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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15:49)

1. 성경 (고전 15:34 ~ 49)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4)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5)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6)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7)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8)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39)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0)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1)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2)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4)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5)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6)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7)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8)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49)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34. 깨어 의를 행하고~~" ;  그는 고런도교회 교인들이, 말하자면 부당하게 잘못된 안도감에 사로잡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깊은 동면(冬眠)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 (義)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그들이 깨어났을 때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기를 그가 원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들에 관한 한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맑은 정신으로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민감함을 자랑까지 하였던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일에 보다도 더 각성이 요구되는 그런 일에 대하여 그들은 나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의롭게 깨어있으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들의 생각을 바꾸어 선하고 거룩한 일에 헌신하여라'하는 뜻이 된다.

 

그는 또한 ‘너희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 아주 현명한 사람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경고를 그들이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그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것은 허공을 날아다니데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하는 사람들, 곧 가능한 한 예리한 지혜를 가져야 할 때, 아주 우둔한 사람들에게 대한 겅고로써 가치가 있다.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 이말은 말하자면 아버지들이 그 자녀들이 부끄러움을 당함으로써 부끄러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악행(惡行)을 책망 함으로써 그들의 자녀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고 있는 그런 방법이다 한편 앞에서 바울이 그들을 부끄럽게 할 뜻이 없다고 말하였을 때,  그가 적의 (敵意)를 품고 불쾌한 태도로 그들의 비행을 공중 앞에 폭로함으로써 그들에게 창피를 줄 생각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도 그런 큰 죄악 속에서 즐거워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준엄한 말로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 시점에서 그들에게 이익이 t되었다. 참으로 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다고 책망하였을 때, 그는 그들의 이름에 대한 영예를 남겨두지 않았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 믿음의 이 교의(敎義)보다도 더 인간 이성(理性)에 모순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재외 하고는 아무도 우리의 육신, 곧 이미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혹은 불로 소멸되고 맹수들에게 찢기는 그런 육신이 죽은 후에, 다시 그 전체의 원형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본질로 회복될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의 전체적인 기질이 극단적인 모순으로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배척하지  않겠는가?  이 불합리한 출현을 폐지하기 위하여 바울은 'anthypophora', 말하자면 반대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얼핏 보기에는 부활에 대한 교훈에 배치되는 것 같은 반대를 하고 있다. 이 특별한 질문은 그 부활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대하여 그가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묻고 있는 어떤 사람의 질문이 아니라,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의 질문인 것이다. 이것은 그의 대답에서 바울이 그런 종류의 반대를 준엄하게 논박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비웃으려는 사람들이며, 또 부활의 불가능성에 근거하여  모욕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36. 어리석은 자여~~~~~못하겠고" ; 비록 부활의 방법이 뭔가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는 아주 쉬운 일이라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반박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의 근거에서 결정되어져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되는데 대한 영예를 하나님의 놀라우신 비밀의 능력에 우리는 돌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론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부활이 자연과 반대된다 (naturae adversitur)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례 (事例)를 그가 보여 주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매일의 생활, 자연, 그자체의 과정, 곧 과일이 자라는 성장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분명한 실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땅에서 거두는 열매는 그들의 근원이 어디인가? 그것이 썩지 않는가? 일단 씨앗이 땅에 뿌려지면, 그 씨앗이 죽지 않는다면, 아무 싹도 움트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패가 재생(再生)의 기원이고 원인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눈 앞에 이미 분명하여진 것을 하나님께서 이륙하신 것으로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너무 간악하고 배은 망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 이 비교는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1) 씨를 뿌린 경우에 일어나는 것과 똑 같은 일이 알어난다는 사실에 비추어서, 육체가 썩은 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텅빈 씨앗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노련한 기술로 완전한 생산인 많은 이삭들을 나게 하시며, 양질(養質)의 곡식들을 거두게 하시는데  우리의 몸이 다른 형태로 회복될 것이라는 것은 이성(理性)에 조금도 배치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가 많은 육체들이 그 결과 한 몸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까닭에 그는 뭔가 다른 것 곧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육체의 종류를 형성 하신다는 것은 그 속에 또한 질적(質的)으로 각각 다른 육신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그가 말한 내용을 제한하고 있다.  그는 각각 씨앗마다 그 씨앗 고유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절(節)은 다른 몸에 대하여 그가 말한 것을 제한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은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은 그 자신의 모습(speciem)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이것은 다른 비교이다. 그러나 같은 목적을 위하여 이런 비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다른 설명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체라는 단어가 사람과 죽음의 육체를 총 망라하여, 또 각 육체가 각각 다른 종류의 육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거기에는  참으로 본체는 하나 (unam substantiam)이지만, 그러나 본질은(in qualitatem) 각각 다르다는 것을 그는 의미하고 있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우리가 어떤 독특한 종류(in quoqua specie)에서 깨닫는 그 각각의 다양성은 부활에 대한 일종의 예표(豫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현재 장래를 다양하게 변화시키심으로 우리의 몸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  하늘과 땅의 육신들 사이에 차이성이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의 육신들은 그  영광에 있어서도 동일하지 않다. 태양이 달을 비추고, 또 다론 별들도 각각  다른 별들과 다르다. 따라서 이 부동성(不同性)은 죽은 자의 부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을 적용함에는 곧잘 오류를 범하기 쉽다. 왜냐하면 사람둘은 바울이 부활 후 성도들에게 영예와 영광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것을 말하는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사실이며, 또 성경의 다른 귀절둘도 그것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한것이라는 점은 이무것도 없다. 그는 부활 후 성도들이 각자 그들의 상태로부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 이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육체가 마지막에 우리가 받을 육체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직유(直哈)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모순되는 암시를 제거하고 있다. 곧 태양과 달은 한 본체이지만, 그 영예와 그 광채에 있어 각각 서로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이 더 훌륭한 질적 (質的)인 변화를 갖게 된다고 하여 놀랄만한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또한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곧, ‘나는 이미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부활에서 이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그 말의 의미 라는 것은 문맥으로부터 분명하여진다. 만일 참으로 그가 이제 성도들을 각 각 다른 그들의 상태에 있는 각자에게 비교하고 있다면, 지금까지 그는 모든 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그들의 미래 상태와 비교하고 있었을 때, 또한 다음에 나타나는 귀절들에서 그 비교를 진행할 때,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또 무손 목적 때문에 그가 이 갑작스런 비약을 하게 되었는가?

