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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4:11)

1. 성경 (롬 4:1 ~ 12)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1)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2)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4)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5)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6)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7)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8)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9)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0)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1)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런즉…·무엇을 얻었다하리요." ;  바울은 그의 논증을 실례를 들어서 확증한다. 그리고 그의 증명이 결정적인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은, 내용면에서나 인물면에서 모두 잘 조화되고 일치를 이루고 있기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였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고, 그 이상은 없다. 다른 사건들의 경우에서는, 한가지 실례만을 가지고 일반적인 법칙을 삼는다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의(義)의 모형 (模型)이 나타나 있었고, 그 의는 온 교회에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에 , 바울이 아브라함 일 개인에 대해 기록된것을 교회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옳다. 동시에 바울은 유대인들을 제지한다. 그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다는 자랑 외에는 아무런 다론 자랑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들의 거룩한 족장인 아브라함에게 돌렸던 것 이상의 거룩(sanctity)을 자신들에게 감히 돌리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값없이(즉, 행함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는 그의 후손들은 수치를 당하고 참묵을 지켰어야 마땅하다 ..

 

"육신으로……"  ; 이 문구와 조상’이라는 단어 사이에 동사 ' 휴 레 -케 나이' 가 바울의 글에는 삽입되어 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가 된다. 이런 까닭에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하기를, 본문의 질문은,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를 뜻한다고 한 것이다.  만일 이 해석이 만족스런 것이라고 한다면, `육신으로’라는 문구는 본래 ‘생래적으로'(naturally) 또는 ` 그 자신으로부터 ' (from himself)를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 나 '육신으로' 라는 문구는 성질을 나타내는 형용어구인 '조상’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낮익은 실례 (~例)를 대하게 될 때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까닭에, 유대인들이 크게 자랑한 그들의 종족의 위엄을 바울은 다시금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경멸적인 뜻으로 이 문귀가 침부되었다고 간주한다·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른 성경 귀절에 보면, 이런 의미로 육적(carrial)이라고 불리워졌 바 이는 그들이 영적이거나 적출(摘出)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구는 그것이 특별히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사용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곁들여져 있기만 한다고 하면, 단순한 입양(入養)에 의한 것보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과 맺어진 그들의 밀접한 결합관계를 인정해 준다. 그러나 그가 인정해 준 것은 그들이 그들의 조상의 믿음의 본에서 일탈(逸脫)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보다 깊이 명심케 하기 위함에서였다.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십을 얻었으면…" ; …본 귀절의 논증은 미완성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 만 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그는 그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있 을 것 이 나, 하나님 앞에 서는 자랑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행위로써 의돕다 하심을 얻온 것이`아니다” 이와같이 " 하 나님 앞에서는" 이라는문구는 삼단논법의 부전제(副前題)이다. 그리고 비록 바울에 의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여기에다 위에서 내가 전술한 결론 부분이 첨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상급 받 을 만한 어떤 것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체하는 경우 그것을 바울은 `자랑'이라고 칭한다. 이 자랑은 아브라함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다 떤 우리 중에 그 누가 눈곱 만큼의 공로라도 스스로 주장할 수 있 겠는가 ?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이것은 바울의 부전제,즉 가정을 증 명해 주는 증거 이다. 바울은 그의 부전제에서 아브라함은 자랑할 것이 아 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서 믿 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에게는 하등의자 랑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 냐하면 그 자신의 것으로 내 놓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궁홀을 갈급하는 그 자신의 비참합 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온 믿음의 의를 행위가 없는 죄인을 위한 도움과피난 의 처 소(the place· of help and refuge) 로 생 각하고 있 다• 만일 율법으로나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의는 사람들 자 신에게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없는 믿음을 다른 곳 에서 얻는다• 이런 이유로그의를 믿음의 전가된 의(the imputed righteousness of faith)라고 일컫는 것온 바론 표현이다• 인용된 귀절은 창세기 15장6절에서 온 말씀이다. 창세기 15장 6 절 에서 "믿는다”라는 단어는 특별하게 그 뜻을 한정하여 해석되어서는 안되 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지(感知)했다고 하는 구원의 전(全) 언약과 입양(入養)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장래 의 씨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온 값없는 입양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의할 것온, 구원온 하나님의 은혜없이 약속되지 않 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없이 또한 약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 시에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 나 구원의 소망에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위의 입장을 받아들이계 되는 경우, 바울이 그 문맥에서 모세의 전술을 여지로 갖다 붙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 이 분명 하여진다. 그들은 이해 하기를, 그 문맥(창 16 : 6 )에는 특 별한 약속이 전술되어 있기 때문어b 그것을 믿는 일에 아브라함이 올바르 고 영예롭게 행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 나 본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그릇된 것온, 첫째로, ’믿으매’라는 단어가 전 문맥에 걸쳐 있다는 것과 그런 까닭에 한 문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된 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그릇된 주요한 요인온, 하나님 의 은혜를 그들이 간파하지 못한 데 있다. 하나님 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입양(入養)과 그의 부성애(父性愛)를 아브라함이 보다 착실하게 믿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 나님의 수양과 부성애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믿을 때, 하나님의 온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베풀어전 은혜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일 이로 인하여 그에게 의가 전가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의의 유일한 근 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가 신뢰한 대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그가 받기를 감히 소망한 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모세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 떻게 생각했는가를 말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 의 법정 앞에서 가졌던 신분에 대해 말한 것 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 온 그에게 약속으로 제공되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포착하였다. 그리고그 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의가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는것을깨 달았다. 의의 의미를 정의하는 대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 이 필요하다• 왜 냐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법률상으로 존재하는 것 과 갈은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그 의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 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섣명이 다 되어지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야고보서를'다 물 수 있게 되는 경우에는, 이 말씀에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야고보서와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어 떻게 ·조화시켜 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좀 며 자세 하게 설명코자 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 유의해 둘 것은, 의가 전가된 사 람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온 자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온 의의 전 가와 칭의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온, 문제는 사람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떤 존재들인가 하는대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 주시느냐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청결한 양심과 순결한 생활이 하나님 의 값없는 은총과 구별되는 때 문이 아니 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 의 사랑과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 는 하나님의 인정(認定)에 대한 이유가 문제시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 리에게 그 자신의 의를 입혀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 보여지는 것이 필요하 기 때문인 것이다..

