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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2)

1. 성경 (롬 7: 7 ~ 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8)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9)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0)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1)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2)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7 그런측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을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수 있다고 말씀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자극하여 죄 짓게 하는 허물이 율법 안에 본래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나게 모순되는 것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가 그것을 논박하려고 한 것은 정당하다. 그가 율법이 죄 냐고 물은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이 율법에재 전가되어 있으므로 울법이 죄들 낳느냐" 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그러므로 죄는 율법 안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 죄의 원인은 우리의 육신의 부패한 정욕이며, 율법 안에서 우리에게 선언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이 없으면 정(正)과 사(邪)사이에 어떤 구별도있을 수 없는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없으면 우리가 너무 우둔하여서 우리 자신의 부패를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기 도취로 말미암아 완전히 분별력을 결여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그러기에, 이 말씀은, 죄에 대한 무지가―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앞서 말했다-----자기 자신의 정욕을 깨닫지 못한 데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 앞 문장에 대한 설명이다. 바울은 일부러 한 가지 종류의 죄만을 다루고 있다. 이 죄에는 특별히 위선이 지배적이며, 그 죄는 서툴기 짝이 없는 방종과 거짓된 자만과 연제나 관련되어 있다.  인간들은 외적 행위들을 선악간에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판단력을 결코 상실한 것온 아니다. 참으로 그들은 사악한 계획들과 이와 유사한 계략들을 정죄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론 마음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찬양을 들려 주지 않고서는 이것을 할 수가 없다. 탐심의 죄는 보다 은밀하고, 깊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는 한, 그것에 결코 주의 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가 탐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죄가 그의 마음 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만큼 방종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의 의가 자신의 탐심으로 말미암아 방해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잠깐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지 만, 그가 마침내 죄인인 것을 깨달았을그 때에 그는 탐심----아무 인간도 이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이 율법에 의하여 금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거스탄은 바울이 이 탐심이라는 말씀에 율법 전체를 포함시킨 것으로 말한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이 말은 사실이다. 모세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행동들을 삼가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자리에서, 그의 모든 금지 명령들과 관련되도록 되어있는 탐심에 관한 이 금지명령을 첨가하여 말하고 있다.  모세가 앞선 아홉번째까지 계명들에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부패한 감정들을 정최했던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런데 사려 깊은 목적과 우리를 미혹하는 욕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계명에서, 우리가 아무리 승락하가를 보류한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부패한 정욕에도 우리가 음직여 악을 행하지 않을 만큼의 청렴결백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의 생각이 여기서 보통 사람들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데까지 미치고 있다고 내가 말한 것이다. 로마의 법률들은 사건의 결과 대신, 사건의 동기가 되는 고의 (故意 ; imp/eat) 를 벌하였다. 철학자들은 아주 정교하게 악과 덕 모두를 마음 속에서 (in animo> 찾아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우리의 탐욕의 마음에까지 미치신다. 그런데 탐심은 의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악(vice)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탐심은 철학자들에게 죄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로마교회의 교황주의자들은 중생한 자의 경우에는 탐심이 죄가 아니라고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이 감추인 질병 속에서 자기의 죄의 근원을 발견했노라고 말한다. 이 사실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탐심으로 눌려 있는 자들은 그들의 허물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핑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편, 우리의 승락을 확보한 부패한 정욕과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며 영향을 주는 탐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다.

