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 8:18 ~ 27)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9)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0)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1)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2)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3)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4)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5)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6)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 교할 수 없도다." ; 이 구철의 말씀을 일종의 보정(補正)으로 보는 것이 아주 적절하다 하겠으나, 그가 반대론을 예상하여 그의 권면을 다음과 갈은 의미로 부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며 낫겠다. 만일 우리가 하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각종의 고통들을 겪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 상할 것이 없음은, 그 찬란한 영광과 비교해 보면 이 고통들은 아주 하찮은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영원한 영광’ 대신 ‘장차 나타날 영광’이라고 기술하였는가 하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환난들을 ‘현재의 고난'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갈이 비교해 놓고 보면, 이 구절을 중세 가톨릭 교회 학자들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전다. 그들은 적합성 ( congrujty)과 당연성 (condignity) 간의 하찮은 차이를 그 구절에서 끌어냈다. 그러나 사도는 각각의 가치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거운 십자가를 찬란한 영광과 비교시킴으로써 단지 그 십자가를 가볍게 해주고, 그리하여 신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인내하게 하려는 것이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 ; 바울은 그가 우리에게 권면하였던 인내의 본을 말 못하는 피조물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 게 가르쳐 주고 있다· 본 구절에 대한 각종 해석들은 생략하기로 하고. 나로서는 본 구절을 다음과 갈은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즉, ‘현재의 고난을 알게 됨으로 해서 감정이 상하게 되면. 부활의 소망을 간절히 고대하지 않을 피조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바울은 두 가지의 진리, 곧 모든 펴조물들이 고통하고 있다는 것과 그렇지만 소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 탱하고 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영원한 영광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또한 알 수 있다. 사실 그 영광이 값진 것이기에 만물이 그것을 간절히 고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우기, ‘고대한다’ 라는 표현은, 다소 혼하지 않은 진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의미하고자 한 것은 피조물들이 큰 근심에 억눌려 있고 또한 간절히 고대하는 나머지 안절부절 못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을 밝히 나타내게 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영광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 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 때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는 요한이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요일 3 : 2 ). 나는 바울이 말한 원문을 그대로 살려 두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라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내 생각에는, 사도의 의도를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지나치게 의역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지막 날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들의 썩어질 몸을 벗어버리고서 하늘의 영광을 입게 될 때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바람직하고 행복한가 하는 것이 그 날에 알려지계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에게 그 소망이 있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눈을 뜨고 보이지 않은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생명이 외관상으로 초라한 가운데 감취어져 있는 것이다·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목표를 선포하되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피조물은 부패 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전하게 회복될 때까지는 새로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것들의 재생을 기다리는 한편, 하늘나라가 나타날 것을 고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들이 ‘허무한 데 굴복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혼들림이 없이 확실하게 남아 있지 못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버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허무한 것을 본래적으로 완전한 것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뜻이 아니요·" ; 이성이 없는 피조물에게는 아무 의식이 없는 까닭에, 뜻'(voluntas) 이라는 단어는 본래적인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본질은 본래적인 그것의 성질을 따라서 그 자체를 보존하며 완전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의인화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부분들이 의식을 부여 받은 존재인 양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만일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의 불확실한 불안정으로 말미 암아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르지 못할 것 갈으면 우리의 우둔함을 크게 부끄러워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순종의 본을 우리 앞에 제시해 놓고서는 부언하기를,I .:i 순종이 ‘소망' 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소망 때문에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일정한 궤도로 운행하는 것이며, 땅은 언제나 변합없이 순종하여·그 소산을 내고, 바람은 지치지 않고 불며, 물은 힘차게 흘러가 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피조물에게 그것의 고유한 임무를 부여해 주 셨으며, 정확한 명령을 발하여 자기의 뜻에 순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내적으로는 재생의 소)방울 십어 주었다· 세상이라고. 하는 가 계의 모든 부품들은 어떤 감추인인 힘에 의해서 의부로부터 받쳐주지 ’ 않으 떤; 세상이라고 하는 전 기계는 거의 매 순간마다 고장을 일~7J.