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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14:1)

1. 성경 (고전 14: 1 ~ 19)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2)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3)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4)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5)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6)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7)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8)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9)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0)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1)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2)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3)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4)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5)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6)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7)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8)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9)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그가 앞에서 그들이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갈망하라고.격려하였던 것처럽 이제 그는 “사랑을따라 구하라"고 그들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 다른 은사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사랑이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는 한, 그들은 그들의 은사를 잘 관리 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암암리에 그들의 사랑의 결핍에 대한 의무 수행을 촉구하고 그때까지 그들온 그 은사들을 남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서 추리하고 있는데, 그들이 사랑을 제1위로 여기지 않을 때, 그들은 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것이 참으로 무엇인가 그것을 소유하는 데에 신중하고 적절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기주의가 그들의 소망과 열망을 파산시키고 있는 때에, 그 이기주의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그둘에게 지적하고 있다.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 ;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면 하나님께서 모욕을 받으시는 것이라는 반대를 제기할 경우를 예상하여, 사도 바울은 그를이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 은사들을 그가 결코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그가 이 은사들을 그들이 갈망하도록 격려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교회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 은사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그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방법 때문에 그 은사들이 무용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폐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은 예언이 다른 모든 은사들보다도 더 나은 것이라고 증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 예언이 은사들 중에서 가장 큰 은사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 문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즉 그는 어떤 유용성이 있는 은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잘못된 열심으로 근본적인 중요점을 가진 것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언을 지도적 위치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은사라도 무시하지 말라. 나는 예언이 그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 다른 모든 은사를 사모하라고 여러분에게 권한다’ 는 뜻이기도 하다.

 

"2. 방언을 말하는 자는……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  바울은 이제 실제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왜 그가 예언을 다른 모든 은사들 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다론 사람들이 외국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하므로 다른 은사보다 더 화려한 전시효과를 나타내게 되어 그들이 지나치게 이 방언의 은사에 관심을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원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전혀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방법이 아니므로, 그것이 얼마나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첫째 요점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속담이 가르치는 대로), 그는 ‘자기 자신과 벽을 향하여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다음과 같이 그녀의 입으로 말하였다'. 또 ‘나는 나의 두 귀(莊 1)로 그의 음성을들었다'라는실례들에서 보여주는것 처럼, ‘방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용어법(亢語法)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어를 의미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한 이유는 ‘아무도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방언을 말하는 본인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들은 소리만 들을 뿐이며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말하자면 '영적은사로 인하여' (이것은 크리소스톰과 마찬가지로 내가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는 신비와 또한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유익을 가져오지 못한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에서 ‘신비'를 좋은 의미,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탁월한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나쁜 의미, 곧 이해를 가능하고, 나쁜 영향을 주며 , 또한 수수께끼 같은 말로 해석 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이무도 알아  듣는 자가 없는  그런 말이다. · . . .;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바울은 ‘방언’이 땅에 묻힌 보화인데 반하여 , ‘예 언약은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어떤 일에 귀한 모든 시간을 사람이 허비하는 것 이상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또 있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을 전혀 돌보지 않고 게올리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말하여 덕을 세우는 것'은 모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적절한 교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용어가 종교와 믿음에 대한 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배와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책임감을 갖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에 싸여 있고, 또한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볼리한 입장에 있을 때에 그러나 우리들 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극이 필요하므로 바울은 교훈을 곁들여 위로와 격려의 말을 주고 있다. 이 귀절과  앞의 말에서 예언이란, 예언을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겠다.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 바울은 2절에서 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하나니'라고 이미 말하였고, 이제 여기서는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이나 교희에서 행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데 방해가 되는 잘못된 이 이기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하자!   이 외에도 바울은 양보의 화법 (話法)으로 말하고 있는데, 야심이 그와 같은 과장된 말을 쏟아 놓는다면, 그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바울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도, 다른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과시하려는 사람들에게 주려는 명령인 것 같다.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 ;바울은 그가 방언에 대하여 여유를 주는 그런 아무런 방법을 제시함도 없이 무조건 예언만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울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신데 이무런 목적도 없이 그의 교회에 어떤 은사를 주시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아마 그 당시에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였던 것 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잘못된 멸망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은 이 은사를 어느 면에서는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고, 또 다론 면으로는 심지어 유해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그 잘못을 수정함으로써, 그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방언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교회를 위하여 그것을 잘 선용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방언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부르짖음이 있으며, 또한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의 놀라우신 은혜로 그들을 흑암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빛을 주실 때, 그런 상황에 부딪쳐서 큰 소리로 맹렬하게 그들에게 저항하는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다. 성령께서 이 귀절에서 방언에 불멸의 명예를 주신 것이 틀림없으므로, 어떤 종류의 영(靈)이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그렇게 심한 모욕적인 말로 언어를 배우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그런 비평가들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추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나라들 가운데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도움을 주는 모든 말들에 대하여 차이를 두지 않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런 현대의 비평가들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가 원천에서 솟아나오는 것처럼 나오는 그 언어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은 아래와 같다. 즉, 우리가 방언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말이야 하며, 그것에 더 우월성을 가질 때는, 예언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 만일 해석이 덧붙여 지면, 예언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어떤 사람이 외국말을 중얼거리는데 교회의 시간을 허비하여도 된다고 허락하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같은 일을 많은 다른 나라 말로 선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때때로 의국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이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유일한 목적은 교회를 수립하기 위한 일이 되도록 하자.