 

"8上. 그러나 죄가 기회률 타서 계명으로 말미알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그러므로 모든 악온 죄와 육신의 부패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울법은 단지 악이 이용하는 기회로서, 악의 근인 (the occasionof evil) 이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여 더욱 광적인 것으로 폭발하도록 하는 자극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말씀들은 율법이 전달해 주는 죄에 대한 지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그가  "감추어져 있을 동안에는 아뭏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나의 모든 탐심을 율법이 내 안에서 들추어 냈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하겠다. 그러나 육체는 율법에 의해서 보다 민감하게 충동을 받아 탐심을 품게 되며, 이렇게 해서 또한 자체를 드러낸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의 경우도 아마 이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말해온 것이 문맥에 보다 더 잘 들어맞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바울이 다음과 갈이 즉시로 덧붙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8下,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바울은 위에시 그가 하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율법이 없으면 죄에 대한 지식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곧 그 자신의 경우를 적용하게 되는 일반적인 고찰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번역자들이 본문을 미완료 시제로 번역해 놓은 것온 무슨 의도에서 그렇게 했는지 의아스럽다. 그의 계획은 일반적인 명제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에 그 자신의 경우를 들어가지고 주제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 .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죄가 자기에 대하여 또는 자기 안에서 죽은 때가 있었음을 뜻하는 데 있다. 그가 언제든지 율법 없이 지냈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살았더니’라는 문구는 그러나, 특별한 언외(言外)의  뜻<connotaion)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살아 있다고 하는 이유, 즉 비록 그 자신의 의에 대한 자신감으로 자만하고 있었지만. 그가 정말로 죽었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 고 주장한 이유는 율법이 부재한 데 있었다. 그 문장은 우리가 다음과 갈이 즉, “내가 한 때 율법없이 지냈을 때에. 내가 살아 있었다" 고 읽을 것 같으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이 강조 용법이라고 말 한바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의롭다고 가장함으로 해서 그가 또한 살아있는 것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이렇다. "내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버림으로 해서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알아 차리지 옷했던 나의 죄가 잠 잠하여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었다. 다론 한편.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생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서. 나는 나 자신으로 만족하였었다. 죄가 죽는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요. 또한 죄가 사는 것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또는 율법이 부재하여 바울이 언제 살아있는 것으로 주장했는가 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의 교훈으로 교육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율법의 교훈은 의문의 신학 (thetheology of the Ie tfer) 이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것을 배우는 자들을 겸손하게 해주지 않는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볼 수 없도독 수건 (veil) 으로 덮여 있었다(고후 3 : 14) . 그 자신의 경우도 역시 그가 그리스도의 영을 결여한 반면 그의 눈이 수건으로 덮여 있었기에, 의의 외형적인 가면 (brva) 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

 

