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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1. 성경 (고전 15:20~33)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0)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1)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2)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3)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4)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5)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6)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7)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8)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29)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0)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1)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2)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3)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축은 자 가운데서~~~~~첫 열매가 되셨도다." ; 만일 우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한다면, 모든 것 이 어떻게 전도되고 말 것인가를 보여 주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을 전에 그가 충분히 증거한 것을 의당한 것으로 여기며, 또한 율법 아래에서의 고대 관습으로부터 취하여 온(그렇게 보인다) 은유인,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다고 덧붙이고 있다. 일년 중의 수확을 첫 열매로 바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역시 우리 모두에게 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며, 또는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첫 열매의 수확이 있었다고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귀절을 이런  의미, 곧 죽은 나머지 사람들도 주님을 따를 것이다'고 이해하고 싶으며, 같은 방법으로 또한 모든 수확이 첫 열매를 따른다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귀절에서 더 확증되어 나타난다. 

 

"21 ~ 22절 시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얻으라라." ;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한편, 그리스도께서 다만 독립적인 존재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 아님을 또한 증거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대조를 통하여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죽음이 뭔가 생래적(生來的)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의 대가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 자신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함께 죽게 한 것과 같이,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주님은 이담 안에서 멸망 당하였던 모든 것을 회복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 논증의 본질에 우리는 주의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논쟁점을 말의 상징의 효용이나 실례(實例)의 사용법과 결합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반대적인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반대 원인에 의뢰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은 아담에게 있으며, 또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그의 직무인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또한 그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기초(hypostasis)와 보증이 되고 있다. 또한 아담이 죽음의 원조(元祖)가 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기원(起源)이 되고 있다. 로마서 제 5장에서 그는 같은 대조를 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런 차이성을 가지고 있다. 즉 로마서에서는 영적 생명과, 영적 죽음을 취급하고 있고, 여기서의 논쟁점은 영적 생명의 상(賞)인 육체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  바울은 어떤 사람이 부활할 것인가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을 그와 함께 끌어올린다면, 왜 우리는 이것에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을지라도 우리는 그 대신에 무덤에서 썩는다.' 바울의 대답온 하나님께서 사물을 질서있게 하는 다른 방법을 지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첫 열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의 부활의 시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 임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아직 나타나시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생명은 주님과 함께 아직 감취어져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날을, 예상하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일 것이다.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그 시간이 우리의 새로운 생활을 원숙하게 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의 조급함에 제어를 걸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끊임없이 딩굴고 있는 험악한 바다와 같으며, 또한 우리의 운명이 매우 불확실하고 오히려 고통 투성이며, 또한 모든 것이 돌연히 변화하기 쉬운 까닭에 약한 사람들이 이런 일들로 인하여 흥분의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것이 그 때에는 질서있게 되리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그 날에 기울이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 마지막 날이 올텐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방향의 목적지이며, 우리의 평화로운 안식처일 뿐 아니라, 또한 모든 변화가 다 사라진 그런 상태일 것이다. 동시에 그는 경기하는 도중에 우리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부적당한 일이므로,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하나님께 아버지 바칠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조금 뒤에 설명될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말할 때,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곧 그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거나, 혹은 다론 한 가지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설명의 방법으로써 덧붙여전 것이다. 후자(後者)의 경우  '~~~ 도’ 라는 접속사는 '즉, 바꾸어 말하자면' 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전자(前者) 에 관한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人性)에 관계되는 한,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말함으로써 부당하거나 이상스런 점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모든 능력을 멸하시고."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반대되는 모든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이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라는 다음 귀절을 참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은 그가 이 귀절 초두에서 말하였던,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끝 날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께 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귀절을 이 사람들이 암시하는 방법으로 제한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실명하며 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합법적인 능력이라는 말로 이해한다. 