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행 2:37~42)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7)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8)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39)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40)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1)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누가는 이제 베드로의 설교의 성과를 우리에게 증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비단 다른 방언으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것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또한 나타났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가는 이중효과에 주목한다. 첫째는 그들의 비탄의 감정으로 마음이 찔렸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들이 베드로의 권고에 순종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회개의 시작이다. 우리의 죄과에 대하여 슬픔을 느끼고 또 우리의 나쁜 짓의 자각으로써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일은 신앙심에 들어가는 입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없이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참된 가르침에 참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은 검에 비교되는 것이다 (히4:12).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 우리의 육체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음의 찔림에는 복종의 의지가 첨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가인과 유다는 마음에 찔림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절망으로 인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방해를 받았다. 두려움으로 억압된 마음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통회하는 마음과 겸비한 심정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희생이라고 우리가 들었을 때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자발적인 마음의 찔림이다. 악한 자의 양심은 큰 사회적 불안과 섞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고 또 그가 명령 하시는 바를 따르도록 준비되기 위하여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며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하여야만 한다. 날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찔림을 받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초조해하고 또는 불평을 터트리며 혹은 아니면 맹렬하게 반항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광폭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광폭으로 달려가게 되는 그 진정한 이유란 바로 자기들의 의사를 거슬러서 그들이 그러한 찔림을 받게되기 때문이다. 기쁜 마음으로 괴로움을 맛보려고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으려는 마음의 준비를 가진 사람들만이 이러한 종류의 찔림에서 이익을 얻게 된다.
"38 베드로가 가뢰되" ;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일을 알게된다. 즉 주의 일 곁에서 묻는 자들, 그리고 주께 지배를 받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은 결코 헛되이 떠나가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7)" 한 그 약속은 결코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알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주께서 그들의 거룩한 욕망을 거부하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그가 배우고 알고 싶어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제자를 만나기만 하면 그는 가장 훌륭하시고 가장 충실하신 스싱이시며 믿음직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를 무엇이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현명한 조언을 주시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의 조언과 권위에 지배를 받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사도들의 시중을 든 사람들의 재빠르고도 신속한 복종은 그들의 구원의 길을 저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저들이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 이 헬라어에는 보다 큰 강조가 있다. 그 말에는 전 인간이 새로와지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마음의 회심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교황정치 시대에 비참하게 부패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유의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특히 회개라는 명목을 어떤 외면적인 의식으로 이전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로마서 12장 2절에서의 가르침처럼 사람이 그 마음의 영에서 새로와질 때에 진정한 회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또 베드로가 회개의 효력과 성질에 대해서 분명히 설교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는 단지 그 요점만을 지적할 뿐이요, 그가 설교한 전체 내용을 기록해 주지 않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이 있다. 베드로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당부했고, 그런 다음에 그들에게 죄 용서의 확신을 주어 정로에 들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복음의 두 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교리 내용을 간단히 말씀하시고자 했을 때에 그가 하신 말씀은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의 용서를 전파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눅24:47).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중재로 인해서만 하나님과 화해 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의 죄가 그의 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끗해질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기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분명히 그의 이름을 상기 시키는 것이다. 네번째로 그는 은혜의 약속이 완성되는 보증으로써 세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몇 마디의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총체를 보게된다. 이를테면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는 일, 둘째로는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로 인하여 죄책감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고 또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는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가 무상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신앙과 회개의 유일한 기초로서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설교는 교회 안에서 계속 울려나와야 한다.
