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 12:9~13)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9)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0)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1)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이제 구체적인 임무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면서 그는 완전의 기반(oond)이 되는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일이다. 여기서 그는 모든 위선이 제거되고 사랑이 순수한 마음의 성실성에서 우러나올 필요가 있다는 점을 권면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이 그들에게 실제로 있지도 않은 사랑을 얼마나 기발하게 위장하는가 하는 점은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은 그들이 소홀히 다룰 뿐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개척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스스로 참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짐함으로써 남들 뿐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기만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전정한 사랑은 모든 위장을 벗어버린것 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 구석에 사랑에 위배되는 무엇을 품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선과 악이라는 단어에는 일반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는 심술궂은 부당행위를, 선은 인간들을 돕는 친절을 뜻한다. 먼저 악이 금지되고 다음으로 덕이 추천되는 것온 성경에 자주 나오는 대조법 이다. 에 라스무스나 벌게이트역은 '아포스튀군테 스' 증오하는 것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이것을 따르지 않는다. 내 생각에 바울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돌아서는 것으로 보는 의미가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할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계속 그렇게 지속할 것을 당부 하는 대귀와 더 잘 일치하고 있다•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 바울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서로를 포용하는 데 있어서 품어야 마땅한 열렬한 애정을 충분히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형재애로 부르면서 그것이 부드러운 정을 가져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정은 라탄어에 있어서는 친척간에 지니는 사랑스런 관심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종류의 사랑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선의가 계속 유지되기.위해서 더없이 필요한 교훈을 덧붙이고 있는데, 각자는 자기 형제를 먼저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서로를 이간하는 데 있어서 한쪽이 무시받고 있다는 생각보다 더 직효한 독약도 없다. ''존귀'를 온갖 종류의 친절로 이해하는 쪽을 택하는 독자들이 있다 해도 나는 크게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전자를 택하고자 한다.
각자가 남을 보다 못하게 여기고 자기를 추어 올리는 교만에서 나오는 모독보다 형제적 일체감을 저해하는 것이 없듯이 각자가 남을 존귀하게 여기는 겸허한 마음이야말로 사랑을 가꾸는 최상의 것이다.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이 교훈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적극적이어야 마땅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혜택을 무시하고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수고를 기울이되, 항상 선한 자들에 대해서만 아니 라 종종 더 없이 배은망덕 하고 무가치한 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그 숱한 임무 속에서 자신을 망각해야 옳은 만큼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의 모든 나태를 벗어 버리려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제대로 그리스도를 순종할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는 말이다. 영혼에 있어서 '열성을 보이며'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나귀처럼, 마냥 게으르며. 그러므로 계속 채찍질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무감각을 교정 하는 것은 성령의 열 성 (fervent in spirit )뿐이다. 그러므로 선행에 있어서의 근면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속에 지펴 놓은 열성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열성을 권면하고 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 다. 곧 이 열심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임무가 신자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맥풀린 상태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지펴 주시는 불길에 빠져 들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수로 성령을 질식시키거나 말살하는 것은 혼히 있는 일이다. 시간을 아끼는 것(섬기는 것) 역시 동일한 내용이다. 우리 인생이 짤막한 것인 만큼 우리의 선을 행할 기회도 순식간에 지나쳐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임무들 수행하는 데 있어서 더욱 더 진지하게 냐와야 옳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세월이 악하기 때문에 시간 아낄 것을 당부하고 있다(엡 5 : 16).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시간에 적용하는데 큰 의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권하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바울은 시간을 섬기라는 명령을 게으름과 대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옛 사본에는 '퀴리오' 로 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는 이 독법이 문맥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나는 이것을 반대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나는 바울이 하나님 예배를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행하는 여러 임무 및 사랑을 보강하는 대 도움이 되는 것과 관련시킴으로써 신자들에게 더 큰 격려를 주려한 것으로 믿는다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이 세 조언은 서로 연관되어 '시간을 섬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처럼 보인다.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즐거워 하며 참을성 있게 환난을 감당하는 자라야 시간을 가장 잘 선용하는 자요, 활기차게 자신의 진로를 추구할 기회를 이용하는 자이다. 어떤 경우이든 ( 왜냐하면 이 귀절들의 관련성 여부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 문에) 바울은 먼저 우리에게 우리의 현재 축복으로 만족하거나 마치 우리의 행복이 지상에 있다는 식으로 지상 내지는 지상적인 것에 우리의 기쁨을 두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보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려 충분하고 확고한 기쁨을 누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리의 기쁨이 내세의 소망에 의존할 경우 이것이 역경에서의 인내를 낳는 것은 그 어떤 술픔의 감성도 이 기쁨을 압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 곧 소망으로부터 생기는 기쁨과 역경에서의 인내는 상호관련을 맺고 있다. 이 세상 저 편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십자가의 쓰라림을 소망의 위로로 감소하고 완화하는 법을 터득한 자만이 의연하고 침착하게 십자가를 짊 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우리 능력을 한결같이 하나님을 부르는 땅에 떨어지거나 재앙으로 산산조각이 나게 내버려 두시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우기 바울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자극할 뿐 아니라 우리의 견인불발을 분명히 요청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전 생이 불안하며 날마다 여러가지 공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강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주 새 로운 힘을 얻지 않고서는 이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쳐버릴 것을 막는 최선의 처방은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이다.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 그는 사랑의 여러 임무로 돌아오고 있는데, 이 가운데 으뜸가는 것은 우리가 조금도 보상을 예상치 않은자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보다도 빈곤에 짓눌려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더없이 멸시들 받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혜택이 헛것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바로 이런 사람들을 우리에게 추천하고 있다. 오로지 우리의 친절을 베푼다는 생각에서 우리의 궁핍한 형제들을 구제할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사랑을 입증하는 샘이다
'손대접하기’ 에게 보이는 다정함과 후덕이 결코 가장 낮은 사랑에 속할 수 없는 이들이 그들의 친척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모든 것이 결핍된 자들이기 때운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남 접대에 힘쓸 것을 특별히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더욱 더 무시를 받을수록 더욱 더 우리는 그의 부족한 사항에 유념해야 옳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성도들의 필요사항을 해야 옳다는 바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돕는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곤경을 구제해야 옳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성도들을 도울 것을 명령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사랑이 전체 인류에게 확대되어야 옳지만 그것이 권속에 속하는 자들을 특별한 애정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더욱 더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