먼저 선지자들은 달과 태양이 어두워지고(사 13 : 10, 겔 32 : 7),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뚜렷하게 나타나실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의 통치 이래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을지라도, 그러나 마지막 날이 올 때까지는 그것이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모든 승귀(昇貴)의 사물들이 마지막이 될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만이 홀로 찬란하계 빛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권세를 가진 모든 지상적인 통치와 신분들이 여기서 우리가 아는 것같이 다만 생명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며,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의 완전한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차례로, 그들이 일시적인 것들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세상에 말세가 올 것처럼, 또한 정치와 장관직, 법률, 질서의 구별, 영예의 차이나 또 모든 그런 종류의 일들이 그렇게 종말을 맞을 것이다.  종이 더 이상 주인과 구별되지 않을 것이며, 왕이 평민들과, 또한 장관이 평범한 시민들과 다를 점이 없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때에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그리고 교역자들의 직무에, 또한 교회에서의 감독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도 끝날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천사의 손을 통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 홀로 친히 그의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물론 그때에도 천사는 계속 존재할 것이며, 또한 그들은 그들의 우월성 (excelentia)을 그대로 보유할 것이다. 물론 의 (義)는 역시 찬란히 빛날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해당하는 은혜를 분수껏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이름과 하나님의 명령으로 행사하고 있는 지배력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감독들과 교사들, 그리고 선지자들은 그들의 역할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들이 지금 이행하고 있는 직무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모든 정사(政事)와 모든 권세와 능력은 이 귀절에서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세가지 단어들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각자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 그라스도께서 아직 모든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지 않은 까닭에 모든 것이 그 자체의 참된 모습과 또한 평화스러운 상태로 회복될 때까지 동시에 그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가 아직 오자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게 될 때까지, 그가 받은 통치권을 양도하지 않았다는 조건 아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오른 편에 앉히셨기 때문에 그것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부활이 그렇게 지연됨으로 인하여서 성도들이 초조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신자(信者)들을 위 한 위로로 또한 말씀 되어진 것이다.  이 귀절은 시편 110편 1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시편의 단순하고 자연적인 의미가 요구하는 것보다도 '~ .... ,까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더 세밀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절에서 성령이 나타내고 있는데, 종말 이후에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라는 문제보다는 종말이 오기 전에 무손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성령이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딥은: 그리스도께서 시편에 그것이 미리 예언되었기 때문에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직 그의 원수들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하나님께 나라를 바칠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중거할 목적으로, 다만 시편의 증거들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아울러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라고 말하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은유적인 표현 대신에, 그는 간단한 낱말인 왕노릇하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 우리논 아직도 많은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으며, 강팍하게도 그의 통치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마지막으로 정복 될 원수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계속 그의 아버지의 나라의 행정관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실재로 이루어지기 전에 있을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신자(信者)들은 용기를 가지고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미 멀망되었고, 또는 하여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그의 부활로 인하여, 그리고 생명의 완성인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이 이미 멸망을 당했는데, 죽음이 맨 나중에 멀망 받을 원수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죽음이 선지자들에게 더 이상 숙명적일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멸망되었지만, 그 죽음이 그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안 되는 그란 방법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생명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직 죽을 운명을 지닌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안 있는 죽음의 ‘요소’ 는 미래의 어느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아직 이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씨로 다시 '거듭났지만, 그러나 우리는 아직 원숙하게 성장한(perfectionem)'것은 아니다; 그 본질을 그 직유로 요약한다면 죽음의 칼이 마음을 관통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칼의 날이 무디다. 물론, 그것이 지금도 상처를 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어떤 치명적인 위험성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었다. 그러나 죽어있는 상태 속에서 생명으로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로마서 6장 12~14절에서 죄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 곧 죽음이 틀림없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지배할 통치권을 갖지 못한다는 그런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27.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사람들은 이 단편적인 증거가 시편 8편 7절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통치의 본질을 살펴 봄으로써 도달하게 된 결론이라고 이것을 말함으로써 그 속에 아무런 부당성이 없으므로 나도 이 견해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더 광범위하게 용인 된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시편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바울은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시편에, "하나님이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나이다”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선지자가 시편에서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말하고 있다. 둘째는 우리가 창세기 2장 19절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만물’ 이라는 말로써 다만 은혜의 목적을 우리의 육적인 존재에 봉사하게 하는 그런 사물들을 의미하고 있다. 첫째 난제는 아주 쉽게 풀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며 (골 1 : 15),  또한 만유(萬有)의 후사이시다(히 1 : 2). 하나님 아버지는 인류에게 주권을 가지고 간섭하는 그런 방법으로 `만물을 사용 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말하자면, 직접적인 주도권은 그리스도의 손에 있다는 뜻이다. 

 

더구나 우리는 아담이 그에게 부여된 권리를 잃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근 저(根低)가 저주를 받았으며,,모든 것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가 잃은 것은 다만 그리스도 한분으로 회복될 수 있가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물을 특별히 그리스도의 위(位)에 적용하도록 그리스도의 발 이래 두셨다는 이 진술에는 모든 명분이 둘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들이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의 상속자둘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이외의 누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겠는가?  

