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15:12 ~ 1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2)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3)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4)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5)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6)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7)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8)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19)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2~l3절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 바울은 이제 우리 모두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기원되는 것임을 증거하기 시작한다. 서로 관계가 있고 상호 이익이 되는 결과는 한편과 또 다론 한편으로부터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쌍방이 모두 확정적이며 또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로’ 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다음과 갈이 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장차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우리로 부터 그리스도에게로'라고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다음과 갈은 결과가 나타 날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부활한다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도 부활하신다. 만일 우리가 부활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못하신다. 이제 그들을 정리하도록 하자.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라는 말씀으로부터 이끌어 낸 논증 뒤에 오는 추론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죽거나 혹은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우리의 본질(~ypostasis)이며, 또 주님 안에서 효력이 발생하는 것온 또한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다론 한편 부정적인 형태로는 그것이 이렇게 된다. 그 이외의 점에서는 다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이유와 목적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결과는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리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논증으르부터 이끌어온 앞에 나온 결론 뒤에 나타나는 추론은, ‘부활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근원으로부터 온 것이다. 아담안에서 우리는 죽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갈은 결론을 얻게 된다. 즉 그의 부활이 우리의 기초이므로 그래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거된다면, 우리를 위하여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결론 뒤에 온 추론은 이미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오직 우리를 위하여 다시 부활하셨으므로 만일 거기에 우리를 위한 은혜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을 것이다.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롯하셨으면……" ; 이 말씀은 그것이 단순히 어떤 거짓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철두 철미하계 무가치하고 속이는 것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망에 사로잡힌 바 되셨다면, 또 그가·멸절되어 버렸다면 무엇이 남겠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의 저주로 인하여 멸망을 받았다면, 마지막으로 그가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한마디로 일단 근본적인 원리가 무너져버리면 그 나머지 모든 것은 무용하게 되고 말 것이다. 갈은 이유로 그는 그들의 믿음이 헛 것이 될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생명 의 소망이 사라지는 때에 어떻게 믿음의 확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망의 근거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죽음에 완전히 정복당한 사람온 다른 사람들을 구원 할 효력을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 복음의 .주요한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실을 기여하도록 하자. 그래서 만일 우리가 복음 안에서 선하고 정규적인 발전을 이루기를 원한다만 혹은 오히려 만일 우리가 무력하고 결실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 그가 조금 전에 자세하게 설명한 다론 나쁜 결과는, 그것이 우리에게 관계되는 한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믿음이 사라지고 만일 복음의 전체 교훈이 무용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며; 우리는 모든 구원의 소망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전령사로 위임받은 사도들이 그들의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는 자들로 판명된다면 이것은 사소한 일이거나 간단히 웃어 넘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고, 또 하나님께서 가장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습올 보여줄 것이기 때 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라는 귀절을 두 가지 방법으로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즉 그 하나는 그들이 그것을 단순한 핑계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하여 그들이 증거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들이 거짓말장이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두번째 경우가 나에게는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다른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또 바울도 이미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정된다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그가 그의 선동자로 보낸 증인들 앞에서 거짓말장이의 죄책을 지게 될 것임을 바울은 경고 하고 있다. 그것이 덧붙여전 이유가 역시 앞에서 말한 내용과 이주 잘 일치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시작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그것에서 악한 주장을 그들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론 사람들이 Kara(카타)라는 전치사를 다론 방법으로 실명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벌계이트경(經)은 그것을 adversus, 곧 ~~~에 대하여, ~~~에 반대하여' (against)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반하여, 에라스무스는 그것을 de, 곧 ‘…에 관하여 ' (concerning)라고 풀이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헬라어로 '아포', 다시 말하면 ‘……으로부터 '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남에게는 그 뜻이 사도 바울의 의도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서 인간의 명예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말한 대로), 그들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거짓말에 대한 책임자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讀罪)하시어, 우리의 죄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범죄하고 싶은 생각이 더 이상 우리 속에 있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으심으로 인하여 죽음의 권세와 마귀를 이기셨을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부활이 없다면, 죄의 횡포가 다시 새롭게 살아날 것이다.