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로마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5)

1. 성경 (롬 7:14 ~ 25)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4)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5)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6)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7)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8)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19)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1)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2)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3)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4 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바울은 이제 율법과 인간의 성품을 보다 면밀하게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망에 이르게하는 사 악의 근원을 보다분명하계 이해할수 있도록한다. 그래서 바울은 중생한 사람의 실례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 중생한 사람 안에서 그의 영이 주의 율법에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하는 만큼 육신의 찬재들이 그 율법을 반대하 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그러나 바울은-우리가 말한 대로-율법과 인간의 본성을 간단하계 비교하고 있다• 인간과 관련이 있는 문제들 중에 영과 육 간에 촌재하는 경우보다 더 심한 불일치는 없기 때문에( 왜 냐하면 율법은 영적이요 인간온 육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 울 법 간에 무슨 일치가 있을수 있겠는가? 어두음과 빛과의 경우와 같온 것 이다. 더우기나, 율법을 신령하다(영적이다)고 부름으로 해서, 어떤 수석 가들이설명하고 있는 대로.바울은 율법이 우리 심령의 내면적인 감정들을 필요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대조함으로써,육 적(육신에 속하여)이라는 단어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율법이 가지고 있다 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그 수석가들온 율법은 신령 하다는 말씀을 설명하기들, 외적 행위와 관련되는 한, 율법은 발과 손을 묶어 놓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심령의 감정들에 적용되고 그리고하 나님에 대한 신실한 경의심을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육과 영에 대한 대조가 여기에 명시되어 있다. 육신이라는 용어가 인간 들이 모태로부터 가지고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은 문맥으로 미 루어 보아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미 또한 드러 났다. 육 신이라는 단어가 혈통을 가지고 태어 나 선천적인 성품을 보유하고 있는 인 간들에게 적용된 명칭 인 것은, 인간들이 타락하고, 아무런 평판도 없으며.조잡하고 세상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 영 온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새돕게 하는 것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한편. 하 나님께 서 우리을 그 자신의 형상대 로 개조해 주신다• 바울은 우리 안에서 역사되는 새로움(newness) . 성령의 온사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완전한 교훈은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대립이 된다. 그러므로 그 뜻은. 율법온 천국적이고 천사적인 ca heavenly 떠 angelic righteousne$)들 필요로 한다. 이 의에는 아무런 홈도 나타나지 않으며, 그 의는 더 이상의 청결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 나 나는 육적인 사 람이다. 그리고 다만 그 의를 거스려 저항하는 것만을 행할 뿐이다. 오리 젠의 해석은 옛날에 많온 지지를 얻었겠지만.그것온 논박할 가치조차도 없 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율법이 바울에 의해서 신령하다고 불리우는 것은 성경이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본문의 주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

 

"죄 아래 팔렸도다" ;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죄가 자체적으로 가지 고 있는 힘에 대해서 밝혀 주고 있다. 본질상 인간의 죄의 종인 것은. 몸 종의 경우 그들이 소나 당나귀인 것마냥 그들의 주인들이 그들을 사서 자 기 마음대로 부려 먹는 것과 똑같다. 우리 는 죄 의 세 력 에 의 하여 완전 히 부립을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심령과 모든 우리의 행위 는 죄를 짓기가 쉽다. 나는 언제나 강박 현상(즉,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강요당하여 죄를 짓는 것)을 배제하는대,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대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 의지는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한 최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우리가 지나치게 죄에 탐닉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죄 짓 '- 것 외에 달리 행할 도리가 없 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사악함이 완전히 지배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 악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 그러므로 본문의 비교가 나타내 보여주고 있 는 것온, 강요된 여제가 아니고 자발적인 죄에 대한 순종이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바울은 이제 이미 거듭난 사람에 대한 보다 특정 한 실례를 언급한다. 