 

"4. 일하는 자에게는……"  ; 바울이 말하는 “일하는 자" 란, 좋온 의미에서 선행에 열삼하는 사람, 즉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추구 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를 가리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의 행 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말하는 “일을 아니하는 자"란, 그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상급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온 신자들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태만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나라, 다만 어떤 보상을 하나님께로 부터 바라는 타산적인 생각을 신자들이 갖지 못하게 금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본문의 논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규 제할 것인가 하는 신양 윤리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의 이 유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빛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선물로 주는 것이라고논증한다. 나는 바울의논증 형식이 단일 표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체 문장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 한 뷰우처(Bucer)와 의견을 갈이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갈이 의역된 수가 있는 것 이다 ... 만일 어떤 그 무엇을 자기의 일의 공로에 의하여 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공로로 받는 것온 값없이 그에게· 전가된 것 이 아니 라,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삼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것 이다n• 믿음이 의 로 간주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그것이 어떤 공로를 들추어내기 때문이 아 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의는 우리가 당연히 받은 삼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cu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자신의 선한 뜻대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언제 나 이 사실에서 우리에게는 아무 자랑할 것 이 없다는 것, 죽 자 기 무가치성(self-emptying)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 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해주시는 것 말고, 우리는 무 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이와 동일한 전리가 갈라디아서 3장 11 절에 다 론 말로 전술되어 있다. 그 말씀에 보연,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고 되어 있다. 율법은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까닭에 바울은 이로부터 결론하기물, 값없는 믿음의 의는 행위의 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행위에 근거하여 믿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 고 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주의깊게 비교 검토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공로는 전적으로 배제되고 만다.

