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 4:19 ~ 22)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19)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0)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1)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9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양자택일적으로, 부정사(否定詞) 중의 하나를 생략함으로써 (칼빈은 Considered not his own body로 번역했음),우리는 본문을 다음과 갈이 번역할 수도 있다. 그는 믿음이 약하였지만, 자기 몸을 죽은 것으로 생각치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뜻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는 데 방해를 놓았을 수 있었고, 그리고 전적으로 약속을 받지 못하게 했었을 수 있는 환경들을 보다 세밀하게 지금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선천적으로 생산할 수가 없었고 그리고 사라가 잉태할 수 없었을 때에 사라가 그에게 자식을 낳아줄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안팎에서 볼 수 있는 모두가 그 약속의 성취와는 정반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볼 수 있던 불리한 환경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즉, 하나님의 진리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기 위해서 자신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가 이제는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자기의 몸을 전혀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그가 다음과 갈이 생각했다고 확연하기 때문이다. "백세나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그리고 90세 된 사라가 애를 낳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이러한 생각들을 집어치우고 그의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겨 버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그의 몸을 죽은 것으로 생각차 않았다"라고 한 것이다.
자신에게 부딪쳐진 엄연한 현실적인 사실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은 그가 그러한 사실을 전혀 깊이 생각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믿음이 있다는 표지이었다. 본문의 말씀과 창세기 17장, 18장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주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 그의 몸은 그의 나이 때문에 출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사람에게만 장애가 있었다고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결론을 내리도록 해 준 반론의 불합리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영항을 받아서는 안된다. 어거스틴은 주장하기를, 아브라함이 백세 이후로도 많은 자녀들을 낳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 세 된 아브라함을 출산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다 충분하게 드러내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전에는 메말라 시들어버린 나무 같았었으나, 하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회춘(四春)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삭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생식력 있는 나이로 회복됨으로써, 그 후로는 다른 자녀들을 출산할 수가 있었다. 사람이 그만한 나이에 어린애를 낳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역행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일축해 버릴 수도 있다. 비록 그러한 일은 경이(prodigy)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기적적인 것이다.
그 성도(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를 지치게 만들어 버렸었던 수많은 괴로움과 슬픔과 방황과 고통들을 생각해 보라. 그는 그의 나이로 말미암은 것 못지않게 고통과 수고로 말미암아 지치고 체력이 소모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몸은 무조건으로가 아니라 비교적으로 출산할 수가 없는 것으로 말해야 한다. 정력이 넘치는 꽃 같은 젊은 나이에 출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그의 능력이 사그라져 버린 지금에 와서야 출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은, 우리가 불 확실한 가운데 있을 때에 그러는 것처럼, 그가 방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았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은 이중의 연약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역경의 시련에 굴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까닭에 생기는 것으로서 그렇지만 믿음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않는 것 등이 있다. 아무리 많이 우리의 머리가 깨우침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많이 무지한 체로 남아 있으며, 그리고 아무리 많이 우리의 가슴이 뜨거운 확신을 갖는다 해도 많은 의심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계속적으로 육신의 악들인 무지와 회의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과 싸움에서 그들의 신양은 흔히는 심하게 흔들리며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승리하기 마련이며, 그러기에 연약할 그때에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 ; 나는 나의 번역(하 나님의 약속을 살펴보았을 때, 믿음이 없어 흔들리지 않고 )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벌게이트(Vulgate)역이나 에라스무스의 번역을 따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주님께서 그의 약속을 성취하실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불 신앙 상태에서 그 증거를 저울질하지는 않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주제이든 그것을 바르게 알아보려고 하는 경우는, 그것을 냉정하게 검토하고, 그리고 철저한 조사 없이는 믿을 만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어떤 것이나 물리쳐야 한다. 천사에게 그의 메시지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물었던 때의 동정녀 마리아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비슷한 경우들에서처럼, 아브라함은 이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놀란 나머지 묻은 물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메시지가 성도들에게 전달될 때에 그것은 그들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경이의 감탄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경이의 감탄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성도들의 물음을 조롱하며, 하나님의 사역들을 신화로 간주하여 거부해 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데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가 그의 육체를 주어 먹게 하겠는가라고 했던 유대인들의 경우와 같았다.
이런 까닭에, 백 세 된 남자와 90세 된 여자가 어떻게 어린애를 낳을 수 있는가 하고서 아브라함이 웃으며 물었을 때 그는 책망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긴 해도 그는 놀람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사라의 웃음과 질문은 책망받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비 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위에서 살펴본 사실들을 본 주제에 적용할· 것 같으면, 아브라함의 칭의와 이방인들의 칭의가 정확하게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받은 부르심을 불합리한 것으로 반대하는 경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조상을 모욕하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의 환경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들과는 반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멸을 약속하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죽음과 부패로 둘러싸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로 덮여 있다. 그는 그가 우리에 대해 호의를 가지며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증언하신다. 그렇지만 밖으로 나타나는 징조들을 봐서는 그의 진노가 임박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눈을 감고, 우리 자신과 그리고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무시해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이 구절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지 않았다고 바울이 말했던 앞 구절과 대구(村句)를 이룬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종여일(始終如一)하고 견고한 믿음에 의하여 그가 불신앙을 극복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투쟁을 통하여 결국 승리하게 될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그 말씀에서 힘을 얻는 사람뿐일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며" 라는 말씀을 덧붙여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리를 인 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이상 존귀케 해드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거부하는 것, 또는 그의 말씀의 권위를 감소시키는 것보다 그에게 더 모욕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것은 그 약속을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 종교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거저 평범한 것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우리가 해내기 가장 어려운 것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다.. 어떠한 장애물이든, 그것이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이 그의 사역을 성취하기에는 짧다고 생각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경미한 시련을 만나기만 해도 우리에게서 미끄러져 나가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아무도·하나님의 전능하심을·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경로를 방해 놓는 장애물이 생겨나면, 곧바로 우리는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서 합당한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비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강렬한 태양의 햇살이 구름들을 흩어버리는 것 처럼 세상의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빈번한 의심이 그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늘 변명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의 말씀 가운데 약속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 (이것은 그릇된 것이며,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다) 은 결코 우리의 주저의 원인이 아니며,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결함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높인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의 연약함과 비참함과 결함을 바라보아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능력에만 온전히 주목해야 한다. 만일 신양이 우리의 의나 품위에 달렸다고 한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하게 고려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이 앞서 말한 불신앙의 증거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측정하는 데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부동(不動) 상태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능력을 그의 계속적인 활동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의 말씀에 의해서 결과되는 것에 특별히 그의 능력을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실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관계 대명사를 남성으로 여기고자 한 것은 내게 이상하게 보인다. 비록 다른 성(性)에 의해서 그 뜻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들에 보다 더 철저하고 싶다. 내가 알기는 그 동사는. 수동형이다. 그러나 조금 변경시켰더라면 그 표현이 좀 덜 거칠게 되었을 뻔했다.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에게 의를 가져다주었는가 하는 것이 이제 보다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은혜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음과 말씀과의 이 관계는 주의 깊게 견지되어야 하며, 꼭 기억되어야 한다. 이는 믿음은 그것이 말씀에서 받은 것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일반적이며 혼란된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체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확실하게 신뢰하지 않는 한, 곧바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