-것이 며 그것의 모든 부속품들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결과된 슬픈 혼돈 가운데 빠쳐들 것이다· 그러므로 잠재하’는 본능으로 말미암아 이성없는 무생물계에서 생겨나는 것보다 뎌 져온 효과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커} 령의 보증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고 할 것 같으면 아주 부끄러운 일인디것 이 다 •. 노러 므로 ' 피 조물들이 타고 나면서 부터 어 떤 다론 방향으록느 아무리 많이 기울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허무한떠1 굴 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 에 복종한다; 그리고 장래에 있을 더 나온 상태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께 서\:그것둘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 소망을 인하여 자신들을 지탱 하며 , 그것 들에 게 약속된 썩 지 않을 것 이 나타날 때 까지 -7J:철히 고대하든 컷이'다· 바울은 그가 앞에서 의지(뜻) 와 거철하는 것이 그것들에게 있는 것으로 서술하였던 것처럼, 의인화 용법을 사용하여 ‘소망’ 도 그것들에 게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i • I t e, . _i ,l 누 :~ :-니
"21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집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 ; 바울은 이 구절에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된 것은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될 것을 ‘소망하는 중에서' .. 였다는'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가 증거하고 베드로가 더욱 ,분명하게 확증한 바와 갈이, 펴 조물이 언젠가는 해방될 그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이갈은 사실로부터 우리가 받은 저주가 얼마나 무시 무시한 것인가를 추론할 수가 있는데, 이는.천하에 모호 무죄한 피조물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중에 발버둥 치고있다. 이와 같이 인류가 받은 정죄는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깊이 새겨져 있는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얼마나 찬란한 영광에까지 높아지도록 되어 있는가 하는 것과 모든 피조물들이 그 영광을 돋보이게 하고, 그것의 광채를 선포하기 위하여 새로와질 것이라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의미하는 바는 모든 피 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더불어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나름대로 더 나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장차 인류를 완전한 상태에로 회복하는 것처럼 현재의 타락된 세계를 그렇게 완전한 상태에로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댜.
짐승이나 식물들이나 금속들에 의해서 증명되게 될 완전한 상태에 대해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서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옳지도 않다· 왜냐하면 썩어점의 주 요한 요소는 부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리한 그러나 균형을 잃은 주석가들은 모든 종류의 침승들이 불멸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그 여부를 묻는다. 만일 이같은 억측들을 마음대로 구사할 것 같으면, 결국 우리는 오리무중 (五里霧中)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순전한 교훈으로 만족해야 한다. 즉, 모든 종류의 짐승들의 구조와 그것들의 상태는 아주 완전할 것이므로 안무런 외콴상의 흠점이나 단명하는 일이 결코 없게 될 것이라는 교훈으로 만족해 하자.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할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 가 아나니·" ; 바울온 우리 자신의 경우를 다루기 위해서 똑같은 전술을 되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결론의 효과와 형식 을 갖추고 있다. 피조물들이 그것들 본래의 욕구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 의 정하신 뜻으로 말미암아 썩어점의 종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장차 썩어집에서 자유케 되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것들이 해방될 때까지 해산의 전동을 앓는 여자처럼 고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고통이 헛되지 않으리타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가장 적철한 비교이다• 결국은 기쁘고 행복한 결실을 맺게 될 것 이 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피 조물들은 그들의 현재 의 상태 에 불만족하 고 있으나, 그렇지만 그것들이 고통하되 회복할 수 없게 쇠찬해질 정도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고통하고 있는 것은 더 나온 상태에로 회복 될 것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함께 고동한다' 고 바울이 한 말의 뜻은 그것들이 인류와 공통되는 근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 니고, 바울은 그것들을 우리의 동반자들로서 우리와 연결해 놓은 것이다· ‘이제까지 ’ 라는 품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무디고 지쳐있는 본 성을 일깨워준다. 만일 피조물들이 그토록 많은 세월을 두고서 고통을 계 속해 왔다고 하만 우리가 그림자 갈은 짧은 인생길에서 쇠찬해진다고 할 지라'.£., 우리의 유연한 자세나 나태한 마음은 용서받지 못할‘것이다·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 우리의 장래의 복된 상태를 사도가 여 기서 지나치게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이 성이 없는 피조물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우 리까지도 그것을 간절하게 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률렸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내 생각에는, 바울이 더 큰 젓을 며 작은 것과 비교하 고 있는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갈이 말한 것같다 .. 우리의 장차의 찬란한 영광은 의식과 이성이 없는 바로 그 피조물들에게조차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간절하계 그 영광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 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조명을 받았으니, 우리의 소망을 튼튼히 불 잡고 열과 성을 다하여 더욱 며 그갈은 복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고대하 며 위하여 분발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있어야 할 두 종류 의 감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환난으로 인하여 짓눌려 있기 때문에, .• 고통'해야 한다 .. 그렇지만 그들이 해방될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바울이 신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장래의복된상 태에 대한 기대로 그들의 가슴이 부풀어 있는 것과, 그들의 현재의 상태를 초월하는 마음을 가집으로 해서 그들의 현재의 고난들을 극복하여, 그들이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장차 있을 자신들의 모습을 생 각할구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 어떤 사람들온 ‘ 처 음 익 은 열 매 ' ( primitias ) 라는 단어 를 진 귀 하고 두드 러 지 게 뛰 어 난 것 을 의 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나 나로서는 그갈온 해석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모호한 표현을 피하기 위하여, 그 단어를 ‘처음 시작하는 것들' (_primordia)로 번역하였다. 