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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고전16:9)

1. 성경 (고전 16:1 ~ 9)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1)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2)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3)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4)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5)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6)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7)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8)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9)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 누가는 사도행전 11장 28절에서 글라우디오때에 흉년이 들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을 말하고,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다. 선지자가 거의 모든 세계가 이 재난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더 큰 곤궁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또 모든 이방 교회들이 극도로 배은망덕하다는 비난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들이 복음을 받았던 교회를 돕는 의무를 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자기를 잊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마음을 결정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비참한 빈궁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 나타나는데, 바울은 거기에서 사도들이 그에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도록 권고하라는 책임을 맡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팔요성이 아니었다면 바울에게 그런 책임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귀절은 바울이 다른 귀절에서 주장하는것에 대한 진실을 확증하고 있는데, 그는 이방인들이 그런 종류의 필요한 구조를 하도록 권면하는 고통을 짊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둘이 도움을 주는 그 방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더 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이미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설명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직까지 아무도 시도 해 본 일이 없는 어떤 것에 대하여 쉽게 적응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을 알면서, 이미 어떤 사례를 본보기로 할 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감화시키는 더 큰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그것을 지체하는 모든 것과 방해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바울이 목표하는 것은 그들이 적기 (適期)에 연보를 준비 하여 두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조심성도 없이 급하게 서둘러서 한 알이 제대로 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i있는 것이다. 그들이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을 각 사람이 그 능력에 따라  안식일  곧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이 예배드리러 모이는 날 헌금하라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카다 미안 사바톤' 이라는 귀절을 '첫 안식일에'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에, 즉 안식일마다 연보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며, 혹은 그들이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나 다 모든 안식일에 연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편리한 말로 생각을 하고 있으며, 또 둘째로, 신자(信者)둘이 성도들의 모임을 즐거위하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모임은 그들에게 부가적인 자극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식일이 여기서 ‘주의 날'로 대치되었다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 초기에 사도들이 그들이 ·이미 친숙하였던 그날을 지켰던 것은 매우 그럴듯한 일이다. 그러나 후에 유대인들의 고지식한 준수가 그것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다른 것으로 대치하였다:  이제 주의 날은 모든 다른 사람들이 더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율법의 그림자를 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생각나게 하는 날이다. 마지막으로, 그 귀절에서 우리는 신실한 자들이 그들의 일을 멈추고 휴식을 하는 특별한 날을 항상 가졌었다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낱온  그런 일이 날마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예배를 위하여 함께 모이는 날로 지정되어야 한다. 다른 귀절에서, 바울이 한 날과 다른 날 사이의 어떤 구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금하였는데, 우리는 그가 제도적이거나 외적인 질서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를 얻은 대로" ; 이 말 대신에 벌게이트경(經)은 ‘그 자신의 분별력에 따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번역은 그 단어의 유사성에서 야기된 오해임이 틀림없다. 다른 한편, 에라스무스는 ‘편의한 대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번역은 모두 다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 이유는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는 말하자면 ‘번영하고 번창하다’라는 뜻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신선한 호소력을 그들에게 주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곧 '너희들 중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듯이 너희들의 수입 중의 얼마 정도를 그 가난한 자들에게 주도록 하자.

 

"저축하여." ;  나는 헬라어 분사.(thesaurizans)가 그 사상을 더 강조하여 나타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 그 분사를 취하고 싶다. '테사우-리 제인' 이 ‘저축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되나, 그러나 바울온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성도들을위하여 연보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이 소유 할 수 있는 최상의, 그리고 가장 안전한 보화라는 사실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지적하려고 하였다. 이교도(異敎徒) 시인(詩人)이 다음과 갈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곧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풍요하게 주는 것은 당신이 그 부(富)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원리는 우리에게 별로 큰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의 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채무자가 되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든지 간에 풍성하게 이자를 붙여 어느날 우리에게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이 말이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는 이유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저질하느니라"(마 6:19).

 

