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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8:16)

1. 성경 (롬 8:12 ~ 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2)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3)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4)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5)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6)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빛진 자로되." ; 이 귀절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것들에 대한 결론이다. 만일 우리가 육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 , 우리는 그것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만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셔야 한다고 하면, 그의 명령에 경청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 여기서 바울의 문장은 다른 부분, 즉, 우리가 성령께 빚진 자들이라는 대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는 아무런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바울의 관례가 원리에서 권면의 말씀을 항상 끌어내는 데, 있듯이 이 결론의 말씀도 강력하게 권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이렇게 그는 경고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 : 30)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5: 25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본분(本分)인 하나님의 의에 전념하기 위해서 육욕(肉悠)을 포기하는 때에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논리인 바,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팔요가 없다고 부질없이 말하는 어떤 욕설장이들의 통상적인 관례와는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과 태만으로 소멸해 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바울은 그들의 나태함을 엄정하게 바로잡기 위해서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이 경고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양심이 그들을 보다 충분하게 가책한다. 왜냐하면 의에 대한 아무런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신뢰와 확신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받는 모든 자들이 그들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주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요 확실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를 신봉하는 것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보낸 바 되신 것은 그릇된 불건전한 신앙에 의해 그를 갈기갈기 찢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바울이 이처럽 그의 견해를 조절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자신들이 허물 투성이임을 의식하고 있는 경건한 자들에게 절망감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도 죄에 굴복된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죽이기를 힘쓸 것 같으면,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라고 그는 여전히 약속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의 멸절을 업격하게 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고, 다만 육신의 정욕을 정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우리에게 명하고 있을 뿐이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율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 이라." ; 이 말씀은 바로 앞서 되어진 말씀에 대한 증명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 마창내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는 이 표시가 있어야만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명무실한 위선자들의 헛된 자랑이 꺾이게 되고, 신자들은 이렇게 해서 그들의 구원에 대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들과  요지는 이렇다. 즉,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아들들은 모두가 영생의 상속자들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두가 영생을 확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전제(小前題)는 자명(自明)한 것이기 때문에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적절하다 하겠다. 모든 피조물이 보존되고 기동하는 성령의 보편적인 역사가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만 특유하게 있는 성령의 역사들이 있다. 이 역사들은 그것들의 성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령은  ‘성화’를 의미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가 택한 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이 성화의 은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한편 주님은 그들을 자신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들로 따로 구별하시는것이다.

 

"15절" ;. 바울은 그가 최근에 신자들에게 명하여 확신하게 했던 그 확신의 확실성을 이제 , 확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성 령으로 말미암아 결과된 특별한 효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공포감을 갖게 하여 우리를 괴롭하거나 근심과 걱정에 싸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 앉히고, 우리의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 이르게 하며,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게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앞에서:다루었던 논증을 계속 추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성적 관용에 관한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부성적 관용으로 딸미암아 그의 백성에게 육신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는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같은 관대한 용서를 우리가 확신하게 되는 것은 양자위 영에 의해서 확실하게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양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기도하게 하되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마음 속에 확신시켜 주신다.

 