 

"5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  이 말 씀은 크게 강조한 완곡한 표현이다. 이 말씀으로 바울은 믿음과 이 두 가 지의 본질과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분명하게 밝히기를, 믿음이우리 에게 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때 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 울은 하나님이 의를 가져다 주는 것온,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가지고 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주기」때문이라고 한 다. 바울온 하나님이 의를 주시는 분이지라는 것을 전술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의한 것을 또한 정최한다 •.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우리 의 궁핍함을 채워줄 수 있게 한다· 요약하면,, 자기네들이 경건차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만이 믿음의 의에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완곡한 표현의 말씀은 본문의 주제, 즉 믿음으로 말미 암아 다른 사람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금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가 마땅히 전노해야 했던 사람 들에게 그의 사랑을 가지고 온총을 베푸셔서, 죽 그의 궁훌하십으로 우리 의 불의를 도말하시어 우리를 의몹다 칭하여 주시는 분으로 되어 있다• 

 

"6. 일할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십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 하여…" ;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儀式)에 제한하는 사람들 이 단지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서 울 법의 행위로 지칭하였던 것을 이제는 단순히 그리고 아무런 형식적인r단어 를 첨부함이 없이 행위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이 간략하고 수식이 없는 단어가 모든 행위에 구별없이 처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면, 이것은 전체 논증에 일관해서 유효한 것임에블 림없다. 칭의의 능력을 단지 의식들에서만 배제하는 것만큼 모순되는 것은 없다. 왜 냐하면 바울이 차별 없이 모든 행위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사람들의 최를 전가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서 의 몹다 하신다는 부정적 어구(negative Clause)가 덧붙여져 있다. 이 말씀들 에서, 우리가4 배우는 바는, 바울의 경우 의란 죄 사함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나라는 점과, 결국은 이 죄 사합 역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다• 왜냐하면 죄 사함(remission)이라는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대로, 이 의 는 행위가 없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빛 이 탕감되는 것은 채권자가 변제 받 을 때가아니고, 채권자가 자의로 그가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어서 빛을 말 소해 주는 때이다. 그러므로 공의를 만족시킵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물리치자. 바울은 의의 선물이 값없는 것이라는 것을 입 증하기 위해서 이 죄 사함의 개념에서 그의 논증을 빌어 온 것이다.-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울과 의견을 갈이 할 수 있겠는가?그 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 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런대 바울은 여기서 주장하 기를, 믿음의 의는 값없는 것이고· 행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말한다. 왜냐 하떤 그 의논 죄 사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 행위라도 최 사합 받는 대 요구된다고 하면 그의 논증은 분명히 거짓된 것일 것이다. 반쪽 사죄(half-:·remission)에 대한 로마교회 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온 다윗의 바로 그 말씀에 의해서 또한 반박된다. 그들은 터무니 없게도 주 장하기를, 우리의 허물이 사함을 받기는 해도 형벌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시인 다윗온 우리의 죄가 가리워져 있다는것,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옮기어져 있다는 것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이 추궁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추궁하지 않는 죄들에 대한 형벌을 그가 요구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 것인가? 그 러므로 죄들을 값없이 사함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깨끗케 된 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영광스런 말씀이 우 리에게 적용되는 것 이다. 