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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1. 성경 (롬 14:13 ~ 2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3)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4)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5)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6)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7)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8)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19)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0)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1)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23)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4.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음식에 있어서 아무 구별을 두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진전을 본 자들의 반론을 예상하고서 그는 먼저 음식 그 자체만을 놓고 생각할 때 어떤 견해를 품어야 옳은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음식도 올바르게 순결한 양심에게는 불결하지 않으며 음식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유일한 장애물은 무지와 오류에서 일어날 뿐이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혹 자가 음식이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이어서 우리는 음식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같이 앉아서 먹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옳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하 나님의 축복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사랑의 법칙에 어굿나게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알기로 모든 음식은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사용 여부는 전적으로 여러분들의 자유에 달려 있읍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양심이 모든 조바심에서 벗어나는 것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여러분들이 음식 그 자체를 삼가는 것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러분들이 그것에 대한 온갖 생각율 제쳐 놓되, 차라리 여러분의 이웃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불결한' 이란 속되며 불경건한 자들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특별히 신실한 백성들이 사용하도록 성별된 것과 반대되는 말이다. 바울은 음식의 정결성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하는 뜻에서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점을 자신이 알되 그 점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 고 있다. 그가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아담 안에서 저주 받았던 모든 피조물이 주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축복으로 내려지는 것은 당신의 은혜와 호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지는·자유를 율법의 속박과 대조시킴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지키지 않아도 되게 그들을 풀어 놓아 준 그것에 얽매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점을 깨우쳐 주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예외를 통해서 우리는 그 어떤 음식도 타락한 양심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을 정도로 순결하지 않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모든것을 우리에게 거룩하게 하는것은 신양과 경건성 뿐이다. 불신자들의 손에 닿는 것이 모두 더러워지는 것은 그들이 내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딛1 : 15).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  바울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에게 끼치는 폐 때문에 그 자체로서 훌륭한 것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만약에 우리의 형제가 그처럼 하찮은 이유로 상심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침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건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에 어굿난다. 둘째 이유는 연약한 양심이 상처를 입을 경우 그리스도의 피의 값이 허비된다는것이다.  우리 가운데 제 아무리 못난 형제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구속된 자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형제가 배를 채우는 일 때문에 파멸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아무 가치도 없는 음식을 그리스도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취할 경우 우리 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욕망에 빠처는 셈이다. 세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확보해 놓은 자유가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선물을 남용함으로써 그것을 몹쓸 것으로 만드는 일이 없도록 관심을 가져야 옳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 이유를 명심합으로써 우리의 자유 때문에 무분별하게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데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함부로 사용했다가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삼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어떤 손해가 오든, 하나님 나라를 세우거나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는 임무만은 결코 생략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사랑을 위해서 음식을 삼가함으로써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해를 입히며, 경건성에 누를 끼치는 일을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우리는 음식때문에 교회를 소란하게 하는 자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유사한 논리를 샤용하면서 음식은 배를 위해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으나, 하나님 께서는 양자를 무로 돌리실 것이요,  몸은 음란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요 주는 몸을 위한 것이다"(고전 6 : 13 )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곧, 우리가 먹지 않는다 해서 그만큼 더 나빠지는 것도 아니요.우라가 먹는다 해서  그만큼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고전 8 : 8·)라는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이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은, 그것이 복음의 진로를 훼방하는 원인이 되기에는 너무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이 그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이것을 음식과 대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열거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인 것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의 의미를 단, 몇마디에 종합하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선 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양심의 전정한 기쁨을 소유하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이 몇 가지 속성을자신의 현재 이론에 적용하고 있다. 참된 의에 참여자가 된 사람들은 더없이 탁월하고 측량 할 수 없는 축복, 곧 양심의 고요한 기쁨을 누리기 마련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자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평강’ 과 '희락'을 연관시킴으로써 그는 이 영적 기쁨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버림받은 자들이 제 아무리 제 멋대로 나돌며 들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그것과 화해하고 있으며 호의롭다는 점을 느낄때만 기뻐하고·즐거위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 평화만이 참 기쁨을 제공한다.  바울이 이 큰 은사들을 언급한 것은 성령께서 이것들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밝히려는 의도에서였지만 이 대목에서는 성령과 외적인 축복들에 대한 대조를 암시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모든 은사를 음식의 사용과 무관하게 누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 .'바울은 이론을 그것의  결과에서부터 추론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용납을 받고 인간들의 인정을 받은 자는 당신안에서 완전히 잘되고 번창할 수밖에 없다. 침착하고 평화로운 양심으로 의롭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기 하련이다. 그러므로 의, 평화, 그리고 영적 기쁨이 있는 곳이면 어디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질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인간들의 인준을 받는 것은 인간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는 덕 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악인들이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을 봐주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실 말이지 전자는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후자에게 숱한 욕을 퍼부으며 거짓된 말로 무고한 자들을 중상모략할 뿐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악질적인 해석으로 선한 행위를 잘못으로 뒤바꿔놓고 마는 자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올바른 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것은 못된 성미나, 증오, 또는 미신에서 벗어 난 것이다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힘쓰나니.” ; 바울은 최선을 다 기울여 우라들이 음식에 대한 하찮은 고찰에서부터 모든 우리의 행동에 있어서 으뜸가며 따라서, 모든 행동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보다 높은 목적을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러나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  친절하고 정중하게 자신의 이웃에게 덕울 베푸는 자만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화목과 덕을 세우는 일 (hannony_and edification), 이 둘이야말로 사랑의  모든 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나무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바울은 그가 앞에서 반복했던 견해, 곧 썩어 없어질것, :음식이 주님의 건물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기에는 너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반 복하고 있다.