바울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영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종의 영’이라고 바울이 칭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율법에서 얻을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양자의영’으로서, 그것은 복음에서 나온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전자는.과거에 주어진 것으로 공포심을 자아내고, 후자는 현재에 주어진 것으로 확신감을 갖게 해준다. 바울이 확증하고자 하는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가 아는 대로,서로 반대되는것들을 비교함으로 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교는 히브리서의 저자에 의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가 시내산에 온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 시내산은 모든 것이 두려운 것 뿐이어서, 사람들이 마치 즉각적인 사형선고를 받기나 한 것처럼 두려움에 질려 가지고,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기를 간청하였으며, 모세 자신도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 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새 연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니 라" (히 12 : '18이 하 ). ‘다시 ’라는 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오심으로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준 측량할 수 없는 특전으로서, 우리는 이로 인하여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을 팔요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양자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하거나. 또는 율법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종들이었고 아들이 아니었다고 추론하여서는 안된다. 바울은 율법시대의 사람들을 복음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다기 보다는 율법의 역할을 복음이 주는 혜택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약시대의 선조들을 다루던 것보다는 훨씬 더 관대하게 신자들을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 신자들에게 훈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인 면에서만 우리가 구약의 선조들보다 나을 뿐인데, 이는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의 신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몽학선생 '하에 두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지금 알려진 그 자유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거짓 사도들 때문에 바울이 율법의 제자들과 신자들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에 계시는 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신자들에게 말씀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령을 통해서 그들을 내면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계신다. 비록 은혜언약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율법에서 제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을 율법에 대립시킴에 있어서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율법 자체에 특유한 명령과 금령 (禁令),그리고 사형의 위협에 의하여 범죄자들을 억제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특성으로 말미암아 울법은 복음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단지 율법만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위에 관하여 율법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경우에 한한다'고 하는 진술이 더 나을 듯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율법이 유대인들 가운데 공포되었을 때, 그리고 또한 그것이 공포된 이후에, 경건한 성도들은 믿음울 주시는 바로 그 성령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았다. 그래서 영원한 기업에 대한 소망-----이에 대해서는 성령이 보증이요 인(印)이다------이 그들의 마음판에 확실하게 새겨지게 되었다. 유일한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성령이 보다 풍성하고 넘치게 부어졌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원의 교리를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가 하는 그 문제 자체를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그 때에 처음으로 구원이 확실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밝은 빛과 비교해 볼것 같으면, 구약에서는 모든 것이 가리워져 있어서 아주 희미하게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율법은, 그 본질을 따져 생각해 보면, 사망의 공포로 말미암아 그것의 비참한 굴레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다만 속박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데, 이는 율법은 조건부가 아니고서는 아무런 축복도 약속해 주지 않으며, 모든 법죄자들에게는 사망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양심을 공포로 억압하던 종의 영이 있었던 것처럼. 또한 복음 아래에서는 양자의 영이 있는 바, 이 영은 우리의 구원을 증거하여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해준다. 유의할 것은, 율법이 왕노릇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비참하고 불쾌한 생각을 갖게 하여 괴롭히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이 ‘무서워하는'과 '종'을 연결시켜 놓은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평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제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자기의 자녀를 아버지가 자애롭게 다루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 뿐이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바울은 모든 성도들의 공통된 운명을 표현하기 위해서 인칭을 바꾸었다 (15절의 상반절에서는 '너희 ' 라는 2인칭이 사용되어 있으나, 하반절에서는 ‘우리’라는 1인칭이 사용되어 있다. 직역하면,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다 ; 역 자주)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는데, 그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나머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이 자기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를 바울이 흉내 낸 것은 크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자의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반복한 것은 부연(敷衍)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차별없이 모든 언어로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시게 된 정도로 하나님의 자비가 이제는 온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목적은 모든 민족들 간에 존재하는 감정의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사이에 아무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나안의 방언이 모든 민족에게 공통어가 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좀 다르게 말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갈다. 그는 언어의 외적인 형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울 예배하는 데 있어서 마음이 일치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순전한 예배를 드릴 때의 한결같은 동일한 열심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짖느니라'는 단어는 확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는 의심쩍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두려움이 없이 큰 소리로 기도하여 하늘에 닿게 한다. 고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다. 율법 아래에서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복음 아래에서처럼 자유롭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휘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성소로부터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출입문이 활짝 열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큰 소리로 자랑할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같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주(主)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호 2 : 23). 그 약속이 더욱 분명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에게 증인이 되신다는 것만을 단순히 말하고 있지 않으며, 라탄어 Contestatio (컨테스타타오/ 증 거 ) 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 Contestatur ( 컨테 스타루르 ; 증거하다 )라는 라탄어로 번역될 수 있었던 복합 동사를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증거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안내자요 또한 교사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가 이같은 확신에 선행하여 있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이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16절의 이 말씀은 앞 문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에게 중거해 주실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이 확신을 우리 마음 속에 넣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마음이 확신으로 차있을 때에만이 우리의 입이 열리는 것으로 보아서,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부성애에 관 하여 우리의 마음에 증거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혀는 범어리가 되어 기도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 요,그래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 속으로 확신 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올바르게 기도할 수가 없다는 원리를 언제 나 고수(固守)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 기도드립으로 해 서만이 우리의 신앙이 증명될 수 있다고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원리도 이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성령의 이갈은 중거를 회상하 게 해주고. 은혜의 약속을 깨달은 자들이 힘써 기도할 때에만이 모든 신 자의 신양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알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온 아주 당연한 것이다.  본 구절은 도덕적 추축(moral conjectur,e)에 관한 궤변론자들의 천박한 논증들에 대한 좋은 반박이기도 하다. 궤변론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추측 이 란 마음의 불확실성 과 근심 또는 동요와 착각에 지 나지 않는다. 또한 본 귀절에는 그들의 반론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런대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 러나 이 확실성온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 나님의 영의 증거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 서 보다 충분하게 논하고 있다. 또한 이 서신은 본 귀절에 대한 보다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하냐님의 ·자녀로 불리울 수가 없다고 하는 명제는 여전히 성립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그것의 확실성을 표시 하기 위해서 ‘지식 '이 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  바울은 그가 말한 것과 관련된 상황에서 파생된 논증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모시는 데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자녀들을 위해서는 기업이 약속되어 있는 법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들로 입양시켜 주셨을 때,그 는 또한 동시에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정해 놓으셨다. 바울은 그것이 어 떤 종류의 기업인가를 지적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기에, 썩지 않고 영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바의 것이다. 이갈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됨으로 해서 모든 불확실성이 제거될 뿐만 아니라, 우 리가 1하나님의 독생자와 더불어 누리게 되는 이 기업의 우월성이 또한 돋 보이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뒤이어 곧 보다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약속된 기업을 높이 찬양하는,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그 기업으로 만족해 하고, 담대하게 세상의 유혹들을 물리치며, 그리고 세상에서 어떤 종류의 환난이 우리에게 닥치더 라도 인내할 수 있도록 하려 논제 있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귀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 이 있으나, 다른 모든 해석들에 앞서 내가 지지하는 의미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천히 우리를 인도해 주신 그 길로 우리가 그를 따르며, 우리윅 기업을 분별하는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료 상속자들 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갈이 언급한 것은, 다음과 갈은 권면 의 말을 이어서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미암아 우리가 그의 아들들로입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은 우리들의 것이다. 어떠한 의혹이든 다 풀리도록, 그 기업의 소유권이 이미 그리스도에게 양도되었으며, 우리는 그와 함께 분감자(分參者)들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나서,그기업에 도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갈은 길로 그것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갈이 말하고 있다고 해 영광의 원인을 우리의 공로 탓으로 들리고 있는것 사 그가 우리의 영원한 으로 생 각해서는· 안된다. 이갈은 방식의 표현법은 성경에 혼하다. 바울온 구원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성취해 주기 위해서 밟온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행위에서 오는 공로를 반대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충분하게 논증하였다. 그 는 지금 우리에게 인내를 권유하고 있지만, 우리의 구원의 근원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