 

"6. 그런 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 바울은 자신을 실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자신의 상황이 그가 특별히 말하여야 했던 것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교훈이 가져다 준 풍성한 열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그가 그들에게 말할 때 방언들을 사용한다면, 그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하고 그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경험에 대한 이런 호소를 통하여, 그는 예언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그들에게 가르 치고 있다. 더구나 그는 어떤 사람을 제외하기보다는 그 자신 편에서 이와 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정죄하는 데 있어서 공격하기 위하여 동일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바울은 네 가지 교회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계시와 지식, 예언, 그리고 교훈이다. 해설가들이 여기에 대하여 각각 다론 견해들을 취하고 있으므로, 나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주관적인 상상의 견해이기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각각 좋을 대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나는 계시와 예언을 하나로 취급하며, 또한 예언은 계시에 종속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식과 교훈에 대해서도 동일한 견해를 취한다.  그러므로 계시를 통하여 얻은 것은 무엇이나 예언에 나타나야 한다. 교훈은 지식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계시의 해설자가 되고 또한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예언에 대한 정의에 저촉되기보다는 그것을 지원하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예언이 성경에 대하여 단순하고. 불충분한 해석을 포함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기의 필요에 적응하게 하는 지식을 또한 내포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계시와 특별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기 때문이다.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어찌 알게 되리요." ;  바울은 먼저, 악기의 직유(直哈)를 소개하고, 다음에 사울의 일반적인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악기들은 서로를 분별할 수 있는 그 악기 특유의 특성운 가지고 있다.  바울은, ‘생명 없는 것이라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우연히 듣게 되는 많은 소음과 요란한 소리들이 있으며 그런 것들은 음악적인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어떤 기술적인 방법을 통하여 울리게 하는 음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갈다.  ‘인간은 하프나 플루우트 악기에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그 악기들을 통하여 소리를 낼 수 있으며, 이것들은 그들이 식별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조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성을 갖춘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내성적인 소리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어찌되었든 우리논 여기서 지나치게 음악적인 조화의 문제에 깊이 집착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 나팔 소리, 예를 들면 그가 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팔 소리는 피를 분발시키는, 곧, 사람뿐만 아니라, 말을 자국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것은 역사적 기록이 나타내듯이,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들이 전쟁에 임할 때, 플루우트를 더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처음 돌격에서 군대가  지나치게 격렬한 분노에 휩싸여 전력 (戰力)을 탕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하여 음악이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데,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으며, 그래서 플라톤(Plato)은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기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음악은 도덕적인 상태를 형성 하는 데 가장 위대한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9.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서~~~~" ; 이 내용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갈다. 즉 ‘너희의 소리는  하나님께와 또 사람에계 전달되지 못하고,  온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10.  세상에'.;.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바울은 이제 더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동물계의 자연적인 소리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말하자면 분명하고 명확한 소리에 반대되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의 낱말을 사용하고 있다. 개의 부르짖음은 말의 울음소리와는 다르며, 사자의·,울부짖는 소리는· 당나귀의 울음 소리와는 다르다. 모든 새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고유의 노래소리와 지저귀는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모든 질서는 각각 분별될 수 있는 저마다의 소리를 소유하고 있다. ,

