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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고전13장 8절로 13절

1. 성경 (고전13:8~ 13)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8)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9)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0)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2)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8. 사랑은 언제까자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사랑의 또 다른 현저한 특징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결코 끝이 없는 그와 같은 특성은 분명히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일시적이며 사라지고 말 은사들 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인 것이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여지고 말 종말이 온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모든 다른 은사들이 종언을 맞이한 이후에도 남아 있는 까닭에, 사랑은 그렇게 귀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카톨릭교도들은 어떤 성경적인 권위도 없는 교의(敎義)를 지원하기 위하여  이 귀절을 왜곡하고 있는데 , 말하자면 죽은 영혼들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날조한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추리한다. 즉 "기도는 사랑이 보증하고 있는 영원한 봉사이다. 사랑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 속에서 계속 살아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하게 논쟁 할 의향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내가 양보함으로써 그들이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지 않기 위하여 그 반대 의견에 대하여 간단히 대답하려고 한다.

 

먼저, 사랑이 결코 끝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즉각적인 결과는 그들이 말하듯이 사랑이 그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이행해야 할 그들의 의무인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성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카톨릭교도들이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불일치가 무엇인가를 당신에게 묻고 싶다.  두번째로, 형제들을 위하여 중재를 하는 사랑의 의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 반대의 것울 증명하는데 성공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중재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마음대로 상상하는 모험을 하여도 된다면, 축복 받은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이 더 그럴듯한 추측이다. 카톨릭교도들은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반사된 빛 안에서 모든 세상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우리의 상황을 모른다는 점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관심울 기울이지 않는다고 내가 말한다고 가정하면, 카톨릭교도들은 나의 견해를 포기하도록 나를 강요하기 위하여 무슨 논증을 나에게 할 것인가? 그들이 매우 옹고집이고 다른 것을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환영에 열중해 있다고 내가 주장한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그들은 이것이 정당한 견해가 아니라고 증명할 것인가?  바울사도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사랑의 영원성이 마지막 날까지 존재할 것이며, 그 중간기에는 아무것도 관계를 가질 일이 없다고 내가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고 가정한다면 또 상호 중재의 책임이 오직 살이있는 사람, 곧 이 세상의 살아있는 순례객들에게만 해당되며 그런 이유로 죽은 자들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고 내 가 말한다고 가정 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미 아주 충분히 말하였다. 카톨릭교도들이 그렇게 완강하게 다투는 바로 그 점에 대하여 나는 그것이 무의미한 일이므로 논쟁을 피하려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 귀절이 얼마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주의해 볼 필요는 있다.  사실상 그것이 그들에게 그런 놀랄 만한 무기를 제공하여 준다고 그들이 생각할만한 여지는 있다.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인 어떤 증거에 의한 지원도 못 받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충분히 알아야 하며, 또한 그러므로 그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들은 철면피하고 무모하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깨달아야 한다.

 

"지식도 폐하리라." ; 이 말의 의미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학문과 다른 은사에 있어서도 뛰어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무식한 사람들과 동일한 입장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는、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라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믿는 사람들인 나의 독자들에게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지나치게 고통을 겪지 말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들은 천국에서의 그들의 상태가 장차 어떠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런 문제에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우리가 그런 호기심에 빠져들지 않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추측할 수 있는 한, 또 이 귀절에서 내가 이끌어낼 수 있는 불충분한 정보를 통하여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려고 한다.

 

