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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6:11)

1. 성경 (롬 6 : 1 ~ 1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1)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2)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3)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4)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5)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8)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9)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0)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본 장을 통하여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새 생명을 부여해 줌이 없이 우리에게 값없는 칭의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부끄럽게도 갈기갈기 찢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사람들이 죄가운데 거하면 이로 인하여 은혜가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하는 반론을 재의한다. 우리는 우리 육신이 방종에 대한 구실을 얼마나 잘 갖다 붙이는 경향이 있는가를 알고 있다. 사단 또한 은혜의 교리을 의심케 하는 모든 종류의 비방을 아주 잘 고안해 낸다. 육신의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 (justification by faith) 에 대해서 들었을 때.매우 자주 다름 장애물들에 부딪친다 할지라도 우리가 놀라서는 안된다. 왜냐하면.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되는 모든 진리가 인간적으로 판단할 때는 전혀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길을 계속해 나가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많온 사람들에게 실족케 하는 돌이요. 거침 .바위라는  이유로 그가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가 경건치 않온 자들에게는 멸망으로 나타니는 것처럼.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그리스도의 교리가 어떤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앓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불합리한 질문들에 잘 대처해야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선포를 반대하여 가장 흔화게 주장되는 반론을 이제 사도는 추적한다. 이 반론의 내용은 이렇다. 즉, 만일 우리가 보다 큰 죄의 짐으로 압도당하는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더욱 관대하고 풍성하게 도와주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죄의 심연으로 깊이 빠져들고, 그리고 자주 새로운 범죄들을 지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만 우리가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인 것이다. 우리가 오해를 어떻게 반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2. 그럴 수 없느니라." ;  어떤 주석가들은 사도의 유일한 소원이 그러한 터무니 없고 어리석은 태도를 분연히 꾸짖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귀절들에 보면 얼마나 자주 기다란 논증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여기에 대한 대답을 했는가가 입증되어 있다. 여기서도 그는 그의 은혜의 교리를 반대하는 비방을 대단히 신중을 기하여 곧바로 반박할 것이다. 그러 나 먼저 그는 그 비방을 분개한 부정적인 말로 거부한다.  그렇게 그가 거부한 것은 우리의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_조장시켜 나가는.것보다 더 모순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의들 회복시키는 수단인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바울은 이제 반대 편에서부터 논증을 시작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산 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러므로 죄를 폐하는 것이 죄에게 힘을 주어 그것을 조장시키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다. 도리어 중생의 은사를 받지않고서는 신자들이 결코 하나님께 화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바로 이·목적을위하여 의룹다 함을 받은 것은 이후로 순결한 생활을 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함에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씻어 깨끗께 하시고 그의 속최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케 하시며 우리들 그의 성령에 참여하는 자로 삼으셔서 성령께서 우리를 세롭게 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재공되는 온혜에 의하여 죄가 힘을 얻도특 되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터미니 없이 전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악은 그것이 파괴하는 질병을 조장하거나 촉진시키지 않는다. 바을이 여기서 다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시는 때 그가 우리를 발견하시는 우리의 죄된 옛 상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리고 값없이 우리를 아들로 삼아주셨을 때 우리가 마땅히 되어 있어야 할 성결의 상태를 다루고 있다고 내가 이미 언급한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미래의 때를 나타내는 부사를 사용함으로써, 칭의에 뒤따라야 하는 변화가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3. 예수와 합하여 세례~~~~~" ; 이 세례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을 믿는 믿음을 갖기 시작한다-----의 효과를 빌어 자기 백성 안에 있는 죄를 멸하신다는 앞서의 주장을 바울은 증명한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로 옷입으며,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기 위한 이 원리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은 이제 두번째 원리를 가정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그것의 열매를 맺힐 때에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참되게 장성 하는 것이다( in Christi corpus vere coale scere).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이 교제가 세례의 촛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세례는 씻는 것만이 아니고, 옛 사람을 억제하는 것이요, 또한 처형하여 죽이는 것인 바, 이런 열매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가 그의 온혜를 받는 순간부터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이 교제의 효과에 대해서는 다음에 서술되어 있다.

