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 5:1 ~1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1)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2)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3)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4)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6)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7)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9)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0)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절" ; 누가가 여기까지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온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진 그 단체가 사람들의 단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사들의 단체와 같았다는 사실이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돈뿐 아니라 그들의 토지까지도 내던졌다는 것은 견줄 데 없는 덕행이었다. 이제 그는 실제로 다음의 사실을 보여준다. 즉 사단은 이 거룩한 교단 (holy community) 에 참입할 계략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고상한 미덕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교묘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놀타운 위선의 방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공공연한 싸움에서 승산이 별로 없을 때 그런 위선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방법을 삼는 것은 물론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성령의 의도하시는 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그는 첫째 마음의 정절이 얼마나 하나님울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또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협오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둘째로는 교회에서의 순결하고 거룩한 정치형태를 얼마나 크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가를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요점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에게 과하신 형벌인 것이다. 그 당시에 그 중한 형벌이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처럼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가 성도의 걷치레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로 농락한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불성실을 용납하실 수가 없다는 훌륭한 중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서 전체면의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누가는 거짓된 헌금으로써 하나님과 교회를 기만하려고한 단 한 가지 최 때문에 아나니아를 비난한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만의 배후에는 많은 악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비뚤어진 마음을 알고 계셨지맏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멸시한 일, 둘째 그는 하나님에게 바쳐지기로 스스로 표명 한 것의 일부를 절취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하는 부정을 자행한 일, 세째 그릇된 허영심과 야심,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이를 조금도 .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환심을 사고자 한 일, 네째 불신앙,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러한 범행의 길에 발길을 내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앙적이고 거룩한 계획을 망쳐놓은 일, 여섯째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위선이 그 자체 안에 있는 큰 죄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그의 계획적이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첨가될 수 밖 에 없다.
아나니아가 자기의 토지의 값의 절반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표면상으로는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 이었다. 그리고 한 부자가 가난한 사람 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고르게 분배해 주는 일은 실상 큰 미덕이다. 그러나 "악인의 제사는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참 15:8)" 그리고 마음의 진실함이 동반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을 기쁘지게 할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과부 가 드린 동전 두 푼을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거대한 재산에서 끄집어낸 큰 액수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이다(눅 21 : 2).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에게서 매우 강렬한 징벌을 예로 만드신 이유이다. . 이제 개개의 요접을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 야심이라는 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라. 아나니아는 자기가 사람들 중에 서 가장 훌륭한 사람 가운 데 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실율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돈에 욕심이 있는 자이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 가운데서 스스로 온 명망을 얻어내기 위하여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내놓았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께서 그 거짓으로 인하여 자기를 형벌하실 것이라는 일에 대하여 전혀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실제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눈보다도 사도들의 발을 더 존겅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세인의 눈길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충고해 주셨다. 즉 우리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라는 것이다(마 6 : 3)
"3 베드로가 가뢰되 ~~~~~~" ; 베드로는 어떻게 아나니아의 사기행위를 알게 되었던가? 의심없이 그것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사도들이 어 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대표하였고 (sustinuisse Dei personam) 또 그의 대리로 행동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만일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죽어야 할 사람의 입을 이용하셔서, 비록 사람이 거짓된 미덕의 외관 속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그 위선자를 그처럼 즉석에서 타격을 가 한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십판의 자리에 출두하게 될 때에 그 나팔의 날카로운 음향을 동반한 하나님 자신의 음성 앞에 어떻게 위선된 인간들이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고 말함으로써 그 범죄의 가공할 만한 것임을 지적해 준다. 왜냐하면사단의 독안에 마음이 찔림을 받지 않은 자는_한사람도 없으며 또 많은 유혹이 이들 개개인에게 몰래 스며와서 그들의 마음 속까지 파고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이 그 마음을 잡게 될 때에 마치 하나님온 거기서 추방되는 것처럼 되기 때문에 사단이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머물만한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가 사단에게 넘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립받은· 자의 표지인 것이다.