 

다음은 두번째 난제에 대한 해석이다. 참으로 선지자는 공중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들의 짐승들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류의 통치권이 나타나 보이고, 또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반적인 설명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된 모든 것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속된 사물은 그 통치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상태가 그 주인의 기호를 닮고 그에게 부합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동물을 음식물로. 요구하지 않으시며, 혹은 다른 피조물들도 전혀 그에게 필요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만물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도록 만물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그의 통치의 일원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결과를 피조물의 형상 속에서 분명히 본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들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그것으로부터 야기된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더 광법위한 적용을 가진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다. 

 

"만물을 저의 이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 바울은 두 가지 점을 철저히 납득시키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세계를 다스리는 그의 통치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기 전에,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 하였음이 틀림없다.

(2) 하나님 아버지는 주요한 통치권을 그리스도이신 아둘이 갖도록 하기 위하여 만물의 통치권을 아들에게 주셨다. 첫째의 결과로써 최후의 심판의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의 것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중재인이 되고 있어서, 우리를 마지막에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 이다. 그래서 바울은 곧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28절)라는 결론을 내리고있다.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의 원수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시어, 우리를,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둘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성경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이 이 문장과 모순되는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 문장이 다른 말씀, 곧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벨후1:11)와, 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 : 8)라는 말씀과 조화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으로써 우리는 바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 수있을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속에 모든 능력이 그에게 양도 되었다는 사실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위대한 위엄은 인간에게는 부적당한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본질상 동일하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만물이 그의 이름 아래 꿇어 엎드리어 경배하도록 하는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빌 2 : 8). 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부섭정관이 되시기 위하여 주님과 최고의 왕으로 임명 되셨다. 말하자면, 세계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그런 위치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시고 그리스도께서만 모든것을 하신다는 .그런 경우는 아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지혜와 섭리의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와 한 본체이시고 또한 같은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대신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지금 가지셨다는 것을 증가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이외에 다른 통치자나 주(主), 변호인, 혹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심관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우리의 눈을 오직 주님에게만 고착시키도록 하기 위하여서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통치자이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이 인간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sed in facie hominis Christi).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때 그가 받은 나라를 바칠 것이며,그래서,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방법으로 그 나라를 포기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스라운 신성(神性)에 대한 그의 겸손으로부터 어떤 방법이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quodammodo) 그것을 이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감추어져 있는 것이 그때의 접근하는 방법으로써 우리에게 공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시게 될 것인 데, 그때 베일이 벗겨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위엄으로 다스리시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더 이상 우리 사이에'서 우라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뵙는 일을 저해하지 않을 것 이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 그것은 마귀와 불순종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아마 우리가 ‘존재하다’는 동사를 ‘알게되다, 혹은 '공공연히 알려지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않는다면 그럴 경우 그 의미는 ‘마귀가 지금 하나님과 싸우고 있으므로, 악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제도를 혼란에 빠뜨리면서 그 하나님의 질서를 뒤엎고 있으므로,'우리를.공격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면전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안에 계심이 분명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그라스도께서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심판을 수행하실 때, 그리고 사단과 모든 불 순종이 우리를 넘어뜨렸을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의 파멀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그 성격 상 거룩하고 합법적인 권위에 대해서도 말하여질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실제의 하나님 그대로 지금은 우리에게 아주 적절하게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중재자 없이 하늘과 땅을 다스리실 것이며, 또 그때는 그런 방법으로 그 모두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그 결과로써 하나님은 마지막에 모두의 안에 계실 것이며, 모든·인류에거1 분만 아니타, 마찬가지로모든 피조물들 안에도 동일 하계 계실 것이다• 이것은신실한 해석이며, 또 그것이 바울이 마음 속에 품었던 것과· 아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만 일 이 귀철이 다만 신자들, 곧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나라를 그들 속에서 세우기 시작한 그· 신자들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적합 하지 못할것이며, 또 그때 그것이 완성될 것이고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하 나님께 완전히 집착하게 될 것이다 •. 이런 해석들 중어느 것이든지 이 귀철을, 그들이 주장하는 것울 증명하 기 위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의 불경건하고 터무니없는 견해를 져되하기에 그 자체로써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소멀될 것이고』또 한 무(無)로 돌아갈 것이타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모든 존재 안에서 모두가 뮐 것이라고상상한다. 

