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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8)

1. 성경 (고전 15:1 ~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1)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2)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3)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4)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5)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6)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7)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8)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9)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0)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1)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바울은 이제 다론 주제, 곧 부활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이 어떤 불신의 사람들로 인하여 혼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후의 날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것만을 의심하는것인지 아니면 또한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서까지 하는 것 인지 그점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관련하여 당시에 많은 잘못된 견해들이 횡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철학자들온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라고 논쟁을 하였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 문제는 그들의 논쟁 주제의 대상에 들지 않았다. 다시, 사두개인들은 더 야비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현세(現世)만으로 인생이 종결된다고 얻었으며, 또 그 이외에도,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다만 호흡뿐이며, 어떤 물질도 개입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 당시에 미래의 삶에 대한 어떤 확신을 포기하는 그런 어리석은 단계에 이르렀는지, 혹은 그들이 단순히 육체의 부활만을 부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이미 내 가 말한 대로), 그러나 바울의 논증을 보면 그들이 완전히 사두게인들의 헛소리에 현혹되고 있음을 암시하는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그가 '죽은 자에게 세례를 행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왜 우리가 매 시간마다 위험에 직면 하겠느냐?' 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말할 때, 다음과 갈은 철학자들의 시구(詩句), 곧  ‘우리의 영혼이 죽음 후에 남아 있기 때문에'라는 말을 따라 대답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 15장에 나타난 바울의 전체 논증이 우리의 영혼의.불멸성에 대하여-말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잘못이 실제적으로 무엇인가를 미지수로 남겨놓는 한, 나는 바울의 말이 육체의 부활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적용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일단 그것이 결정되도록 하고,  또한 그가 그것을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章) 에서는 그 이의의 아무것도 없다. 그라나 Hymenaeus와 Philetus의 이교(異敎; impielas)가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까지 침투하여 들어 갔을까?  이 두 사람은 부활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장차 미래에는 부활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들과·갈은 광신자들이 또한 있거나, 혹은 어떤 사람은 자신들을 자유 사상가들(Libertines)이라고 부르는 다른 마귀들의 영향아래 있는 마귀들이라고 부를것아다; 그러나 그들이 미래의 그들의 부활의 소망을 절단해버린 어떤 상상적인 관념에 잘뭇 인도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그리고 자유 사상가 들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참 약속을 철폐함으로써 어떤 상징적인 종류의 부활을 상상함으로써 그들이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나에게는 보여진다.

 

