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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5:21)

1. 성경 (롬 5: 17 ~ 21)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7)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8)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19)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0)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7  한 사람의 범죄틀 인하여…" ;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진술한 비교를 일반적으로 다시 수정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 비교에 관하여 상론(詳論)한다. 바울의 목표는 모든 세부적인 주제를 모조리 파헤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요점만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앞에서 은혜의 능력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더 풍성 하다고 말 했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하여 신자들 을 위안하고 그리고 견고케 하며, 동시에 그들을 고무하고 격려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깊이 생각케 한다. 바울이 이처럽 진지하게 반복하여 말하는 의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훌륭하게 선포하며, 자기를 신뢰는 데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로 인도되어, 우리가 그의 은혜를 얻었은 즉, 우리로 충만한 확신을 누리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이 은혜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감사의 원천이다. 본문 전체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능가하시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그리스도의 의에 압도된다는 것이다. 아담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타도되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이 아담에게서 온 사망을 삼켜버린다. 그러나 이 비교의 부분들이,  서로 일치되어 있지는 않다. 바울은 신자들이 왕노릇하리라고 말하는 대신, 생명의 축복이 은혜가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충만하고 풍성하다고 말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똑같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왕국이 생명 안에 있고 그리고 생명의 왕국이 신자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 간에 있는 두 가지 차이점이다. 사도가 이 차이점들을 여기서 생략한 것은, 이 두 가지가 중요 하지 않다고 그가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야니고, 이 둘을 열거하는 것이 본 논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받는 것은 죄의 전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처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죄받는 것은 우리 또한 죄책이 있기 때문에 아담이 받는 형벌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이 본성은 아담 안에서 부패되었다-------이 부정하기 때문에 죄책이 있는 것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전혀 다른 방도에 의하여 우리을 회복시켜 구원을 얻게 해준다. 우리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그의 모든 축복과 함께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축복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관대함을 베풀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의의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질-----이것은 그릇된 해석이다------이 아니고, 값없이 주는 의의 전가(the f_ree ' imputation of righteousneg, ) 이다. 사도는 '은혜' 라는 말에 대한 그의 해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담이 그의 온 인류를 정죄에 연루시킨 것과 갈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아주분명하다. 왜냐하면 저주------우리는 이 저주를 아담에게 서 물려 받는다-----가 본질적으로(by nature) 우리에게 전달되어 있는 까닭에. 그 저주가 온 인류를 연루시킨다고 해서 놀랄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죄의 처참한 유업을 참여하여 물려 받는데 충분하다. 왜냐하면 죄가 인간의 살과 피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항유하기 위해서는 신자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와 교제< consortium.)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특별한 방법으로 영아(infants)에게 전달된다. 영아들은 언약으로 입양의 권리를 갖는다.   이 언약에 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통 ( in iChristi communionem )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경건한 자들의 자녀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은혜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인류 공통의 운명을 결코 면하지 못한다.

 

"18 그런측 한 범죄로……말미압아."  ; 그런즉 한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이 의롭다 하십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본문의 문장은 완전하지 못하고 결함이 있다. 그러나 정죄와 의롭다 하심이라는 단어들을 주격으로 읽어주면 그 뜻이 온 전해 질 수가 있다.

 

 본 구절은 앞에 나오는 비교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가 삽입해 넣은 수정에 대해 언급하기를 생략하고. 그 비교를 지금 완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이 된 것처럽, 또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의롭다 하기에 유효하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가 이렇게 유효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의롭다 하시는 것(칭의)이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상기시키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남 몰래 혼자서만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의는 그 범위가 광범위하였는데,  이는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신자들을 그가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공통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에게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제공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방금 사용한 두 단어인 '심판'과 '은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또한 반복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죄가 많은 사람들을 정죄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의롭다하는데 유효하다.  나의 판단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justification of life )는 말씀은 사면을 뜻한다. 이 사면은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준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대하여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용납되는 것은 우리가 의로울 때 에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것의 기원을 의롭다 하심(칭 의)에 두고 있는 것이다.

