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1. 성경 (고전15:50~58)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0)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1)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2)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3)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4)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7)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58)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 ;이 귀절은 다음에 오는 내용이 앞의 진술에 대한 설명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갈다. 곧, ‘우리가 하늘의 아담의 형상을 닮을 것이라 고 내가 말함으로써 의미하는 것은우리의 몸이 부패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새롭게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부패하지 않는 나라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혈(血)과 육(肉)이라는 말을 그것들이 현재 구성되어 있는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지만,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를 받고도 회복된 후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바울의 논증온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며, 둘째로 그것의 본질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의 설명을 신비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그것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그 설명을 신비라고 부른 것은 다론 두 가지 경우에서와 같이, 그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게 분명하게 여기에는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말하여야 되는 것에 대하여 그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악한 교리는 그들이 이 주제를, 마치 그것이 조금도 어려움이 없는 어떤 것이기나 한 것처럼, 아무 관심도 없이 또 가벼운 마음의 태도로 논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신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그들이 아직 모르는 어떤 일에 대하여 익숙하여졌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하늘의 기밀의 부분으로 알려진 어떤 것에 익숙하여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밀하노니~~~~~" ; 헬라어 사본에는 이문이 없다. 그러나 라탄어 사본에는 세 가지 다론 독법(讀法)이 있다.

 

그 첫째는, ‘우리는 참으로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변화될 수 없을 것이다. 

두번째는, ‘우리는 참으로 모두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세번째는; ''우리가·다 잠 잘 것이 아니요, 우리가 다 변화될 것이다.'

 

나의 추측으로는 이 상이성(相異性)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차라리 우둔한 어떤 독자들과 또 참 독법(讀法)이 재미 없다는 어떤 독자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더 그럴듯한 것이라고 그것을 대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견상으로 보아서는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定)하신 것이요"라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우리가 다 죽을 것이 아니요' 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비록  '모두 다시 일어 날 것이다', 혹은 ‘모두가 죽을 것이다', 모두가 다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변화됨으로써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이들이 얻을 그 영광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맥으로부터  참 뜻이 무엇인가를 결정할수 있다. '바울의 목적은 그가 이미 말한 것, 곧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주님의 날까지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그때 어떻게 될 것인가?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그들이 죽지 않을지라도 죽음과 타락이 소멸되기  위하여 그들은 새로와질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오직 신자(信者)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변화하는 부활이 있을 지라도, 여기 그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우리는 모든 것이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문장이 앞의 문장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게 되고, 우리가 변화 받을 때에 그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날 것을 그는 이제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때까지 아직 살아있는 어떤 사람들도 처리하신다는 것은 이 변화에 차이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발견하여야 한다. 즉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며, 또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존재한 어떤 본질이 죽지 않고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으므로, 그런 변화는 아주 당연히 죽음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육신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가 없으므로, 그것은 일반적인 죽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때에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멸망할 것이 죽음이 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축복받은 불멀로의 돌연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52. 