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거되어 버린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용한 것이며, 또한 기독교는 다만 사기일 뿐임을 그가 증명하기를 원하였으므로, 그는 생명이 그들의 죄 속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죽음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의 실례를 분명히 제시하였으므로, 이제 그는 그들에 대한 설명을 소개하고 있다.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죽은 자들이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미 죽은 우리의형제들은 무료로 그리스도의 믿음 속에서 살았다.,그러나 만일 영혼이 그 본질상 불멸이라고 인정된다면, 이 추론은·얼핏 보기에 약화되는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살아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항의를 받을 수 있다. 어떤 환상가들은 이 귀절에서 죽음과 부활사이의 중간기에는 생명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의 헛소리률 논박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비록 죽은 자들의 영혼이 지금 살아선 안식의 축복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행복과 위로의 완성은 부활에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것이 그들에게 적절하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천국을 소유 하도록 소환될 날을 기다릴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 날이 곧 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의 소망이 헛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 여기에 다른 조화가 안되는 상황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그 은혜가 죽을 때 멸망하고 마는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믿을 때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헛되게 보낼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이 더 견고하고 더 바람직한 입장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전혀 믿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 것이다. '다만 금생(今生)뿐'인 것을 믿는 것온 여기서 , 그 은혜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기원된다는 것에 한정하는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더 이상 이 현세의 한계 이상을 바라 본다든지 그이상으로 뻗쳐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귀절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Hymenaeus와 Philetus가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최종적인 은혜는 이 세상에사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 뿐이라고 당시에 주장한 것과 갈온 그런 상징적 부활에 대한 어떤 잘뭇되고 환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었음을 더욱 분명하계 하여주고 있다.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며, 또한 말하자면 부활이 모든 우리의 축복의 최 절정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죽은 후의 소망에 대한 어떤 좋은 것도 남겨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이 귀 절은 우리의 영혼이 부활 때까지 우리의 육신과 함께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헛소리에 전혀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로부터 분리된 후에 살기를 계속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반대하고 만일 부활이 폐하여진다면, 우리의 영혼이 어떤 종류의 행복이 남을 것이라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바울이 극락(Elysian fields)과 갈은 헛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종류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소망을 완전히 최후의 심판날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없는 사실로 그가 받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영혼들도 역시 갈은 기대 속에서 분명히 즐거위하고 있으며, 또한 갈은 이유로, 만일 그런 확신이 우리를 거짓으로 속이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고 말 것아다.
그러나 왜 그는 마치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 불신자들의 운명보다 더 비참한 것처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볼쌍한 자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솔로몬이 전도서 9장 2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일반이로다. "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모두가 틀림없이 비슷한 재난을 당하게 되며, 또 같은 좌절과 갈은 불운을 체험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더 고통을 받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으며; ·특별히 바울 당시에 더 그러하였던 것은 역시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 첫째 이유는 주님께서 여시 자주 불신자들을 그의 채찍으로 벌할 수 있으시고 또한 그의 심판을 불신자들에게 내리실 수 있는 반면에, 주님은 특별히 그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시는데,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가하는 것과논 다론 방법으로 그렇게 하신다.
주님은 첫째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까닭에 그렇게 하시고, 두번째로 그들을 인내하도록 연단하시고, 그들의 순종을 시험하시며, 또 한걸음씩, 한걸음씩, 십자가를 가까이 하며 참으로 새롭게 중생시키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어쨌든간에 다음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관계되는 한 언제나 진실을 안고 있다. 즉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밴전 4 : 17), 다시 “우리가……도살할 양갈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시 44 : 22). 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 : 3). 한편 불신자들의 환경은 일반작으로 더욱 부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살할 날을 위하여 잘 먹이는 돼지와 갈이 그들을 살찌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번째 이유는 신자(信者)들이 모든 물질의 풍요와 모든 좋은 것을 풍부하게 소유하였을지라도, 그들은 풍요로 인하여 방탕하지 않으며 또 그것을 아무 부담없이 탐식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온 불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세상을 즐기지 않으며, 그들온 근심하는 마음으로, 항상 단식하는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이유의 일부는 그둘이 자신들의 연약합을 알기 때문이며 , 또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내세 (來世)와 생활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다론 한편 불신자들은 완전히 이 현세의 기쁨에 도취되어 거기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앞에서 말한 특별히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더 어려웠다는 세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당시에는 매우 증오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써 아무도 자신을 죽음의 위험에 내놓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 충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만일 그들의 보중이 이 세상에 국한된 것 으로 끝났다면 그들이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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