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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4:18)

1. 성경 (롬 4:13 ~ 18)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3)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4)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5)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6)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7)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3.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앞에서 다루어 왔던 바 울법과 믿음과의 대조를 좀더 명백하게 이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조심성 있게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데 아무것도 율법에서 빌려오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궁훌과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로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의식법의 준수를 가리키는것 으로 보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쉽게 논박된다. 

 

왜냐하연 만일 행위가 어떻게 해서든지 칭의에 기여한다고 하면, 바울은 "(기록된) 율법으로 말미암아" 가 아니라 오히려 "본성의 율법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했을 것이다. 바울은 영적 거룩함의 생활을 의식(儀式)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그것의 의를 의식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기업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은, 그가 율법을 지킴으로 그것을 공로로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의를 얻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곧 바로 덧붙여 말하겠거니와) 사람의 양심은 그것들이 합법적인 권리에 의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값없이 거저 받았다고 느낄 때에만 참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로부터 결론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얻게되는 은혜 (benefit)는----그것의 원인온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유된다 ―유대인에게 못지않게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방인들을 그 온혜에서 제외시키는 사람들온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그 은혜의 진로(進路)를 제한시키며 방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 ; 사도 바울은 지금 영원한 구원에 관해서 다루고 있으므로, 세상이라는 말을 그의 독자들에게 그가 여기서 들추어낸 것은 다소 적절치 못한 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세상’ 이라는 말속에 그리스도에게서 기대된 회복을 일반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사실상은 신자들의 삶의 회복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러나 온 세상의 타락된 상태가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후사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은혜로 말미 암아 우리가 얻은 입양(入養)으로 인하여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잃어버린 기업의 소유권을 다시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모형으로 삼아 천국 생활의 소망과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계시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소유권이 그에게 약속되었다고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온 옳다. 경건한 자들은 천국 생활을 금세(今世)에서 맛보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자주 그들이 곤경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눌림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창조해 주신 것들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가지며, 세상 축복들을 은혜로우시며 너그러우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원한 삶의 보증과 시식(試食)으로써 받아 누리기 때문에, 그들이 궁핍하다 하여도 그들은 땅과 바다와 하늘을 그들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재물들을 독점하여도,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차라리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도적질하여 가로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 소유물을 탈취한 까닭이다. 궁핍한 가운데 있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검소하게 살고 있기는 하여도. 다른사람들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도적질하지 않고, 대신 그들이 그들의 기업을 완전하게 소유하게 된 때, 즉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영광에 이바지하게 되는 때까지,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아바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의 합법적인 배당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하여 새로와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그들의 분수를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다 영광스럽게 하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 ; 바울온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얻은 은혜는 법률상의 협정에 의하거나 행위와 관련하여 그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근거가 박약하고 어처구니없는 입장을 들추어서 논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양자될 자격이 있거나, 아니면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만을 양자될 자격 있는 것으로 간주하신 것이 하나의 조건으로 주장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도 자기가 양자된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기업이 그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전을 기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믿음은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연 그 불가능한 조건으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은 불안과 걱 정에 사로잡히게 될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전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속들의 효력이 무산되어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그 약속들이 믿음으로 받아지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무런 소유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대적들이 이 한 가지 이유에 온전히 주목할 것 갈으면, 그들과의 우리의 논쟁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약속들을 마음으로 완전하게 확신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약속들이 효력이 없다는 것을 사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을 위한 구원이 율법 준수에 근거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인간의 양심은 확신을 갖지 못하여 끊임없는 불안으로 괴로와하다가 마침내는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약속 자체는, 불가능한 것에 그것의 성취가 근거된 까닭에,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무산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련한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 행함으로 구원을 얻도록 가르치는 자들을 없애버리자. 