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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14:12)

1. 성경 (롬 14:1 ~ 1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2)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3)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4)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5)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6)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7)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8)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9)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0)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1)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 . 그는. 여기서 교회를· 가르치는데 특별히 필요한 교훈으로 넘어가고 있다. 곧, 기독교 교의에 있어서 더 큰 진전을 본 자들은 스스로를 체험이 보다 적은 자들에게 ·적용하며 이 사람들의 연약성을 부축하는데 그들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남보다 더 약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며, 이런 사람들을 만약에 아주 부드럽고 너그럽게 대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낙심하게 되고 마침내 신앙에서 소외되어 버리고 만다. 추측컨대 당시 교회가 특별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섞여 있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다. 이들 가운데는 모세 율법의 의식 준수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으며 유아기 때에도 그것을 먹고 자랐기에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것을 전혀 베우지 못했기 때문에 습관 들지 않은 멍에를 거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들은 단순한 견해 차이 때문에 쉽게 논쟁과 분쟁으로 미끄러져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도는 서로 다른 견해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불화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더 힘이 센 사람들은 약한 자들을 돕는데 그들의 수고를 드리며 더 큰 진전을 본 자들은 미숙한 자들을 용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 보다 힘세게 하실 경우 그가 우리에게 약자를 괴롭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정도 이상으로 오만불손해 하며 타인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지혜일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보다 더 체험이 많고 이미 확증을 얻고 있는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에게 그만큼 더 자기 이웃을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의심스러운· 논쟁에 .. …·하지 않는) 이 문장에는 그 의미를 완결하는 단어가 없는만큼 불완전하다.  하지만 약한 자들을 골치 아픈 논쟁으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의도라는 점이 명백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전제를 명심할 팔요가 있다.  유대인들 갸운데 율법의 그림자에 집착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당분간 용서해 줄 것을요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을 너무 가혹하게  누를 경우 그들의 신양이 뿌리째  뽑혀 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직 충분히 확립되지 않은 마음을 괴롭히거나 그들을 회의 속에 말려 들게하는 질문들을 논쟁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자만 우리는 이 귀절을 넓은 의미로 확대하는 가운데 연약한 양심에 덕이 되기는 고사하고 불안과 동요를 일으키는 얽히고 섥힌 난제를 모두 여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어떤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우리의 가르침을 개인의 능력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2. 어떤 사람은……믿음이 있고……” ;나는 에라스무스가 여러 독법 가운데 어느 독법을 따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바울의 말에 있어서는 완전한 것을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고 있으며 관계사를 사용하는 대신 부정확하게  '다른 이는, 사실, 믿는다' 하는 말을 삽입하고 있다. 내가 원형 동사를 명령법으로 취하는 것을 조야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것은 바울은 아주 빈번하게 이런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들의 양심에 확신을 가진 자들을 신자들로 말하면서 그들이 아무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연약한 사람은 채소를 먹으며 먹어서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삼간다. 통상적인 번역을 따른다면 그 의미는 거침없이 모든 것을 먹는 자가 나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아직 미숙하며 신앙이 연약한 자들에게서 동일한 원칙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식이 될 것이다. 이 단어를 '병든'으로 해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 …” ;·바울은 양쪽의 결점을 아주 현명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다. 더 힘이 센 자들에게는 이런 잘못이 있다. 그들은 사소하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그게 우매한 미신이 가득차 있다 해서 멸시하고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후자는 거의가 성급한 판단을 내리며, 그들이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죄하는 일을 피하지 못한다. 그들 자신의 견해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그들은 악으로 여기고 만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자에게는 너무 소심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가 덧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양자에게 다 적용되는 만큼, 두 귀절에 다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지식으로 일깨워져 있는 것을 볼 경우 여러분에게는 그가 주님의 영접을 받았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여러분이 그를 멸시하거나 정죄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자를 베척하는 것입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만약에 우리가 남의 하인에게 우리 의 법을 순종하도록 강요하며 그의 모든 행동을 우라 자신의 판단의 원칙에 따라 측량할 경우 우리의 행동이 무례하고 오만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을, 그의 어떤 문제가 우리 비위에 맞지 않는다해서 정죄한다면 우리는 월권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가 마땅히 하고 안할 문제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요, 그는 또한 우리의 규정대로 살 필요도 없다. 바울은 우리에게서 심판하는 권리을 박탈하고 있는 데 그는 사람과 행동 모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내리는 판단은 인간적인 것도 아니요 이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우리들이 어떠한 무모한 판단도 내리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판단을 내리려 할 때 빠지기 쉬운 잘못이다.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 • 이것은 당신의 종의 행동을부인하거나 용납하는 권한을 주님께서만 갖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이다. 이 권한을 스스로의 것으로 탈취하려는 자들은 당신의 마음을·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하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바울은 우리에게 정죄하는 것을 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자비 와 친철을 권면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항상 좋은 소망을 품게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당신의 은혜의 일을 시작한 자들을 전적으로 확증시켜 주고 그들을 완전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점을 소망할 이유를 우리에게 이미 주셨다.