이 세상의 생활에 필요한 학문이나 어학에 대한 지식, 이와 비슷한 은사들은 내 생각에 이 세상 마지막 날이 올 때에 그대로 존재하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배운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은사가 폐하여진다 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상태가 더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은사에 대한 결실을 받을 것이며, 또한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예언과 그런 비슷한 종류의 모든 다른 은사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폐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우리의 불완전성이 끝날 것이며, 그러므로. 이런 은사의 활용 역시 동시에 끝날 것이다. 그런 것이 필요 없는 그런 곳에서 그 은사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그 은사들은 폐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논증을 이 13장 마지막까지 계속 추적하고 있다.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절을 잘못 설명한다. 곧 그들은 우리의 지식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그런 속에서 발전을 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일이 예언에도 적용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바울이 나타내는 의미는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지식이나.예언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적 으로’ 라는 뜻은 우리가 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식과 예언은 불완전이 우리에게 따르고 있는 한, 우리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불완전성을 돕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미완성의 상태로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지적하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곧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은사는 다만 일시적인 것이라고 그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지적하는 이유는 은사를 받는 축복은 날마다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우리가 목적지를 향하여 향상하여 나아가는 데서 그 효력이 나타난다고 가르치려는 목적 때문이다. .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결승점에 도달하였을 때, 그 때는 그 달리는 과정에서 우리를 돕던 사물들은 그 도움을 그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것을 어떤 부분적인 것과 대조하면서, 그전에 그랬듯이 동일한 방법의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완전한 것이 올 때에는 우리의 불완전을 돕던 모든 것은 폐지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완전이  언제 올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때에 우리는 육체와 함께 많은 연약함을 벗게 되기 때문이다. 그라나 그것은 우리가 곧 뒤에서 배우게 되는 것과 같이, 심판날까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논쟁 전체를 중간기에까지 적용시키려는 것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뱌울은 비교를 틍하여 그가 말한 것을 예증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해당되던 많은 일들이  우리가 성년이 되었을 때에는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면, 우라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었지만, 성년들에게는 우스운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우라가 완전한 지혜에 어르기에는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연령에서 성숙하게 되는 완전을 이루게 되면 그때는 교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또한 모든 일들이 그렇게 될 것이다.  에베소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엡 4:14)에서 바을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 상태로 있지 말자고 권고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는 거기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귀절을 살펴 볼 때에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로 하겠다.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 이제 우리는 비교를 적용하게 되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의 형태는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에 적합한 것이며, 그것을 우리의 어린 아이 시절로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하늘 나라의 신비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며, 또 그 나라의 환영을 바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바울은 다른 비유, 곧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울과 같은 것이며, 또한 희미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수수께끼'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 불 분명성을 전달하고 있다. 먼저 그가 말씀의 임무와, 그것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거울에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하시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런 것들을 지정하셨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로마서 1장 20절과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우주의 전 구조를 포함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피조된 만물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위엄이 그 속에서 나타나 보이도록 하는 거울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특히 영적 은사를 취급하고 있는데, ,이 영적 은사는 교회가 행사하는 사역을 돕는 것이며 그 사역과 함께하는 것인데, 우리는 더 이상 지엽적인 문제를 논하지 않겠다. 나는 말씀의 사역이 거울과 갈은 것이라고 말하겠다. 천사들은 설교나, 다른 열등한 보조 재료, 혹은 성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다른 유리한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얼굴을 다만 거울로 보듯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그런 고차적인 척도의 눈을 갖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씀과 성례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희미하게' 보는 환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희미하게 보는 것은 그 실존 자체가 의심스럽거나 혹은 어떤 현혹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날까지 결국 그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와 같은 일을 고린도후서 5장, 6,7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러므로 이제우리의 믿음은 부재(不在)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없기 때문에, 거울 속에서 그 형상을 보고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갈 때에 가까이 계시며 또한 눈앞에 바로 나타나 보이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이해하여야 한다. 즉, 우리가 그의 말씀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확실한 것이며 또한 참된 것이다. 그리고 모호하거나 난해하거나 불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희미하다' 라고 하는 것은 비교하는 방법 상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하게 될 때에 보게 되는 분명한 계시에 비하면 현재 보는 것은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어떤 다른 귀절들, 곧 때로는 율법에 대하여, 또, 때로는 성령 전체에 대하여, 또한 복음 전체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는 그런 다른 귀절들에 대하여 어떤 면으로든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에 관한 개방적이고 적나라한 계시가 들어 있으며 (우리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에 족한) 믿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우리를 불확신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런 이해 불가능의 것은 아무것 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이 계시의 몫은 그 얼마나 적온가!  그러므로 이것을 장차  나타날 다른 것에 비교할 때  ‘희미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라는 부사는, 우리의 죽음 후에 곧 나타나게 되는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 그러나 계시가 충만하게 성취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연기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죽는 순간에 하나님을 더 가까이 뵙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몸에서 떠나게 되며, 또한 외적인 사역이나 혹은 다른 열등한 조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바울(내가 이 미 지적한 대로)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논쟁 때문에 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는 지식이 경건에 대하여 큰 도음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은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요한은  그의 서신(요일 3 : 2)에서 동일한 내용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뵙게 되는데 그의 영상(imagine)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이며 말하자면, 서로 보게 될 것이다.