이 사람 안에서 바울이 주목하 는 두 가지 대상. 죽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본성 간에 촌재하는 큰 차 이점과. 율법이 저절로는 사망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등아 보다명 확하계 나타나 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죄 짓는 정욕에로 그의 온 마음울 기울여 무턱대고 들전하기때문에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자기의 능력 대로 되는 것처럽 자유 의사에 의하여 최불 짓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_ 이다 . 이와 갈온 가장 유독한 견해 죽 인간온 기 자신의 천부의 능력에 의하여 신적 온혜의 도움이없이도그갑 좋아하는 길을 얼마든지 、소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견해가 거의 일반적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나 신자의 의자 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선을 행하도록되어 있는데 반하여, 완강하게 반 항하며 저항하는 본성의 부패성이 안에서 두드러지게 타나는 것아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에게서 우리의 본성과 율법위 의 사이에_:_ 얼마만한 정도의 불일치가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수는 가장 적합한 실예들 볼 수가 있다. 또한 중생한 자가 보여 주는 실례는, 인간의, 본상에 대 한 단순한 찰보다도 다른 귀절에 대해 보다 적합한 . 중거를 . 제공해준 -. 율법온, 것이 전적으로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서만 사망을 낳기 때문에, 그 점에서 보다 쉽 , 비 난을 받는다. 왜 냐하면' 악의 근원 ~. 의문시되 기 때문이 다. 중생한 사람에께서 율법은 건실한 열매들을 맺는다. 이 사실온 율법이 ‘ 생 명을 주지 못하도록 막는 것온 오직 육신뿐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울 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망을 결코 낳을 수가 없다. , ,. 그러므로 이 논증의 전체를 보다 확실하고 충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에의해 언급된 이 갈등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 연후 에야 비로소 사람 속에 존재케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사람은 그 자 신의 본성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정욕이 완전히 발동 하고 만다. 비록 경건치 않온 자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말미 암아 고통을 당 하고, 그리고 구들이 악을 즐길 때에는 다소T 쓴 맛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악을 미워하거 나 선을 좋아한 다는 것을 추단할 수가 없다. 이처럽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고통들을 당하게 허락하신 것은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 그의 심판을 나타내시려는 것 이지 의를 사랑하거나 최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들이 갖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 러므로 경건치 않은 사람들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점이 있 이다. 경건치 못한 자들온 그들 자신의 양심의 판단을 받아 자기들의 최악을 깨닫게 될 때 그 최악들을 정죄하지 않율 만큼 그들의 마음이 가리 워져 있거나 결코 안악해지는 법이 없다. 지식 (understanding) 이 그들에 게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들온 옳고 그릇된 것을 구분 하는분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또한. 그들은 그들의 죄의삭 때문에 혐오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금생에서마저도 일종의 정 죄를 선 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전심으로 기뻐하여 최를 만족하게 여기고. 그래서 아무런 형오감도없이 죄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들이 당하 는 양심의 가책은 그들의 의지의 반갑(反感)에서라기보다는 심판의 반박 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중생시키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아주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비목 그들의 마음의 특별한 욕구을 가지고 하나님 을 사모하며, # 하늘의 의 를 추구하고, 죄를 미워하지만, 그들온 그들의 육신의 잔재로 말미암아땅 에로 다시금 뒷걸음치고 만다. 따라서, 그들은 이갈은 미칠듯한 상태에서 그들 자신의 본성을 대적하여 싸우며 또한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신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정최하는 것 온 그들이 이성의 판단에 의하여 강요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감 정으로 그것들을 증오하고 죄를 법하는 그들의 행위를 몹시 싫어하기 때 문이다. 이것 이 바로 기독교인의 영욱간의 전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 울이 갈라디아서 5 : 17 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 그의 영혼 전체의 동의와 감정 의 일치들 얻어 최에 몰입하계 된다는 것과, 그러 나 그 사람이 주님 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새옵게 되는 순간 즉시로 분열이 생긴다고 말씀된 것은 당연한 것 이다. 중생온 오직 금생에서만 시작된다. 중생한 연후에도 남아있는 육신 의 찬재는 부패한 감정들을 언제나수반하며, 이와같이 해서 성령을 대적 하는 두쟁 을 야기시 킨다.