 

바울은 마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것을 행하실 수 있다는 식으로 , 하 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통상적인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능력과 연관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마치 하나님께서 한 번 세워 놓은 자들이 끝까지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어떤 영속적인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좋은 소망을 품고 우리의 판단을 이런 방향에서 내릴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여러분들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빌 1 : 6 ).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강한 사랑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바울은 지금까지 음식의 선택에 있어서 따르는 조바심에 대해서 언급했다. 여기서는 날을 구분하는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덧붙이고 있다.  양자는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음식을 구별하면서 어떤 것을 불결한 것으로 선언하여 그것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  그는 또한 절기와 엄숙한 날들을 정하면서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율법의 가르침의 양육을 받아 온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이 처음부터 받았으며 일생에 걸쳐서 습관이 든 절기에 대한 존경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처럼 장기간에 걸쳐서 삼가해 온 음식에 감히 손을 대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연약성의 표시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명백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양심에 위배되는 무엇을 행하는 것이 뻔뻔스러움과 모독의 표시였듯이, 그들이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삼가는 것도 신앙의 표시였다. 그러므로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목적을 확실히 할 것을 명함으로써 우리에게 여기서 아주 현명한 안내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이 말에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확신이 서지 않는 문제는 아무 것도 행하자 않을 정도로 주의깊게 순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들이란 하나님의  뜻에  의존해야 하며, 만약에 그들이 확신할 수 없거나 마음에 망서려질 경우에는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는 것을 허용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 참된 생활의 원칙이라는 점을·우리는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감히 확신 이상으로 나아가려 할 때면 경솔은 급속하게기 교만으로 변하고 만다.  혹 어떤 사람이 항상 실수가 따르는 어려움은 있기 마련이요, 그러므로,바울이 요구하는 확실성은 연약한 자들에게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반론을 재기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스스로의 한계 안에 머무르게만 한다면 용서를 받기 마련이다. 바울의 유일한 바람은 무수한 사람들이 마치 우연히 그런 것처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문제에 말려드는 옳지 못한 방자함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첫째가 되도록 선택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바울은 절기의 준수가 그리스도의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만큼 우리는 그가 그러한 타락행위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으로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말씨에는 절기를 준수하는 자들이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 셈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한 것만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준수해야 할 절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품고있는 견해와 그들이 묶여 있는 준수 그 자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견해는 미신적인 것이요 바울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그것을 연약한 것으로 부름으로써 그것을 정죄한 바 있으며 다음에 더 공공연하게 그 점을 밝힐 것이다.

 