 

그러나 바울의 ,말아 내포하고 있는유일한 의미는 만물이 하나님께 더욱 가까와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1상태로 그리고』오칙 처음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론 사람들온 이것으로부터 마치 하나님께서 마귀를 찬구로 만들며 또한 그와 함께 하시 려는 것보다는 그 마귀의 멀망 속에서 모든 선한 자들에게 알려지기를 원 하시기타도 한 것처럼, 마귀와 불순종자들이 구원받을 것이타고 추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논 그들이 이 바울의 말을 그들 자신의 독신(濱神)을 지지하 는 것으로 왜곡할 때, 이런 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뻔멘스러운 광인(狂人)들 인가를 깨닫게 된다.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 ; 죽은 자둘을 위하여 세례받 는 자둘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처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 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룹쓰리요선형제듄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법인처럽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손 유익 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둘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 하고 최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 럽 게 하기 위 하여 말하노라(29-34). , .. • I d"" 29 절. 만일 축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애쓰고 있는불합리한 과오의 결과에 대하여 다시 한번회상하고있 다. 그는 이런 권리를 처음부터 취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스 그는 교훈과 위로를 곁들였으며, 또 참시 논증의 실마리를 그렇게 맺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다시 그 문재를 취급하고 있다. 

 

우선 먼저, 그는 만일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이미 죽온 자로 간주되어 지는 사람둘에 의하여 받은 세례는 무용할 것이타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이 철을 설명하기 전에, 그것은 교부(敎父)들의 권위로 지원을 받았 고, 또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 동의한 일반적인 설명이므로 논박할 가치가 있다. 그리 하여 다른 사건들의 추종을 받은 크리 소스톰과 암브로스는, 어 떤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을 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 죽은 사람을대신하여 묘지에서 세례를 받는 관습이 있었다고 생각하였 다. 참으로 그들은 이 관습이 타락이며 또한 아주 찰못된 미신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 나 또한 그들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논박하기 저 하 여 그들이'부활을 부인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무것을 믿는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는 동안,·바울이 이 논증을 의뢰하고、있었다고 말한다. 그려 나나에개관한한, 아무것도 내가이것을믿도록 퍼이는것이 없었다; 왜냐 하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일치하여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 께 그란의식(儀式)을 행하였다는 것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박은 곧 바울에 대하여 만들어졌을지도· 모론다. 꽤 너희들은·사실상 너 회들이 그것을 너희 자신들이 친히 증명하지 않았을 때, 이 늙은 부인들의 미신으로우라를-압박하느냐?' 다시,·만일 그들이 이것을 행하였다만, 그둘은,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이것을 행하는 잘못을 법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위대한중요성을 가전어떤 것을층명하기 위하여 이용하여야 하는 것 보다 그」찰못을 고치는 것아 더 좋을 것이다'타는· 대답을 그들이 준비하였 을 것이다 • .;. 그러나 그들의 논증이 건전한 것이타고 상상하면서, 만일 이것이 고린도 교회·교인들 사이에 만연된 것과,7,J-은 그런 타락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우리가생각하고 있는가? 그들의'잘못에 대하여 거의 모든 간단한 잘못만 을책망하는것을·보면서·, 바울은그것에대하여 아무말도.하지 않았다. 그 논 앞 장(章)에서 이것과 갈이 십각하지 않은 어떤 것을 정최하였다• 그는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문재와 다른 그와 비슷한. 문제들에 대하여 안 내하는 데는.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성찬에 대한 찰못된 시행만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의 비판을 십화하고'있다. 동시에 그것이 다론 문제 보다 더욱 십각한데 그런 무서운 세례의 .신성모독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그가 하지 않을 것인가? .. 그는 그들이 그들의 축제를 자주 행함으로써 이방 인의 미신적인 신조와 관습들을압암리에 따르고 있는 그들에게 맹렬한 공 져울 가하였다 .. 그가 이 가증스러운 이방의 미신을 성령의 세례라는 이름으 로 바로 그 교회에서 행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그러 나 그가 그 문재에 대하 여 침묵을 지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실제로 그것에 대하여 륙별한 언 급율 할 때 우리가 무엇이타고 말할 것인가? 나는 사도가 논증으로써, 세 례가 타락되고 완전히 마술져인 악용으로 변해버린 신성모독을 인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음직한 일이며, 또 그것의 무례함을 정최하는 말을'단 한마디 라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직한 일인가? 최대의 중요성을 갖지 않은 문재들 을 취급할 때, 그럽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인간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을 괄호로 삽입하고 있다. 그런 괄호를 위하여 이것은 더 적절하고 적합한 것이 아닐까? 