그  상황이 어짜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확실히 두려운 본보기를 우리에게 재시하여 주며, 또한 경고의 본질에 있어서 매우 특출한 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런 비열한 잘못된 견해를 깨닫고는 즉시 그 교사를 포기한다는 그 무엇을 분명히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교회에서 사두개인들이 공공연하게 영혼의 기본적인 본질에 있어서 인간이 금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며 또한 동물들이 갖는 이상의 어떤 행복을 인간이 갖지 못한다고 공언하는 방약무인한 행동을 취할 때, 거기에  거기에 놀랄 만한 무손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와 갈은 우매함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사단의 기만적인 간계에 끌려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왜 바울이 다론 어떤 문제들보다도·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를 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으로 연기하고 미루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그들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어느 정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상실하였던 그의 영향력  곧 그의 권위를 회복할 때까지 또 그가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꺽고, 그들이 스스로 바울의 교훈에 따르게 될 때까지 그런 중요한 언급을 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희로 알게 하노니" ;. 여기서 ‘알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들이 이미 전에 들어서 ’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다시 깨우쳐 준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것과 갈다. 죽 ‘나와 갈이 새로운 눈으로 너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복음을 바라 보아라 너희들은 벌써 이전에 그 바론 길에서 떠나 잘못되어 있지 않느냐.  바울은 어떤 사람이 그가 좋아하는 견해를 취임하였다가도 그것을 버리며, 자신의 구원과는 이무 상관이 없이, ·다론 주제들을 마음대로 취하는 것이 제대로 될 일이라고 그들이 생각하지·않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으로서의 부활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부연하고 있는데 마치 그가 ‘너희들은 나를 사도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 않니?  그렇다면 내 자신이 너희들에게 가르친 것이 그 말 속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갈다. 두번 째의 부연은 그들이 이미 그것을 믿었다는 효과에 대한 것인데, 그래서, 만일 그들이 그 반대되는 것을 확신하게 되도록 그들 자신을 지금 용납한다면, 그들은 변덕스러운 존재로 비난은 받을 것이다. 세번째 부연은 이제까지 그들이 확고하고 혼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믿음을 지켜 왔다는 효과에 대한 것인데, 그 혼들리지 않는 결심은 옛날에 그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연하는 설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확하게 그들의 구원이 내포되어 있는 바로 이 일에 들어있다고 바울이 선포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결론은, 만일 부활이 삭재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그들에게 종교도 남아 있지 않고, 믿음의 확신도 남지 않으며, 또한 사실상 믿음이란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둘은 ‘선 것이라’는 말을 다론 의미, 곧 유지된다, 혹은 보존된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가 한 해석이 사실에 더 가깝다.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 이 두개의 조건절이 그들 안에서 날카로운 자극이 되고 있다. 먼저 그는 그들의 무관심과 변덕을 정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그것과 같은 갑작스런 붕괴는 그들이 배운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중거이거나, 혹온 그들의 지식이 그렇게 빨리 사라졌을 때에 그것은 부스러지기 쉬운 연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귀절에서 그는 만일 그들이 이 믿음의 ·근본적인 원리를 지속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온 그들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호홉으로만 고백하였을 것이리고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  이제 바울은 그가 부활에 대하여 설교함으로써 야마보여준 내용을 지치하고 있으며, 또한참으로 복을에 있어서,중요하고군본적인 요소들중의 하나로서 지지하고 있다~'먼 처'라고 그가 말하는 것온 건물을 세울 때우리가 일반적으로 놓은 기초 공 사와 갈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그가 받온 것이외의·것은 아무것도 전하자 않았다는 것을 덧붙임우로써 그의 설교의 권위를 강화하고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알려준 것만을 단순히 자세히 설명하는것만이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말씀온 문맥에 비추어 해설되어야 한다 . 이제 주님으로부터 밭은 것만을 공적으로 알리는 것이 사도의 책임 이다. 그래 서 사도는 직접적으로(de matJu, , quod aiunJ,, in manum)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교회에 전하여 줄(administret)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틀 위하여 죽으시고" ;  이제 당신온 어디에서부터 그 가 ,:::J-것을 받았는지 그 장소를-더욱분명하게 알 수 있을?것이다. 왜냐하만 성경울 증거로써 인용하고있기 때문이다. 먼저-그는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 여 언급하고, 또 참으로 그의 장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언급을 하고 있는 데, 그것온 준~~1~서=죽을~'11::련~£11-!았어~~우리-인간과뇨꼼=같았닥~결론을 우~잃~복길부브넓의며, 그와동일한 일이 부활에 있어서도 적용된 단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천히 우리와 함께 죽으셨으므로, 우리는그와?함께 부활할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던 죽음의 실체는,' 또한 그위 장사를 묘사함으로써 더욱 분명하여진다. 

 