"3. 내가 이를 때에~~~~" ;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우리의 선물이 다른 사람들을 잘 보살펴주게 될 것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줄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들이 선택한 사람의 가치와 진실성이 이미 증명되어, 그 사람에게 그들의 사무를 일임하여 그들의 연보가 선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서 잘 사용될 것을 그들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를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보다도, 그가 그 자신의 봉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의 이 봉사를 갈망 하여야 하며 또 그것은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견해는 이 서신이 빌립보로부터 보내진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빌립보에서 육로(陸路)로. 고린도까지 여행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당신은 마게도냐를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는 마계도냐의 산맥을 마주보고 있는 바다에서 가장 먼 구석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은 육로 대신 해로(海路)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게도냐로 가서 그곳 교인들을 만나기를 원하였고, 또한 도중에 그들을 방문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상이 교회를 들보는 일에 대하여 취하고 있는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편지가 에베소에서 기록된 것이 더 가능성 있는 일로 보인다. 즉.그가  ‘오순절까지 그가 그곳에 머물 것이다’라고 말한 후 잠간동안 그곳에 있을 때의 말이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하여 환영한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교회들을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환영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두번째 편지에서, 이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 마계도냐로 건너갔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게도냐를·통과한 후에 충분히 에베소를 방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에베소로 가지 않고 반대로 마게도냐에 가까운 아가야로 갔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그때 에베소에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에베소에서 아가야까지는 직접 항해할 수 있었다. 반면에 마게도냐를 방문하는 사람은 길게 우회하며 또 더 어려운 노정(路程)을 가야 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마게도냐로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직선 코스로 그들에게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부가하여 , 그는 그가 아주 오랫동안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함께 있을 것을 그들에게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그는 그의 그들에게 대한 사랑(amorem)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들의 복리에 대하여 관계되고 있는 이외에 그로 하여금 더 확대된 방문을 하도록 만드는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한편 그는 그의 여행에서 그를 호위하는 친절을 그들이 베풀 것을 모두 인정하는 곳으로 그가 받아 들일 때 그는 그에 대하여 가지는 그들의 애정(caritate)에 관한 의심의 그림자를 벗고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의 우정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말한 후 그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이라고 제한하고 있다. 신자(信者)들은 이 단서를 모든 그들의 계획과 뜻에 부가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단 한 순간도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미래의 일을 보장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일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미래의 사건들을 취급할 때 모든 것을 하나남의 뜻에 의뢰하게 하는 것이다.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  나는 이 서신이 에베소에서 보내진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빌립보에서 보내졌다는 나의 논증을 지지 하기 위하여 이 귀절을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이  그가 바로 우회하는 길을 통하여 그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하였다기보다는, 그가 서신을 쓰고 있을 당시에 그가 살고 있었던 장소에 대하여 그가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더 그럴듯한 일이다. 부가하여 마게도냐를 통과하여 에베소에 도착하기 위하여서는 고린도에 가까이 왔을 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고린도에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남아 있을 것을 미리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또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를 더 인내심을 가지고 그렇게 그들을 기다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에라스무스는 '50일까지' 라고 번역하였다.  이 독법을 적용하면서 그는 어떤 확실한 추론보다도 무가치한 상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것이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것과 갈이, 오순절이 기독교인의 축일(祝日)로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에 관한 한, 나는 그와 의견을 같이 한다.  그는 이것이 유대인의 명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여러 차례 그 날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정죄하고 폐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가 에베소에 있을 때에 바울이 그날을 지켰다고 내가 그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곳에 사람들의 큰 무리가 모이기 때문에,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바울이 얻고 싶어서 그렇게 하였다는 점 때문에 그에게 양보를 하는 것이다. 비슷하게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열망을 가졌을 때에, 그가 급하게 서둔 이유는 그가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율법의 의식(儀式)을 따라 희생 제물을 드리려 예루살렘에 갔는데 반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그의 복음전도도 큰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뜻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정확하게 50일을 의미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아주 무의미한 일이다. 그가 분명히 '밴 펜데-코스덴 ; 오순철' 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다만 특별한 어떤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 축일(祝日)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면, 레위기 23장 16절을 참고하시라.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  바울은 그가 에베소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고、있다. (1)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를 얻고 있으며, (2) 또 그의 출현이 특별히 많은 원수들의 출현 때문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내가 여기 머무는 것을 좀 더 연기함으로써 나는 많은 중요한 일을 할 것이며, 이에 반하여 만일 내가 그곳에 없다면, 사단이 많은 위험을 끼칠 것이다.' 이 귀절의 첫 부분에서 그는 기회를 의미하는 ‘문' (門)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아주 일반적인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현관’을 열어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을 ,‘광대하고'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많은 사람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 이었다.

 

또 그는 이 문을 ‘공효(功效)하다’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수고를 축복해 주시고 있으며, 또 그의 교훈이 성령의 능력으로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바울 격자 주)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편의나 즐거움에 적합한 장소로 선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어디에서 그가 가장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이며, 또 어디서 그가 주님께 봉사하고 그의 수고를 더 많이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는 여기에다 그 자신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추가하고 있다. 그는 자원하여 더 날카롭게 싸움이 일어 나고 있는 곳에 또 그 싸움이 더 치열한 곳에 참여하였다. 그는 많온 원수들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남아 있었으며, 또 그가 그 원수들의 공격울 잘 견디었기 때문에, 그가 더욱 잘 준비되었으며 또한 기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