앞서 말한 주석가들은 ‘처음 익은 열매 •. 라는 표현을 사도들에게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는다• 나는 이 센-상에서-· 또 몇 방울의 성 령으로리도-뿌룬l을 받은 일 OL&E 모든 신자들에계 적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즉 믿음에 크게 전보 한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양의 성령을 부여받았기는 하 지만 아직 ·완전하기에는 요원한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갈은 사람들은 처음시작 하는 것들 또는 처음 익은 열매들로서 , 완전히 다 익어서 수확한 것 들과 뇰가 된다. 만일에 있을 성령 충만이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하여 동요하는 것온 이상할 것이 없다. 바울은 강조 하기 위해서 ‘우리까지도 ’라는 말을 덧붙여 ‘우리 ' 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 율 단순히 욕망이 라고만 칭하지 않고 ‘ 탄식 '이 라고 말하고 있다. 왜 냐하 면 우리의 비감함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에는, 우리 또한 ‘ 탄식하기 ' 때문 이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양자될 것 '을 가리켜 우리자 이미 양자되어 얻온 기업을 누리게 되는것 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칭한 데에는 아주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이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결과인 약속된 부활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작정이 효력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우리를 그의 자녀들로 선택하셨으며, 그것에 관하여 복음으로 우리에게 증거하시고, 그것에 대한 신앙을 그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신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나그네 길을 다 마친 후에 하늘의 기업을 우리가 받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어찌 우리의 아버지이시겠는가? '우리 몸의 구속'이라는 문구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구속받은 것에 대한 대가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불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를 사망이 그것의 굴레로 주장하고있다. 우리 안에 사망의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로. 보건대,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되신 것이 결실하여 우리가 하늘에서 새로와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죽으심의 희생제물은 헛된 것이 되고 말것이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바울은 그의 권면의 말을 또 하나의 다른 논증을 들어서 확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논함에 있어서 세상에 사망이 들어온 것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소망의 본질을 들어서 증명한다. 소망은 우리가 아직것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에까지 이르고, 그리고 감취어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형상을 우리 마음에 제시해 주기 때문에, 눈으로 환히 볼 수 있거나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것들은 소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구원이 소망 중에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전리를 바울은 인정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소망이란 우리의 감각의 영역 밖에 멀리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바울이 한 말온 조금 거칠은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 뜻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그가 다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소망은 장래에 관한 것이요 현재의 이익과는,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으로 잡아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탄식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부담스런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부담스럽게 느끼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순서를 정녕 뒤집고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부르셔서 승리하게 하시기까지는 먼저 그들이 고통하는 투쟁을 겪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그의 품에 고이 간직하고 계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땅 위에서 고생하며, 눌림을 당하며, 애통하고. 괴로와하며, 반쯤 죽은 것처럼 또는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은 우리의 편의를 위한 강구책이다. 보이는 구원을 구하는 사람들은 소망을 단념하는 까닭에 사실온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 되는 바, 이는 소망이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을 위한 수호자로 정하여졌기 때문이다.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이 논증은 뒤따라 나오는 것에 선행하여 있는 것에서 나왔는데, 이는 인내가 필연적으로 소망에 수반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바, 선이 우리에게 없음으로 해서 괴로와하게 될 경우, 우리가 인내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며 위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망하여 실신할 것임에 틀립없다. 그러므로 소망은 언제나 그것과 함께 인내를 가지고 온다. 그러기에 바울의 결론은 가장 적절한 것이다. 곧 만일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십자가와 환난들을 참고 견디는 가운데서 우리의 현제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할 것같으면,부활의 영광에 관하여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모든 것 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생명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 눈앞에 사망이 다가온 것임에 틀림없으며, 만일 우리의 영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현재의 상태는 불쌍하기 짝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구절 전체를 몇 마디의 말로 요약하고자 한다면, 바울의 논증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구원은_모든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소망 중에 있다. 그러나 지금은 없으나 장차 있을 유익들에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이 소망의 특질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구원은 감취어 있다. 그립데 소망은 오직 인내로만 지탱된다. 그러므로-신자들의 구원은 오직 인내로 말미 암아 성취된다.