 

"11. 그러므로 내가 그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 우리의 말은 속담이 말할 뿐만 아니라, 아라스토텔레스가 그의 <OnInterpretation〉의 초두에서 가르치고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사실은 그의 청중들이 그가 말하는 것을 한마디도 께닫지 못하고, 그 암시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 군중들.앞에서 그가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과시해 보이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일이다. 그 러므로 바울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울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청중들에게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는 최대의 볼합리성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어리석은 만용을 잘 놀려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려 하고 또, 그들로부터 경이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들의 고통의 대가로 얻게 되는 모든 상은 너회들이 야만인이 될 것이라는 그것이다.' '야만인’ 이라는 명칭은, 그것이 꾸며낸 것이든지 (스트라보가생각하듯이)아니면 어떤·다론 파생어이든지 간에 그것은 어쨌든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들만이 좋은 말을 쓰고 순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백성으로 생각하는 헬라인들온 다른  모든 민족들을 야만인들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거칠고 야비한 화술(話述)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리 발달된 언어를 사용할지라도,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 하지 못할 때에는 그 언어도 역시 ‘야만스러운 것'으로 부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울은 듣는 사람이 나에게는 야만인이 될 것이며, 또한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언어로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의 친교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그 친교에서 분리되어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

 

"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방언의 은사는 어떤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어떤 공헌을 함이 없이, 자신들을 나타내는 전시 효과를 노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이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만일 신령한 은사가 너희들에게 기쁨의 근원이 된다면, 그 은사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가 너희들로부터 유익을 얻게 될 때, 그때에만 비로소 너희들이 참으로 돋보이고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비록 그 과정에서 교회에 덕을 끼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기 위하여 그 은사를 사모하여도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잘못을 수정함으로써, 그는 그들이 그들의 목표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동시에 그는 어 떤 사람이 가장 귀하게 인정받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을까 더욱 염려하는 바로 그 사람이 더 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관계되는 한, 주님만 이 돋보이고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또한 주님의 통치만이 날마다 더욱 확장 되도록 하는 그 목적만이 지금 여기서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영적 은사’라는 말 대신에 환유로서 ‘신령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동일한 방법에서 교훈의 성령, 이해의 성령, 판단의 성령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영적 교훈, 영적 이해력, 혹은 영적 판단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앞에서 가르친 곧,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11)는 교훈을 기억 하여야 한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여기서 뱌울은, ?그러면 어떤'사람 이 외국어문 안다면, 그의 온사가무용하계 될 것이타는-~을의미한단 말인 가? 그리고 왜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드릴 수있는 것을묘제나거두음 ..,속에 뱌밀로 감추어 두어야 하는가?'라는 질 문이 제기될 것을 쉽게 예상하고, 바울은. 여기서 대답을 하고: 있다. 바울온 치유채울제시하코.--있다,. r'하나님께 또한 통역의 온사를 구하도록 하자. 한 편 만일 그가 통역의 은사를 갖지_못하였다면, 허식적으로 동역하는 것을 절 제 하도록 하자.; .