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수제 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계 획을 미숙한 사 람들온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온 바울이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서술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인간의 능력에 대한 그 러한 서술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 나 성경은 그것이 철학적인 원리에 있 어서 훨씬 깊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이래로 사악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인간의 마음 속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성경이 밝혀 주 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궤변 철학자들온 자유 의지를 정의하거나 또는 인간의 본성의 능력을 평가하려고 할 때, 그들온 이 본문을 인용한 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이미 전술한대로.여기서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 울 서술하고 있는 것 이 아니 라, 신자들의 연약성 의 성격과 정도들 자기 자 신을 예로 들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동안 어거스탄도 이와 갈은 오류에 빠져서 바울이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본문을 면밀하게 살피고 난 후에 그의 잘못된 해석을 취소했 을 뿐만 아니라. 보니페이스 (Boniface) 에게 보내는 그의 첫번째 책에서 많은 강력한 논증들을 들어서 본문은 중생한 자들에 대한 것으로만 이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독자들로 하여금사실이 그렇다 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노니." ; 즉,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법한 행위 들을 .:::z. 자신의 것으로 그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냐하면 그는 그 행위들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인정한다는 말로 번역 했다. 이 번역온 꽤 잘된 것이기는 하지만, 모호한 감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냥‘안다’라는 번역을 그대로 취했다. 우리는 이로부터 율법 의 교훈이 바론 판단에 아수 잘 일치하여 맞기 때문에 신자들이 율법을 법 하는 것을 인간 이하의 짓으로 알고 결단코 그러한 우(愚)를 범하지 않 으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에 규정되 어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z. 가 인정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에. 많은 주 석가들이 오해하여 바울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본성을 말하고 있는 것 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바울구법을 법하는 것 '은 경 건한 자들의 모든 과오를 뜻한다• 그러 나 이러 한 과오로 인하여 서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의심이나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열 심을 상실한 것온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그가 행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것은, 그가 율법의 모든 부분을 전부 성 취하지 못하고. 그가 애쓰다가 다소 지쳐 있기 때문이다.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 바울에게는 연재나 선을 행할 능력 이 없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다소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었으 면서도, 그가 원했던 것을 행하지 못하는 즉, 민첩하게 선율 추구하지 못 하는자신의 무능력을 다만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가 실패하 고 싶지 않온 경우에 실패한것온그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넘어 졌기 때문이라고 불평한다. 경건한 자가, 그러므로. 그가 행하기를 원하 는 바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르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경건한 자가 서 기를 원하지만, 넘어지거 나 또는 적어도 방황하기 때문에 그가 행하기를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이다.'원한다'그리고‘행하기들 원 치 않는다’는표현의 말씀온 성령에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신자들 가운대 서 첫 자리를 차지해 야 하기 때문이 다. 물론 육신도 그 자 체의 의지들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 나 바울이 말하는 바 의지는 특정한 강정을 가지고추구한 것을 뜻한다. 그불 대적하여 겨루는 것을 그는 .:z. 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으로 일컫고 있다 • .. ') 우리는 이로부터 우리가 앞서 언급한바. 바울이 여기서 신자들에 대하 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온혜가 얼마간 신자들 안 에 존재하고 있는대, 이 사실로 말미암아 건전한 마음과 율법의 의 사이 에 있는 일치가 설명되는 것온, 육신이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즉, 나의 심령으로 율법을 묵묵히 따르고. 리고 그것 의 의를 즐기면(그리고 율법을 범하는 것을 싫어할 때 그렇게 행하는 것 이 를림 없지만) , 어떤 악도 그 책임 이 율법에게 전가되어서는 안된다 는 것을 우리가 중분히 확신하게 되는 사실에서―여기에 대해서는 체험에 의하여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다一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깨달아 ...... 알게 된다. 실로, 율 법이 바르고 순전한 마음을 만나게 되면 • . 그 율법온 사 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계 될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시인(是認)온 나 는 좋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며 나쁜 길 을 따돈다. 또는 나는 내게 해몹게 될 것을 따르겠다. 그리고 내게 유익 하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피하리라”고 말하는 불신자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그런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 이 불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행하지 않 을 수 없도록 강요되어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그들이 찬성하기 때 문이다. 