또한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생애를 동해서 값없는 의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다윗이 오래 계속된 그의 양심의 고동으로 말미암아 시달립을 받아 이 선 언을 말씀한 것 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체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수 십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경배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에 크게 전보한 후에, 다윗온 하나님의 법정에로 소환되는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마침내 체험하였으며. 그래서 선언하기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온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그의 은총의 품에 안아 주시는 것 이라고 하였 다. 이 렇 게 해 서 • 믿음의 의는 단순히 시 작하는 행 위 (the initial act)일 뿐 이고. 그 후로는 신자들이 처음에 아무런 그들 자신의 공로 없이 얻었던 그 의를 그들이 행위에 의해서 보지(保持)한다고 터무니 없게 생각하는 사 람들의 오류 또한 반박되는 것 이다. 행위나 다른 경험들이 의로 간주되어 종종 전술되어 있다고 해서 바울 의 논증이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시편 100편 印절에 기록되기를, 주님의 제사장 비느하스가 간음자와 창기를 처벌합으로써 이스라엘의 재앙을 그치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의로 인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과 연 우리가 어떤 사람이 의로운 행위를 해-~냈다는 것을‘듣는 것온사실이다. 그러 나 한 가지 행위로 알미암아 어떤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구되는 것은,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 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 라,,(레 18 : 5 )는 약속의 말씀 대로,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순종이다; 1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느하스가 내려찬 이 처벌이 그에게 의로 인정되는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온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합을 받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이미 덧입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까지를 좋게 봐 주시는여까닭이다.-그들의 이 행위들이 갖고 있 는 홈결과 허물들은 그리스도의 순수성에 의하여 가리워진다 .. 그리하여,그 들은 심판을 받지 않게 되며, 어떠한 더러움에 의해서도 오영되지 않기 때 문에 그로 인하여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처럽 -관용을 베풀어 주시지 않고서는 인간의 아무 행위라도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수 분명하다. 그러 나 만일 믿음의-의는 우리 의 행위가 의롭다고 간수되는 유일한 이유라고 한다면, 의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 이 아닌 것온 그것 이 행위에 힘입은 까닭이라고 하는 논증이 얼마 나 어리석온 것인가포l에 대한 나의 대답으로, 만일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 암아 된 것 이 아니 라고 한다면, 모든 행위들은 불의한 것으로 정죄받 을 것이라는 분명한 논증을 제시하는 바이다. 이는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갸지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길로 행하 며 ( 시 128 : 1 ), 그 의 율 법 을 주 야 로 묵상 하는 (시 1 : 2 )-;사들 이 복 이 있다고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충분하게 만족시킬 수 있 을 만큼 완전하게 아무도 이를 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 이러한 종류의 든 축복들은 우리가 죄를 사합 받아 정결케 되고 씻음 받음으로 복을받게 될 때까지는 무용하다. 주님께서 그의 종들에제 그들이 율법과 선한 일에 열심한 까닭에 약속하신 축복들을 이렇게 해서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것 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는 믿음의 의의 결과이며, 행위에서 생 기는축복 온 죄 사함에 있는 축복의 결과이다. 만일 원인이 그 자체의 결과에 의해 서 파괴되어서는 안되고, 또 파괴될 수도 없다고 한다면, 믿음의 의를 행 위에 의해서 파괴하려고 애쓰는 자들의 의도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온 이렇제물을 것이다. "어째서 의 이 인용구들을 사용하여 사람 행위착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으며기복되게 된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궁훌에 의한 것 못지않게 행위에 의해서도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고' 선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온혜의 시여(施與)뿐 아니라 원인들의 순서를 숙고해야 한다. 믿음의 감된 의가 행위의 의에 앞서 선행하지 않는 한, 그리고 오직 .이 믿음의 의가 그 모든 기능들을 성 취하지 않는 한, 행위의 의나 행위에서 오는 축복에 대한 선언은 아무 것 도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 그러므로 이 믿음의 의가 먼저 확립되어야 하 는 것이다. 그래야 과일이 나무에서 자라나 열매맺는 것처럼 행위의 의가 믿 음의 의에서 자라나 열매맺는 것 이다. 