왜냐하면 바울이 분명히 선언하기를, 약속이 행위에 근거를 두는 한, 그 약속은  폐기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위를 의지할 때에 믿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 린다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되며, 또한 만일 사람들이 행위의 의를 확신을 가지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행위의 의가 나타내 보여주어야 하는 그 성걱이 어떤 것인가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신뢰하지 않을 것 같으면 믿음이 소멸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또는 그의 전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나, 또는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쉽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궁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만일 구원이 율법의 준수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마음은 전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들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것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만일 우리가 구원의 원인 또는 확실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행위에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비참한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 본 절은 앞 절의 확증이며 율법의 반대 결과에서 이끌어 낸 말씀이다. 율법은 보복 외에는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온혜를 가져다 줄 수가 없다.  율법이 덕망있고 순결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었을 것이나, 그것은 죄 많고 부패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지도 않고서 그 의무를 행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그것은 죄책 가운대 있는 인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간다. 우리의 본성은 대단히 부패된 까닭에, 우리는 정의와 공의가 어떤 것인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의 죄악, 특히 우리의 완악한 것이 보다 더 밝히 드러나게 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보다 심하게 임하는 것이다.  '진노'란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죄인이 받는 진노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타오르게 되는 것은 죄인이 그의 정욕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입법자(Lawgiver)를 증오하고 비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말한 바 내용은 그럴듯하나 그들의 논증은 본문과는 맞지가 않다.  본문에 사용된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을 바울이 곧장 첨가하여 말하는 이유로 보아서, 율법이 우리 모두에게·결과시켜 주는 것은 오직 정죄 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이 말씀은 바울이 그의 진술을 확증하는 두번째 증거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 이유가 만일 보다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더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인지를 아는 것온 어려웠을 것이다.  그 이유란,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대한 자식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가 댈 수 있는 핑계가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는 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대하여 심하게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도 멸시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서 범죄한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사도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예외가 된 수 없는 단순한 범과(犯過)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있는 '범함'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불쾌하게 하는지를 배웠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규정된 한계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범하는 경우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문의  '범함'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의를 어기는 고의적인 완악함을 뜻한다. 본문의  '후; 곳에는' 라는 단어를 어떤 주석가들은 cujus, 즉 ·oJ which 로 번역하기도 하나, 보다 적합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곳에든'이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 간에 본문의 뜻은 마찬가지이다. 즉, 기록된 율법으로 가르침 받지 못하고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악하게 깨뜨리며 범하는사람 만큼 큰 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믿을으로 되나니 " ; ..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갈이 요약될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의 후사가 된다고 하면, 우리가 양자로 된 믿음은 사라질 것이며, 또한 양자된다는 약속도 폐기 되어 버 릴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약속 모두가 확실하고 견고하게 되는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자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근거로 해서 양자되는 것이 확 실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는 요지부동의 확실성을 갖춘 믿음을 믿음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주저와 의심을 불신양으로 여긴다. 이러한 불신앙은 믿음과 약속을 폐기시킨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의 학자들은 이 의심을 도덕적 추측이라고 부르며 그 의심이 믿음을 대신하고 있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  사도가 여기서 먼저 밝혀 주고 있는 것은, 순수한 은혜만이 믿음앞에 올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의 객체는 순수한 은혜이다. 만일 은혜에 공로가 계산되게 된다면, 은혜로 얻은 것은, 무엇이나 공로없이 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해 볼 것 같으면,  만일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행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은 그 약속이 은혜에 근거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모든 모호한 점을 없애 준다.

