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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16:20)

1. 성경 (고전 16:15 ~24)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5)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6)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7)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8)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19)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0)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21)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2)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3)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2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5. 형제를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 우리는 매일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이 좋은 일인가를 알며, 하나님께서 더 특출한 은혜를 주시는 사람들은 가장 큰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교회의 안녕을 원한다면 선한 사람들이 그 영예를 받는다는 점에 항상 유의하도록 하자. 그들의 충고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하도록 하자.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그들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도록 하자.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스데바나의 집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도록 권고할 때에, 이 귀절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백성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풍요하게 그의 은사를 내려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자원하여 복종하도록 하자.  이제 그들이 모두 그 집에 대한 영예를 받는 자가·되도록 하기 위하여 (여 하튼 이 귀절에서 다론 이름을 부가하는 것은 순수한 것이 아닌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의 첫 열매'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처음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름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람들이 나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다는 그런 경우는 항상 아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함께 하는 곳에는  어느 의미에서 그들이 준비함으로 믿었던 복음을 가능케 한 사람들은 영예를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신자(信者)들의 유익을 위하여 물질로도 봉사한 사람들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는 조금 후에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하여 잘 말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더 훌륭한 사람은 더 큰 봉사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이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봉사함으로써 그들의 전체 교회의 실패를 보상하여야 한다고 그는 말 하고 있다.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 기록에 오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一‘교회’라는 이름이 한 가정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그리고 신자들의 모든 가족들이 수많은 작은 교회들처럼 그렇게 조직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적합한 말이다. 다른 한편, 에라스무스가 취한 ‘회중’ 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마음 속에 뜻하는 바와는 전혀 일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단순하게 모인 군중들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하려고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조직(de·Christiana oetonomia)에 대하여 큰 존겅심을 품으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대신하여 문안 인사를 그들에게 하고, 그 사실은 이 서신이 에베소에서 보다는 빌립보에서 기록되었다는 앞에서의 나의 주장을 확증하고 있다. 누가는  바울이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하여 에베소를 떠났을 때 그들이 그의 장소로 그곳을 택하였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20. 모든 형재도 너희에게 문안하나~~~~~" ;  입맞추는것은 유대인둘 사이에 아주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헬라에서는 그 관습이 그렇게 관례적이거나 일반저인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아마 여기서, 그둘이 예배를 위하여 모였을 때 서로 나누는 인사에서 의례적(儀禮的)으로 하는 입맞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갈다. 나는 사도 시대부터 입맞춤이 성찬 예식과 관계될 때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혀 이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나라들 중에도 이 입 맞춤의 관습이 둘어오게 되었다. 어떻든 간에, 그것이 상호 사랑의 표이기 때문에 나는 바울이 그둘 가운데서 그들이 마음 속으로 또 그들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에서 뿐만 아니라, 그 입맞춤이 거룩한 것인 한 그것이 음탕하거나 기만적이 아니므로, 그들이 서로 선의(善意)를 개발하도록 바울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을의미한다는 데 의심을 품지 않는다. 여기서의 그  ‘거룩한' 입맞춤은 예배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역시 받아 들여져야 한다.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발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 서신의 결론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받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이 그들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사랑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짓 고백하는 사람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그는 가장 준엄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바울은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외부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물질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또한 공허한 겉치례를 즐기면서, 교회 안에서 혼란을 조장하는 사기꾼들과 위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파문의 저주를 선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더한 저주를 빌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기를 그가 원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증오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나는 오히려 신자들 앞에서 저주 받기를 그가 원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그가 복음의 타락을 가르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하였을 때, 그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배척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꺼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실명하여 보자.  곧, 그들이 뿌리째 뽑혀 멀망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독충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익 부패한 욕망을 위하여 신앙을 고백하는 유익을 취하는 그런 사람들처럼 유해한 존재는 참으로 없다. 참으로 성실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형제 앞에 걸림돌이 되는 어떤 방해를 할 수 없게 함으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때, 이 악의 근원을 그가 지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가 곧 이어 추가하고 있는maranptha라는 단어는 좀 더 어렵다.  거의,  모든 교부들이 그것이 옛 시리아 말이라는 데 동의 하고 있다.  그러나 재롬이 그것을, '주께서 임하셨다' 라고 번역한데 반하여 다른 사람들온 주께서 오실 때', 혹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이 '주께서 임하시니라’고 말하기를 원하였을 때,  헬라사람들에게 시리아말로 말하였다고 생각하는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요령없는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분명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주께서 임하실 때'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다만 위험한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누구를 저주 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일정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하는것이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 예를들면 Eli,.,Eli, lama sabachthani (엘라엘리 타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아까 ?-역자 주)와 갈은 혹은  Amen(아멘)의 경우들과 Hosanna(호산나)갈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말을 재외하고는 거의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maranatha",  파문에 적합한 말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Bullinger는 Theodore Bibliander의 권위에 대하여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아람어 Maharamata인데 히브리어로는'케렘 ; 파문, 저주' 이다.  그리고 축복 받은 기억의 사람인, Wolfgang Capito는 과거에 나에게 그것에 대한 확증을 주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들의 자국어 (自國語)로부터 이 말씀들이 선포되고 있는 방법과는 다르게 그들이 이 말씀을 기록한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며, 그것은 앞에 나온 실례(實例)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로써 정죄(定罪)한 후에, 그는 그 사건의 심각성에 괴로와서 그 자신이 충분히 말하지 못한 것처럼 느끼어, 그들이 저주에 대한 문장을 대할 때, 바울은 유대인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을 더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곧, ‘나는 너희들을 파문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덧붙인다면,  ‘또한 나는 너희들이 저주를 받거나 저주 받은 사람이 되기를 선포한다.'  나의 생각 같아서라면 그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라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