 

"13.  그런측 믿음, 소망, 사랑" ;  앞에서 말한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사랑이 다른 모든 은사들 보다 훨씬 더 상위(上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바울이 이미 앞에서 언급한 은사의 목록을, 이제 ,그는 믿음, 소망과 함께: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은사들은 이 세 가지 속에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 때문에 전체적인 거룩한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이 세가지 은혜들 안에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 일까? 그러므로 ‘믿음'은 이 믿음을 활용한 데 대한 앞에서 나타난 실례들 보다는 여기서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말한것과 같다. 즉  ‘참으로 많은 ,또 다양한 은사들이 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은 모두 이 한 가지 결론에 귀결되고, 또한 그 한가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는다는 것' 은, 모든 것이 다 폐하여진 후에, 마치 계산이 부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이것이 총계로.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댜른 곳에서 눈으로 보는 것과 대조 시킨 것처럼, 또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는 동안만 계속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우리의 죽음 후에는 계속되지 않는다. 이제 우라는:이 귀절에서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의 뜻을 아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교회의 복음사역을 통하여서 알게 되었으며, 혹은 만일 당신이 더 좋아 한다면, 그 믿음의 충만함을 알게 되고 또한 믿음의 적절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소망'은 믿음안에서 참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으면, 그 후 계속 우리는 모든 것이 완성될 때 까지 계속 견디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소망의 어머니라면, 소망은 또한  소멸되자  않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지켜지게 된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바울이 이미 이 세 가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듯이, 만일 우리가 사랑이 갖는 효력에 대하여. 그 탁월성을 평가한다면, 우리도 역시 이 사랑을 최고의 위치에 둘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또한 그것의 영속성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각각 개인의 축복을 그 자신의 ’믿음과 소망에서 얻게 되지만 반면에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에 대하여 함께 공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완전한 상태에 이론 이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결과를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고, 또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여 본다면, 우리는 믿음이 여러 면에서 월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또한 갈은 사도 바울의 증거 (살전 1 : 3)를 따르면, 사랑 그 자체는 믿음의 산물이며, 또한 그 결과는 틀림없이 그 원인보다 더 낫지 뭇 할 것이다. 첨가하여 놀랄만한 찬사를 믿음에.부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즉 요한 사도(요일 5:4)는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듭난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또 영생을 얻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모든 축복이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축복들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 몇 가지 실례 만으로도 믿음이 많은 그 결과 면에서 사랑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때 내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전달하였을 것이다. 사랑이 모든 면에서 더 위대한 것이라 그 영원성 때문에, 또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주요한 역할 때문에 더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 진다.  그러나 카톨릭교도들이 만일 믿음이 정당하다면 더 위대한 것으로 묘사된 사랑이 그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어떻게 그들이 자기 만족에 빠질 수 있는가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제 이 논쟁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내가 말한 내용에서 분명히 그 해답이 주어졌다. 사랑이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가정을 하면, 그것이 더 위대하기 때문에, 인간을 정당화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이 논증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왕은 농부보다 밭을 더 잘 경작할 것이며, 제화공보다 구두를 더 잘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왕은 그들보다 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은 말보다 더 잘 달릴 것이다. 코끼리보다 더 무거운 짐을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그런 동물들보다도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원리 아래서 천사들은 해나 달보다도 더 밝은 빛을 지구 위에 내려 비칠 수 있는데, 그것은 천사들이 그 천체들보다도 훨씬 더 상위(上位)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당화하는 힘이 믿음의 가치나 공로에 의존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것에 주위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더 가치 있고, 또한 더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정당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 안에서 자유로이 주어진 의로움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위대성이나 혹은 가치는 이 안에서 작용할 분야를 갖지 못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이 귀절이 카톨릭교도들에게 조력율 더 이상 줄 수 없는 이유인데, 만일 사도 바울이 믿음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에 두었을지라도, 카톨릭교도들을 지지하는 더 이상의 근거가 뭇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