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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1. 성경 (롬8:1 ~ 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2)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3)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4)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 그러므로 이제…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사도 바울은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육체로 인하여 끊임없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을 묘사하고 나서 , 그는 앞서 그가 언급한 바 있는 위로에 관해서 다시 말한다. 그런데 이 위로는 그들에게 매우 팔요하였다. 그 위로의 말씀의 내용은 비록 그들이 아직도 죄에 사로잡혀 있기는 하지만  만일 육체대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게 되면 사망의 권세에서 , 그리고 모든 저주에서 그들이 자유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 세 가지, 즉 신자들이 항상 갈등을 갖게 되는 그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성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온혜와, 그리고 성령의 중생을 서로 관련지어 놓고 있다. 이 위로에 관한 말씀을 바울이 맨 나중에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육신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모든 저주에서 해방 받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이다. 그러므로 만일 육에 속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이 은혜를 구실로 삼아 자신에게 무처벌 (impunity) 을 약속하는 경우에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한편 경건한사람들의 양심은 불안하여 떨고 있어 보이지만 사실인 즉, 확실한 방어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는 한 아무런 정죄 받을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의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영을 좇아 행한다' 고 하는 말은, 모든 육신의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림으로써 그들의 생활 전체가 오직 천상적인 완전함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들이 육신을 억제하고 죽이는 데 전심전력함으로써 참된 경건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신자들의 경우를 가리켜 육신을 좇아 행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선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이 역사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육신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의 오염이 다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 이것은 앞 귀절에 대한 증명이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들이 뜻하는 바 그 의미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을 '성령의 법' 라고 칭한 것은 적절한 표현은 못된다. 이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서, 우리에게서 죄책의 얼룩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성별하여 참된 순결에 이르게 한다 바울은 덧 붙여 말하기를, 성령이 생명을 준다고 하고 있다.  히브리 문법에 따르면, 소유격은 형용사로 취급하여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생명의 성령은 "생명을 주는 성령"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율법의 의문에 매이게 하는 자들은 그를 죽음에 복종케 하는 셈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 율법의 의문에서 결과하는 육신의 왕노릇과 사망의 폭군노릇을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칭했다. 그러기에 , 하나님의 율법은 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 중간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의를 가르쳐 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줄 수 없으며, 대신 우리를 죄에 매이게 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오랏줄로 사망에 매이게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이렇다. 사람들이 율법의 의무 아래 있는 한, 그들은 죄의 굴레에 매여 있게 됨으로 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육체의 무절제한 정욕을 바로잡음으로써 우리 안에는 죄의 법을 폐하며, 동시에 사망의 죄책에서 우리를 건져내 준다. 이 경우 우리의 허물이 다 가리위지게 되는 그 용서가 우리의 중생에 달려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혹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점은 쉽게 대답될 수가 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죄책에서 건짐을 받게되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방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율법의 외적인 교훈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때에 동시적으로 또한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죄의 저주가 우리에게 있지 않게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마치 바울이 중생의 은혜가 의의 전가(,i隊)와 결코 분리된 수 없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어떤 주석가들 처럼 `죄와 사망의 법’을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해석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지나치게 귀에 거스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율법이 죄를 증가시킴으로써 사망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바울은 이러한 비위에 거스리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극히 삼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의 법"이 육체의 정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서, 바울이 자기가 그것을 정복 한 것으로 말을 한 것처럼 설명하는 자들의 견해에도 또한 찬성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해주는 공로 없는 사면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 곧 분명해질 것 같다. 나로서는, ‘ 법'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놓아 두고 싶으며, 에라스무스처럼, 권세’ 또는 `세력 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 바울은 결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언급하지 않았다.

 

"3.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  주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의 값없는 긍흘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셨다는 바울의 증거에 대한 설명이 이제 나오고 있다. 이렇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율법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아주 주목할 만한 문장인 까닭에, 자세하게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4절 상반절의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라는 구문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값없는 칭의,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화목케 하는 용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죄를 이기는 방법을 거듭나게 하는 영에 의하여 우리가 배우게 되는것으로 바울이 말하려고 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이 귀절을 덧붙였겠는가? 그러나 바울이 신자들에게 값없는 사죄를 약속하고 나서, 회개하고 믿음을 갖는 자들에게, 그래서 육신을 탐닉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지 않는 자들에게 이 교리를 그가 국한시키는 것은 적절하다. 바울이 제시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생 각키로 하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죄책에서 용서받게 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면 '토 아뒤나돈', '율법이 할 수 없는 것' ·이라는 말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이 말은 '흠결'  또는 ‘무능력’ 을 뜻함에 분명 하다. 이는 마치 율법이 결여하고 있는 능력을 보완하는 대비책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신 것으로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다. 에라스무스는 소사(小詞)인 '엔 호'를  '그점에서' 로 해석했다. 그러나  나는그것이 원인을 나타내는 소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때문에' 로 해석하는 편을 나는 택했다. 비록 그러한 문구가 유명한 헬라어 저술가들의 글들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도들의 경우는 히브리 문구들을 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조잡한 것은 아니다. 지각있는 독자라면 바울이 여기서 표명한 것은 그 홈결의 원인이라는 것을 틀림 없이 인정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곧 다시 언급될 것이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주동사를 넣어 해석하고 있으나, 내 생각에는 그 주동사가 없어도 본문은 뜻이 잘 통한다고 본다. 에 라스무스는 연계 접속사 '카이: 그리고'  때문에 착각을 일으켜 동사 'praestitit —- 성취 했다' 를 삽입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죄를 인하여'라는 표현을 앞에 나오는말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고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보내어’ 에다 연결했는데, 그의 억측을 아무라도 입증할 수만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으나, 나로서는 그 연계 접속사가 부연할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나타내려고 한 본래의 의미라고 생각된 것을 따랐다.