니팔 소리가 니매" ;  바울은 이직도 일반적인 용어로 말을 계속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즉각 일어날텐데, 그·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눈짓을 하거나 혹은 눈을 깜박거린다’는 구(句)를 사용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헬라어 사본에  '로페', 혹은 '리페' ; (눈짓 혹은 움직이다)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몸의 특별한 동작을 선택하고 있는데, 그것은 속력에 있어서 모든 다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눈의 움직임보다 더 신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눈의 반짝임에 대조되는 것으 로써 잠자는 것을 암시로 들고 있다. ‘나팔소리라는 말의 반복이, 여기서 그것이 이 문자적으로 폴이되는 것을 아주 결정적으로 만드는 것같이 보이지만 나는 그것을 차라리 은유로 여긴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6절에서 그는. '천사장의 소리와'를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연결시키고 있다. 지휘관이 그의 부하들을 전쟁터로 모을 때 나팔 소리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온 세상에 다 울려퍼지도록 그의 나팔소리의 선포로써 죽은 자들을 그에게로 블러 모을 것이다. 모세는 율법이 선포되었을 때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가 그 울려퍼진 음향의 종류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어떤 한 나라 백성만이 아니고, 온 세계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될 때에 그것은 얼마나 다른 양상이 되겠는가 !  그리고 그것은 살아 있는 자들만이 소환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죽은 자들 역시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소환율 받을 것이다. 그 보다도 더, 마론 뼈와 흙이 그들의 이런 상태로 회복되도록 명령을 받을 것 이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도 그 육체에 들어가, 그들은 즉시로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고~~~~~" ; 모든 것에 대하여 일반적인 말을 하면서 바울은 이제 어떻게 그것이 죽은 자와 산 자들에게 적용이 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분은 앞 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는 말씀의 설명에 블과한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라고 하였다. 죽은 자들이 경험하는 그 변화를 주의하여 보자!  그때 그는, 살아 있는 자들도 역시 변화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당신도 있을 것이다.  둘 다 덮여진 상대로  이제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잠자는 그런 경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도 변화하리니'라고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살아날 사람들 중에 자신도 그 한 일원으로 계산하고 있다. 이미 마지막 때가 되었으므로, 성도들은 그 날이 곧 임할 것을 대기하고 있다. 그가 데살로니가서에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가 온 세상에 홀어져 있을 것에 대한 놀라운 예언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말하자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여기처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를 방해하지 않으며, 또 그 자신과 그둘이 함께 그날이 올 때 살아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가능한 것으로 하고 있다.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러나 혈(血)과 육(肉)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 할 것인데, 그 이유는 먼저 그 혈과 육이 부패로부터 자유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락하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성온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부패를 벗어버리고, 부패하지 않음으로 옷을 입을 때, 그때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귀절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동일한 육신을 그때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마치 의복처럼, 새로운 질(質)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 부패한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면, 그는 인간이 새로운 육신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날조한 그런 환상가들의 오류를 그렇게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처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라고 말하고 있을 때 거기에는 논쟁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54~55.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말씀이 응하리라."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것은 단순한 확충( 에펙세르가시아)이 아니라, 앞 절에 대한 확증이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예언은 우리의 육신이 그 부패를 벗고, 불후성(不朽性)이 될 때까지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불후성온 필연적으로 일어날 그 무엇이다. 이제 응하리라’는 말온 여기서 완전히 성취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설명한 것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완성을 향하여 매일 발전을 이루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그것은 마지막날까지 그 적절한 성취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이 인용문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참으로 분명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많은 귀절들이 선지자들의 이 특질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첫째 귀 절이 두 근원 중의 어느 한 곳에서 인용된 것임이 틀림없다고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귀절은 이사야 25장 8절로써 "주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나타나 있다. 다론 그럴듯한 귀절(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인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은 호세아 13장 14절인데,· 거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강팍함과 악함을 매우 탄식하면서, 이스라엘은 산모(産母)가 해산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나오지 않으려고 산문(産門)에서 어거지를 쓰고 있는 조숙한 어린 아이와 갈다고 한탄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죽음으로부터 구 원을 받지 못하는 사실온 다만 그 자신의 이유 때문에 오는 치욕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는 말하였다(託 1)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救讀)하리니~