 

"14. 내가 만일 ~~~~못하리라" ; 이것이 또한 그가지금까지 권고한 것을 확증하는'·적절한 본보기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나는 그것을 새로운 주 제라고생각한다,,.왜냐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방언을 말 하는 습관에 것어 F있었던' 것처럼, .또한~그들이 방언으로 곧찰 기도를 하였 기 때문에, 또한 이 점에서.,그들이 잘못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동 일하게이,두가지 남용은 갈은근원에서 나온 것인데, 왜냐하면 이'두 가지 가 모두 하나이고 또 갈은.계열이기 때문이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  야말의 의미는 이미 앞 철에서, 군분 방언으로 키도한 다는 부분에사분명하여졌다. 다론 한편, 여기서 ‘영'이타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섣덩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세례에서 받은 성령에 ,대한 암브 로스의 언급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혹은 근거에 대한 어떤 유시성도{ 없다. 오히려 어거스탄은 그것을 더 난해하게 그것이 정신력에 대하여 열등한 영 혼의 능력 이 되 도록 하기 위 하여 사실성 에 대 한 기 호(signa rerum)와· 관념 을 포착하는 이해력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호흡을 .. "Pl 쉬운 말로 복으로숨을 쉬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더 _:그럴듯한 견해를 취하고 있다• I그러나 바울이 이 논쟁에시 계속,~사용하고 있는 방법은,그해석과는 상이하다. 이보다도 더 참으로 그 단어는 매우 빈번히 양보의 방법으로서 반복되고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으 왜냐하면 그들이 갖도록 바울이 그들에게 분명히 허락한 명예로운 서술'.안에서 그들이 긍자를 가지고 있다0 I그러나, 한편 그는훌륭하고 놀라운. 일운 악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일인가를 지 척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 신령한 것을 나에게 자랑하고 있군고요:그러나' 만일 그것이 무 용한 일이라면,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대가I이〈말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이해에 동의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는 앞에서도 그런 것처 럼 영적 은사, \곧 동일한 위미를 그것에 부여』하고=--~있거 때문이다. '.외렇게 하여 ‘나의 영'은 정확하계 ‘나에게 쥬어전 은사’와 동일하게 됨을 「의미할 것 이 다.  그러나여기서 새로운 문제가제기된다. 성령의 덕사로, 그들t자신도 모 르는언어로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적어도 우 리는 그런 어떤 실례를 읽어보지 못했다). 방언의 은사는c..:.사끄럽계 하키 위 한 묵적으로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통의 ,목적으로 주어진 것 이다. 로마어의 방언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헬라어에 대하여 의무것 도 모르는 사람에게 헬라어로 말하도록 지시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 인가 !

 