 

이제 그가 단 한마디의 비난도 없이, 그것이 합법적인 관습을 의미하는 것이타고 말하는데, 누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사람이'있겠 는가? 나는 바울이 여기서 세례의 규칙적인 시행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이타고 분명히 이해하며, 또한 그것과 갈은 타락에 대한 것이 아님을 깨닫 ~ I 는다. 이제 우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자. 나논 바울이 여기서 세 례의 모든 포용적인 종말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왜냐하면 세례의 유익은 여기서의 우리의 현세 생활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 문이 다. 그러 나 후에 그 말들을 내 가 더 자세 히 살펴 보았을 때 에 , 二나는 여기서 한가지 특별한 관점을취급하고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세 례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동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모든 사람에 대 하여 말하고 있는 것 이 아니 다. 더 구나 그는 총명 한 해 석..!L다는一 건전한 해 석 을 더 좋아한다. 그러 면 그것 은 무엇 을 의 미 하는가 ? 나는 죽은 자를· 위 하여 세례를 받는사람들은 이미 죽은사람으로 생각되는 자들이며, 또한생 명 의 소망을 함께 포기 한 자들이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한 전치 사 u1rip(휘 펠 )은 라탄어 pro(as)의 의 미 를 가질 것 이 다. 예 를 들면 'haber'l! pro 'tierelicto'라는 표현 속에서 표기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e강압적 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살펴보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원한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취하여도 된다. 죽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것은 죽을 때, 그리고 살아 있지 않을 때, 은해를 받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인 믿음의 초신자들(catechum eni)이 아팠을 때에, 그리고 만일 그들이 절박한 죽음의 위험에 칙면하였을 때, 그들은 수세(受洗)를 요청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그태서 그들이 그리스 도를 고백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하였으며, 또한 세례를 받음 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미신이 이 관습에 또한 침투해 들어갔다는 사실이 교부(敎父)들의 문 헌에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교부들온 세례 받기를 죽을 때까지 미루고 있 는 사람들을 욕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단 그들이 모든 그들의 최를 다 씻음 받고 하나님의 십판에 이르게5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온 참으로 부분적으로 논 큰 무지(無知)에서 또한 일부분은위선(僞善)에서 온어리석은 과오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다만 거룩하고하나님의 제도에 합당하는관습, 곧 만 일 이미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받아들인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거 ^을 알고 그가세례 받기를 요구할 때, 부분적으’ 로는 그 사람 자신을 위하여, ’ 또 다른 면으로는 그의 형제둘을겅강하게 하기 위 하여 (aedificationem) 세 례 己下베푸는 관습만을 취급하고 있다. 자기 봅재 확증된 이 구원의 증거를 갖는 것온 결코 적은 위로일 수가 없다.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데 있어서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강력함이 또한 있다. 그러므로축온자를위하여 세례를 받는사람들은,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그 둘에게 유-익이 없는 까닭에, 또그들이 인생울 철망하였다는 사실온 그들이 죽을 대어]야제례 받기를 요구하는 바로 그 이유가 된다. 우리는 만일축은후에 아무런·소망이 없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것이냐고 바울이 질문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이 귀절은 또한 고린도 고회 교인들의 믿음을 뒤엎어버린 사기꾼들이 신자(信者)들의 궁극척안 목적이 이··.현재(現世)에 있다고 부활은 상칭적으 로 날조하였다는 데 대한 증명이가도·하다;' 바울은 곧 ‘어찌하여 처희를 위 하여 세례를 받느냐'?·:라는 형식으로'거듭 질문하면서 그것을 더욱 강조하 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 '그것은 그들이 세례를 받 은 사람들보나먼저 그둔의 생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분만 아니라; 면전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것이다. 그리고 후자(後者)는 그들이 죽 은 후에 그들의 제례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세례를.-받는다 .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  만일 부활과 마지 막 행복이 이 세상에 있다면 왜 우리의 자유 의지가 그것을 포기하며, 또 한기쁨으로 죽음에 복종할 것인가? 그의 추리는 이런 방법으로 또한 설명 윌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더 좋은 삶이 우리가 죽은 후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시간마다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무익할 것이다 •. 그러 나 그는 신자(信者)들이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자유 의지로 달리는 그들의 생활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만일 그· 성도. 둘이 죽었을때 그들이 멸망하고 만다면, 죽음을 무시하는 이 고귀한 마음 온, 침착성이라기보다는’』오히려 만용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 온 죽음으로써 블멀의 명성을 사는 미친 짓이며, 또한 마귀에게서 나온 것 이기'~대문이다.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  바울은 그가 개인적인 위험에 있지 않을 때에, 그가 용감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바울 자신이 죽음에 대하여 그런 멸시를 한다고 친히 말하고 있다. 그는 ‘날마다  나는 많은 형태의 끊임 없는 죽음의 위협아래 있노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하늘에서 나를 위하여 상(賞)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불행을 감수한 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인가! 그렇다. 그보다도 더 만일 나의 영광과 축복이 이 세상에만 있다면, 왜 내가 자발적으로 그것을 줄기지 않고 포기할 것인가?' 그는 그가 죽음에 끊임없이 직면하기 때문에 그는 매일 죽는다고 말한다. 그 위험이 매우 크고 억압적이기 때문에 어느 의미에서는 그 죽음이 면전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시편44 편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같은 종류의 일이며, 또한 우리는 다음 서신으로 넘어 갈 것이다. 