이러한 미신에 사로잡힌 어떤 사람이 어떤 날의 엄숙합을 해치지 않으려 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이 점을 인준하시는 것은 그가 무슨 일이든 의심스러운 양심으로 하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대인이 절기에 대한 미신적인 준수로부터 완전히 구출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절기의 준수를 추천하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준수의 필연성은 율법에 의해서 그에게 부과되고 있으며 그는 그것이 폐기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보다 더 완선한 계시을 기다리며 자신을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국한시킬 도리밖에 없으며 자유(liberty)의 축복 역시 그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부정한 음식을 삼가는 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견해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만약에 그들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먹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 것이 되지 않고 금지된 것에 손을 대는 셈이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생각에 허용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것들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이해의 정도를 따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친철하심에 의해서 먹여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드릴 수 없는 감사를 주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이 마치 이 자제와 독실한 극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식으로 그들을 무시해 서는 안된다. 연약한 자들의 자제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시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말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바울이 마음의 확실성을 요청한 것은 아무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무모하게 이런 저런 것을 지키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본 문단에서 확증하기보다는 권면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야겠다. 이 문단을 다음과 갈은 식으로 읽게 되면 더 부드러울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행동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겠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그것에 대해서 이실 직고 해 야 하기 때문이다.  곧 어떤 사람이 고기들 먹든 삼가든, 그는 어느-경우에 있어서나 하나남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 일방적인 판단의  자유를 억제하고 미신을 교정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우리를 소환하는 것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현명하게 각 개인을 각자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참조해야만 하는 뜻의 주인공인 유일한 재판관 앞에 고정시켜 놓고 있다. 본 문장이 긍정형 식이라 해서 이 해석과 위베될 수 없는 것은, 바울은 곧 이어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죽는 자도 없도다” 하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해야 옳은가 하는 점을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주님께 대하여 먹거나 먹지 않을 경우, 우리가 당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주목을 요한다.  여기서 감사를 드리지 않고 먹는 것과 절제하는 것이 불순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행동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의 그 이름 뿐이다.

“7. 우리 증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그는 이제 전체에서 부분으로 이론을 전개하면서 앞 문장을 확증하고 있다. 우리 생활의 세세한 행동이 주님과 관련지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은 생, 그 자체가 전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위해 바쳐져야 옳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목표로 삼을 때만 제대로 질서를 잡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 뜻과 관련지어져야한다해서 우리 생각에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 아니 하나님을 기쁘시게하지 않는 것으로 확증하는 것을 모조리 시도하는 것은 아주 부당하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볼 위하여 살고……” ; 이것은 6장 11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당신에게 살아 있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당신의 뜻과 기쁨에 일치하며 만사를 당신의 영광에 따라 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 뿐 아니라  '주를 위하여 죽어야' 마땅하다. 곧 우리의 생사가 당신의 뜻에 내맡겨져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여기에 대한 최선의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에게는 생명과 사망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결론이 따른다. 이 교의의 적용은 아주 광범위하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생활 조건을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로 알고 감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생사에 대한 능력을 주장하고 계신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각자의 인생의 위치와 진로를 할당해 주신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과 무관하게 아무것도 성급하게 지도하지 말라는 금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고용과 상실에 있어서 인내한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때건 육신이 역경에서 움츠려들 때마다, 누구든지 자유롭지 않고 자산의 주인이 아닌 인간은 만약에 자신이 주의 뜻에 의지하지 않을경우 법과 질서를 의곡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죽는데 있어서의 원칙을 배우게 되는데 당신께서 계속적인 술픔과 지루함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간이 되가전에 떠나려고 에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께서 우리의 인생의 절정기에 우리를 소환하 실 경우 항상 출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9.. 이틀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냐 죽었다가·: •.•• “ ; 이것은 앞에서 나온 이론에 대한 확증이다.  우리가 주님께 대해서 살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뜻에서 바울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는점을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아주 비싼 값을 치르고 우리에  대한 권세를 획득하셨기 때문에 당신께서 우리에 대해서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담당하심으로써 사람이 파괴할 수 없는 지배권을 당신에게 확보해 놓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의 전체 생활을 당신 자신의 소유로 받아들여 주셨다.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살거나 죽거나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섬길 수 있게 해주셨다.  '다시 살으셨다' 는 말에는 당신의 부활에 의해서 새로운 삶이 당신을 위해 확보되었으며, 당신께서 현재 누리고 있는 생명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우리에 대한 당신의 지배권은 영원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 ;. 우리 모두의 생명과 죽음을 그리스도와 관련시킨 다음에 그는 아버지께서 천지의 지배권과 함께 당신에게 베푸신 심판권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부터 누구든지 자신의 형제를 판단하는 권세를 횡령하는 것이 무례하고 주제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런 재량권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당신께서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능력을 강도질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는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이 욕망을 제지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형제단(asocietyrofbrothers)을 정해 놓으셨다면 평등이 준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재판관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는 자는 오만불손하게 행동하는 셈이 되고 만다. 다음으로 그는 아무도 그 권세를 제거할수 없고 그 법정을 피할 수 없는유일하고 참된 재판관에 우리를 소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형제의 양심을 심판하는 재량권을 스스로 사취 하는 것은, 마땅히 재판관의 발등상 밑에 누워있어야 할 죄수가 재판석을 차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된다.