 

그러나 당신이 그 동사들을 미래 직설법으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가상법 으로 받아들이든지 벌로 큰 상관은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취하든 그 뜻 온,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축복을 주실 준비를 하고 있으며, 만일 그들이 멀망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찰못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託 2)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내 멸망이 어디 있느냐~

 

이 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망과 음부가 아무것도 아난 것이 될 때에만 그의 신실한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 귀절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완전한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이 그와 같이 멸망시키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주신 충만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과, 또 같은 이유로, 그것이 그날까지 연기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그것은 죽음의 정복을 받을 때 ,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복함으로써 완전하고 철저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말씀의 둘째 부문에 관계되는 한, 그 속에서 바울은 사망과 음부를 문책 하고 있는데, 그가 그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또한 거기서 선지 자가 말한 것을 인용하려고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거기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 ' 헬라어 역본(70인경)은 그것을 이령계 번역하고 있다. ‘사망아, 너 의 고발장이 어 디 있느냐 ? 음부야,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호13:14)


비록 헬라어 저자들의 잘못이 그 말의 '유사성 때문이었다는 이유로 변명이 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문맥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저자들이 그 선지자의 의도로 떠나 얼마나 멀리 방황하고 있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참 의미는 주님께서 사망을 멸하시고 음부를 끝낼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헬라어 역(譯)이 공통적으로 통용될 가능성이 있는 한, 바울은 그것운 암시하고 있었으며, 또 그 암시로 인하여 나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한마니한마디 인용한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승리’라는 말 대신에, 그것은 법적인 ‘원인’이나 혹은 ‘행위'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여기서 선지자의 말을인용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말을 그의 목적을 위하여 다만 적용하고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한다. 그것을 떠났으므로 그것은 참 종교의 본질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확신에 대한 소리 높이 올리는 함성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즉시 실재 부활에 직면하기라도 한것처럼,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주려고 하였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두 눈으로 그 승리를 아직 보지 못하고, 또 그 날의 나팔 소리가 이직 들려오지 않을지라도 우리돈 계속 전쟁과 그 전쟁의 위험을 인내하고 있다 우리가 곧 지적할 것처럼, 그런 것은 우리의 믿음의 확신을 아주 조금도 혼들지 못한다.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  말하자면 ‘사망은 죽음 이의의 어떤 다른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망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왔으므로, 사망온 이 죄의 무기로 우리를 들러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만 우리의 죄만을 노하시므로, 이 죄가 사라졌을 때 죽음은우리를 더 이상 해치지 못할 것이 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6장23절에 "죄의 삭은사망이요"라고 한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론 은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온 그가, 치명적인 상처를 가함으로써 죽음으로 몰아넣는 유일한 것으로써, 죄를 찌르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제거된다면, 사망온 무기를 빼앗기게 되며, 또한 더 이상 상처의 고통을 줄 수가 없다. 이제 바울은 왜 그가 이것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곧 밝힐 것이다. ·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 그 치명적인 능력으로 찌른 것온 하나님의 ‘율법' 이다. 그 이유는 물론 그 율법이 우리의 죄를 발가벗길 뿐 아니라, 또한 그 죄를 더욱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대한 더 분명한 해석이 로마서 7장 9절에서 나타나는데, 거기에서 바울은 우리가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우리의 눈에 아무 찰못한 것이 보이지 않고. 또한 율법이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소환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우리가 살았는데, 우리의 양심이 이제는 영원한 죽음을 깨달음으로 인하여 몹시 괴로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그는, 죄는어느 의미에서 잠을 자도록(영적 수면―역자 주) 달램을 받는 것 이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에 의하여 더 포학하고 전단적(專 斷的)으로 자라도록 환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그 율법 자체로는 죄를 제조하지도 않으며, 또한 죄의 원인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이 오해받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수치스러운 악에 대한 치욕이라도 우리 자신에게 그 원인을 돌려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손상을 우리에게 주는 수단이 될 뿐이며, 그 고통의 참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이 귀절에서 법을 죄의 권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죄가 그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죽음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경우 그것이 그 위세를 떨침에 있어서 그렇게 맹렬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은 죄를 더 가중(加重)시키든지, 혹은 이루 헤아릴 수 없게 한다.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것은 바울이 죽음을 취급하면서 왜 죄와 율법을 다루고있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여준다. 죽음은 죄가 없다면 우리를 조금도 상하게 하지 못하며 이 찌름에 율법은 그 치명적인 권능을 부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정복하셨으며 그의 정복으로 인하여 우리가 승리를 얻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더 아상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걸론이 나온다. 따라서 이 축복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직 우리에게 계시 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그 축복 안에서 확신있게 자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머리되시는 분에게서 완성된 것온 팔연적으로 그 지체들에게도 완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망을 정복되어버린 것으로 욕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졌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곧 우리들의 승리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인성(人性)안에서 죄를 멀하였으며,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시고, 저주를 참으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고 생명을 얻으 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모든 이런 축복에 우리가 그 참여자가 되도록 하기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죄의 잔재를 가지고 있긴 하나,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며 또 그 죄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상처가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찌르는 그 죄악의 뾰족한 칼날이 둔하여져서, 그 것이 우리의 영혼의 생명력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직도 율법이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고 있으며, 그것이 율법의 공포를 깨뜨리고 있다. 육신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 속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사망에서 살리신 성령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생명이 되신다.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혼들리지 말며 항상 주 의 일에 더욱 힙쓰는 자들이 되라……" ; 바울은 그가 부활 안에서의 믿음을 충분히 설명한 데 대하여 만족하면서, 이제 그는 권면으로써 그의 논의를 끝 마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말한 것을 확증하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는 "견고하며 혼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상을 준비하여 두셨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자(信者)들에게 용기를 준 것은 단 하나의 유일한 소망이며, 또 그 후에 그들이 그들의 경주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그들을 지탱하여 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혼들리지 않고 남아 있도록 그들을 깨우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늘나라에 그들을 위하여 준비된 더 좋은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 때에, 그들이 혼들리지 않는 기초위에서 안주(安住)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바을이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부활의 소망이 우리가 선올 행하기에 지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부딪치논·장애물 앞에서 누가 용기를 잃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혹은 그 길을 벗어나도록 강요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경의하고 더 좋은 삶을 생각함으로써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론 한편, 만일 부활의 소망이 사라지고 말면 기초가 찢겨지고 마는 것처럼, 종교의 전 구조가 파멀되고 말 것이다. 만일 상을 받을 소망이 없어지고 소멸되고 만다면, 계속 달리는 데 대한 열심도 단순한 기(旗)에 불과할 것이며,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