 

경건에 대한 섬이라도 비취는 곳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 있으며·자신들의 무감각한 행동으로 아직 연약한  양심을 소란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파손하는 자이다.  우리는 바울이 덕을 세우는 일과 평화를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 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너무 너그러운 나머지 서로 양보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때때로 자신들의 고분고분함 때문에 아주 많은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친절하게 대하려는 우리의 거룩한 열성에 있어서 분별을 행사하고 유익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우리 형제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베푸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대목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권면하면서 “그러나모든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고전 10 : 23이하). 

“20절 “ ; 바울은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말라” 는 점을 효율적으로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앞에서 말했듯이. 만약에 금식이 경건성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그것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모든 것을 먹지 않고 우리 형제를 위해서 음식을 삼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만물이 다 성하되……” ;; 바울은 모든 것이 다 깨긋하다는 점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는 말로써 예외들 두고 있다. 이것은 ‘‘음식이 정말 좋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거리낌은 나쁘다."  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음식은 우리가 사랑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먹도록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으 면서 사랑을 해치는 것은 깨끗한 음식을 그대로 줄기지 못하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우리가 우리 형재에게  폐를 끼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22. 네게 있는 믿음을 ” ;  바울은 자신의 강론의 끝을 맺는 뜻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것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자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거짓으로 자유를 자랑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자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확신을 소유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평화로 만족하는 것이 옳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그것이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입증하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들이 고기를 먹어서 연약한 형제들에게 폐가 돌아갈 경우 우리의 행동을 악한 변덕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만 하는 필연성의 강요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자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는 한, 각자가 어리석고 미신적인 의식을 지키면서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 없는 것으로 추론하는 주석가들에 의해서 이 문맥이 곡해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문맥 자체가 보여주고 있듯이 바울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의식은 하나님 예배를 위해서 정해진 것이요 우리의 고백의 일부이다. 신앙을 고백과 분리시키는 자들은 태양에서 그 열을 강도질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사용하는 우리의 자유에 대해서만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자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먼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선물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와, 둘째 우리가 무지해서  미숙한 자들에게 그들 연약성의 한계를 벗어날 것을 강권할 경우, 그 위치가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가  하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일반적인 진리는 아무런 비행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은 그가 자신의 행동을 면밀히 검토하기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적용된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더 없이 악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맹목적으로 날뛰는 육신의 무절제가 이끄는 대로 눈을 딱 감고 무작정 돌진하기 때문이다. 우매와 분별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있게 행동하는 자는 그가  자신의 하는 일을 정직하게 저울질하고 곰곰히 생각할 때, 양심의 비난을 받지 않는 한, 행복한  자다.  이것만이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몰랐다면서 내세우는 헛된 핑계를 제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오류가 나태와 경솔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선의로서 충분하다면 하나님의 영이 이 문제에 있어서 인간들의 행위를 달아보는 조사는 팔요치 않을 것이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바울은 방황하는 나머지 필요한 행동의 방향을 확실히 모르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아주 좋은 단어를 선택해서 사용하고 있다.  의심한다는 것은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변화하며 두 행동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돌아설지 모르고 있는 것을 뜻한다. 선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마음의 확실성과 침착한 보장이다.  그러므로 혼란한 경악보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인준과 배치되는 것도있다. 이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 부동하게  뿌리 박을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용납이 되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만을 시도해야 옳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의 그 술한 부분에서 그처럼 혼란하게 되지 않을 것이요, 각자의 상상이 이끄는 곳으로 이리저리 방황하거나 맹목적으로 덤비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생활 습관에 있어서 아무도 의심하는 양심으로는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손 대려하지 않을 정도로 자제해야 한다면 더없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신중을 기해야 옳은지 모름다. 

“믿을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것이  죄니라·''  : 그가 이런  정죄를 내리는 이유는, 어떤 일이든, 그것이 제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탁월해 보이고 뛰어나 보이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양심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한, 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겉치레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 면적인 순종을 보신다. 오직 여기에만 우리 행위의 가치가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인준을 받는 것으로 확신하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순종이겠는가? 그러므로 의심이 있는데도,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버무림에 대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여기서의 ‘신양'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한결같은 확신과 혼들리지 않는 확실성을 뜻한다. 곧, 확실성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온 확실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당황과 불확실성이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그것이  또한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망쳐놓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읍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아무대서도 확 실한 안식을 발견할 수 없는만큼, 인위적  모든 예배형식과 인간들의 마음에서 유래한 모든 행위는 여기선 사라지기 마련이다.  신앙에 입각하지 않은 모든 것을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와 인준이 없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결론에 의존 하면서. 그것이 해야 마땅한 일을 위해 적극적인 준비를 갖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계속 불확실한 가운데 있지 않을 경우 올바른 생활의 제일 원리는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는 마음으로 의지하며 그것이 우리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