다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 여러 곳에서 예언되었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다니엘 9장 26절과 시편 22편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震격 릎~하~ n타는 것 온' 말하자면, 운-리를 최의욕츠카터-T-원하7b윗 굴모국님께석~현 저주를 강당하신一것이었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하여-.:z.리 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이니라, 우리의 최를 대속(代讀)하기 위한 제물로써 그가 죽으신 것 이 다. 그가 속최 의 형 벌 을 받으십 으로 (poena satisfactoria)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한 사람이 정최(定罪) 받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무죄 석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바울은 이와 비슷한 말을 로마서 4장 25절에서도 여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거기서는 부활이 다른 효력 을 발생하는데, 바로 그 속에서 '그것어 운러에게-의-(義)를_가져도다-준다교 그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죄가 그라스도의 죽음으로_말미암아 소멸되듯이 그 부활로 인하여 또한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구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게 되는가를 알고 또한 그의 부활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계 될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이 구별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다른 귀절들이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언급할 때, 우리는 그런 실례들에서 그의 부활이 그의 죽음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따로 따로 언급되었을 때는 우리의 구원의 시작(initium)이,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그의--죽음에 있으며, 그 완성 (comp/ementum)아 그의 부활에 있음을 안다.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  이제 바울은 목격자들 (auro'1CraS : 아우토프타스)을 실례로 들고 있는데, 누가복음 1장 2철에 나타 난 것처럼, 성경에 예언될 것이 이루어전 것을 본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완전한 목록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여인들을 생략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누구보다도 먼저 베드로에게 m나타나셨 다고 그가 말하였을 때, 우리는 베드로가 다른 모든 사람들 중에 제 1인자 였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는 마가의 진술(막 16 : 9)은 어떤 면으로든 그것과· 모순되는 것 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롯 유다가 죽은 후, 그들이 열 한 사람 남아 있을 때에 주님이 열 두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어떻게 그_가 말할 수 있을까? 크리소스몸은 이 사건이 맛디아가 유다 대신 들어온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다론 사 람들은 마치 그것을 찰못인 것처럼, 그 묘사를 고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 중 한 사람이 비록 그 목록에서 빠쳤을지타도 그들 열 두 사람이 떨어져 있게 된 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배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그 말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데 대하여 우리가 깝짝 놀랄 만한 충져올 받는 것온 아니다. 로마에 있던 사람들의 몸이 갈온 이유로 백명이나 부름 을 받았다. 비록 실제로는 102명이었지만, 이름이 거기에 또한 기록되어 있 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 두 사람이 여기서는 선택받은사도들을 의미한 다고 다만 받아둘여야 한다: 주님께서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천히,‘나타내 보이셨을 때, 예 루살렘에 그란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을 가능성을 제의하고는,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때가 아주 정확하지 않다. 누가 (눅 24:33)는 열 한사람과 합께 있었던 제자들에 대하여 일반져으로 말하고 있 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는가에 대하여서는 밝히 지 않고 있냐 크리소스톰은 그것이 승천을 가르치는 것이라고하며, t1ra브CJ) (에파노)를 ‘위로'타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에게 주님께서 친히 야고보에게·나타나셨다는사실에 비추어 볼7 때 이것은 분명히 승천 이 후의 사건임이 룰림없다. 모든 사도들이라는 말을, 나는 열 두 제자듈분만 아니타, 주님께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임하신 제자들을 모두 말한다고.나는 이해한다. 우리 주님 께서 그의 부활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시어 그,사실을 그 목격자들이 반 복하여 증거 하도록 하시 기 를 원하셨다는 사실로 미 루어 보아서 , 우리 논 주님 의 부활을 더 확실한,사실로 우리 마음 속에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 도 바울이 주님께서 많은 사람둘에게 1냐타나셨다는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였으므로, 그는 이것이. '상칭적인’ 부활이 아니라, 순수하고 육체적(naturalem)인 부활이었다는.그런 방법으로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 면 우리의 눈이 ‘영적'인 부활의 목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바울 온 이제 자신을,다른 증인들 중의 한사람으로 포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_에게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셨기 때문 이다. 이 나타나십이 환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데 또한 귀중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바울이 사도행전 26장 8철 에서 사용한 증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권위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서 가장 큰 가능성의 중요성을 기쳐야 히기 때문에, 그는 어올터서 그가 대단히 좋아하논 어떤 것을 삽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비록 그가 대단한선언을 천히 하고 있지만 그 것을 그런 방법으로 연화(軟化)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동시에 대단히 겸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o] r누구인데, 우리가 당신 을 믿어야 하느냐?'타고 말하면서 도전한다떤, 그는 거리낌없이 그 자신 아무가치성을 시인할 것이다. 참으로 먼처, 그는 자신을 조숙한,어린 아이 에 비교하고 있으며, 또(나의 생각에는) 그것이 그의 갑작스런 회개에 기 인한 것임을 나타낸다.