 

바울이 할에 와 '무할례'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 온 당면한 유일의 문제는 율법의 의식들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는것이라고 지혜롭지 못하게 결론내리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 대방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냐하면 위선자들이 일반적으 로 공로적인 행위를 자랑하면서도 겉보기에는 그들의 행위를 숨기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거칠게 율법을 남용함으로써 감되 고 순수한 의로부터 그들이 이탈하게 된 데에는 그들 자신의 특별한 이유 가 있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거저 용서하여 자신과 화목케 한 사람들만이 복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들의 행위가 판단을 받 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온 그들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훌에 의하여 의롭다함 을 받는다는 원리가 전술되는 것 이다. 그러 나 죄 사함이 모든 행위에 선행 하지 않는 한, 이것은 충분치가못하다. 이 행위들 중에 첫째가 할례였다. 이 할례로 말미암아 유대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시작하게 되었던것이 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점을 또한 보여 주려고 말을 계속한다. 우리가 연제나 기여해 두어야 할 것은, 할례가 여기서는 율법의 의의 최초의'(initial)행위로고려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인 할례를 자랑하지 않고, 그들에게 공로가 되는 율법 준행을 자랑했으며 , 그리 고 하나님 앞에 서 특출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보다 신들을 더 낫게 여겼다. 있는 논쟁점은 단지 의식 즉, 보상을 받아야 하는 가 특별하게 언급되어 있는 었다. 바울은 반대되는 경우를 들어 논증하기를, 만일 아브라함의 의가 최 사 함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만일 그가 이 의를 할례 받기 전에 얻을 것 이라 고 한다면, 죄 사함은 이전의 공로 때문에 주어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하고 있다. 바울의 논증은 인과관계 (因果開係)의 순서에저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연 원인이 결과에 언제나 선행하듯, 아브라함 이 그가 할례 받기 전에 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하나만에 대한 것이 모든 행위가 이 부류에 것온, 그것이 율법의 있는 것 은, 바울_ol, 다루고 아니고, 율법의 모든 행위 포합된다는 점이다. 할례 의의 기초이었기 때문이다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바울은 반대론을 예상하여 비록 할례가 의롭게 해주지는 못했지만.그것은 다른 특출한 용도,죽 믿음의 의 를 인쳐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례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힌다. 한편 바울은 할례의 목적 바로 그 자 체에서 할례가 의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할례는 무 할례시에 이미 얻온 믿음의 의를 확인해 주는 성질이 있고· 그래서 를 결코 손상시키거나제거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온 성례의 일반적인 유익에 관한 괄목할 만한 귀철이다. 바울이 증거하는대로, 성례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그리 고 온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정들이다. 비록 성례들온 그 자체들 만으로는 무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의 은혜의 도구로 작정하 셨고, 그리고 그의 성령의 은밀한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유익 울 증진하는 대 그들이 방편으로 삼게 하셨다• 또한 비록 유기된 자들에게 는 성례들이 생명이 없고 무익한 상칭들이지만, 그러나그것들은그것들의 힘과 성격을 잃지 않고 연제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성례의 효력이 우리에게서 박탈되어 있지만, 그 불신양온 하 나님 의 전리를 파괴하거 나 소멸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성한 상칭들인 성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시는 중거들이라고 하는 원리는 변함이 없이 존속된다. 할례의 표에 의하여 이중 은혜가 나타난 바 되었다는 점이 특별히 전술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받은 씨를 약속해 주셨었다•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1 = 1n곤 약속은 이것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값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 표에 대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유추(analogy)는 신자들이 약속된 씨를 고대하는 것과 충분하 계 일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곡i에서는 생활의 순결과 거룩을 요구 하셨다. 그리고 그 상징에 의해서 이러한 생활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 즉, 육신으로 난 사람 안에 있는 모든것을 할례함으 로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성품은 부 패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표에 의하여 영적으로 자 기의 육체의 부패한 것을 할례하도록 아브라함에게 가르친 것이다. 모세 는 이 점을 신명기 10장 16절에서도 연급하였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직 나이가 어린 탓으로 할례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던 어린 영아들의 할례를 하나님께서는 명하셨다.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 역으로 특별히 언급하였다. 이는 신명기 泊장 6철에서 찾아 볼 수가 있 다. 그 귀절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주께서 네 마음을 할례하실 것이라” 고 했다. 모세 이후로 선지자들은 아와 같온 사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섣 명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세례에 두 가지의 요소가 있듯이, 옛날의 할례에도 거 듭남의 생 활(newness of life)과 최 사함(forgiveness of sins)의 두 가지 를 증거한 두 요소가 있었다• 비록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의가 할례에 · 앞 셨지만, 우리가 이삭과 그의 후손들의 경우에서 보는 대로, 성례에서는 반 드시 의가 앞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외적인 표에 재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에 한 번 그러한 실례를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무할려1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십율 얻게 하려 하십이라·" ;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의 할례가 값없는 의를 믿는 우리의 신양을 확증해 주는가를,-ff-의하라. 할례는 믿음의 의를r'"인치는 것 으로서, 믿는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도록 하기 위한 것 이다. 이와弓갈이 바 울은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여 그의 적수들이 제시할 가능성이 i있었던 셔} 론에 응수하고 있다. 만일 할례의 바로 그 전리와 의의가 무할례시에 발 견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크계 ·자 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이다. 그러 나 다음과 갈은 의심쩍온 점이 있을 수 있다. 즉,' 우리 또한 아브 라함의 본을 좇아서 할례의 표에 의하여 그의 경우와 동일한 의를 확층해 야만 하는가? 만일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한다면, 왜 사도-_바울은·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생략해 버렸는가? 그1이유는, 그자 앞 문장에서 오언급한고갈 씀에 의해서 문제가 이미 해결된 것으로 그가 생각했기 때문임에卜나불림없 다• 할례는 하나님의 온혜를 인치는 대만 유효하다는 것이 안정되었을 경 우에, 오늘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댜. 왜냐하떤우리는 그 것 대신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다른 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세례가 존재하는 경우 이제는 할례란 아무 필요가 없는.까닭에, 이미 해결되어 버린 문제, 죽 왜 이방인들에게는 믿음의 의가-아브라합의 1 경 우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쳐질1필요가 하등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L가지고 아무 이득도 없는 논쟁을 바울온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I무할례시에' 믿는다는 것온 이방인들이 그들 자신의 조건에 만족하고서 할례의 인호 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전치사 8,&c디아}e-이처럼 b,(엔) 대신 사용되어 있다• I-'a `l ) --.:홀 , .. ,一.

