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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23)

1. 성경 (롬 6:12 ~ 2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2)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3)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4)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5)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7)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8)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19)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0)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1)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2)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 이제 바울은 그의 권고를 말하기 시작한다. 이 권고의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갖는 교제에 관하여 그가 말했던 교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비록 죄가 우리 안에 거하여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주장하는 권능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성화의 권능이 죄의 권능보다 우세해야 되기 때문이며,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인 것을 우리의 생활로 증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몸이라는 말은, 내가 이미 주장한 바대로, 육체와 피부와 뼈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인간의 전 존재(全存在) 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의미를 본문에서 아주 확실하계 추론할수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몸의 부분들에 관해  곧 언급하게 되는 다른 문구에서는 영혼까지 아울러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처럼 땅에 속한 인간을 업신여겨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한 까닭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혈통에 합당한 것을 아무것도 우리가 열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3절에서도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야수들처럼 육체가 된 것을 불평하시면서, 사람에게 땅에 속한 성품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를 않으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한 그리스도의 선언(요3 : 6)도 갈은 개념을 지니고 있다. 영혼의 경우에는사정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반론은, 우리의 현재의 타락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영혼이 땅에만 집착해 있고. 그리고 우리의 육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영혼의 본래의 탁월함에서 전락해 버렸다는 주장에 의해서 쉽게 응수될 수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이 육체적(corporeal)인 것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이 하늘의 은혜를 상실 (privatus coelesti gratia) 당했고, 그리고 단지 일종의 믿을 수 없는 그림자나 형상(Jallax tan umbra - vel imago) 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몸을 죽을 몸이라고 경멸하여 또 언급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전 본성이 죽음과 파멸을 면할 수가 없다는것을 가르쳐 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고, 우리를 충동하여 죄를 짓게 하며, 우리의 모든 악한 행동과 악의 근원이 되는 원시적 부패 (original depravity)에 죄의 오명(汚名)을 붙여 주고 있다.  바울은 죄와 우리 둘 사이에 정욕을 개재해 놓음으로 해서, 우리의 무 절제한 욕망들이 죄의 칙령이요 명령인 한, 죄가 말하자면, 우리위에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3  또한 너희 지체를 볼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죄가 한 번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기능들은 즉각 죄를 섬기는 데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죄가 왕노릇 하는 것을  죄의 결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죄의 멍에를 벗고자 하는 경우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하는가를 보다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함에서이다. 바울이 우리의 지체들을 병기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군사적인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치 어떤 군인이 자기의 장수에게 명령을 받을 때는 언제라도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자기의 무기를 항상 준비해 놓고 있기는 해도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 한 결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 인들도 또한 자기네들의 모든 지체들을 영적 싸움을 위한 무기로 여겨야 한 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과도 갈다.

 

그러므로 만일 신자들이 그들의 지체들 중에 어느것이 라도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들은 죄를 방조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하는 맹세를 서약 하였으며 그리고 이 맹세에 그들은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의 전염과의 모든 관계를 삼가하여 끊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마치 사단의 창녀들이기라도 하듯이 온갖 종류의 가증한 추행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지체들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장하는 것인지에 대해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다. 이에 반하여, 바울은 이제 우리에게 명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림으로써, 육신의 정욕이 우리를 끌고갈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우리의 심령과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열심히 순종을 준비하고서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의 지체들도 또한 그의 뜻에 바쳐지고 헌신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능력들이 그의 영광만을 대망할 수 있어야하는것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우리의 이전의 생명이 멸망되었끼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다른 생명으로 창조하신 것이 헛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이 다른 생명과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진리의 체제를 거의 또는 전혀 가지지 못한 해석들을 반복해서 말하고 반박하는 말에 긴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해석들보다 더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는 해석 하나가 있다.