그래서 그가 율법을 부재한 것으로 언급한 것은, 율법이 그의 목전(目前)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전지한 의식을 그에게 율법이 통감케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위선자들의 눈들은, 우리로 하여금 탐심을 갖는 것을 금하는 계율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가를 그들이 알아 볼 수 없게 하는 수건으로 덮여있는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 ;  바울온 이제 율법을 감되게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율법이 이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죽은 자에게서 죄를 깨우쳐준 것온, 그 율법이 바울에게 그의 마음의 깊온 곳에 가득차 있는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보여 주었고. 또한 동지에 그 울 법이 그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위선자들이 그들의 죄를 알아차리 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우쑬대면서, 그들이 신뢰하는· 마취 상태에 있는 자만십 에 대 해 서 망하고 있는 것 이 다. I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것을 말하고 있다.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보여 주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부패로 말미암아 방해 받지 않는 한, 주의 율법을 준행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도록 그 계명이 주어졌다. 둘째, 그러나 우리 가운대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율법이 우리를 불러낸 그 인생의 길로 곤두박질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망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의 본질과 우리 자신의 사악함을 구별해 둘 팔요가 있다. 이로부터 결론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치명상을 가해주는 것은 하나의 불상사(不祥事)라는 점이다. 이는 마치 불치병이 치료할 목적의 처방에 의해 오히려 급 성병으로 악화되어버린 것과도 같다. 불상사가 율법과 불가분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율법은 복음과 비교될 때. 다른 곳에서 사망에 도움을 주는 것 (the ministration of death) 으로 블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율법이 그 자체의 본질 상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패한 까닭에 율법의 저주를 초래한다고 하는 취지는 유효하게 들어맞는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블 속이고… ." ; . 비록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고 아무런 교훈도 우리의 길을 비춰 주지 않을지라도. 인생살이 전부가 나쁜 길에 빠져들어 실수로 가득차게 되는 것온 사실이다. 실로, 율법이 바론 삶의 길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줄 때까지는, 우리는 실수 외에는 아무것도 능히 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때 우리가 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고 바울이 말해서 옳은 것은, 주께서 공공연하게 우리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셨을 때에만이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의식하기 시작하계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사 '엘 사파란' 이 율법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 라. 우리의 율법 지식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그 율법 자신이 우리가 바른 길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났는가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동사를 길에서 벗어나게 하다(속이다)로 번역 했어야한다. 이는 아무런 조심성도 없이 이전에는제멋대로 행하였던 죄인들이,  율법이 죄의 불결함을 드러내어 주었을 때, 그들이 죽음을 항하여 줄달음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들에 대해 넌더리가 나며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 율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 다시 기회라는 말울 쓰고 있다. 이는 율법이 저절로 사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망과 관련되는 것온 다른 요인들 때문에 우발적으로,그리고 불의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가 알도록 하려는 데 있다.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  몇몇 주석가들은 율법과 계명이라는 단어가 중복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견해에 동조한다. 이 단어들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일 목적으로 중복된 것이다. 율법 자체, 그리고 율법에 명령되어 있는 모든 것은 모든 면에서 거룩하다. 그래서 가장 존귀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은 의롭다. 그러므로 어떠한 불의도 율법의 책임으로 들려 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선하다. 그러므로 순수하고 아무 홈결도 없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을 모든 비난에 대해서 변호해 준다. 그리하여 아무도 선과 의와 거룩함에 반대되는 것은 아무것도 율법에 감히 돌리지 못하계 하려는 것이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되었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율 모든 그릇된 해석들로부터 변호하여 왔다. 그러 나 울법이 사망의 원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약간의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수단이 어떻게 파멸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겠느냐하는 문제에 부딪칠 때 인간의 마음은 당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온 사망이 율법으로부터 생겨 난다고 하는 것을 부인하고. 단지 사망은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이라고 대답하여 이 반론을 반박한다. 이 대답은 생명에 이르게 할 목적으로 주어졌던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하는 앞의 귀절 (10) 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 모순도 없다. 앞의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우리 의 부패가 원인이 되어 우리가 율법을 잘못 사용함으로해서 그 율법의 성질과는 반대로 우리가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율법이 사망의 질료인(質料因 ; 실질적인 중대한 원인)이라는 것을 바울이 부인하고· 그래서 사망은 율법에게 전가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 :7 에서 율법에 대하여 보다 자유롭게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율법을 죽게 하는 직분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말한것은 논쟁의 문제에 있어서 일반적인 관례와 일치된다.  왜냐하면 그가 율법의 성격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대적들의 그릇된 견해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 다른 사람둘과 논쟁을 벌이는 일이 없 이.본문은 내가 번역한 대로 읽는 것이 좋다는견해만을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온, 죄가 율법으로 알미 암아 드러 나기 전에는. 어느정도 정 당화된다• 그러 나 그것이 율법을 근거로 삼아(즉. 기회를 타서 율법 으로 말미암아) 드러 나게 되는 때, 그것은 갑으로 죄라고 칭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의 일반적인 선을 바꾸어 우리에게 파멸이 되게 한 까닭에. 더 욱 악하고 죄된 (sinful>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론 일만 없으면 본질 적으로 유익한 것 을 유해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수 치 명적임 에 들립 없 다. 그 의미는, 죄의 잔학성이 율법에 의하여 람지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이다. 만일 죄가 업청나게.그리고 난폭하게 터져 나오지 않았었다고 한다면, 그것온 최로 인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죄는 이처럼 업청나고 난폭하 게 쇄도하는 한편. 생명을 바꾸어 사망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변명할 근 거들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