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 5: 12 ~ 16)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2)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3)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4)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5)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이러므로 한 사랍으로 말미암아 " ; '바울은 반대되는 것들을 비교 함으로써 같은 교리를 이제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아담이 빠졌었고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들을 그와 함께 곤두박질 치게 만들어 버렸던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알게 될 때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이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아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비유가 모든 면에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잡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곳에서 살펴 기로 하겠다. 또한 혹 있을 수도 있는 차이점에 대해서도 지적하기로 하겠다. 본문의 문장이 불완전합으로 해서 본문을 다소 흐리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교 구문들 중에 첫째 구문과 비교되는 둘째 구문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련된 문구를 다루게 될 때에 그 둘을 보다 분명히 하도록 해 보고자 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 여기서 바울이 밟고 있는 순서에 주의한다. 그는 말하기를, 죄가 앞섰고, 그리고 사망이 죄를 뒤따랐다고 한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우리의 파멸이 이렇게 왔으니, 우리가 멸망하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서가 아니라, 단지 아담이 말하자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주석가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단언하기를, 죄의 벌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이미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잠시 뒤에 가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어째서,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에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우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죄를 짓다 (to sin) 는 말은. 그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대로, 부패하고 더럽혀져 있다는뜻이다.
우리가.모태(母胎)로부터 지니고 나온 생래적(生 來的)인 부패는. 비록 그것이 즉각적으로 그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여전 히 하나님 앞에서 죄이며. 그래서 그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원죄이다. 아담이 처음 창조 되었을 때 그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 라 그의 후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 ( divinae grati죠 dotes)을 받았던 것처럼, 그는 주님으로부터 타락함으로 해서, 그 자신 속에서 우리의 성품을 부패시키고.더럽히고, 파멸시켰다. 즉,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음으로 해서 ( abdicatus a Dei similitudine ), 그가 생산해 낼 수 있었던 유일한 씨 (seed) 는 그 자신을 닮는 것 ( sui simile ) 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죄들 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생래적인 부패로 물들어 있고, 그리고 이런 까닭에, 사악하고 완악하기 때문이다. 죄가 아담으로부터 온 인류에게 물려진 것은 모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말씀을 교묘하게 피하려한 펠라기우스파의 시도는 천박한 사기였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다만 하나의 모범은될지연정 의의 원인이 될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바울은 여기서 본죄(actual sjn>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면, 왜 바울이 아담을 그리스도와 비교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의 생득적이고 유전적인 부패를 언급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 본문의 귀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예상하고 기록한 말씀이다. 율법이 없으면 범죄란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에, 죄가 율법 이전에도 있었는가 하는 의심이 다소 있을 수가 있다. 율법 이후에 죄가 존재한 것에 대해서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율법 이전의 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대답하기를. 비록 하나님께서《그때까지는 기록된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내리지는 않으셨으나, 인류가 심지어 모태로부터 여전히 저주 아래 있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울법이 공포되기 전에 사악하고 타락한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결코 정죄를 받지 않고 면할 수 없었다. 이는 언제든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이 계셨고 의의 법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해석온 명약관화하기 때문에 어떠한 반대되는 설명도 논박하기에 충분 한 것이다. .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 만일 율법이 우리 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악한 행위를 아주 잘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우리를 억누르는 악에.대한 지식을 할 수만 있으면 억제하여 없애 버리거나,적어도 그것을 빨리 잊음으로 해서 기억에서 없애 버린다 . 율법은 우리를 정 죄하고 책망하는 한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케 해준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들의 완악성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율법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지 않는 경우 선악간의 구별도 대개 제쳐 놓고서,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것처럼, 조심이나 거리낌이 전혀없이 그들의 정욕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가인이 받은 벌, 전 세계를 파멸시킨 홍수, 소돔성의 무너짐 그리고 아브라함 때문에 바로와 아비멜렉에게 내려진 벌 또한 끝으로, 애굽 사람들에게 임한 재앙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들리신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사람들이 서로간에 죄가 있다고 비난하는 많은 불평들과 간언들이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자기네들의 행위를 조심스럽게 무죄하다고 해명하는 변명들로 보아, 그들이 서로간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고소한 것이 또한 입증된다. 