 

"4. 그러므로~~~~ 함께 장사되었나니" ;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받은 세례(our baptism into the death of Christ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는 세례)가 무슨 뜻이 있는가를 바울은 이제 밝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충분한 설영을 해주고 있지는 않다. 세례는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죽음으로 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교제로부터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가짐에 대한 것으로 옮아간 것은 정당하다. 이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멸망된 것은.그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의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평생토록 주어지셨기 때문에 보다 나은 생명에로 다시금 살아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할것 같으면. 왜 그와 함께 우리가 죽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참되게 회복시켜 생명을 얻도특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의 요소를 죽여 없애는 것이다.

 

 더구나 사도가 단순히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권고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죽음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마땅한 모범으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울이 심증에 보다 고차원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지금 그가 후에 권면을 위한 기초로 사용하게 될 교리블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교리는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육신의 부패를 멸하고 넘어뜨리는데 유효하며 그리고 그의 부활이 우리 안에서 더 좋은 성품을 새롭게 하는 데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의 교리는 또한 진술하기를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한다. 바울은 이 기본 명제를 제시한 까닭에 그리스도인들로.하여금 그둘의 소명(召命)에 일치하게 살기를 힘쓰라고 당연히 권고할 수가 있다.

 

이 능력이 모든 세례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그가 신자들을 상대로 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와 외적인 표지로 나타나는 결과를 그가 흔히 쓰는 수법으로 관련 짓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유 형적인 상징에 의하여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나 신자들의 믿음에 의하여 확증되고 인준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컨대 세례가주는 진리를 올바로 받아들일 때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바울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모든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그는 증거한다(갈3:27).  주님이 정하신 제도와 신자들이 갖는 신앙이 일치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이 용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배은망덕과 사악을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방해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상징들이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으로 영화로운 분으로 선언하시고 그의 영과으이 위엄을 나타내신 찬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이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시에 작용하였었다---- 이 고상한 용어들로 흔히 진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마지막 부활---- 이 부활은 육신의 지각을 초월한다--- 에 대한 우리의 신앙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우리가 받는 다른 유익들을 찬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바울 온 그가 앞서 보다 분명 하게 밝힌 바 있었 던 논증을 확증한다. 그가 도입 하고 있는 비교는 모든 모호한 점들율 제거해 준다.왜냐하면 우리의 접뭍 임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을 본받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 께 성장하는 신비한 연합( arcanam con,unctionem) 을 의 미 한다 . 이 신 비 한 연합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소생시키 며, 그의 능력을 우리에계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접물인 가지는 접붙임받게 된 원 나무와 생명과 죽음을 갈이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못지않게 그의 생명에도 갑여하는 자가 되어 야 한다는 것온 당연하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 in similit뼈nem)접붙임을 받으며, 그의 죽음이 그의 부팔과 불가분하다고 할 것 갈으면, 우리의 죽음 또한 우리의 부활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러 나 이 말씀온 두 가지로 해석될 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게 접붙임 을 받아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 히 그를 본받아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첫번째 해석대로라면. 헬라어  '호모이오-마티' 가 우리블 접 붙이는 수단을 나타내는 수단 의 어 적(dative of rreans) 으로 간수되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이 깊온 뜻 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 나 두번째 해석이 표현의 간 결성에 보다더 적합하기 때문에, 나는 그 의미를  사용하는 편을 택하여 왔다. 그러나 두 혜석 모두 결국 갈온 것이 되므로 별다른 차이는 없다. 크리소스를온 수장하기를. 바울이 말하는 바 ·.1의 축으실을 본발아· 라는 표현의 말쓸온 축으십욜 뜻한다고 했다. 이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하는 바-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 : 7) 라는 말쓸이 ‘사람이 되었고’를 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그  표현이 알쓸에는 이보다 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부활을 가리키는 것 외에도 이 말온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옥산의 축을을 축는 것을 뜻하지 않고

 

우리의 죽음과 그의 죽음 사이에 다음과 갈온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둘에게서 취했던 육체를 입고서(육체 안 에서) 죽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안에서(그를 .. 옷,입고서)살기 위 하여 우리도 우리 자신들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죽음 온 그리스도의 것과 갈지 않고, 그것과 비슷할 뿐이다·. 이는 지금 우리 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이 죽는 것과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하는 것 사이에 있 는 유주( analogia ) 를 우리 가 수목해 야 하기 때문이다•

 

