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3:1 ~ 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1)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2)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3)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4)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5)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6)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7)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8)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9)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 누가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떠 메어져 왔다고 했을 때 우리는 거기서 그 사람은 사소한 불구가 아니요 그의 다리가 죽어버린 것 같이 누워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걸하였던 사실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졌을 것이다. 기도시간에 그가 고침을 받아 성전 안에서 걸어 다니기 시작한 사실에서 이 기적의 소문이 더욱 멀리 퍼져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즉시 자기 발로 일어서서 뛰어다니고 기쁘게 걸어다닌 일도 이 기적에 첨가된 증거가 되었다.
"성전에 올라갈새" : 주께서는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희생제물을 드리도록 정해 주셨다(출29:41). 이를 실천하므로써 그들은 하루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로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미28:4).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성별하신 성전에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그로써 자기들의 신앙심을 증거하였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옛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을 지키도록 원하셨다는 사실에서 교회도 어떤 정해진 규율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점을 결론지을 수 있다. 오늘이라 할지라도 만일에 우리의 지나친 게으름이 그것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날마다 그러한 모임을 가지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는 일에 대하여 거기서 우리는 복음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기회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3 ~~~~구걸 하거늘" ; 우리는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책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선 이 앉은뱅이의 인간 속에서 어떻게 옳게 기도할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직 믿음으로 눈이 열려지지 않은 사람으로써 우리 앞에 실예로 보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이런 사람들에게 기선을 제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고쳐주실 때 건강케 하시는 것만이 아니요 생명까지 주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생겨나지 않은것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일이 우리를 부르시는 첫 계단인 것이다(롬4:17, 사65:1). 더구나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가르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는 고침을 구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신의 마음대로 또는 우리가 예기치 않은 치유를 베풀어 주신다. 결국 우리가 아므리 많은 기도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우리의 희망과 탄원을 초월하여 자신의 선하심을 베푸신다.
"4 우리를 보라 하니" ; 베드로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확신이 없이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실히 그는 이 말로써 그 사람에게 어떤 진귀하고도 이례적인 축복을 희망하도록 종용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때마다 가끔 기적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을만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대행자였으므로 자기들 자신의 의지나 독창력으로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주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을 때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을 고쳐주는 일이 생겨났고 모든 사람을 예와 없이 고쳐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음 사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인도자요 지휘자로서의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기 전에 그를 주목하였다. 이런 주목하는 시선은 성령의 특별하신 고무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이 기적이 일어나도록 그처럼 자신감에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한 까닭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말로 인하여 그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각성하기를 그는 원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동냥 밖에는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6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가 구하고 있는 종류의 원조가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을 변명한다. 그리고 그는 만일 자기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의 가난을 구제할 것이라고 명언한다.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은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화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준다고 말한다. 얼른 보아서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가공적인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그를 위로하는 말을 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가 자기의 두 발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름'이라는 말은 권위와 능력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경멸을 받아 나사렛예수로 호칭되었으므로 베드로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나사렛예수, 그의 이름이 유대인 가운데서 멸시되고 불명예스러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그 이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였으며 또 그 분에게 하나님께서 일체의 자기의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표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자기는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전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고전2:2)
"걸으라" ;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로 보였을른지 모른다. 그 앉은뱅이 사나이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었다. 즉 "왜 당신은 먼저 내게 다리와 발을 주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에게 발도 없이 걸으라고 명령하는 일은 조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처럼 부진하였던 그가 이제는 간절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사실이 바로 말씀의 효력과 믿음의 결과를 모두 명백하게 만들어 준다. 말씀의 효력은 두 가지다. 첫째는, 그 앉은뱅이가 그로 인하여 감동을 받아서 지체없이 즉각적으로 순종하게된 것이요, 또 하나는 그 사람의 죽은 지체에 힘을 주어 그를 새 인간으로 만등어 준것이다. 그가 일어나서 걸으라는 명령을 헛되이 복종한 것이 아닌 까닭에 신앙은 해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말씀을 통하여서 역사하시는가를 알게 된다. 즉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성공적이게 하셔서 그로 인하여 말씀이 사람들의 심정을 뚫고 들어가게 함으로써 또는 거기에서 약속되어 있는 일들을 친히 주심으로써 역사하시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헛되게 되는 일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앙이 향유하게 하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인하여 파악된 말씀이 그 앉은뱅이를 건강한 몸으로 회복시켜 준것 같이 주께서는 또한 그 말씀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시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의 입을 의지하여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복종을 권장하신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성령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감동시키셔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산 뿌리가 내리게 하시며 끝으로 하나님은 그의 손을 펴사 모든 방법으로써 우리 안에 자신의 역사를 완성시키신다. 기적이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태로부터 배운다.
"9 모든 백성이 그의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 그는 이제 이 기적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불구자는 하나님을 찬미함으로써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증거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놀람으로써 압도당했다. 여기에 이중 성과가 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했으며, 한편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그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보려고 찾아 온 것이다. 그런데 누가가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기이이 여겻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지 첫 계단을 지적한 것 뿐이요 그다음에 보다 충분한 성과가 따랐다. 그들은 거기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