모든 사람들이 선악을·모두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많은 실례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악행(惡行)들을 묵인하여, 어쩔 수 없이 죄를 자기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바울이 주 장할 때, 그가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율법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 행동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나태에 빠지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이 지혜옵게도 본 문장을 소개한 것은 유대인들이 본 문장에서 을법에 의하여 그들이 공공연하게 정죄 받음으로써 그들의 죄가 얼마나 중한가를 보다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그의 법정에 소환한 일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형벌을 면치 못한다고 하면 전령과도 갈이 율법이 그들의 죄를 선언하며 참으로 심판을 경고한 유대인들의 경우는 어찌될 것인가? 죄가 율법있기 전에 죄로 여김을 받지 않고서도 왕노릇한 것을 바울이 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가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들어 볼 수가 있다. 사망의 원인이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것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모든 사람들의 멸망이 최종적으로는 율법에 의하여 계시되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즉시로 모든 사람이 비참 버림을 받았다고 바울온 선언한다. 문맥상 반의 (反意)접속사 '데'를 '비록 ……하지 만' (although) 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 의미는, 비록 사람들이 방종할 수도 있겠지만. 율법이 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이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4.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사망이 윙· 노릇하였나니." ; 아담으로부 터 율법이 공포된 모세 때까지 인간들이 살아온,조심성 없고 방탕한 생활이 그들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었다는 것을 바울은-보다 분명하게 설명한 다. 선악간의 구별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율법의 경고가 없었기에 죄를 상기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그들을 정죄할 수 있도록 최가. 여전히 편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그때에도 왕노릇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들의 맹목과 심령의 .완악함에 의해서 파괴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본문은 일반적으로 어린애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어린애들온 아무런 본죄로 인한 죄책이 없이 원죄로 말미암아 죽는다. 그러나 율법없이 죄를 범한 모든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라키는 것으로 나는 본문을 해석하고 싶다. 이 귀절은 앞의 말씀들과 관련지어져야 하는 것이다. 앞의 말씀들을 보면, 율법이 없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죄를 전가시킨 일이 없는 것으로 진술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담의 범죄와 같온 죄를 짓지 아니한 것은. 아담이 받았던 것과 갈은 확실한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아담에게 금하여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에계 주께서 주신 유일한 명령은 양심의 증거뿐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간의 이 차이점으로 인하여 그들이 정죄받지 않고 면제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어했다. 한편 영아들도 만인 공통의 명부에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 문장온 두번째 절(clause) 대신 들어와 있다. 비교 문구의 일부만이 명시되어 있고:, 다든 부분은 파격구운(anac oluthon)에 의하여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이렇다. 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처럼,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 놀랄 팔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담과 고리스도 간에 어떤 유사점은 아주 분명하계 드러나 있으나, 어떤 경우는 완전히 정반대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회복되었기 때문에.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불리운다 해서 부당할 것은 없다. 그러나 마치 아담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범에 의해서만 우리를 앞선다는 듯이. 아담이 죄의 모형으로 불리우시 않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의의 모형으로 불리우지 않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 두 사람은 오히려 대조되어 있다. 우리가 이 점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오해와 오리겐의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에서다. 그런데 오리겐은 인류의 타락을 비기독교 철학의 용어로 이론화시키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거의 완전히 파괴할 뻔하였다. 에라스무스도 용서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가 그처럼 엄청난 오해를 변명하느라고 장황하게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이제 위에서 그가 소개하였던 비교 구문의 수정 부분이 나온다. 그러 나 사도는 그의 독자들이 쉽게 빠져들 가능성이 있었던 오류를 반대할 때처럼,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가 설명할 때 말하지 않고 생략해 버린 것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가 자주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의 모든 반복된 진술들은 비교하는 절(clause)을 결여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생략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바울의 문체상의 홈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지는 그 천국의.지혜의 위엄을 그것들이 결코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로 말미암아 이 천국의 오묘한 신비들이 비약한 문체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전해전 것은 우리의 믿음이 인간의 웅변의 힘에 의거하지 않고 성령의 효험에만 의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아직도 그가 하고 있는 수정(修正)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된 온혜가 첫째 사람 아담에 의해서 지워진 정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속하게 되었다고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다만 어떤 논점(論点)을 가지고 논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나의 모든 독자들이 의견을 같이 할 수 있을지 그 여부를 나는 모르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아주 알맞게 추론할 수가 있다.