그러 나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와는 멀어지계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건한 사람은 전지하게 그리고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율법을 시인한다. 이는 경건한 자의 유일한 소원이 천국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 이 말씀은, 사악한 행위 를 육체의 탓으로 돌립으로 해서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들을 위장할 수 있 는 정당한 방어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경솔한 사람들처럼. 자신 온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양.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사람의 탄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감정과 그의 육신간에 있는 불일치의 정도에 대한 선언이다. 이는 신자들이 매우 열정적인 영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이르러 그들이 그들 자신의 육신을 부인하게 되기 : 때문이다 •• 본문 또한 바울이 여기서 이마 거듭난 경건한 사람들만을 논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 히 입증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뺄 그대로 납 아있는 한. 그가 어떤 사람과 갈이되고자 할지라도 그가 타락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 자신이 최에게 전적으 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참으로 그 자신온 죄의 멍에에서 벗 어나 있다. 그가 하난님의 의를 간절한 마음으로 추구하고 열망하며,그리 고 하나님의 율법을 그 자신 안에 새겨 두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 1' 때문에 • . 최가 그의 영혼의 한 구석에만 남아있는 것이다. ;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바울운 본성에 관한 한 그 속에 아무 선한;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 다. 그러므로, 내 속이라는 말의 뜻온 ·내게 관한 한'을 의미한다. 바울온 ..:z. 의 논술의 서두에서 아무 선한 것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고백함~ 로써, 자신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안에 가하되, 그러 나 그의 육신에게는 결코 속하지 않는 하나님 의 은혜를 욕되게 하지 않도록. 수정을 가한다. 여기서 다시금 그는 그가 모든 인류 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다만 육신의 잔재와 성 령의 온혜 때문에 자 신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 하고 있다. 만일 자신의 어떤 부문이 부패로부터 면제되고 그래서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고 아니할 것 같으면, 무손 목적으로 이 수정을 첨부하였겠 는가? 바울온 ‘육산이라는 용어 아래, 성령의 성결케 하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 본성의 모든 자질과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포함 시키고 있다. 그래서 ‘영’은 일반적으로 육신과 대조을 이루는 까닭에. 바울 이 말하는 바 ·~~이 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성 령 이 악을 깨끗이 씻어 주고 그 래서 아주 잘 개조된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서 빛나는 영혼의 그 부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신’과 ‘영’이라는 두 용어는 영혼에 해 당된다. 후자는 중생 된 부분과. 그리 고 전자는 아직도 본성 적 인 감정 을 보유하고 있 는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 이 말씀은 그가 무력한 욕구 (desir~) 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 나 . 그의 행위의 효력이 그가 원하는 (Will) 에 부합되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온, 육신으로 말미암아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 나 오는 말씀, 곧 "원치 아니하는 바 악온 행하는도다 .. 또한 61 』’의미로 해석되 어야 함은, 육신이 신자들로 하여금 신속히 행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 라, 신자들이 또한 과오물 범 하도록 그들에게 방해 가 되는 많온 장애 물들 율 그 육신이 놓아1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해 야 할 것을 행하 지 옷하는 것은, 그것을 잘 준비하여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 가 언급하고 있는 이 ‘의지'(원함)는. 믿음에의 준비 로써, 성 령은 경건한 자 를 단련하여, 그들이 열십을 내고 준비하여 그들의 지체를 하나님께 순종· 케 하도록해준다. 그러 나 그의 능력이 그의 원함에 미치치 못하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것, 죽 그가 바랐던 선을 성취하는 일이 그에게 없다고 바울 온 말한다. I·I ’ '

 