 

"43. 욕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 어떤 의문이 남아 있을 것 같아 바울은 우리의 현재의 상태와 부활 후의 상태 사이의 차이점을 제시함으로써 분명히 하고 있다.  만일 먼저 그가 성도들이 앞으로 받을 영광의 정도 사이에 차이성을 두려고 하였다면, 그의 논설이 어떤 종류의 일치성을 가질 것인가?  그러므로 그가 지금까지 단일 주제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그는 그가 사용하였던 최초의 직유를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목적에 더 적합하도록 그는 그것을 만들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더 좋아한다면, 그. 직유를 그대로 두면서, 그는 이 현세(現世)의 시간을 은유적으로 씨앗 뿌리는 시기에 비교하고 있으며, 또 부활의 시기를 추수기에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영광스럽고 부패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빌립보서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다른 말로써 나타내고 있다(빌 3 : 21). 곧,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役事)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갈이 변케 하시리라."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 그가 각각 하나 하나의 형체를 자세하게 열거할 수 없으므로, 그는 몸이 지금은 육적인 것이지만 (animale), 그때에는 그것이 영적인 것 (spirituale)이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한마디 속에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더구나 육적(animale)이라는 말은 영혼(anima)에 의하여 결정되어 (informatt1-r)진 것에 주어진 것이며, 영적(spirituale)이라는 말은 영혼에 의하여 결정되어 주어진 것이다.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은 영혼이며, 육체가 시체가 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영혼(anima)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야만 옳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성령으로부터 받은 생명력이 더욱 뚜렷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일하며, 육체의 본질과 동일한 것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것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과 다만 동일한 것이다.

 