 

어린 아이들은 적당한 시일이 지나 완전한 유아로서 자라기까지 모태(母胎)에 있으며, 자란 후에야 출생하게-된다. 우리 주님께 서 도 사도들을 뽑으시 고 그들을 양육하시 며 또한 사도로 그들을 완전히 준 비시키시기까지 이 계획에 따라 그들을 형성하는 과정왕•' 취하셨다. 그런데 다론 한편 바울은 생 명 이 적 당하게 성 장할 충분한 시 간적 , 여 유도 갖기 겨i에 모태에서 나온 것이다. --··;I :.:어떤 사람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말을 -'아바지가 죽은 후에 태어난자'(遺腹子―역자 주)로 해석한다. 그러나 전자(前者)가一훨씬 더 적 철하냐 왜냐하면 그가 한 순간에 생겨서 태어났고, 또 장성한 사람이 되었 기 때문이다(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구렇다는 뜻아다―역자주:,.). :그 이외에 도 이 유산(流産)은 바울의경우,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산적으로, 한걸 음씩 자라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분명하게 실감하게 하였다~ I , , •-- I , ,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  내가 하나남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의 원수들이 바울에 대한 그의 신뢰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하였는지, 혹은 바울 자신이 자유 의지로 완전히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하여 자신을·준비하고 심지어 기쁘게 자신을 낮추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온 의심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이 귀절에서 그가 그에게 반 도전하는 악한 고소(告訴)들에 직면 하려고 생각하였을 것임을 상상한다. 고린도에는 그에게 도전하여 악하게 말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침식하는 것을 그들의 일거리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앞에 나타난 많은 귀절에서 추론할 수있고, 또한 그가 조금 후에 소개하는·비교에서 추론할 수 있는 사실온, 만일 그가 어떤 사람들의 사악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도록 강요 받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였을지 모른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대로 나를 모욕하여라. 나는 티끌보다 더 비천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이 더욱 뚜렸하게 나타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 되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겠다.

 

그러므로 나를 지극히 작은 사도로 여겨라 참으로 나는 내가 그런 신분을 가질 만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신분에 이를만한 무슨 공로를 가지고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상 너희둘이 나의 가치를결정 지을 팔요가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와갈은 사람에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었지만, 그러나 그의 은혜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었다. 이것을 종합하면 이런 내용이 된댜 죽 바울은 자신이 비천하계 되는 것 _o] 어 떤 1 방면으로든지 복음전파에 방해 만 되 지 않는다면, 또 그의 가르침 을 조금이 타도 손상하지 만 않는다면, 그가 모든 사람둘 중에 서 가장 비 천한 사· 람이 될지라도,.사실상 거의 보찰것없는 존재가 -될지타도 그는 그것을 만 대하지 않는다 .. 만일 그가 받은 은혜 때문에 그의 사도성을 칭찬한다면, 그. 논 그 자신에 관하여서는 이주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은 그 의은혜가 망각 속에 묻히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그렇게 특출한 은혜를 주시는 영예를 주신 것이 아니며, 바울의 ‘사도성이 뛰어나고 가장 귀한 것 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0. 그러나 니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 논 어떤 선에 대해서라도 전적으로책임을 지도록 우리가 그렇게-하지 않을 까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대하는 자유의지를 가전 사람들은 이 말을, 마치 바울이 그 자신의 노력으로서-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은혜 를 아무 목져 없이 그가 방해하려고 하여 바울이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을 그둡의 취향에 맞도록 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은혜가쉽E 명히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쳤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은혜 의 올바론 사용은 뭔가 인간이 그 자신 속에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며, 또 그 능력을 참자도록 하면서 그것을 방해하는 책임은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 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의 이 말이 그들의 찰못된 견해에 어떤 지원을 보내 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이 귀철에서 그가 마치 하나님과는 무 관하게 그 자신이칭송 받을 만한 어떤 일을 이루기나 한 것처럽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의것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 공연한 자랑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면서 실재상으로는 그것이 지원을 받지 못하는 모든 말인데, 그는 그곳에 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뇨있는:것이라r고 말한다. 마 지막으로, 아 말이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잘못 ·사용하고~;'있는 것이 아니 타는 사실윤 보여주고 있다고 인정하였으며, 또한그것이 그 자신의 게으름 으로 인하여 무용한 것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1~테문에 우티가 칭의 률 받지 못하는 것이타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우비자이에 찬양을 받을 몫운 할당한다떤 그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b. ·01유든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을\분만 /아니라,{도한 그렇게 할 의지를 주셨으며 우리의 노력에 대한 대가도 주셨다는 그런 사실 에 비 추어 볼 때 그렇 다•