거짓말한 일에 뒤따르는 것온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그가 성령을 소유한 것 갈온 거짓 겉모양을 지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성령을 거스러 거짓말한 것이거나 어느 것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헬라어에) 문자적으로는 ‘성령 을 속인 것 ' 이다 (Spiritum mentiri). 그러나 헬라어의 프슈-데 스다이 라는 말은 이 중의 대격(對格)에 연결 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본문에 더 적합하므로 나는 차라리 아나니아가 자기의 불신령위로 성령을 조롱하였기 빼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논 조금 후에 아나니아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이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선이 우리를 지베하지 못하도록 대단히자신을 수호하는 일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연 위션의 본절은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악이요. 또 이를테면 속담에 있듯이 생 눈을 빼가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조롱으로써만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은 그 마음이 사단에게 빼앗겨 버리기 때문이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은 자못 지당한 말이다. 왜냐하명 그가 모든 식별력과 이성을 잃지 않고서야 감히 그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모욕적엘 행위를 가질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괴물에 관한 일인 양 그를 심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려한 종류의 무분별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 ; 그에게 아무런 팔요 요건이 없었는데도 최를 범하였다는 그 사실이 그의 죄과룰 더욱 크계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그 범죄가 어면 외부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자극돼어졌다는 적당한 구실이 전혀 없는 까닭에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악으로 달려가 이를테면 일부러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였다는 사설은 얼마나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이 사실에서 우리는 거기에 누子 한 사람이라도 법으로써 그 재산을 양도하도록 강제된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추측한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자기 돈을 남겨두거나 자기의 토지를 팔지 않고 소유하거나 할 자유와 권리를 가저고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의 나중 부분에서 팔린 밭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실제의 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소운재산이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불신앙의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제산을 소유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못 정신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 이 문귀는 다르게 구성 되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앞의 글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겨 않는다. 왜냐하면 위선자란 많은 덮게로 가려져서 자신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나나아는 교회를 속였기 때문에 베드로는 참으로 분명하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도 그 가운데 계셔서 주재하신다"(마 18 : 20) 는 사실을 그는 고려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 그 모임에서는 마치 자기가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지배권을 잡기 원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어떤 존경을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써 행사하시는 그 통치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존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사사로운 일은 (privati) 행동하지 않았다. 한편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성령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울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의 표현으로 성령의 신성이 확실히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동일한 생각으로 "성령이 너희 안에 거 하시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 : 16) 고 말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 아나니아의 죽음은 참으로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 것임을 확증해 준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고후 2 : 16) 라고 말함으로써 이 말씀의 능력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실상 혼의 영적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아나니아의 몸에서는 인간의 눈에는 숨겨져 있는 그 형벌의 가견적인 상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나 세력으로나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생명을 빼앗긴 것이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복음을 박해하는 일의 두려움을 알아야 하며 또한 우리도 동일한 운명울 경험할 것에 대비하여 재빨리 스스로 겸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 "(사 11 : 4) 라고 선언된 사항은 악인의 우두마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요 또한 각자 개인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의 고유의 본질은 구원하는 것이었으므로 말씀이 제공해 주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에 누구에게라도 사도가 육체적 형벌을 준 것이 부조리하게 여겨진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의 비상(非常)한 일이었으며 둘째로 그것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밝혀진 대로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마술사 엘 루마 (Elymas) 가, 바울에 의하여 소경이 된 까닭인 것이다(행 13 : 11). 그러므로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전 화살을 적당한 때에 쏘았는데 그것은 그의 칙책에 벗어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그 형벌은 너무도 잔혹한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들이 아나니아의 죄과를 하나님의 저울로 달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의 것으로 달기 때문이요. 또 따라서 우리가 그처럼 많은 죄악으로 가득찬 것으로 이미 나타난 중대한 범죄를 아주 하찮은 허물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은 신빙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들은 대단히 많은 위선자들이 아나니아 못지 않게 하나님을 조롱해도 처벌이 면제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실상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만 하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지독한 하나님 모독자들이지만 자기들의 불경 때문에 형벌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처음에 그의 교회 위에 눈에 보이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써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실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또 한 걸음 더나아가서 우리가 신앙 경험에 의하여 내적으로 실감한 바를 외적인 표적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교회를 조롱하는 모든 위선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두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벌에 의하여 명시하신 것이다.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한 사람의 형벌로써 다른 사람들을 두려웁게 위협하는 일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로써 그들이 의식적으로 모든 허위를 단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가 그들이 두려워한 일에 대해서 말한 바는 우리에게도 또한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설할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모든 세대에 대하여 일반적인 경고를 주시기 원하셨다. 