즉, 아담의 타락이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데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파괴시키는 힘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는 힘이 훨씬 더 강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을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의 논증도 논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두 해석들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일임 하겠다. 뒤이어 나오는 문구는 논리적인 추론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일한 논증을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에 있는 유사점에 관하여 그가 진술했던 진술을 그가 말하고 예외에 의하여 단순히 관련짓거나 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더 큰 수를 많은 수와 대조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의 큰 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아담의 죄가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덜 효과적일 리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구원받는 자와 멸망받는 자의 수를 아담으로 말미암은 멸망시키는 세력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하는 능력을 다만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 바울은 이 말씀을 부패가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물려져 내려왔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마치 우리 자신에게는 책망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럽 생각하나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아담의 허물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의 멸망을 아담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그의 죄가 우리의 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우리의 죄란 우리 안에 있는 생테적(natural) 이고 생득적 (innate)인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와…은혜로 말미알은 선물……" ; 온혜가 범죄와 반대되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고 은혜로부터 나오는 선물은 사망과 반대가 된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 또는 그의 공로 없는사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 주셨는데, 이는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그 '선물'은 우리 에게 임한 이 긍휼의 열매이다. 즉, 우리가 생명과 구원을 얻은 화목이다. 그것은 또한 의요. 새 생명(newness of life) 이요, 모든 기타의 같은 유 (類)의 축복이다. 이것은 중세 신학자들이 내린 은혜에 대한 터무니 없는 정의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데 중세 신학자들은 은혜를 단지 사람들의 심령 속에 주입된 자질(資質 ; quality)로 보고자 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은혜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은혜의 결과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은혜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한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 모두가 얻어낼 수 있는 원천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생명의 한 방울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발견될 수가 없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풍부한 것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의 궁핍과 부족을 위한 구제책이 없다는 것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16절 " ; 본문은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비교를 그가 수정한 것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되는 바, 즉 죄책은 한 범죄로부터 만연되어, 우리 온 인류를 정죄하는데 이르렀으나. 값 없이 주시지는 은사는 '우리의 많온 범죄로부터 우리를 의롭다 하는데, 유효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앞 문장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은. 바울이 아직껏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아담을 능가하는가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아담간의 이 구별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한 것은 단순히 원죄, 또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온 부패로부터의 자유뿐이라고 가르친 사람들이 신성 모독적인
견해를 주장한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주의할 것은. 많은 범죄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함을 받는 것으로 바울이 주장하는 바, 그 많은 범죄들이란 우리 각자가 세례받기 전에 범했던 허물들뿐만 아니라, 또한 성도들에게 매일 새로운 죄책을 지워주고, 그리고 만일 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항구적인 변치않는 구원(constant rel~ef)을 얻지 못했다고 하면, 그들이 마땅히 정죄 받아야 했던 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은사’와 ‘심판'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심판이란 엄격한 공의를 뜻하고, '은사'란 값없이 주는 용서를 뜻한다. 이는 정죄가 엄격한 공의에서 비롯되고, 사면(敎免)은 용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말하자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의에 따라 다룰 것. 같으면, 우리 는 모두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칭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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