 

즉 '법 아래’라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지 못하는 `율법의 의문의 종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한편 '은혜 아래’라는 말씀은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부패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해석을 전적으로 찬동할 수가 없다.  이는 만일 우리가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다음에 나오는 질문인 우리가 "법 아래 있지않으니 죄를 지으리요?"라는 물음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우리가 엄격한 율법에서 자유케 됨으로해서 하나님께서는 높은 수준의 공의에 준하여 더 이상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을 바울이 이해하치 못했다고 한다면, 그는 결코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주님의 바로 그 법의 속박으로부터 다소 플림 받는 것을 지적하려고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논쟁을 벌임이 없이 나의 견해를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감정 때문에 거룩합에 이르려는 시도도 해보지 못할까 보아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격려를 우리가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들의 모든 힘을 의에 순종하는 데 사용하도록 권면한 바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육체의 찌꺼기를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불확실하게 행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음으로해서 의기소침하고 낙담하지 않도록 그들의 행위가 지금은 율법의 엄격한 규칙에 준하여 강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결을 용서하시고 친철과 사면을 베풀어 그들을 용납하고 계신다는 점을 생각케하여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해주는 위로의 기회로 삼고있다. 율법의 멍에는 그것을 메는 사람들이 깨어지고 부서지지 않고서는 멜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하여 그들의 자유의 수호자로서 그의 도움을 간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물됨이 그러한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대하여 빛진 자는 아니셨지만. 그가 자신을 율법의 속박에 복종시킨 것은 사도의 말을 빌리면. 그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함에서였다(갈 4 : 5). 그러므로 법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은 죽은 문자가 우리를 정죄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구하고. 그리고 율법의 아무 부분이라도 범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을 선언하는 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은혜'라는말을 구속(redemption) 의 두 요소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 주는 수단인 죄의 용서와 그가 우리들 새롭게 빚어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방편인 성령의 성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흔히 그러하듯이 이 반의 접속사는 원인을 나타내며, 그뜻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그 의미는 아주 분명 해질 것이다.  사도는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가 바른 것을 행하려고 애쓰다가 지치지 않도록 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도 우리 자신 안에 많은 결함과 불완전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독침들이 아무리 많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그것들을 능히 정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더우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가 율법의 멍애에 얽매어 있으며, 그것의 정죄 아래 붙들려 있다는 것을 사도가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는 한, 그들은 죄의 지배을 받는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15 그런측 어찌하리요 ... … 죄를 지으리요." ; 육체의 지혜는 항상 하나님의 신비를 거스려 절규하기 때문에, 바울은 가능성 있는 반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 진술을 첨가해야 했다. 율법이 선한 생활의 규칙이요. 인간들을 규제하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만일 율법이 깨어진다면, 모든 권징이 즉시로 땅에 떨어지고, 구속력이 산산조각나며 그리하여 종래는 선악의 구별도 없어지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율법에서 인정하시는 의가 그 율법이 폐기될 때에 폐지된다 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 점에서 우리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폐기는 우리에게 삶의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율법 (precepts) 에는 전혀 적용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 (precep_ts)을 확증하시고 재가하시며, 폐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론의 바른 해답은, 율법 중에서 유일하게 제거된 부분은 '저주이다’라고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바울이 이 점을 명 백하게 진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씀온, 지금까지 생각되어 온,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마치 바울이 그러한 질문의 반증을 드는 것보다는 그 것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하는 편을 택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고 있는 대조의 본질 문제로부터 곧 바로 반론을 반박하는 데로 나아가 대강 다음과 갈은 의미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멍에와 죄의 멍에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 둘을 동시에 질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죄를 섬기는 데 자신을 내어 줌이 된다.  한편,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죄의 폭정으로부터 구속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죄에게 얽매어 있을 수가 없다?  바울의 논증을 추적함에 있어서 그가 취한 순서를 보 다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 더 좋겠다.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순종하든지." ; 관계 대명사인 ‘누구' 는. 자주 그러하듯이, 원인의 의미로 여기서 해석될 수가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즉  존속 살해범이 하지 못할 종류의 악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who) 야수들마저도 주저하는 행위인 모든 범죄 중에서 가장 악한 존속 살해를 범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논증을 일부는 노예제도의 결과에서, 일부는 상관 접속사의 성질에서 끌어내고 있다.

 

첫째로, 그들이 하는 순종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이 종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강요하여 자신에게 복종케 하는 그 사람에게 명령하는 권능이 속한다는 사실이 순종에 의해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논증은 노예제도의 결과에서 취해 온 것이다.