 

"12.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 본문의 동사는,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의면적인 할례만을 받고 그것을\ 대단 하게 자랑하는 아브라합의 육신의 후손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러 나 그들은 다론 주요한 요점, 즉 아브라합의 믿음을 본받는 것 을 소홀 히 하였다. 그런대 아브라함의 경우 오직 그의 믿음이 그의 구원을 확보 해 주었던 것 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울이 믿음과 성례를 얼마나 조 심스럽게 구별하려고 하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바울이 이 둘을 干별짓는 목적운 아무도 자신의 칭의를 얻는 데 할례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고 서 할례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 라, 오직 믿음만이 모든 요구를 충 족시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의롭다 합을 받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한편 만일 그들이 순수한느믿음으로아브라함의본을 좇는 경우에는, 할례를 그는 분명히 제의시킨다. 만일 다른 어떤 도움 없 이도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을 보여주기 위한 것 이 아니 라면 , "무할례시 " 의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할례와 믿음, 이 둘을 분리시킴 으로써 칭의의 두 원인들을·혼동하는 것을 우리는 피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을 구별하는· 스콜라 학파의 교의(敎義沖곤 위와 갈 온 논쟁에 의해 반박된다.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은 구약의 성례에는 칭의 의 능력을 부인하고, 신약의 성례에는 그것을.안정_한다.' 그러나 만일 아 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 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 문에 할례 로 말미 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증명할 때에 그의 논증이 옳다고한 다면, 바로 그 논증은 우리에게도 또한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 이다. 그러 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세례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것을 부인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의'것과 똑같은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 을 받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