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8:5 ~ 11)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5)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6)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7)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1)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 ; 바울이 육과 영을 이처럼 구별하여 소개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후에 홈없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한다고 하는 앞서 한 그의 말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위로의 말로 신자들을 굳게 세워줌으로써 그들이 그들의 많은 죄에 대한 의식으로 말미암아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영적인 삶을 사는 자들만을 저주에서 면제시켜 주었었기 때문에, 그가 모든 인류의 구원 소망을 꺾어바린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누가 천사같이 순결하여 육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것’과 `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 이 정의를 바울이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뒤에 가서 알게 되는 대로, 비록 신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육신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좋은 소망을 주어 격려하려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정욕대로 방종해 서는 안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 육신적인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고 바울이 말할 때, 천국의 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프로누신' 을 넓은 의미를 가진 단어인 '생각하다' ( cogitant )로 번역했다. 이는 육신의 유혹에 빠져 더러운 정욕에 전념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에서 제와된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반절에서 , 바울은 신자들을 격려하여 좋은 소망을 갖게 해 주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를 생각하도록 되어 있는 경우이다. 성령이 지배하는 경우는 언제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의 표적이다. 이는 마치 성령이 소멸되고 육신의 나라가 우세한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앞서 내 가 준 권면의 말을 간단히 반복하여 말하겠다. 육신에 있는 것, 즉, '육신을 좇는것' 은 거듭남의 은사를 결여하고 있는 것과도 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본래의 인간" 그대로 계속해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 ; 에라스무스는 cogitatio 대신 ‘ 감정· ( a.ffectum ) 으로, 벌게이트역은 사려분별 ' ( prudentiam )로 번역 해 놓았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는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마음의 생각( figmentum ; 창 6: 5) 이라는 단어의 경우와 똑같으며, 이 단어가 판단력과 이해력으로부터 감정에 이르기까지의 영혼의 모든 지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생각'( cogitatio )이 본문에 더 적합한 듯하다. 비록 바울이 소사인 '가르' 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확증적인 표현법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일종의 양보절의 성격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육신을 좇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한 정의를 내린 다음에, 육신에 빠진 자들에게 닥칠 말로에 대해서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그는 육신에 거하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들의 전생애를 통해서 사망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조법을 사용하여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성대로 행할 때 사망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본문에서 배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혼자 행하게 되면 오직 파멸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곧 바로 대조되는 문구를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은, 만일 우리 가운데 어떤 부분이 생명을 향하고 있다 고 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증거라는 것 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한 줄기의 생명의 섬광도 육신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영적인 생각 (spritual~mi. ndednes~) 을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것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아니 생명에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히브리 어법에 따르면. 그가 말하고 있는 '평안은 안녕과 복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모든 역사는 우리의 행복에 이바지 해 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구원을 행위의 탓으로 들릴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시고,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그 구원을 마침내 완성하시지만, 그래도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원인은 그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인 바, 그 뜻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바울은 그가 제시했던 명제에 대한 증거를 덧붙이기를, 우리의 육신이 하는 일들에서 오직 사망 만이 초래되는 것은 그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반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불의하며, 그리고 그것이 불의하다고 하 면, 그것은 동시에 사망을 가져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대하시며 대적하신다고 하면, 우리가 생명을 기대하는 것은 헛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망이 하나님의 진노의 보복으로써, 필연적으로 곧 하나님의 진노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뜻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는 것을 여기서 주목해 두자.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부패와 정직사이에 있는 것과 갈은 대단한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 이것은 앞 문장에 대한 해석으로서, 육신의 모든 생각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란 그가 그것을 계시해 주신 곳에서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하나님은 무엇이 그를 기쁘게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느만큼 순종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살펴 보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들의 모든 계획과 행실들을 이 표준에 준하여 검사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은밀히 통치하는 섭리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지만, 이것을 구실로 하여 그의 허용이 없이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불경스런 언사이다. 율법이 우리 목전에 분명하게 제시해 놓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구별을 깊은 미궁(迷宮)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내가 말한대로 주님께서는 그 자신이 감추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그 계획에 의하여 모든 것을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명령하신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우리로서는 깨달아 알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알아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은 다음과 갈은 진리, 즉, 오직 의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리고 오직 울법 —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에 그가 좋아하시는 것이나 또는 싫어 하시는 것을 뚜렷하게 밝혀 놓으셨다---- 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변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간주 해 두기로 하자.