 

 바울의 이 말씀은 인간들이 행위를 의지하는 한 처할 수밖에 없는 불확신의 상태를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행위를 의지하는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약속의 열매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럽, 은혜는 중생의 은사를 의미하지 않고, 다만 공로 없는 은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생( 역자주 : 칼빈은 중생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은 결코 완전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것이 인간들의 양심을 무마시키기에는 전혀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그 약속을 재가(裁可)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  율법에 속한 자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는 율법의 멍에에 자신들을 얽어매고, 율법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는 광신적으로 울법에 열심하는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유대 민족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에게 주의 율법이 주어졌었던 것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자들이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율법의 종들이 아니고, 율법으로 양육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된 유대인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갈이 의역하여 읽으면, 문장의 뜻이 더욱 분명하여질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 뿐아니라, 비록 전에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자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은……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본문의 관계 대명사(who)는 원인을 나타내는 조사(particle)의 효과를 함축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 들이 이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기업을 양도해 준 바로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한 민족의 아비가 아니라 열국(列固)의 아비로 택정되었다고 전술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은혜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장차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예표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약속되었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확대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고려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사가 과거 시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성경의 통상적인 유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이방인들에게 은혜가 미친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로 택정되었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인용구인 모세의 말을 괄호로 묶으면, 이 문장은 끊기지 않고 다음과 갈이 읽을 수가 있다. 즉, "아브라함은 그가 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 그 관계의 형식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육체적인 혈통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 즉, “우리의 영적 조상" 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온 우리와의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한 목적은 그의 모범으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화제를 급선회시키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주님의 입으로부터 들었던 약속에 기이한 방법으로 도달하여야 되었다. 왜냐하면 약속에 대한 아무 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마치 생식력과 정력이 왕성하기나 한 것처럽 씨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생각의 차원을 높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의 능력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보면 출산할 수 없고 죽은 자나 다름없지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합리할 것은 없다.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을 자져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이 죽어 있든 아니면 살아 있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상에 의하여 `뒷받침 되어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들을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능히 쉽게 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일반 소명 (general calling)의 유형과 모형을 볼 수가 있다. 이 일반 소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의 시작이 우리 눈앞에 제시된다(우리의 첫번째· 출생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세의 소망과 관련이 있는 삶의 시작)  즉,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무(無)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성품을 소유한 것처럽 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아무 선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완전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우리의 신적 소명 (divinecalling)의 조건은 죽은 자가 주님에 의하여 일으킴을 받는것과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쓸모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부르심' 이라는 말은 선포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성경의 일반적 의미로 해석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고개 한 번 끄덕여 승락함으로써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다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 

"1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만일 우리가 이 사본대로의 이문(異文; reading)을 채택하여 읽는다면, 본문의 의미는 아무런 그럴 만한 이유가 없던 때, 즉, 모든 사리(事理)가 그에게 전혀 불리한 때에도, 그가 계속해서 믿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소망이 실체를 눈에 보이는 것에서 구하려고, 우리의 이해를 보이는 것에 국한시키는 것보다 믿음에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랄 수 없는 중에"라는 번역은 아주 적절한 번역이다.  이는 ' 마치 아브라함의 경우 그의 믿음은 그가 구상해 낼 수 있었던 어떤 착상(conception)이나를 막론하고 훨씬 그것을 초월했었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과도 같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육신의 모든 감정들을 높이 위에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천상의 날개(heave nly wings)를 펴서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세상의 전토 가운데 연제나 깊이 묻혀 있게 될 것 이다.  바울은·문장에서 "바란다” (hope)는 단어를 두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첫째번 경우는 본성적이고 육신적인 사리에서 끌어넬 수 있는 소망에 대한 논증을 의미하며, 둘째번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바랄 만한 근거가 없었을 때에,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사실이, 아무리 사실 그 자체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일지라도, 바랄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_

 

"하신 말씀대로(According to that_ which had been spoken)." ;  내가 이 번역을 채택한 것온 이 번역이 아브라함의 때를 가리키도록 하기 위합에서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많은 시험(temptations)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서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었을 때 그는 그에게 주어졌었던 약속, "네 씨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갈이 되리라”는 말씀에 그의 마음을 둘렀다는 것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인유 구문의 일부만을,인유하였다• 이는 우리를 자극하여 성격을 읽도록하게하 기 위합이다• 사도들은一성경을 인용할 때에 우리가 성경을 더 세십하게 음 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유의주도한 주의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