"각각 ~~~~~세례를 받고" ; 이 귀절의 내용에는 세례가 죄 용서에 선행되는 것으로 되었지만 순서로 말하면 그것은 나중에 와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유하게 되는 축복의 증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축복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회개를 말한 뒤에 유대인들에게 은혜의 확신과 구원의 희망을 촉구한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여기에 죄의 용서를 삼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똑 같은 의미에서 나중에 바울의 설교에서는 신앙과 회개를 결부시키고 있다. 그것은 정당하게 된 일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희망이란 단순히 값없이 거져 주시는 의의 전가에서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또 회개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날마다 울려 나와야 한다고 내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죄의 용서도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처음 입회했을 때 못지 않게 우리의 전 생에에 걸쳐서 계속 필요한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5:20~21)" 고 하신 그의 이 임무가 이를테면 계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 없이는 한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받아 주신 일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세례는 헛된 표가 아니요, 참되고 효과 있는 증거라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라도 세례에서 주어지는 혜택이 물의 성분이라고 믿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분명하게 표시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의 능력과 효과를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하며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므로 세례에서 우리가 씻김을 받는 줄을 알 때에만 이 증표는 우리에게 유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그들은 사도들이 갑자기 외국 방언을 말하기 시작함을 보았을 때 놀라움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온다면 같은 은사에 참여한 ㄴ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은사는 죄의 용서와 생명의 갱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눈에 보이는 은사로서 자기의 능력을 그들에게 보이시기 위한 어떤 특별 추가분이었던 것이다. 이 구절은 모든 신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성화의 은사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그들이 다름 방언에서 그 예를 본 그 성령의 은사를 그들에게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이적으로써 그의 왕국의 개국을 장식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났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며 우리의 혀는 진정한 고백을 하도록 훈련을 받으며(롬10:10),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며(요5:24) 가난하고 궁핍한 우리가 부해지며 그리고 사단과 이 세상에 대해서는 승리자가 되게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쪽에서 어떤 방해가 생겨나지 않는 한 성령의 은혜는 세례에 결합될 것이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확신하게 되도록 이것은 특히 말해질 필요가 있었다. 배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 계단에 주목해야한다. 첫째계단은 그 약속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고, 둘때계단은 그들의 자녀에게 주어졌고, 셋째계단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총애를 받게 된 까닭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의 장자요 (출4:22) 또 하난의 특권으로써 다른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우월성을 주는 것은 정당한 질서를 지키는 일이다. 그 자녀들을 추가한 것은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양자 삼으심의 은혜안에서 그 자녀들을 부조들과 함께 계산해 주신다.
"모든 먼 데 사람~~~~~" ; 베드로는 공간적 거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계약을 근거로해서 하나님과 맺어진 최초의 백성들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는데 이방인들은 그의 왕국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배소서 2장 12절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이방인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중간의 막힌 담을 허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함께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으며 또 그의 오심으로써 가까이 있는 자에게와 먼데 있는 자에게 화평을 전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베드로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이해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할 양으로 이방인들도 역시 그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도 그런식으로 제공해 주었다.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뢰되~~~~~" ; 당시의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큰 권위를 향유하고 있었으며 교회의 가면과 복장을 걸침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일이 심각하게 방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다시 흔들릴 수 있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진정한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아무리 그들이 교회의 이름을 자랑할지라도 구부러진 시대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다.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 누가는 베드로의 이 한 설교가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보여준다. 즉 그것은 삼천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얻은 것이다. 그들이 그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쾌히 받아들였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신앙의 능력과 성질이 어떤 것인가를 또한 보여준다. 우리도 복종하기를 더디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일에 재빠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처럼 열심으로 받아들인 가르침에 우리는 굳게 그리고 단호히 매달려야 한다.
"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 누가는 단지 신앙과 헌신에서의 그들의 변치 않는 지조를 칭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작업에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념했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에 힘썼으며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떡을 떼는 일을 계속 시행하도록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떡을 떼는 것은 코이노니아 즉 주의 성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 '성도의 교제', '주의 성찬', '기도'임을 깨닫게 한다.
"서로 교제하며~~~~" ; 이 부분과 또 마지막 부분은 매 처음 부분의 열매 혹은 결과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르침이란 우리 사이에 있는 형제적 사귐의 유대요 동시에 하나님께로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며 또 성찬은 교리에 대한 확증으로 거기 첨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질서가 잘 세워진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해서 이 네가지 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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