 

야고보도 거의 동일한 용어로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판단하는 자요, 네가 율법을 판단한다던 너는 율법을 준수하는 자가 아니라 재판관이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법 제정자와 제판관은 오직 한 분 뿐이니, 곧 구원할 수도 있고 파멸할 수도 있는 그분이라"(약 4 : 11 이하)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는 '심판대’는 당신의 심판의 권세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우리를· 소환하는 천사장의 목소리가, 그것의 무시무시한 소리가 모두의 마음과 귀를 찌를 것이기에, 다른 곳에서 ’나팔'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살전 4_:_ 16 ).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바울이 선지자의 이 문맥을 인용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한 점을 입증학려는 뜻에서라기보다는,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쟁 거리가 아니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을 겸손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뜻에서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이 문단의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의 말로 모든 인간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권세에만 달려 있다는 점을 밝헌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모든 육체가 이 심판을 예상하는 가운데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입증해 주고 있다. 이것이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다.

 

주께서는 이사야의 이 문맥에서 당신의 영광이 비록 이것이 당시에는 극소수의 백성들에게, 마치  어느 후미진 모퉁이에 숨겨지듯 숨겨져 있지만  당신의 영광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 알려지게 될것이요, 당신의 위업이 세상의 온갖 구석에 휘황 찬란하게 비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제를 보다 더 면밀하게 검토한다면 이 예언의 성취는 아직 하나의 사실이 아니며,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사실이 된 적이 없으며,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오는 시간에도 이것을 소망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현재로서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의、복음에 의해서만이 세상에서, 지배하시며 당신의 위엄은 오직  그것이 복음 전파에 의해서 알려지고 존경을 받을 때에만 재대로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것을 완고하게 반대하는 원수들이 항상 있어 왔으며 그것이 마치 단순한 우화나 조롱의 대상이라는 듯이 그것을 우습게 여겨 온 조롱자들이 따르고 있다. 현재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여기서 명백하게 되는 점은 이 예언이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엎드러져 당신의 발등상이 될 최후의 부활의 날이 비취기 전에는 그것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주께서 심판대에 앉으실 때에만 성취 될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예언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적용시 킨 것은 옳았다. 이 문단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주목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는 하나님, 곧 . 당신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단번에 밝힌 바 있는 하나님 이시다(사 42:8). 그런데 당신께서 자신의 것으로만 주장하는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면 당신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실 말이지 이 예언의 전실성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으로부터 당신에게 한 백성을 모으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당신의 위업을 예배하고 당신의 복음을 순종하게 하셨을 때 공공연하게 계시되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무릎을 꿇릴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는 말로서 언급하는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빌 2 : 9, 10). 이것이 하나님께서 심판대에 오르셔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은 아버지께서 천상천하의 모든 심판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선지자의 말은 “나에게~~모든 혀가 맹세할 것이요” 이지만 서약이란 신령한 예배의 한 형식인만큼 바울이 사용하는 '고백할 것이다' 라는 말에는 동일한 의미가 있다. 주께서는 모든 인간이 당신의 위엄을 인정할 뿐 아니라 입과  바울이 무릎 꿇는 자세로써 지칭하고 있는 몸의 외형적인 자세들 통해서 당신에게 자신들의 순종을 고백할 것을 바라셨다. 

“12. 우리 각인이……직고하리라.” ; 이 결론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낮은 마음을 가질 것을 지적해주고 있다.  바울은 곧 이어서 여기서부터 우리가 서로 심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결론 짓고 있다. 우리가 심판의 임무를 횡령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우리 역시 심판에 굴복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바울은 여기서 아주 적절하게 정반대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그는 우리가 정죄함으로써 심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우리에게 이치에 입각한 모든 우리의 판단을 적용해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간접적으로 그는 자신들의 모든 계략을 동원해서 자기 형제들의 생활에서 흠 잡을 것을 찾아내려는 악의적인 트집장이들(fault-finders) 을 꾸짖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경솔로 자신들의 형제들을 낙심시키거나 그들의 길에 장애물을 놓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