 

둘째로. 만일 우리가 종이라고 하면, 죄가 우리를 주관한다는 이 사실에서 귀결된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니라." ; 본문의 표현 어법은 엄밀히 따지면 정확하지는 않다. 만일 바울이 문장의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자 했었다면 그는 ‘의의 종으로 생명에 이르니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들을 바꾸어서 표현한다고 해도 본문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는 의의 본질을 ‘순종’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환유법 (metonymy) 에 의하여 하나님의 명령 자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순종이라는 단어를 아무런 수식하는 말 없이 사용한 것은, 사람들의 양심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가리킨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할 된 순종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그의 비교를 자기 앞에 있는 사건의 경우에 적용하고 있다. 비록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 시킬 필요가 있었던 유일한 진리는 그들이며 더 이상 죄의 종들이 아니라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감사의 말을 덧붙이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덧붙여 감사의 말을 하고 있는 목적은 첫째로, 그의 독자들이 죄에서 건짐 받은 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연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에 연유한 것임을 그 들에게 가르쳐 주려 함이요, 동시에 그들이 드리는 바로 그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지극한가를 그들이 배울 수 있게 하려 함에서이다.  그러므로 이 감사로 인하여 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죄를 증오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감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이 죄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들이 받은 죄에서의 구원 (deliverance) 은 그들이 앞서의 신분에서 떠났을 때 따라온 것이며. 그들이 죄의 종되었던 기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의 이전의 신분과 현재의 신분 간의 이 암 시된 비교는 강조되어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그리고는 은혜가 풍성하지 못하게 될 때 온 인류가 죄의 지배아래 붙잡히게 되나,  은혜가 그 힘을 발휘하자마자 죄의 왕국이 끝장나 바린다는 것 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이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죄를 위해 울법의 굴레에서 해방된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라가 하나님 의 것 이 되 어 우리 안에서 의를 새롭게 하게 되기까지는 율법이 그 지배력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게 될 때에는 우라는 죄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거듭남의 영이 이 '은혜'라는 말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 너희가~~~~~ 마음으로 순종하여." ;  바울은 여기서 또한 성령의 감추인 능력을 율법의 외형적인 문자와 비교하여  마치 그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그것의 위협과 공포로 강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으로 내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빛어 내신다' 고 한 것과도 같다 하겠댜 이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셨다면  그가 우리에게 죄 지을 자유를 가져 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방을 막아 버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들판에서 방목하는 망아지처럼 아무런 제약도 없이 뛰어다니도록 그들의 추종자들을 내어주어 난폭한 방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지도하여 합당한 생활 양식에 이르게 하신다. 에 라스무스는 라틴어 (Vulgate) 을 따라서, 본문의 ‘본'을 형 'cform) 으로 번역했으나. 나는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본 yp 라는 말 을 그대로보존해 두고 싶다;; ;' 모형 '(pattern) 이라는 士어는 아마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새겨 주신 9:1 의 명백한형 (image) 을 바울이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이 미 제정된 율법의 규칙에 일차하며, 이 규칙에 따라 우리의 모든 행동은 형성 .!iJ 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 의 행동온 좌로나 우로 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라" ;. 본문의 의미는, 누구이든지 자유를 얻은 후에 계속해서 속박에 매이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얻은 자유의 상태들은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다시 죄의 지배아래 오게 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에서 자유케 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논증은 동력인(動力因)에서 끌어낸 것이고,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목적인.(目的因) 에서 끌어 낸 것인 즉  '너휘가 죄의 속박에서 해방을 받은 것은 너희가 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함에서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완전히 죄를 잊어버리고. 너희의 온 마음을 놀이켜 의에 이르게 되는 것온 합당하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 가 참으로 자유하리 라 .. (요 8 : 36 ) 라고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신 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천절로 말미암아 최의 포 학으로부터 먼저 해방받지 않는 한, 아무도 의를 섭길 수 없다는것을 유 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록할 수 있는 구원(최에서 건져냄)의 행위에 선행의 시작이 좌우된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자유 의지의 능력으로 그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할 수가 있겠는가? 