어쨋든 이 가련한 사람의 형벌은 그 후에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재산을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에게 바치는 일을 더욱 풍성하게 하도록 장려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선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일이며 그 일을 더럽히는 일은 그처럼 엄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7절" ; 하나님께서 삽비라에게 과하신 형벌에 대해서는 그것이 본보기를 위한 보다 큰 효력을 더해준 것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더구나 그들 각자의 배신적인 의향과 그 완강한 악의를 따로따로 교회 전체가 보았다는것온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똑같이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관한 정보물 동시에 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매우 분명히 나타냈다고 하는 것이 교회의 선도를 위해서 더욱 적절하고 유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런일이 그런 으로 가끔 생겨나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남편의 목전에 있는 일이 삽비라의 위장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녀의 범죄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주어전 어떤 압력이 그녀에게 가해짐이 없이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보다 나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베드로의 심문에서 자기들의 사기행위가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의의 거짓말을 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8 내게 말하라~~~~" ; …·하나님은 고질적인 자돌과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복수하는일이 되지 않기 위하여 돌발적인 충동으로 형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먼저 적당한 조사를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된다. 그것은 삽비라가 그 사건이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은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그런 심문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 앞에 소환된 것과 같이 간담이 서늘해지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녀에게 제 정신에 돌아울 만한 시간이 주어졌다. 실상 그것은 회개할 수 있논 조용한 초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없이 행동함으로써 자신이 치료될 수 없는 인간이며, 또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운 것이다. 즉 우리가 죄인들을 정상적인 길로 데려오는 데는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이려한 절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고집스럽고 완강한 모욕이 그 범죄에 첨가될 때에는 그것은 이미 형벌해야 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과도한 엄격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지나치게 거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차라리 어떻게 우리가 장래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반영시켜 주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일 형벌받는 일이 없이 하나님을 기만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지나치게 그의 거룩하신 존엄을 무시하는 일인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위에서 서술한 그 모든 상황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의 죽음에 해당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첫째로 위선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지극히 싫어하기 때문이요,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그들의 의도는 최고의 경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 모임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신앙에 파렴치함이 첨가된 것이다. 더구나 그듈은 자신들의 선량한 모습을 과시해 보여 주려고 했던 그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불명예를 면해 보려는 마음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명백한 악을 부인한 일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기들의 죄상에 대한 완강한 부정이 모든 것의 극치점이다 (veluti summus cumulus). 그런데 무수한 위선자들이 날마다 이 두 사람 못지 않게 하나님과 교회를 속이지만 그러면서도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왜 부조리로 여겨지지 않는가 하는 것은 내가 이미 설명한 바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결정대로 각 개인을 형벌하시는 일은 그분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논 하나님께 대해서 형벌의 어떤 특정한 방법을 규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신체적 형벌에는 아직도 숨겨져 있는 영적 심판의 중대성이 거울 속에 비치는 것처럼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영원한 불 속에 던져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의 눈 앞에 서 넘어져 죽었다는 것이 재앙 중의 최악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그린도전서 10장 5절을 보라
"9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그는 자기 가 조금 전에 한 말, 즉 그들이 불신앙적으로 또는 경멸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조롱한 일을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치 하나님 의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분 (cognitor) 이 아닌 것 처럼 , 조심없이 자기들의 사기행위를 고안해 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성령을 시험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이 범죄에서 서로 공범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가리위지신 것처럼, 서로 자기들의 계획을 자기들만이 알고 있는 것같이 생각한 것은 너무도 경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제거되거나 그의 전지(全知)가 무시될 때에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성령을 말할 때에 그분은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지배하시는 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떤 그가· 제상을 십판하실 것이다"(요 16 : 8) 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의 마음에 생각하신 지배권은 그가 교회의 선교를 통하여 행사하신다는바로 그누 것 뿐이라고. 여기셨기 문이다.
"11 다 크게 두려워 하니라" ; 한 사람의 형벌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었다고 그는 다시 반복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분명히 다 종류의 두려움을 설명하고 있다. 신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경고를 받음으로써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것이 없을 정도로 그처럼 완전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일찌기 없었기 때문에 그는 교회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악한 자들에게 가하셨던 그 모든 형벌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읽고, 또 오늘도 날마다 실제로 악인돌에게 가 해지는 형벌을 볼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인하여 범죄의 유혹과 방종에서 돌아서도록 자주 경고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란 그 처럼 계속적으로 점겁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굴레만으 로는 그 목적을 이루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인 것이다.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다몬 종류의 두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 배하기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둘리지 않고는 안되도 록 강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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