그것을 아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육체의 현재의 질(質)을 ‘생기'(生氣:anima· tion)라 부르고, 미래의 특질을 ‘영 ' (靈; inspiration)이 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제 육체에 영혼이 생명을 주는 데 있어서, 그것은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을 포함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음료수와 음식, 의복, 수면, 그리고 다른 모든 그와 비슷한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심할 팔요도 없이 ‘생기'(生氣)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우리에게 증거하여 준다. 그러나 육체에 생명을 주는 성령의 그 힘은 더 충만할 것이며,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필연적인 독립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직선적이며, 바울의 앞에 관한 자연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공허한 상상에 더 이상 빠져둘지 않도록 막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본질이 영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 사실온 그 본질에 대한 진술이 없을 때이며 그리고 그것은 변화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  영(靈)이 그가 ‘육적' 몸에 대하여 말한 것이 새로운 생각인 것처럼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아담이 산 영(靈)이 되었다고 말한 귀절을 그는 인용하고 있다(창 2:7). 그 산 영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의 몸이 영으로 알려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영'·(靈)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는다.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네페쉬'라는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는 그것이 생명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이들여지고 있거나, 혹은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을 니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후자(後者)가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갈은 일이 짐승, 곧 살아있는 생명이 된 짐승에게도 적응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이 그 자체의 종류에 따라 고찰 되어야 하며 한 종류의 생명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영혼, 곧 생명의 원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영혼은 그 인간에게 알맞는 특별한 그 무엇을 갖게 되는데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불멸인 어떤 것이며, 실례를 들면, 이해와 이성의 빛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아담~~~~~~" ; 이 표현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기록된 바'라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이 귀절에서  다만 처음 언급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를 인용한 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에 대한 그 자신의 독립적인 대조를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갈다. 곧 ‘모세는 아담의 산 영을 받았다고 말 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을 부여 받았다. 그리고 생명이 되었다. 혹은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갖는다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갈은 산 영(靈)이었다는 사실을 주목 하여야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에게 부어져서, 그 성령의 능력으로, 그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을 살리실 수 있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과거에 아폴리네리스 (Apollinaris)가 생각하였듯이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여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떠나서, 이 귀절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참으로 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도다’라고 선포한 로마서 8장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우리는 무엇인가 죽을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서 그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영이 또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또한 마지막 날에 죽은자 가운데서 우려를 살리는 생명이 되신다. 당신은 여기에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산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중생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진다.  간단히 말한다면  바울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되는 신분은 최초의 사람의 상태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담은 자신과 그의 후예들을 위하여 산 영(靈)을 받았지만, 한편,그리스도는 생명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류가 '첫 사람' 안에서 회복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간단한 방법으로 되풀이 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첫 사람 안에서 인간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모두에게 주시려는 것을 그 (첫사람―역자 주)에게 주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온 인류의 상태는 그 한 사람의 인성(人性)에 의하여 결정이 된 것이다. 그가 타락함으로 인하여 그 자신은 물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켰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신과 함께 그들 모두를 동시에 불행으로 끌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파멸적인 타락에서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그것을 더 좋은 상태로 끌어올리셨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두 기원이고 뿌리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을  '첫 사람’이라 부르고, 그리스도를 ‘마지막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모든 칭의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우리 인간 중의 한 사람으로 만들고 또한 항상 두 사람만이 있다고 하는 환상가들을 지원해 주는 말은 아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는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는 환상이었던 것처럼 그들이 만드는 것을 이 문장은 지원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와 유사한  비교가 나타나 있다.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기원을 아담 안에서 취하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산 영(靈) 으로 시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 된다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사울의 질서에 있어서, 태어난 존재는 다시 태어난, 존재보다 앞서고 있으며, 또한 비슷하게 살아 있는 것은 다시 산 것보다 먼저 오기 때문이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 육적인. 생명이 먼저였다. 왜냐하면 첫 사람이 땅에서 났기 때문이 다, 영적인 사람이 그 다음에 왔는데  하늘에서 온 그리스도처럼 영적 사람은 아담.다음에 온 것이다.  다시 마니 교도들은 ,이 구절을 오해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와 모태(母胎)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육체를 가져왔다는 그들의 요구를 증명하기 위하여 바로 이 절(節)을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육체의 특성과 그 질(質)을 취급할 때에 여기에 육신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이 불멸의 영을 가졌으며 또 그것이 전혀 땅 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러나 그는 땅과 관련이 있으며, 땅에서 그 몸이 기원했으므로 그가 현재 살고 있는 땅과 무관할 수는 없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땅의 생명보다 더 좋고 또 고귀한 생명으로 우리를 중생시키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생명을 주는 성령을 우리에게로 가져왔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은, 마치 가지가.뿌리에 붙어 있는 것처럼, 아담하게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의 기원이며 근거가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담은 땅에서 났으며,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났다고 말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성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온 육신을 가지셨으며, 아담의 몸은 흙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요구하거나 혹은 최소한 인간의 영혼은 땅에서부터 왔으며, 한편 그리스도의 영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바울이 이 두 사람에 대한 비교를 그 모두에 대하여 상세하고 면밀하게 한 것이 어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와 아담의 본질에 대하여 논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아담이 흙으로 지어졌다고 말하면서 아담의 창조에 대하여 대충적인 섣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귀하신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들로서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품성과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올바른 의미이다. 다른 한편, 마니교도들의 교활한 해석은 다만 오해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문제에 대하여 대답할 일이 남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동안, 그는 우리와 똑 같은 생활을 하셨으며 그러므로 지상적 (地上的)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적절한 대조가 아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마니교도들의 환상적인 생각을 더 논박함으로써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죽음에 복종하시고, 또 부패로부터 그 몸이 다시 구원을 받은 것은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 자체의 어떤 타고난 특성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섭리일 뿐 아니라,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적이었다는 것은 그의 몸의 본질일 뿐 이니라, 한 동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상적인 상태와 같은 상태에 계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하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전에, 그가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죽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가 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이 하늘의 생명이 첫째로 나타난 것은 부활에서였다.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에 대한:소명을 만들기 위하여 그가 여기서 본론을 떠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 시제(時制)를 미래 시제로부터 권고적 가상법으로 바꾸고 있다. 더구나 어떤 헬라어 역본들은 '포레소멘'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잘 적합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차라리 그 문맥에 적절한 것과 또한 바울의 직접적인 목적에 일치하는 것을 취하도록 하자.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권고가 아니라, 순수하고 단순한 교훈임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생명의 새로움에 대하여 취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논증을 실마리를 맺지 않고, 육체의 부활에 대한 그의 논리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이것은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가지고 있는 ‘동물의 성질'은 아담의 형상이므로, 우리는 또한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부활이 완성될 때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시작하였으며, 또 우리는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점점 변형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 형상은 영적 중생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의 육신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곧 지금 시작한 그것이 완성될 것이며, 또한 우리는 지금은 다만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그것을 실제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아직도 다른 해석을 취하려 한다면, 이 귀절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만을 가져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경건과 새로운 생활을 생각하는 속에서 참으로 살고 있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그들을 하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으로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