지키고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제는 다른 방법으로도 또한 사용되고 있으며, 아마 여기서는.오히려 목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누가가 또한 선지자들과 함께 묶어저 취급하고 있는 사도행전 13장 1절의 경우에서와 같이, 가르치는 능력의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로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더 좋아한다는 말이다.
내가 선지자의 임무를 성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 중에서두세 사람만이 말을 하여야 하며, 더우기 교대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올 해석하는 것을 재외하고는 아무것도 그들의 행동과 일치되는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의 견해는 여기서 선지자들에 관계되는 것은 예언과 경고, 약속, 그리고 성경의 모든 교훈을 당시의 교회의 필요성에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써 하나님 의 뜻을 잘 알리는 데 세련되고 경험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이 점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갖는다면, 나는 그럴 여지가 있다고 충분히 인정하며, 그것 때문에 그 사람과 다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다만 그 흔적과 그림자 정도만을 유지하는 정도로 오랫동안 박탈당하여 온 은사와 임무에 관하여 우리의 마음을 결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적과 병고치는 은사에 대해서, 나는 이마 12장에서 밝힌 바 있다. 그것은 다만 바울이 그 은사들 자체에 대하여 그 은사들을 실행하는 만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이 직무들을 여기서 상세하계 열거하고 있는 까닭에, 나는 '안틸렘페이스' 즉, 유지, 혹은 도움이란 낱말을 연약한 자를 격려하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말이 무슨 뜻이 되겠는가?. 분명히 그것은 오래 전에 교회에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직무와 은사의 두가지를 언급하는 말이거나 혹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말하자면 집사의 임무이거나 두가지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두번째 경우를 더 지지하고 싶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2장 8절에서 두 종류의 집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나는 집사문제에 대하여 관계된 주석서에서 언급하였다.
나는 다스리는 것을 훈련의 책임을 진 장로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에 '장로회'라는 것이 있어서 백성들을 바로 살도록 지도 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나타내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장로들의 이중적인 질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성이나 경험, 그리고 권위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장로들이 이 다스리는 책임을 감당하였다. 바울은 각종 방언 속에 여러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것과 그 언어들을 풀이하는 은사 두가지를 포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각각 서로 별개의 은사이다. 왜냐하면 때때로 많은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가 알아야 하는 실제적인 교회의 말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 해석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9. 다 사도겠느냐~~~~" ; 물론 한 사람이 많은 은사를 받는 일이 있으며 또 두 가지 직무를 감당하는 일이 있으며, 또한 그 임무를 잘 갑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타난 바울의 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 만만하여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팔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많은 은사를 받은 것 만큼, 그 직무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혼자로서는 전체의 조직체를 이룰 수 없다는 그런 방법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이 귀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 교만이나 왜곡 된 질투, 오만, 형제를 멸시하는 일, 악의, 이기주의, 그리고 그런 종류의 모든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는데 있다.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틀 사모하라……" ; 이것은 ‘가치가 높은'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 문맥에 아주 잘 어울린다. 어떻게 하든 그것은 그 의미에 별 차이를 주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을 확고하게 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그런 은사들을 소중히 하고 또 그것들을 갈망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유익한 일들보다는 허식을 더 찾는 잘못이 그들 가운데 널리 팽배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예언을 무시하는 이유였다. 동시에 모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방언을 한다면 그들이 혼란을 일으킬 뿐, 사실상 방언에 대한 참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각 사람이 예언가가 되고 혹은 교사가 되기를 목표로 삼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자신을 개인에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들이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하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데 가장 효력적인 일들을 더욱 열심히 구하면서 그들이 모든 일에 자신들을 헌신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