 

"나의 자랑을~~~~" ; 벌계이트경(經)은, ‘……때문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서기관들의 무지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불변사에 대한 모호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 특별한 점에 관계 되는 데 있어서 그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더 기울이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분리시키려는 목적의 맹세이다. 그는 그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나의 형제들아, 나는 학문에 있어서 말의 격류를 쏟아 붓고 있는 철학자는 아나다. 내가 매일 나 자신을 죽음에 노출하 고 있으므로, 내가 하늘의 생활에 대하여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긴급한 일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경험한 사람을 믿으라 !  그리고 그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주제에 적합한 그런 맹세의 형식을 취급하고 있다. Fabius가 인용하고 있는 Demosthenes의 그 유명한 맹세가 그것과 같다. 그가 Marathon의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무덤 곁에서 맹세했을 때, 그러나 그의 참 의도는 다른 사람들이 공화국을 방어하는 데 고취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형재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라고 맹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랑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거룩한 맹세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그가 확신하고 있음을 그가 나타내고 있다.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  바울은 죽음의 유명한 형태를 설명하 고 있다. 또 그것은 만일 죽은 후에 더 좋은 삶이 기다리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칙면하는 데 있어서 어리석은 자보다 더욱 나쁠 것이라는 그 본질로 부터 그것이 분명하계 될지도 오른다. 왜냐하면 그는 멀시받은 그런 죽음의 형태에 자신을 노출하고있기 때문이다•·r그는;말하기를, ‘만일 모든 소망이 ol.제상에만 국한된다만 스스로 나쁜’ 이룹을 얻고 또 동시에 가장 찬인한 죽음을 견뎌야 할 팔요가 있겠는가?' ‘내가법인처럼'이란 말온 이 귀철에서,~우리가이 멸망할 생명의 한계 속 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 우리의 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  에타스무스가 잘못 생각하였듯이 야수들에게 던 져진 그런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것 을 구경하려고 운집한 ~}람둔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여 주도록 형벌을 받은 사람들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아주 다론 종류의 형벌이 있었는데, 크_·.하나 논 맹수에게 내던짐을 받은 자람들이요, 다론 하나는 그 맹수들과· 싸우는· 형벌을 받온 자들이다. 이 맹수들에게 던침을 받은 자람들은 즉시 맹수들에 의하여 갈기갈기 찢겨지고f만다. 한편 맹수들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은 무장 을 하고 두기장에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것온 만일 그들이 그 맹수를 축입 으로써 그들아 파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옛날에 검투사(劍鬪士)들이 있었던 것처럼(옛 ~마에 있 었다―역자 주), 맹수와 싸울 사람들을 훈련하는 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맹 수를 죽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가'된 맹수를 죽 이고 살아난다할지라도, 찬인한관객들의 구경거리를 만족시켜 줄때까지 재 2의 맹수와 또싸워야 하기 때문이며, 혹은'어떤 사람온 관객들이 자비십 올 나타넬 때까지 계속 싸워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철망하고 좌철감에 빠져서 구경꾼들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맹수에게 내어주는 사람 들도있다고한다. 그리고 아울러 나는 이것이 시민법에 의하여 오명으로 낙 안겨힌 것처럽,· 고대 규법에의하여 져별하계 정최된 ‘사냥 구경거리'였음 올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바울의 말씀 내용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중이 오도록 허락하신 그 길을 보며, 또한 얼마나 놀타웁게 하나님께서 그 의 종을 구출하셨든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누가는 이 논쟁에 대하여 아무 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 또 우리는 거기에서 바울이 기록하도록 위임 받지 않은 많은 일들윤 그가 끝마쳤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먹고 마시자 하리라." ;  이것은 인간의 최대의 선(善)은 이 현세에서 즐거움 올 누리 는 데 있 다고 생 각하는 향락 주의 자들(Epicureans)의 부르짖 음이 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사람들에게 멀망의 위협을 경고하였을 때, 타락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역 시 주장하고 있다(사 22 : 13). 이 런 강고를 비 웃으면서 , 그들은 방종과 무질 제 의 향락 속에 빠져 자포자기 하고, 또 그들의 전단적 (專斷的)인 독립 성 을 증 명하기 위하여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i죽을 것이므로, 우리에게 주석전 시간을 즐기고, 그 죽음의 공포의 시간이 오기도 전에 그 공포의 그 림자로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자.' 한편,, 어떤 사령관이 그 의 부하들에게 한 말을 살펴보자 .. '전우들이여,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합시 다.-오늘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하에서 식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권고이며 이 귀절의구주제와는 아무 상관 이 없는 것이다. 나는 바울이 타락한 사람들과 아무 j쓸모없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샤용하는:유행어구를?실려왔다고 생각한다· 혹 은(간단히 말하면) 향락 주의자들의 일만 져언에서 빌려온 것일 것이다.: 그 향락 주의자들의 져언은 이런 내용이 된다. '만일 죽음이 인간의 전멀을 의 미한다만 살아 숨쉬는 동안 어떤 문제로 괴로와할 것이 아니타, 향략에 도 취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무엇이 겠는가 ! ' 그런 감상온·종종 li_ora:e(옛 로마의 서정시인一역자 주)에게서 반복되고 있다. 