 

"19 내가 사람의 예 대로 말하노니" ;  바울은 그가 본질이 아닌 형식에 관한한, 사람들의 예대로 말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와같이 요한복음 3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그가 하늘의 비밀들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땅의 것들 말하고 계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장중한 주재가 요구하는 바와 갈은 숭고함을 가지고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그가 무식하고 천박한 사람들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서론삼아 그렇게 말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가 죄짓는 면허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조잡하고 악랄한 비방의 성격을 보다 더 잘 증명해 준다

 

이와 아울러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적은혜가 땅에 속한 자유보다 신자들에게 덜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만큼 불합리하고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런 일은 없다고 신자들에게 훈계하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죄와 의를 비교함으로 해서 너희가 죄에 순종할 때 보여 주는 것보다 의를 섬길 때 보여주는 열정이 얼마나 더 많이 대단해야 할 것인가를 나는 밝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비교를 생략한 것은 너희의 연약성을 감안하기 위함에서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가장 관대하게 다룰 수 있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정당한 요구를 너희에게 할 수가 있겠다.  즉, 적어도 너희는 너희가 죄를 섬겨온 것 이상으로 냉담하게 또는 부주의하게 의를 행하여서는 안된다.' 

 

바울은 여기서 사람의 말이 표현 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이해하기를 바랄 때처럼, 충분한 의미를 진술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대단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신자들에게 보다 크게 주의를 기울여 의를 순종하라고 권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는 죄보다 훨씬 더 섬김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블법에 드려 볼법에 이른 것같이" ;  즉, 너희가 이전에 너희의 모든 신체 기능들을 동원하여 죄에 쉽게 순종환 것은 너희의 육체의 부패로 인하여 너희가 얼마나 불쌍한 상태로 노역(奴役)과 속박에 묶여 있었던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그때보다 못하지 않은 열심과 마음 가짐을 갖추며, 너희의 선을 행하는 활동이 이제는 지난 번에 죄를 지을 때 보다 더 활발하게 하라.  바울은 부정을 거룩과 대조함에 있어서 데살로니가 전서 4장 7절에서와 갈은 순서로 말하고 있지 않으나. 그의 의미하는 바는 아주 분명하다.

 

첫째로. 바울은 죄에는 두 종류―부정과 불법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중에 전자는 정절 및 성결과 대조를 이루며,후자는 이웃에게 가해진 위해 (危害) 행위를 가리킨다. 그는 또한 다른 의미로 불법 행위를 두번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첫번째 경우에는, 약탈, 사기, 위증, 온갖 비행을 의미하며, 두번째 경우에는, 생활상의 일반적인 부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너희는 사악한 행위들을 행하여 너희들의 지체들 더럽힘으로써, 불법의 나라가 너희 안에서 득세하도록 하였다” 고 바울이 말했던 것과도 갈다 하겠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바, 의란 율법과 의로운 생활의 규칙으로 나는 믿는다. 그 율법의 의는 성화이며,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몸을순결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토록 하게 하기 위함이 다.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 바울은 그가 앞서 언급한 죄와 의의 멍에 사이의 구별을 반복하여 말한다. 죄와 의는 서로 정반대 되기 때문에 자신을 어느 한 쪽에 헌신하는 사람은 다른 한 쪽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을 비교시키는 것은 우리가 각각 그것들을 나누어 살핌으로써 그 각각으로부터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이다.  비교법을 사용하게 되면 우리가 어떤 주제를 논하든 간에 그 주제의 성격을 고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와 의를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구별을 지은 후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 그 각각의 결과들이 어떤 것인가를 밝힌다. 그러므로 사도가 여전히 서로 정반대되는 것으로부터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여해 두어야 한다.   “너희가 죄의 종들이었을 때는, 너희는 의와는 단절되어 있었느니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의들 섬기는 것이 너희의 의무가 되었나니, 이는 너희가 죄의 멍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니라''.  바울이 말하는 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순종하여 의를 섬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한편, 육체의 자유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하여 마귀에게 다만 얽매이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천박하고 저주받은 자유이며. 그러기에 이 자유는 거리낌이 없는, 아니 오히려 광란적인 난폭으로 우리가 파멸된 것을 보고 기뻐한다.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바울은 그들의 양심에 호소 함으로써, 그리고 그들 자신이 몸소 느낀 수치감을 고백함으로써만 그의 말의 뜻을 보다 강력하고 효과있게 표현할 수가 있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과 복음에 의하여 영안이 뜨이자마자 곧, 그들의 과거의 생홀 전체가 그리스도 없이 살았던 까닭에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려고 애쓰기는커녕, 사실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또한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치욕을 계속적으로 명심합으로써, 과거 생활에 대한 치욕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더욱 참되고 기쁘게 겸허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말씀은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불결이 얼마나 심화되어 있는가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죄의 어두음에 뒤덮여 있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자기 애 self-love) 야말로 얼마나 맹목적인가?  주님의 빛만이 우리의 눈을 열어서 우리 육체 속에 감취어 있는 더러움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정 으로 불만을 느끼고 그리고 자기들의 비갑함을 보고 느끼는 수치감으로 어쩔 줄 모르게 된 사람들에게만이 기독교 철학의 원리들이 불어 넣어질 수 가 있다.  바울은 끝으로. 신자들이 거의 파멸에 이를 뻔하고, 그리고 바야흐로 죽음의 바로 그 찰나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때 그들은 얼마나 많이 부끄러워하게 되는가를 뒤이어 나오는 문맥에서 보다 명백하게 보 여주고 있다. 참으로, 만일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뒤로 물러서게 되지 않았던들, 그들은 죽음의 문턱에 이미 들어서 버렸을 것이다. 

