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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 : 2)

1. 성경 (롬 5:1 ~ 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1)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3)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십을 얻었은즉" ; 믿음의 의에 관하여 지금까지 주장해 온 바를 사도는 그 결과를 들어서 예증하기 시작 한다. 그러므로 본 장 전체는 그가 지금까지 진술한 것을 상술(詳述)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설명으로만,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논증을 확증시키고 있다.

그는 앞서 주장하기를, 만일 의가 행위에 의하여 얻어진다고 하면 믿음온 폐해진다. 왜냐하면 가련하고 곤고한 인간들은 그 자체로서는 견고하지 못하여 항상 불안으로 번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 나 바울은 가르쳐 주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때에는 우리의 영혼이 안정되고 평화롭게 되어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고 한다. 이것은 믿음의 의의 특별한 열매이다. 행위로 양심의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욕망온(신앙이 없고 무식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볼 수 있거니와) 무위로 끝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심령이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거나 잊음으로 해서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우리의 유일한 평화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는 그 심령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평'(peace)은 양심의 평정(平靜)을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화목되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바리새인들온 이 평정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거짓된 확신으로 교만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감각한 죄인도 얻지 못한다. 그는 그의 악덕이 주는 쾌락으로 마비된 까닭에, 화평이 결핍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 의식으로 강타당한 사람과는 달리, 이들 중에 아무도 하나님과 공공연하게 충돌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참되게 접근해 본 일이 없는 까닭에, 그들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양심이 무디어진 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온 술 취한 육신의 사람이 누리는 방심(放心)과 반대되는 것인데 자신을 일깨워서 자기의 생활방식의 전말을 밝히는 것이 우선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가 값없는 화목에 의존하지 않는한,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서지 못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재판관인 한 모든 사람들이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임에 를림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우리의 대적들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주장할때 쓸데없이 말만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바울의 결론은 가련한 인생들이 그리스도의 온혜 안에서 쉼을 얻지 못하는 한 늘 불안 할 수밖에 없다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2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이 은혜에 들어갑을 얻었으며" ; 우리가 누리는 바 하나님과의 화목온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사랑하사는 아들이요, 우리 모두는 본질상 전노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이 은혜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계 전달되는 것은, 복음이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 화목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의 나라에 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보증을 우리 눈 앞에 제시한 것온 잘한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해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신뢰하지 않게 하는 효과를 크게 거둘 수가 있었다.

'들어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구원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 들의 경우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예비적 행위를 그 구원이 배제한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무가치한 자들을 만나 주시며,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손을 내미신다’’고 그가 말한 것과도 같다. 그는 즉시로 뒤이어, 우리의 구원이 요지부동하고 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온, 바로 그 온혜가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령게 말함으로 해서, 그는 우리의 견인(堅忍)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에 기 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위에 기초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것이다.

그러 나 ‘우리가 서 있는' 이라고 동시에 그가 말함으로 해서 , 복음이 얼마나 깊이 경건한 사람들의 심령속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가들 지적해 주고 있다. 복음이 깊이 뿌리 박아야만 복음의 전리에 의하여 경건한 사람들이 강하여질 수가 있고. 그리고 혈육과 마귀의 모든 궤계들을대항하여 견교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 ‘서 있는’이라는 이 말온, 믿음이란 일시적인 한 날의 덧없는 설득이 아니라. 전생애를 통하여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자 (the faithful)들 축에 끼일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갑작스런 충동에 의해서 믿게 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에제 지정해 주신 그 위치에 그가, 그리스도에게 매어 달리기들 중단하지 않을만큼 변함없이 요지부동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내세의 소망의 나타남과 우리가 그 소망 안에서 감히 줄거위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확실한 초석위에 근거하는 데 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신자들이 지금은 세상에서 나그네들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확신에 의하여 하늘에 오르며, 그리하여 고요하계 그들의 품안에 그들의 장래의 기업(基業)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궤변가들의 각장 골치 아픈 두 가지 교리를 분쇄한다.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식별함에 있어서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도덕적인 짐작(Moral conjecture)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교리와,

둘째로는, 우리의 최종적인 견인에 관하여 우리 모두가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교리를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항구적이고 서슴없는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자랑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빛을 비추었다.이 복음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증거하는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1 : 4 , 요일 3 : 2 ).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바울은 그 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자랑거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금생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슬픔을 맛보게 되는 바 이 모든 조롱울 예견하고 있다.  이러한 삶은 복된 상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선언하기를. 그들이 당하는 재난들은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자랑을 도모해 준다고 말한다. 이 점울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결과부터 들어서 논증을 전개한다.   그는 탄복할 만한 점충법(ifi層法)을 사용하고 있는 데,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우리의 구원과 최종적인 유익에 기여한다는 것을 여기서 최종석으로 결론짓고 있다.

성도들이 그들의 당하는 환난을 자랑한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그들이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역경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주는 아품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여도 비탄에 잠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 하여서는 안된다(만일 그들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련 인내도 그들이 당하는 환난에서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는 것으로 말해도 좋을 것은, 그들은그들이 당하는 고뇌와 술품 가운데서도 그들의 모든 고통들이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하여 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배려되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해서 크게 위로블 받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에 도움이 될 때는 언제나 자랑할 충분한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한다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들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이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 이 환난들을 동하여 우리는 인내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게 될경 우에는 우리가 부패한 까닭에 주님의 사역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 되어버린다. 역경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증거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는 사실에 의해서도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신자들은 그들의 역경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냄으로써 그들의 소망을 품으며 또한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진보할 수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성도들의 불평을 성경이 기록하여 놓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 대한 반증이 되지 옷한다. 때때로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숨을 제대로 못 쉴정도로, 그리고 위로의 원천을 생각해 내지도 못할 정도로 잠시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시며 깨져 부서지게 하신다. 그러나 사망의 어두음에 거의 침몰할 뻔했던 그들을 순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회생시키신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주장은 언제나 그들에게서 성취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쌉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 : 8 -9 ).

"환난은 인내를" ; . 인내란 환난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환난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터뜨리며, 십지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내면적인 순종——-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불어 넣어진 것이다——-과, 위로—- 이것은 바로 그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대신하게 되었을 때에는. 환날들은——— 완악한 마음을 가전 상태에서는 이 환난들온 다만 분노와 불만만을 산출해 낼 뿐이다―—-인내를 낳는 수단 이되는것이다.

"4 인내는 년단~~~~" ; 이와 비슷한 점충법을 써서 야고보가 다른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는 그가 말하기를 “시련(experience)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약 1 : 3)고 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의미 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울 조화시킬 수가 있을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연단'(probation)이라는 단어는,신자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에 대해서 갖는 체험(experienoe)이다. 그런데 그 때 신자들온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합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굳게 서서 인내심을 가지고 참을 때,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언제나 역사하실 것이라고 주께서 약속하신 그의 강한 능력을 신자들온 체험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서. 환난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바로 같온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난에 의하여 자기 종들을 시험하시고 시련을 겪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련들이 혼히 시험 (temptation) 으로 불리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미암아 인내를 하게 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인내심율 바르게 항상시킬 수가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우리블 구원해 주셨다——없이는 우리가 결코 살 수 없으리라는 장래에 대한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이 체험(연단)에서 나온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는 만일 우리가 받온 바 온혜를 기억하며 장래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확증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치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