 

이제 주제 자체를 다루기로 하겠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속죄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분명하게 확언한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율법에 요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일 우리에게 율법을 성취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대비책이 강구될 하등의 팔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신 것은 우리 인간들의 능력의 성격과 범위를 그가 인정하신 때문인 것으로 착각하고서, 율법의 교훈들에 의하여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바울은 율법을 그 연약성을 인하여 불경하게 자기가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아무도 오해 하지 않도록 하고, 또한 율법을 의식상의 규례에 국한시켜 아무도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밝히 말하기를 이러한 연약성은 율법 안에 있는 어떤 홈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부패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누 구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이행할수 만 있다고 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 바울은 교훈에 관한 한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에 충분하다는것 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는 울법이 의의 완전한 법칙 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그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의 전 능력이 무산되어 버리는 것아 다.

 

이로써 의식법의 경우에만 의롭게하는 능력이 없다고 바울이 말한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오류와 망상이 논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고, 율법의 교훈에는 아무런 홈결도 없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나, 율법의 ‘연약성’은 사도가 '아스데네이아스' 라는 단어를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그 개념으로 이해하여, 단지 대수롭지 않은 연약성이 아니라 완전한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도는 울법이 의를 주는 데 있어서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의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특별히 꼭 알아 두어야 할 팔요가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의도 없다는 것을 먼저 분명하게 우리가 알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의를 결코 덧 입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신’ 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두고 사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이 부적합으로 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비록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사망을 항하여 무모하게 치달리는 우리를 돌이켜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은……자기 아들을… ... 보내어." ;  바울은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를 회복시켜 주는 방식에 대해 이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바로 그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즉, 그는 우리의 죄상을 지워 버림으로써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얽매이게 한 죄책을 폐지하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죄를 정함으로써 우리가 의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의 죄책이 제거된 까닭에 우리가 사면을 받게 되어,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신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보내어졌다'고 말한 것은 그 의가 우리에게는 전혀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인데, 이는 그 의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로 를 믿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기꺼이 승락해 주는 때에 한해서만 그들이 의로우며 ,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신으로 성취하신 속죄에서 의를 빌려 오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의 육신은 전혀 죄로 더럽혀진 것이 없지만, 그 육신이 죄 있는 모양을 취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가 형벌을 당했고, 그리고 그것이 사망에 굴복되기나 한 것처럽 분명히 사망이 그리스도의 육신에 그것의 모든 권세를 행사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연약한 자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참 뜻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병약한 육신을 기꺼이 입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죄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보다 더욱 동정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죄 있는 성품과 닮은 어떤 유사점이 그에게서 나타났다.

 

"그리고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죄를 인하여' 로 되어 있음 ;역자 주)  방금 전에 말한 바 있듯이, 이 구문의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신 원인 또는 목적, 즉 죄에 대한 속성을 주기 위함인 것으로 어떤 사람은 해석하고 있다. 크리소스톰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 구문을 약간 더 조잡한 의미로 해석하여 . 죄가 죄 때문에 정죄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부당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롭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죄' 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속죄제물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으로 나는 생 각할 수밖에 없다. 즉, 히브리어로는 '아삼' 이라 불리우고,  헬라어로는 저주가 내려진 제물을 '카타르마' 라고 부르는 경우와 같다.

 

바울은 바로 그것과 같은 의미로 고린도후서 5:21 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남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전치사 '페리'는 여기서 원인 또는 이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바울이 말하기를,  ‘그 제물로 인하여', 또는 `그리스도에게 지워진 죄의 짐 때문에' 죄가 그것의 힘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그것이 이제는 우리를 그것( 죄 ) 자체에다 얽매어 예속시킬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 것과도 같다. 소송 판결에서 패한 사람들처럽, 그의 육신에 "죄를 정했다" (정죄 되었다)고 은유적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유죄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대 당했던 그 죄의 나라가 멸망 받았다고 하는 것과도 그 뜻이 같다.

 

이와갈이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자신이 취하셨다. 즉, 그는 우리의 저주를 자신에게 지우고,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바울온 여기서 '육신에’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죄가 우리의 본성 자체 안에서 정복되고 폐지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때에 우리의 확신을 돋우어 주고 있다.  이로써 바울이  당장 선언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본성이 그의 승리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되는 것이다.

 

"4.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어떤 주석가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율법을 그들이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 그 주석가들은 바울이 의마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릇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에는, 율법의 의가 자기들에게서 완성될 만큼 믿음의 진보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절의 , 말씀을 죄 용서에 적용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의 우리에게 전가 됨으로써 율법이 충족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perfection)이 이로 말마암아 육체에 나타났으며, 그래서 율법의 엄격한 요구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의를 그가 그의 영의 매는 줄로 자신에게 연합되게 한 사람들에게만 전가시켜 주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역자로 오해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중생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면죄 교리를  악용하여 육신의 정욕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그 교리가 의로 운 삶을 추구하려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이 교리를 악의 를 가지고 비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