"연합한 자가 되리라(insiticii facti)." ;  이 말씀온, 크게 강조되어 있으며,사도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은혜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사도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거나 부지런을 피우면 성취할 수 있는 어떤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완성된 접붙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세부적인 것에까지 구태여 은유나 비교를 적용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나무들을 접불이는 것과 우리가 영적으로 접불임을 받는 것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은 곧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접블이는 데 있어서는 접주가 그 뿌리에서 양분을 받아들이지만. 그 자체의 본질을 그 열매 안에 보유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접불입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명력과 활력을 그리스도에게서 얻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성이 그의 것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그저 단순히 지적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 효과는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데서 나타났으며 또한 그의 부활의 효과는 우리 속에서 성령의 더 좋은 성품을 새롭게 해주심으로 나타났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예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 ;옛 사람이 '예'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에 관하여 '옛' 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같다.  그가 중생하기 시작한 때에 예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 성품은 점차 죽어가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모태로부터 가지고 나오는 우리의 전 성품을 가리켜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 성품이 하나니므이 나라를 받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참 생명에로 중생함과 정비례하여 그 성품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다고 한다. 이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이 죽임 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극기의 유일한 원천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가 갑여하는 것(participation) 이라는 것을 보다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서 바울은 십자가를 드러내어 말하고 있다. 바울이 죽었다는 말 대신에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고.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해석은 아주 옳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에는 거의 적합하지가 않다. 죄의 몸----여기에 대해서는 그가 조금 뒤에 가서 언급한다-----이란 육체와 뼈를 의미하지 않고 죄덩어리 전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본성대로 내어버려두면.죄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우리가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죄를 멸하게 된 목적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담의 자녀들로서 단지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완전히 죄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즉, 죄에게 종 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죄 짓는 것 밖에는·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접붙임을 받게 되는 경우, 이 비참한 속박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우리가 즉시로 죄짓는 것을 모두 중단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최후의 승리을 거두기 위함에서이다;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 논증은 죽음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 또는 그것의 효력에서 끌어 낸 것이다 만일 죽음이 생명의 모든 활동을 파멸시킨다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죄가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에 행한 그 활동들을 그만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하는 말은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또는 되찾음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재판관의 판결에 의하여 사면을 받게 된 죄수가 그의 고소로 인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처럼 사망도 우리를 이 육신의 생명에서 풀어줌으로써 우리가 이생의 모든 책저임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더우기, 비록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그러한 실례를 사람들 가운대서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이 진술을 공허한 망상으로 간주하거나,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한 까닭에 절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 하나님의 사역온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그 날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매일 매일 조금씩 전보하여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매일 매일 조금씩 전보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다음과 갈이 요약할 수 있겠다.

 