그는 마치 사람의 소리를 흉내내도록 하기 위하여 훈련한}..!앵무새나, 까차, 그리고 까마귀와 같을것이 아닌가!-그러나 만일--방언의 은사를y받 온 어떤 사람이 지각있게 또 현명하게 말한다면,J그것은바울의 깨닫지 못 하는 영의 기도는 헛된 것이다’라는 말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해한다는 것은 영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1.1-·-,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바울이 실례를 들가 위하여 그는 다음과 갈은 순전히 가정적인 상황을 제시하고있다는 것이다. 즉: "만일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그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 방언을 모르 개하기 위하여 그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그와 같이 그 방언울 중얼 거림으로써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바울이I,여기서 개인의 사적(私的) 인 기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교회가 아무런 유익도 취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해라는 단어를 결실이 없다는 뜻인 aKap1!0JJ(아칼폰) 이라는 단어로 묘사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으로느하냐로 묶 여전 일들이 여기서 교훈 때문에 분리되었다는 것을 기여하도록 하며, 또한 그것이 그런 방법으로 분리될、수 있다거나 혹은 보통 그렇게 하고 있는 이 유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기여하도록 하자• 이제 그 의미가 분명하여진다. i만일 내가 나도 모르는 말로 기도를 만들어서 한다면, 그리고,성령께서 나 에게 말이 유창하게 흐르도록 하여 주신다면, 나의 혀를 지배하시는 그 영 (靈)자체는 참으로 기도률 하고 있는 것이국분명하다•-그러나 나의 이해력 온 다론 곳을 방황하고 있을 것이며, 여하튼 나는 그기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만일 이해력이 기도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찰못이라고 바 울이 생각하였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키도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과 소원을 아뢰는 일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 는가? 다시 영적기도는 하나님을 경의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대, 다만 입술로부터 나오는 것보다는』 그 기도의 본질과 r조화되는 것이어 야 하며, 또한 영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취하는 휴식이 아니고 그 무엇이 겠는가? 사람들이 입술을움직여 기도할 때에, 만일 마귀가 그 기도하는사 람들이 척철하게 기도하고 있다고믿는 그"생각들을제상에서 그렇게 많이 빼앗아가지스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들이 이 모든-영적 일들에 철저하계 친근 하여졌울 것이다• . .,., ' 프 가톨릭 교도들은 그렇게도 지나치게 어리석어서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 짜못하는 기도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을,분 아니라, 또한 그들도 모르는 말 로 좁삭이고 중얼거리논 무지한 짓을 더 좋아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최 종적 인 뜻' or 충분하다고 말함으로써 져 렬한' 단편적 인_ 궤 변으로 -하나님 을 조롱하고 있다.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한 스페인:사람이 많은 세상적인 걱정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대져변의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 독일말로 하나 님을-저주하였다고 가정해 보면 그때 그가 공식적인 기도를 하는 1한, i또한 참간 동안의 생 각으로 하나님 과. 화해 한다면, 그들은 그것 이 하나님 께 서1 보上 으시는 예배라고石생각한다 .. 1 I ~-I -• ·-. r -’ . , L ,-,, r,-r -'-' -," :, ,, ) ' 、_,-r ~

 