"19절" ;  본 질의 말씀은 앞의 말씀과 같은 취지로 되어 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그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은, 아무리 신자 들이 바르게 감화들 받는다고 할지 라도, 그들온 여전히 그들 자신의 연약_ 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어떤 행위도 홈이 없는 것 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경건한 자들의 몇몇 실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그들의 생애의 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한 가장 선한 행위들이 언제나 죄의 얼룩으로더 럽혀져 있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는 한, 어떤 상급 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결론지울 수가 있다. 끝으로 그는 그가 하늘의 빛을 부여받고 있는 동안에는, 율법의 의에 대한 참된 증인이요, 찬동자라고 하는 전술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만일 우리 의 본성 의 완전 무결이 순수하게 남아 있다고 하면, 율법온 우 리에게 사망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며, 건전한 마음을 가지고서 최를 피 하는 사람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우리의 건강은 하늘의 의사로부터 오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 바울은 여기서 사중(四重)의 법이 있다는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런데 이 법만이 법으로 불리우는 것이 당연한 것은, 우리의 삶이 바르게 형성되는 의의 법 칙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법에다 마음의 법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마음 의 법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코자 하는 충성스런' 마음의 준비를 말한 다. 이것은 하나님 의 법을 우리가 준봉하는 것 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좌의 법’이 있다. 바울이 말하는 바 이 죄의 법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 람 뿐만 아니 라, (. 거듭난 사람의 육신 안에서 불법이 ....(j-; 하는 세력을 뜻한 다 • . 폭군의 법도, 아무리 그것이 간악할지라도, 여전히 법이라고 불리운 다• 이 죄의 법에다 바울은‘지체 속에 있는 법’울 상옹시키고 있다. 이 법 온 바로 고의 지체 안에 있는 람심이다. 그는 람심과 불법 사이에 존재하 는 일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이다. 첫번째 구문 (clause) 에 관하여, 많온 주석가들온 법이라는 단어들 그것 의 본래의 의마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KO.'f'(l( 카타) 또는 81.a 디아) 를 넣어 가지고 읽어야 잘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법 에 의햐여 (by the law) 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법의 가르 치심과 인도하심에 의하여 자기의 허물이 본래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발견 했노라고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게 된다. 그러 나 그 문장은 아무런 전치사 도 넣지 않고 다음과 갈이 읽어야 며 좋을 것 이다• 즉, 신자들의 경우 그 들아 산한 것 을 행하려고 힘쓰는 동안, 그들 자신 안에서 포악한 법을 발 견캐 되는것온, 하나님의 법을거스르고 반대하는 악한 성항이 그들의 골 수에 깊이 무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22. 내 속 사랍으로는 하나닐의 법을 즐거워하되." ;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분열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 그 런데 이 분열로부터 어거스틴이 ‘기독교인의 투쟁’이라고 부르는 영욱간의 두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법은 사람에게 의의 법칙을 일깨워준다. 블 법은 사단의 포악한 법으로써 사람에게 악을 일깨워준다. 영은 사람을 인 도하여 하나님 의 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나, 육실온 그들 반대 방항으로 이꿀어간다. 인간은 여러가지 욕망에 의하여 마음이 산란해져 있기 때문 에. 이제 그는 이중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의 영이 통치권을 소유하고 있음에 를림없기 때문에, 그는 특별히 그 부분에 의하여 자신을 판단한고 평가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가 그의 육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 것은 그 가 아직도 악한 정욕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충동근 으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육신적인 것과는전혀 반대되는 영적 욕구를 여제하는 것이되기 때문이다. 

 

‘속 사람바지 체’의 뜻을 주의깊게 유의해야 한다. 많온 사람들아 이 , 말 씀들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나쁜 길로빠졌다. 그러므로 속 사람이란, 적인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난 영혼의 J 간의 보다 부분을뜻한다 •• '지체'란 다른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영혼 (SO비)이 인 우등한 부분이고 (body) 이 더 열등한 부분이돗이, (spi_rit) 온 육신 (flesh) 보다 뎌 우월하다. 명온 사람 안에서 영혼을 대신하며, 육 신은 부패하고 오영된 영혼으로써뮤분을 대신한다_.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 로.기 영은 ‘속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 -육신은 ‘지체’라고 하는 것이댜. 속· 사 람이 고린도 후서 (4 _: 16) 에서는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 있으나 본문의 _ 우는 내가 내란해석이 적당하다. 영을 특별히 속 사람이 라고 부르는. '- 것 은, 그것 이 십령과 숨온 감정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에 반하여 옥 신의 정욕은 사람 밖에서 길 잃고 헤매 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땅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체라는 말을 육신적인 것들 을 경멸할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경멸적인 표현 을 사용한 것은, 우리의 온밀한 중생이란 믿음으로 이해하지 { 않는 한. 욱 감으로는 수가 없다는 것을 보다 잘 밝히기 위함에서이다. 마음의 법이란 의심할 나위 없이 바르게 정돈된 감정을 의미하기 때문 에.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온 그릇 된 것임에 분명하다.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지식이 없다고 한 것은~ 그들 의 영 혼이 그 이성 을 상실한 까닭이다 ((Jnima a ratione degenerat). 