 

"19절" ;  본문의 이 말씀은 같은 말을 쓸데없이 반복한것이 아니고, 앞 구절에 대한 꼭 필요한 설명이다.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정죄를 받았다고 말했으나, 어떤 사람이든 무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 받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어했다. 그가 뒤이어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고 진술한 경우.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해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주론할 수 있는 것은 의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있는것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사실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순종이라고 일컬음으로써 그것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 존전에 무엇을 가져오도록 우리에게 요구되는가를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순종인 율법에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일 의로운 사람이 타락할 것 같으면. 그의 이전의 의는 아무것도 기여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의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 억지로 갖다 내민 자기 본위의 계획들의 허위성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행하라고 하신 것을 오직 우리가 준행할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것이 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를 대담하게 주장하는 자들과는 교제 하지 말자.

 

그런데 행위의 의는 율법을 온전히 완전하게 지킬 때에만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란,·아무데도 없음이 확실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행위―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배설물만도 못하게 여기신다—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은 정신 빠진 자들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이다.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바울이 여기서 진술하고 있는 것은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죄가 존재했다는 그의 앞서의 진술에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죄가 존재했다고 하는 이 사실이 확립되었을 때  '무슨 목적으로 울법이 주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곧 바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난제를 또한 풀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바울에게 지엽적인 문제를 장황하게 다룰 여가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오다가 본문에 와서야 다루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금 말이 나온 때에 죄가 더  많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이 들어 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여기서 율법의 전체적인 용도와 직무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그의 현재의 목적에 도움을 주는 한 요소만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의 멸망이 보다 분명하게 그들에게 계시 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바울은 말한다. 인간들온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실로 파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파멸되었는데도 살아남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깊은 데로 침몰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을 압도해버린 홍수에서 인간의 기대와는 반대로 그들이 떠오르게 되는 때 그들의 구원이 보다 현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이 부분적으로는 이미 한번 정죄받은 사람들을 다시 정죄하기 위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어져 야 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악을 깨닫게 하며, 그들이 유죄로 입증 되었을 때에는 강제로라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시 될 수 있을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어거스틴 시대 이후로 본문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잘 알려져 있다. 육신의 성욕이 율법의 제재를 받아 억제될 때. 그것은 더욱 더 충동을 받는다. 하자 말라고 금한 것을.더 하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본능적인 경향이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범죄의 증가라는 말을 단순히 지식과 완악성의 증가로만 나는 해석하고 싶 다.  왜냐하면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목전에 재시됨으로 해서. 정죄가 그들을 위해 축적되어 있다는 것을 항상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죄가-------이 죄는 율법에 의하여 인간의 목전에 재시되지 않으면 인간들이 모른 채 했을 것이다---------그들의 양심을 점유하고 있다. 이제는 율법이 주어졌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뜻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고 있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전에 공의의 한계를 단순히 범 하였던 사람들이 신적 권위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 된다. 이로부터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중가되는 것은 율법을 주신 자의 권위가 이제 무시되고 그리고 그의 위엄이 격하되기 때문이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죄가 인류를 압도하여 그들을 자기 세력 안에 붙잡아 둔 이후로 은혜가 임하여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그 죄의 홍수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집어 삼킬 만큼 큰 홍수를  이루어 부은 바 된 까닭에 그 은혜의 범위가 보다 현저하게 뚜렷이 계시되어 있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 는 것은 우리에 대한 정죄가 율법에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계속하여 거하도록 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비참함을 잘 깨닫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포로된 자에게는 구원자가, 고통당한 자에게는 위로자가. 그리고 눌린 자에게는 방패자가 되시려고 보냄을 받으신 분이시다(사 61 : 1 ).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 알아 왕노롯하여"  ;  죄가 사망의 쏘는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망이 죄때문이 아니고서는 인간들을 제어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죄 또한 그것의 세력을 사망에 의하여 행사한다. 그러므로 죄가 사망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 문구를 보면 어순(語 順)이 다소 혼동되어 있다. 그러나 부지중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만일 ”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도록” 이라고 바울이 말했다고 하면, 그의 대조는 간단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대되는 것들을 비교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은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우리의 의 전부가 우리 자신의 공로로부터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진리를 우리의 뇌리에 보다 깊이 새겨 두기를 위함에서였다. 그는 앞서 사망 자체가 왕노릇 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죄가 왕 노릇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죄의 목적 또한 결과는 사망이다. '죄가 왕노릇하였다’고 바울이 과거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육신으로 태어난 자들에게서 왕노릇하기들 그쳤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에게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때를 지정하여 줄 수 있도록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그러므로그리스도의 은혜가 개인들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곧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던 것이 중단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