"15.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  어떤 사람이 ‘그렇다면, 기도에는 성령 이 팔요 없다는 말인가?'타고 항의할지도 모를 경우를 대비하여, 바울은, 마음, 곧 이해력이 기도에 따르는 한, 영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그것은 철대 로 팔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에 있어서 영적 은사의 활용을 인정하고 또한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계울러서는 안되 며, 또한 물론 마음이 중십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내가 찬미한다’ 혹은 ‘내가 노태한다'고 하였을 때, 그는 인반적으 로 말하지 않고특별하게 말하고 있는것이다. 왜냐하면 시편은 하나님께 대 한 찬미를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나 갑사로 서 'ffaAAetJJ(프살레 인 ; 찬미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 이 다. 우리 논 기 도할 때에 화나님께 무엇을 구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에 대 하여 갑사를 드린다 •. ' .:z..러나 우리는 이 귀철에서 당시에 찬미하는 습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또한 추축하계 된다. 이것은 또한'적어도 40년동안 혹 은 바울이 죽은 뒤그렇게 서술을 하였던 플리니(Pliny)에의하여 확립되었 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둘이 동이 트기 전에 그리스도에게 찬미를.J드리는 습 관이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나는 바로 초기 부터 그들이 유대인 교회에서 찬미하는 법을 채택하였다는·사실을 의십하지 않는다. -.·~ ~ !Iii :;.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지금까지 바울은, 만일 마음과 목소리가 함께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면 우리 각 개인이 드리는 기도가 무익하고 결실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재 그는 또한 공자기도를 계속 취급하고 있다. 만일 공중의 이익1을 추구하며 또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다른·사람들이 이해하추1 못한다 면, 어떻게 일반 평신도들이 적절하게 그 기도 내용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 결국 그 기도가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포함하고~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내용에 완전후1 일치하지 않으면 그 기 도에 참여할 수가 없다. 동일한 사례가 우리가 하나님께 갑사를 드리는 축 r솔 II 복에도 칙용이 된다. 이제 바울의 말하는 방법이 교역자들 중의 한 사람이 분4명한 목소리로~71 도를 되풀이하거나 혹은 기도를 드탈 때 또 한 사람이 말하는 내용운전 회 중이 그들의 마음으로 따르고 있음을 나타냈는데, 이것은 그 기도자가 기도 를 끝마칠 때까지, 그 기도 내용이 동시에 그곳에 모인 군:중들의 기도도 된 다는 사실을 공적 으로 표명 하기 위 하여 모든 ·사람들이 분명 히 -아멘이 타고 말하고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어 ‘아멘’이라는 말이 우리가 찰」같고 있는 ‘신뢰' ' 혹온 ‘전실' 이타는 말과 갈은 어근에서 왔다는 것은 찰 알려진 사실 이다. 그러므로 그 확증은 우리가 기도에서 확인하는 일분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 말을 오랫동안 사용하여 익숙해쳤 으므로, 그 결과 그것이 그들에게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건하여졌으며, 또 헬라인들이 마치 그것 이 그들의 언어 의 일부인 양 그것을 사용하계 되 었 다. 그러므로 그것온 모든』민족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 다. 바울은 이제, ‘만일 여러분이 공적인 기도에서 무식한 사람들이나 일 반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그들 앞에서 기도한다변, 아무도 여러 분의 기도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며, 여러분의 기도나 강사가 아무런 공~~ 의 미를 갖지 못하고 말 것이다'타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바울은, ‘아무도자신아이해하지 뭇하는데그 기도와 찬양에 그의 ‘아멘’을 추가할」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측시거철하는 그 일을, .가톨릭 교도들은 거룩하고 합법적 인 관례 로 본다. 이 것 은 다만 그들의 놀랄 만한 몰영치 를 나타넬 분이 다• 참 으로:, 그 보다도· 이것온 더 눈에 띄는 실례인데, 사단이 가톨릭 교도들의 제계에서 어떻게 그의공격의 손홍마음대로 옹작이고 있는지 그 방법을 살 펴보도록 하자.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 무식한-사람이 깨닫지 못하고는, 그 사람이 공적 기도의."".내용에 참여할수 없다는 바울의 말 이상 더 분명한 것 이 무엇이겠는가? .껑강자와기도를,공석에서 드릴 때, 모든 사람들이 다:이 해할 수 있는 자국어(自國語) 이외의 다른말로:드려서는 안 된다’는 이 금 지 이상 더 분명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해서는-안 된다고 말하며 또 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그들이 날마다 행하는 때에, 그들이 그를 교육받지 못한;무식한)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하겠는 가? 하나님께서 금하신것을`그들이: 그렇게 철처하계 ‘지킬 때에, 그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그들 가운데서 아무 거리낌없이 어떻게 자신을 즐기고 있는 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국악무도한 강팍성이 그 사실로 인하여 배반 울 당하고 있는데,1:..경고를 받윤후에도구둘은 회개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 으면서, 이와 갈이 십각하계 볼고 겁으루센 타락을 실제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감사하노라" ;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듈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서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악의와 질투에서 방언의 온사를 비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또 그런 의심의 자세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그 모든 것보다. 그 은사를 높게 팡가한다 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여러분은 마치 내가 갖지’ 못한 어떤 것을 과소 평가하는 것과 갈이 내가 말하고 있다는 내용에 의혹을 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가진 방언에 대한 경쟁을 벌인다면 여러분이~가진 방언은 내가 받은 방언과 감히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 좋은 전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나는 덕울 세우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교훈은 그가 자신의영예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높은 평가를 부여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다론 사람들 앞에 나타냄으로써 지나치게 거만하다는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사로서 모두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자만을 겸손으로 부드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차가 위하여~~~~~" ; . 이 다섯 마리 말이라는 말이 다섯 문장을 의미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과장 어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원하기만 한다면, 방언으로 말하고, 또 자신을 현란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스스로 절제하고, 또한 그가 받은 온사의 참 목적을 위하여 조용히 덕을 세우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사실은 다만 텅빈 껍데기 뿐인데도 뭔가 다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급급해 하는 사람들의 우쭙거리는 야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고 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의 권위는 그런 무익한 일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하는 영향력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