"할 수도 없음이라." ; 궤변론자들이 대단한 것으로 알고서 격찬하는 자유의지가 갖고 있는 능력이란 고작 그런것이다. 그들 자신들이 공공연하게 반박하는 것, 즉 우리 인간으로서는 우리의 감정을 율법에 굴복시킬 수 없다고 하는 그 점을 바울이 여기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랑하기를, 만일 인간의 마음이 성령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는다고 하면 그 마음이 아무 쪽으로나 항할 수가 있고, 만일 성령께서만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선악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 바,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 또는 거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또한 생각하기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준비해 놓은 선한 행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선언하기를, 우리의 마음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완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멍에에 본래 굴복될 수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들 중에 한 두가지를 논하고 있는 것아 아니라, 부정한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마음은 자유의지에 대한 비 기독교 철학을 멀리해야 하며, 우리 모두 자신이 본질상 죄의 종인 것을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함을 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타(餘他)의 자유를 자랑하는 것은 극도로 우둔한 소치인 것이다.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계 할 수 없느니라." ; 반의 소사인 '데'를 나는 의도적으로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앞서 말씀되어진 것에서 육신의 정욕을 탐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연역해 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바울이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가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한 것은 그들이 천상(天上)의 생명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9.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 바울이 그가 이 서신을 써 보내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일반적인 전리를 가정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은, 그의 강화를 특별히 그들에게 말해 줌으로써 보다 그들을 강력하게 감동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재거 해 준 사람들의 수에 그들이 속했다는 것을 방금 주어진 정의에서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택자(擇者; the elect) 들에게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를 설명함으로써 그들에게 바울은 새 생명을 권장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바울은 적절하게 말씀을 덧붙여 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좀 더 면밀하게 성찰케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중생하여 정결함과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위선을 바로 잡으려는 데 있지 않고, 율법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내적인 능력보다도 죽은 의문 (the dead letter) 을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율법장이들一 터무니없게 율법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반대하여 택자들이 자랑할 수 있는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지금까지 바울이 '영'이라는 말을 ‘생각’이나 ‘이해력 ’이란 의미로 말한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생각을 영혼의 우등한 부분으로 보고 있으나, 실은 하늘의 선물이다.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영적인 사람들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안아 다스리시는 자들이요, 자신들의 충동에 근거하여 이성에 순종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은 성령 충만이 아무에게도 있지 않다), 비록 그들이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육체의 찌꺼기들을 발견케 되지만, 그래도 그들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그들이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영을 좇는 자" 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게 된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중요한 기능들을 지배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사람이 그의 주요한 본성에 비추어서 일컬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성령의 나라에서는 육신이 전페 (全鹿)된다 ( The kingdom of the Spirit is the aboli tion of the flesh ) . 성령께서 내주하시어 왕노릇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그의 영과 분리시키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죽은 형상이나 시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가 말씀하신 바, 값없는 사죄가 거 듭나게 하는 성령과 불가분하다는 권면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그의 영과 분리시키는 것온, 곧 그리스도를 갈기 갈기 찢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이것이 참되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공공연하게 단언하는 것 때문에 복음의 대적자들에 의해서 우리가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울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멀리 떠남으로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이 없어도 자기네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랑할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양을 조소하는 것을 듣는 것은 참으로 소름 끼치는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교황주의자들의 철학이다. 독자들이 여기서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은, 성령이 어떤 때는 성부 하나님의 영으로, 어떤 때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구별없이 불리우고 있는 것은, 성령의 온전한 충만이 우리의 중보자이시요 머리되시 그리스도 위에 부어집으로 해서, 우리가 각기 그에게서 자신의 몫을 얻도록되어 있기 때문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되기 때문으로, 성부와 성자는 한 본체를 가지고 계시며, 동일한 영원한 신격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도가 좀 먼 거리에 있어 보이는 듯한 성부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에게로 내려온 것은 지혜롭다.
"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 바울은 이제 성령에 관하여 앞서 언급한 것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는 ,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식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성별하여 자신을 위한 성전으로 삼으신 처할 바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적인 존재들로 간주된 것은 온전하고 홈이 없이 완전 ( a full and entire perf~ction)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시작된 새 생 명 ( the newness of -life ) 때문이 라는 것을 바울이 이제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점을 예견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불안을 안겨줄 뻔 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일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이 아직도 사망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생시키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영안에 있다는 대답을 바울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능력은 우리의 죽어야 할 성질 (mortality) 을 능히 소멸시킬 수가 있다 .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결론하기를, 죄의 찌꺼기들이 온전히 없어질 때 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가 기다려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라는 단어가 영혼을 의미하지 않고, 거듭나게 하는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미 독자들에게 말씀드린 바 있다 .
그런데 바울이 거듭나게 하는이 성령을 ‘생명'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며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소생시키어 우리의 죽을 육신을 멸하시고 마침내는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몸’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세속적인 불순물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완고하고 무감각한 덩어리를 의미한다 . 그 몸은 조잡한 것만을 즐거위한다. 그렇지 않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몸에 돌리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영혼은 결코 생명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는 저절로 생명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본래의 성품이 지고 있는 그영이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한에서는 죄가 우리를 정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영이 승리하신다는 것이다. 열매들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해도 아무런 장애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한 줄기 섬광마저도 생명의 씨이기 때문이다 .
"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바울은 앞절의 그의 확증을 동력인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셨다고 하면, 그리고 그 성령이 영원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성령이 또한 우리 안에서 그 능력을 행사하실 것이다. 바울은 교회의 온 몸에 속한 능력의 실례가 그리스도라는 분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부활의 조성자 ( the . thor of the resurrection) 가 되신 까닭에, 바울은 생명을 주는 성령을 하나님께서 유래된 것 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 바울은 하나님을 단순히 이름만 부르는 경우보다는 본문의 주제에 더 잘 어울리도록 하나님을 의역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와 갈은 이유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살리신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것은 그가 부활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보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를 제 공해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는 능력에 의하여 자신을 능히 살리실 수 있었다고 하는 반론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살리셨으며, 그 영을 그가 또한 너희에게도 주셨으니 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은 반박된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소망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 이 구절의 말씀은 결코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8)" 를 감손(減損)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적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 일반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처럽 ,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 그의 신성의 고유한 사역을 성부께 돌린 것은 당연하다. 사도가 의미하는 바 '죽을 몸’이란 아직도 사망에 굴복한 채로 남아있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바울의 일반져인 관례는 이 명칭 ( 죽을 몸 )을 우리의 조악(租惡 )한 부분에 적용하는 데 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게 될 마지막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가 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의 계속적인 활동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육신의 찌꺼기들을 제어하시며 우리 안에서 거룩한 생명 (heavenly Iife) 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Calvin선생주석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8:16) (1) | 2022.09.14 |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2) | 2022.09.13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5) (1) | 2022.09.12 |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2) (0) | 2022.09.12 |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7:6) (1) | 2022.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