 

"더 많이" ; 어떤사람들은 이것이, 바울을 낮층으로써 짜~J.들을 내세우고 또 한 그들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는 그런 허풍장이들에게7 져;용되는_:것으로 간 주한다. 그 아유는 어쨌든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I바울이기 다른 사도 들과 경쟁하기를 원하기에는척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타는 것이다. 그 러나 바울이 자신을 다른 사도들에게 비교할 때에, 그는〈우리가」같타디아서 1장 11절에서 보는 것처 럼, 그의 명예를 하락시키기 위하여 1~ 다론 사도 들을 대결시키려고 하는 불경건한 자들 때문에 그가:그렇게 ·하고0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그가 그 자신의 노력을 다론 사도들의 그것보댜~bf 높이 평가 할 때에 그가 그 사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그리 고 그가 많은 고생을 하고 많은 시험을견디는 체험을 하면서집또 그가누 릴수있는자유를 절제하고끊임없이 모든 위험에 직면할분 야니라, 또한 주님께서 더 콘 성공으로 그의 노력에 왕관을 씌워중으로써, ;그가 다론 사 도둘보다 다상위(上位)에 섰다는, 것은참으로1사살이다 •.. 그러므로 나는 ‘수고하였다’는 말을 그의 수고에 대하여 나타나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할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르라" ;. 관계사를생략함으 로써 벌게이트경(經)은 그 사람둘이 잘못되는 기회를 가진 헬라어를 모론다 고 하였다. 벌게이트경이 그것을 ‘내가 아니요·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 고 번역한 까닭에 그들이 다만 그렇게 된 믿음의 철반만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계 되었으며, 한편으로 다른 나머지 반은 사람에게 돌리고 있다 •. 그 러므로그들은 바울이 은혜와의 상호 협력이 없이 아무것도、할 수 없으므로 바울이 그 자신의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이해하고.:있다 •. 그러나동 시에 그 자신의 자유 의지와 그 자신의 노력아·각각각 그 분야의 여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온 아주 다른 주목을 끌었다. 왜냐하면 뭔가 그에게 적절한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것을 고쳤고 또 그것을 전적 으로 하나님께 전가하였다. 전적으로 나는 주장하고, 그것의 일부만을 그렇 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이나 그렇게 한것처럼 그가 보일 수 있는 것 온 사실상 전적으로 은혜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 운 귀절이다. 인간의 교만을 티끌과 갈은 비천한 위치로 끌어 내릴 수 있기 때문일 분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온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어떤 선의 근원으로 만든 것이 잘못이었던 것같이, 바울은 그가 말한 것을 수정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QJ_의 효과적인 원인이 된다고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다만 겸손을 가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는 그. 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그가 실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또 그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선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값 없이 주신 것이타는 사실을 알 아야 하며, 우리가` 행하는 유일한 선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며, 二그것은·우리 자신으로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 니타, 우리가 영향을 받을 때에 곧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성령 의 지도와 영향을 받을 때에 비로소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 ;••• 바울은 자신을 다른'나 머지 사도들과 비교하면서, 이제 그는 자신을 그들과 나란히, 그리고'그들 • 율 자신과 나란히 세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설교 주제에 대하여 그 들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갈다. "나는 더 이상 나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가 가르치는 데 있어서논 하나이며, 또 지금도 이런 일들에 다대하여 가르치 기를 계속하고 있다.'케뤼스소멘 ; 우리가 설교하다는, 뜻)이라 는 동사가 현재 시제이므로, 계속적인 행위를 가리키고 있으며, 혹은 가르 치기를 계속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그 진리가 우리가 말하는 것과 다르다면 그때는 우리의 사도직이 종결을 짓거나 또 겨우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말한 것을 여러분이 믿었으므로 여러분의 종교 또한 붕괴되고 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