 

"24. 오호라나는 곤고한사람이로다 .. …" ; ·바울은그의 논증을 감정이 격 양된 감탄문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 말씀으로 그가 우- 리에게 가르치고 있 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육신으로 더불어 두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자신 속에서와 하나님 면전에서 우라의 불행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애롱하 고 비 란해야 한다는 점 이 다. 바울은, 오칙 -~ 한분의 구원자(deliverer) 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처럽, 그가 의심에 빠져 있기나 한돗이 누가 그물건져내 줄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이 숨을헐 떡거 리 면서 거 의 까무라쳐 가는 사람의 말과 갈온 것은, 그의 도움이 가까 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건져 내다 '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의 구원 (deliverance) 이 하나님의 특별하고 비상한 눙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망의 몽이란, 죄 덩어리 또는 인간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 요소들을 뜻하나, 예외적으로 그의 경우에서만은 죄의 찬재들이 남아 있어서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이다• 대명사 'TOV'TOV(두루;이) 는 몸에 적용 되지만_-이 점에 있어서 나는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따른다-또한 사망과 도 부합이 된다. 그러 나 전체적인 뜻에는 다들 바가 없다. 바울아 가르치 고자한것온,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안(靈眼)이 열려 있어서, 그들의 본 성의 부패 및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사망을 하나님의 율법과 분별력을 가지 고 분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몸이라는 단어가 바깥 사람(outward man) 과 지체를 뜻하는 것은, 죄의 기원이 창조의 법칙을 인간이 며 나서 육신적이 고 세속정으로 되어 버린 대 있다는 것을 바울이 유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온 아직 야수보다는 더 낫다. 그러나 그의 갑된 우월성온 상실되었으 며, 그리고 남아있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패물들로 가득 있다. 그러 기에 그의 영혼이 타락되어 있는 한, 육신으로 변해버 렸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기에 창 6 : 에서 I If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합께 하 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나님온 말씀하신다 • . 인간 은 여기서 그의 영적인 우월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래서 경멸할 목적으로 동물에 비교된 것이다. 바울의 이 본문 말씀은 육신의 모든 자랑을 파괴 하는 데 도움을 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가장 완전한 사람일 지라도 그들이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한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사망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갑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찰저하게 살펴 보면. 그들 자신의 본성 에는 곤고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없 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나 바울은 그 자신의 실례를 들어서 완전주의자들이 무감각 (apathy) 에 빠지지 않도록 고통의 절규을 깨우쳐 毛고.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들의 죄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책으로써 사망을 구하도록 그들에게 명하고 있다; 이 처방책은 사망을 바 타는 데 있어서 올바른 목표이다. 불경한 속인둘도 절망으로 인하여 이갈 온 소망을 갖게 된다. 그러 나 그들이 사망을 구하는 것 이, 그들의 불법에 전저리 가 난 때문이 라기보다는, 그들이 현실의 삶에 영증을 느낀 때문이 라고한다면, 그것온 그릇된 것이다. 여기서 부인해 두어야 할것은. 신자 들의 경우 그들이 비록 참된 목표를 섣정하였지만, 그들은 사망을 바라는 데 있어서 여제되지 않온 감정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어서는 안되며, 하 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또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분을,가 내어 하 나님께 대해 욕을 퍼붓지 않고, 대신 그들의 근심 걱정을 그의 품에 겸손 하게 내말기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받은 은혜를 회상함으로써, 그들이 당 한 재난을 깊이 생각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완화 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 문장에서 알수가 있다 .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갑사하리로다." ; 그러므로 바울은 즉시로 이 감사의 말씀을 덧붙여, .:z. 가 앞서 불평할 때 하 나님을 완악하게 원망하고 있는 것으로 아무도 오해하지 않게 한다• 우리 는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할 슬픔을 당한 때조차도 불만이나 안달에 빠지 기가 일쑤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바울이 그의 상태를 애 통해 하고 .:z. 의 죽음을 7J- 철히 바라고 있지 만. 또한 동시 에 그가 하나님 의 온혜를 믿는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다. 성도들은 그들의 허물과 결점 들을생각할 때에.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온혜를잊어서는 안 된다. 더우기, 그들을 하나님이 용납하시어 보호해 주시기에 그들이 결 코 망하지 않으리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의 첫 열매들이 이미 수어집으로해서그들의 영원한기업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게 되었다는 사 실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이로써 불만과 조급한 마음을 여제하고 마음의 평화을 간직할 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늘의 약속된 영 광을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 만. 그러 나 그들이 받온 분량으로 그들온 만족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제나 기뻐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올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이 짧은 끝맺음의 말에서 바울은. 신자들은 그들이 육신에 거하 는 동안에는 결코 의의 옥표에 이를 수가 없고, 몸을 벗어버릴 때까지는 계속 그들의 영욱간의 무쟁 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다시금 마음이라는 단어를, 철학자들에 의해 높임을 받게 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조명을 받음으로 해서 올바 르게 이해하고 결의하게 된 그 부분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은 지식- 이 지 식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건져주신 것에 대해 아는 지식이다-을 언급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식에다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연결지어 놓았다. 이 예의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것과 더불어, 그는 그 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많온 타락과 부패로 더럽혀진 채로,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본문의 귀절은 몇몇 불온(不穆)한 망령 들이 현재 재생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는 순수주의파 (Purists. Cathari) 의 가장 유독한 교리를 정죄하는 데 사용픽는 유명한 귀절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