 

"33. 속지 말라~~~~더럽하나니" ; 질문을 하고 있는 것처 럼 가감하면서, 부당한 여축을 하는 방법에 빠져·드는 것보다 더 쉬운-일이 없기 때문에 바 울은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우리가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있으며, 또 한 도덕적으로 우리를 타락시키고}있음을 깨닫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경고함으로써 이 위험에 즈l,면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시인 (詩人)Menander의 말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 곧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어떤 것을 어떤 근원으로부터 빌어올 수 있는 자유를 우리가 가졌기 때 문이다. 또 모든 전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돗이, 하나님께서 불신자 들의 입에 순수하고 건전한 교훈을 불어넣어 주신 것도 의십할 수 없다. 그 러나 나는 이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Basil의 〈젊은이에게 주는 연설〉(Or. ation to Young Men)을 살펴 보려 고 한다. 그러 므로 바울은 이 말이 헬라 사람들에게 더 친근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의 말로 갈은 사상율 표현하기보다는 그것의 사용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쉽게 바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용이하였으며, 또한 우리 자신도 우리의 경험으로 찰 알고 있는 내용의 말들에 동의하기가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톡벌히 우리의 주의를 요하논 문장인데 그 이유는, 사단 이 우리를 칙접 공격할 수 없을 때, 사단은 무엇이 전리인가를 발견하기 위 하여 모든종류의 사색을 시작하는데 아무 찰못이 없다고꾸미면서 우리를 속 인다. 그러므로 반대의 관접에서 말을 하면서, 바울은 그것을 강력하계 항 의하고 있으며,· 생명을 당장에 죽이는 독약을 우리가 조십하듯이 나쁜 지식 을 듣게 되는 것을 피하타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몰태 우리 마음 속에 기어들어와서, 곧 우리의 전체를 타락하게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극히 가벼운 정도일지라도 정통과 순수한 믿음으로부터 우리를 빗 나가계 하는 나쁜 교훈과 불경건한사색 이상으로 더 해로운 것은 없다. 바 울이 우리에게 속지 말라고 권고하는데는그럴 만한 충분한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