 

"22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바울은 전에 말하기를, 죄에 두 가지 결과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말하기를· 위에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결과들이 있다고 한다.  죄는 금생(今生)에서 악한 양심의 고통을 가져다 주고. 이 생명이 끝난 후에는 영원한 사망을 가져다 준다.  이에 반해서 의는 우리에게 금생에서는 거룩의 열매를 맺혀주며 장래 에서는,영원한 생명을소망케 해준다.  이것온,우리가 헤아릴 수없을만큼 어리석지 않는 한, 우라 마음 속에서 죄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을 불러 일으켜 주며 의에 대한 사랑과 사모함을 심어줄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사람들은'텔 로스'를 공물(tribute) 로 번 역하고 었으나. 나는 이것을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망은 우리가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인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공물’이라는 말은 바울이 그말율 적용한 다른 구절에는 들어 맞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이 의의 공물이 라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죄의 샀은 사망이요~~" ; 어떤 주석가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이 사망을 군인들에게 할당된 정량의 하루분 양식 (rations) 에 비교함으로써, 죄인들에게 지급되는 삶의 불쾌한 성격을 매섭게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 이는 그 헬라어 단어가 때로는 군대의 정량의 양식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낚시에 걸려 든 물고기처럼, 죄의 미끼에 유혹되어 파멸에 이른 사람들의 맹목적 욕망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삯' 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완전하다. 왜냐하면 사망은 사악한 자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앞의 죄에 대한 결론 즉, 에필로그(epilogue) 이다. 그러나 바울이 동일게 개념의 말을 바꾸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죄' 대한 공포를 가중시킴으로써 죄를 더욱 증오스런 것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 ; 본 구문을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니라' 고 번역하는 것온 잘못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의가 주어갸 되고 하나님의 은사는 술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의미는 대조법을 드러내주지 못한다. 죄는 바울이 이미 가르쳐 준대로, 사망만을 낳는다. 그런데 그는 이제 하나님의 온사, 즉,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영생의 축복을 가져다 준대로, 사망만을 낳는다. 그런데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사, 즉 우리의 칭의 와 성화가 영생의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이런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사망의 원인이 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바 의는 우리에게 영생을 회복시켜 준다.

 

그런대 한편.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순전하신 사랑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추론할 수가 있다.   바울은 의의 삯은 영생이라고 진술하여 두 문을 걸맞게 할 수도 있었겠으나.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 을 얻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 은사 역시 아무 것도 수반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은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들의 의로 옷입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께 화목되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 거룩함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위엄에 대한 어떠한 자만심도 갖지 옷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