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로마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4:25)

1. 성경 (롬 4:23 ~ 25)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3)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4)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23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위에서 독자들에게 상기시킨 바와 갈이, 한 가지 실례에 의하여 주어진 증명은 반드시 결정적인 것이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진술이 의문을 불러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게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동의 의의 한 실례가 나타나졌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실례 들에게서 유익을 얻어야 할 의무를 상기하게 된다. 이방의 저자들이 ‘역사는 인생의 교사이다' 라고 말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들에게 의해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 바와 갈이 그 역사에서 건전한 발전을 이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 만이 이러한 종류의 기능을 해낸다.   먼저 성경은 우리가 모든 다른 역사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일반 법칙들을 규정해 놓는다. 그렇게해서 그 역사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도록 만든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행동과 피해야 할 행동을 분명하게 구분해 준다. 그러나 교리에 관한 한―그것은 성경의 특별한 분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 그의 백성들을 향한 그의 의와 선하심, 그리고 악한 자들에 대한 그의 심판들을 우리에게 유일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활에 대한 기록이 그 자신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관한 기록은 어떤 특정인의 개인적인 부르심만을.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의를 얻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다. 그 방법은 모든 신자들에게  오직 하나 뿐으로 불변의 것이다. 이 방법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에게서 나타나진 것이다. 그는 우주적인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의 역사들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에서 건전한 교리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역사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방법과, 우리의 신양을 강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어떻게 불러 일으켜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에게서 절제, 정절, 사랑, 인내, 온건, 세상의 모멸, 기타의 덕들을 배우게 된다면, 그들의 본은 우리의 삶을 질서있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그것은 그들에게 언재나 합께 하였다---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그의 보호하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부성애는 우리가 역경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악한 자들에게 내려진 형벌은  만일 그것들이 경의와 헌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충만케 하는 경외심을 불러 일으켜 준다면, 우리에게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만 위한 것이 아니요" 라고 전술함으로써, 바울은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그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이런 까닭에 어떤 주석가들은 이해하기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온 것에 대해 기록된 것은 그를 칭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말한 바,  의인을 기념할 때는 칭찬하거니와 (잠 10 : 7)와 같이, 주께서는 그의 종들이 영원히 기여되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해석하여, 보다 단순하게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이는 마치 유례가 없는 단일한 특례가 본보기로 소개되는 것은 적합할 수가 없는 것과도 갈다 하겠다―, 또한 우리를 교육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같은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다 적합한 의미일 것임에 틀림없다.

 

"24.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나는 위에서 바울이 삽입해 놓은 완곡한 표현법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킨 바 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의 본질에 대한 다른 점들을 보여주기 위해서 본문의 전반적인 문맥에 따라 이 완곡한 표현법들을 바울이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본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내세에서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단지 바울이 말했었다고 한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의를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를 파악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 자신의 부활로 생명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의 의의 전가가 어느 근원으로 부터 흘러 나오는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  바울은 방금 내가 언급한 교리를 아주 상세하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항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성취 하셨는가를 명확하게 아는 데에는 교리가 아주 중요하다. 성경―거기에는 우리의 구원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은 비록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 경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을 더 뚜렷이 설명하고자 하면서, 구원의 두 부분을 열거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첫째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하여졌고.

둘째로. 우리의 의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졌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가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그의 부활과 구분시킴으로써, 그가 우리의 무지에 그의 표현을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에서 나타내 보이신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가 확보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심으로써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는가를 우리에게 알게 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 구분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는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죄를 속해 준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의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되는 것이요 의의 완성은 사망이 멸해졌을 때의 생명의 지배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상(讀償; satisfaction)이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부의 은총을 받는 데까지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 죄를 멸절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던 형벌을 우리 대신 그가 당하심으로써만 성취될 수가 있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사 53 : 5)라고 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말 대신에 ·"내어 줌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속죄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기쁘신 뜻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화목하는 데 이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우리틀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이긴 승리자로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하늘의 영광 가운데로 영접받아 들어가셔서 그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우리를 화목시키지 않으셨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가 죄 때문에 받아 마땅한 저주를 당하신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긴 칭의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 우리를 화목케 해 준 십자가의 희생 재물이 우리의 칭의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가 완성 된 것이 그의 새 생명에서 보다 분명하게 계시된 때문이다.

 

이 두번째 구절이 새 생명(newness of life)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과 냐는 견해를 갈이 할 수가 없다.  이는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아직 다룬 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두 구절 모두 동일한 것을 다루고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칭의가 새 생명을 의미한다고 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그의 죽음이 의미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억제하도록 그가 은혜를 확보해 주었다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아무도 인정 해 주지 않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한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인한 형벌인 죽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셨기 때문인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하여 일어나셨다고 이제 말하는 것은,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이 충만하게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으심은, 그가 죄인의 몸으로( in persona peccatoris ) 죄의 고통(misery-of sin )을 경험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리고 후에 그가 생명의 왕국으로 높이 올리우신 것은 그가 그의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값없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가된 칭의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곧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이 점을 확증해 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