즉.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당신이 교통하는 (communim is cum morl• Christi) 표적을 당신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 교통의 열매는 당신의 육체가 그 모든 정욕과 합께 십자가에 옷박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육체의 흔적들이 아적도 여전히 당신 안에 남아있음을 발견하였을라도 이 교통이 전짜 교통이 아닌 것으로 단성 하지 말라. 다만 당신이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머블어 당신이 누리는 교통을 계속적으로 층가시키기에 힘써야 만다: 만일, 신자의 육체가 계속적으로 극기되어 그 소욕을 죽인다면. 그것온 그 신자에게 참 좋온 일이다. 그리고 육체로부터 빼앗온 영역을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경우 그것온 작은 일{attainment)이 아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처럼 사도가 자주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갖는 또  다른 교통이 있으니. 즉,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길을 수반한다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바울이 이 말씀을 반복하는 이유는  다음에 곧 이어 나오는 선언, 곧 그리스도께서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을 첨가 하는데 있다. 이 말씀에 의하여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들에게 부과된 이 새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의무이다. 만일 그들이 육체를 억제하고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들 안에서 나타내야 한다고 하면 육체를 억제하는것(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것) 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의 육체가 우리 안에서한 순간에 억제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추악에 다시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무죄인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가 새 생활에 의해서만이 그와 더불어 교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9.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바울은 사망이 한 때, 그리스도를 마음껏 지배했던 일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과연 그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사망에게 내어 주었을 때 그는 얼마간 사망의 권세에 항복하고 예속되었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의 고통에 매이거나 또는 사망에게 완전히 굴복하거나 그것에 압도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는 조건으로만 그렇게 잠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잠깐동안 사망의 지배에 굴복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영원히 멸망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좀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사망이 하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자발저인 조건을 가리키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부활로 말미알아 끝장이 났었던 것이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 그는 이제 그의 영으로 신자를에게 생명을 주시며, 아니 그 자신의 생명을 하늘로부터 그의 신비한 능력으로 그들에게 불어 넣어 주신다----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그가 사망의 주장에서 해방되었다 (즉, 그를 사망이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모든 자기 백성들을 바로 그 사망의 주장(사망이 하는 바로 그 주장)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함이었다.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가 사망의 멍에에서 영원이 해방되었다고 앞서 말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죄의 폭정에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언에 이 말씀을 적용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최종적인 원인으로부터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죄를 멸하기 위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 형식으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 짓는 것을 그만 둘 목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우리 자신의 경우에는 그렇게 말해야 되지만-----그가 죄 때문에죽으셨으며, 그렇게 하신 것은 자신을 대속물로 삼으심으로써 죄의 세력과 권세를 멸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사도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신 것은(히 10 : 10~ 14 ). 그가 한번 자기를 제물로 드림으로써 획득한 영원한 구속과 그의 피로써 성취한 죄 씻음(the cleansing of sin)에 의하여 영원히 신자들을 거룩케 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구속주 사이에 공통된 유사성을 확립하시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한다. 비록 영적 죽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단번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죽는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아버지께 우리를 화목케 하시고 그리고 동시에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또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실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라는 말씀을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고 읽든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in God)라고 읽든, 뜻은 똑같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나라에서 이제는 결코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멸의 생명의 모형이 경건한 자들의 중생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사성(likeness)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께서 하늘에서 살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늘에서 살게 될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새 생명----이 새영은 우리가 중생한 후에 지상에서 사는 생명이다------을 하늘에 있는 그의 생명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아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고 하는 바울의 진술은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말해질수 있도록 하려는 데 있지 않다.왜냐하면 죄가 우리 안에서 죽을 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죽으심으로 해서 죄를 멸절 시켰기 때문이다. 바울은 앞서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눠 갖게 될 것을 믿는다고 했다. 믿는다는 단어는 바울이 여기서 믿음의 교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약속들에 기초를 둔다.

 

그렇기에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된다.  즉,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바 그들의 극기란 바로 그 그리 스도께서 그들의 새 생명을 끝까지 유지해 주시리라는 그러한 것이라는 확신을 신자들은 가져야 한다. '산다'는 동사의 미래 시제는 마지막 부활을 가리키지 않고, 다만 우리가 땅 위에서 나그네로 지내는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새 생명의 계속적인 과정율 단순히 나타낼넬 뿐이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바울은 이제 그의 유추에 대한 정의를 덧 불인다. 바울의 유추에 대해서는 앞에서 내가 언급한 바 있다. 바울온 죄에 대하여는 단번에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영원토록 사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두개의 진술들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도 죄와의 관계를 끊고서 어떻게 지금 죽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유추의 다른 부분, 즉,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방법에 관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비록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이 다만 시작에 블과하다 할지라도, 죄의 생명은 바로 이 수단에(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인 극기)에 의하여 멸망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의 영적 새 생명이 이후로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죄를 최종적으로 죽이지 않았다고 하면, 그의 은혜는 안전성과 영속성을 결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이렇다.  즉, 다음은 당신이 당신의 경우에 대하여 취해야 할 견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를 멸망시키기 위해 단번에 죽으신 것처럼 당신이 장래에 죄를 그만두기 위하여 당신 또한 단번에 죽은 바 되었다. 참으로 당신 안에서 이미 시작된 당신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극기가 매일 이루어지도록 당신은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종래는 죄가 완전히 멸망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썩지 않을 생명을 취하신 것처럼 당신 또한 하나님의 음혜로 거듭났다. 당신이 이렇게 거듭난 것은 당신의 온 생애를 거룩함과 의 가운데서 살도록하게 하려 함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거듭나게 해준 생명의 능력이 영원하고 그리고 영원토록 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에라스무스의 경우처럼 바울의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라고 그대로 두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만들어 주는 접붙임에 대한 뜻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