첨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인내는 신앙의 떨어질 수 없는 동료라는 것을 보여주는 유명한 말을 여기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인내와 선양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장차 있을 더 나온 상태에 대한 소망으로.자신을 위로하게 되면, 우리가 현재 불행하다 고 하는 생각은 시들어질 것이며, 그리하여 훨씬 덜 어렵게 현재의 불행들을 이겨넬 수 있게 된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합을 도우시나니·" ;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너무 연약하여 그처럼 많은 무거운 짐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반대를 내세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신자들 앞에 성령의 도움을 제시하고 있다. 이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어려움들을 넉넉히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강건하여진 까닭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아무도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 헬라어 '쉬난티람바네타이' 라는 단어는 그 뜻이 아주 강하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압박하는 짐의 일부를 강당해 주시고, 우리에게 도움과 구조를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추겨 주심으로 해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그 짐을 져주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연약함' 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은 ( 칼빈은 복수형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R.V. 나 R.S V에는 단수형으로 번역되어 있음;역자주) 그 뜻을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표현법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당장 압사해 버린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의 모든 지체가 연약하고 또한 여러가지로 연약함을 인하여 타락의 위기에 처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넉넉히 보호해 주심으로 해서 무수한 악들에 의하여 우리가 멸망당하거나 압도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성령의 도우심들을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구속을 고통하고 탄식하여 갈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바울은 위에서 성령의 중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 성령의 중거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며, 이 증거를 신뢰하고서 감히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간구하는 일에 관하여 '거듭 언급하고 있으며, 바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하는 방법과 기도할 때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침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기도를 경건한 자들의 근심되는 일들과 관련지은 것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통스런 일들로 괴롭히는 것은 그들이 속으로 근십하며 지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도로써 모든 점들을 벗어버리도록 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 구절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으나, 내 생각에는,·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악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너무 어수선하고 혼란되어 있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적합하며, 무엇이 유익되는가를:제대로. 분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론을 재기하여 우라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되어 있는 규칙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성령께서 그의 빛으로 조명하여 우리의 마음들을 인도해 주시지 않는한, 이 규칙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어두음으로 짓눌려 있게 된다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실상 들어 주시지 않은 것같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늘에서 오는 은혜가 임한 까닭에 기도하고자 하는 바로 그 열심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바울은 결론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 스스로는 경건한 기도를 생각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신자들도 부지중에 실제로 기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기도에는 진실성이나 진지함이 전혀 없고 또한 정확한 순서와 형식도 없기 때문에, 다만 하나님을 야유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을 규정하고 계심에 틀림없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토설하는 탄식을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그 탄식이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실재로 자신을 낮추어 간구자로서 기도하거나 탄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기도를 하도록 강화하시기 때 문이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화하시되 이같은 기도들이 간절한 까닭에 하늘에까지 상달되도록 해 주신다. 바울이 이와 갈이 말한 것은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순전히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목적에서였다· 우리논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내적 감화로 알미암아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시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하나님께 열어드리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 스스로는 단 한 마디의 기도도 미리 생각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27. 마음율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 ;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동해서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의 확신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는 바, 이는 하나님 자신이 그 자신의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계시는 까닭에,우리의 기도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여‘ 안다 ’는 단어의 뜻에 유의할 펄 요가 있다. 본문에서 ‘ 안다'고 하는 말의 뜻은, 성령의 생각들을 새롭거나 관례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것과, 그 생각들을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 거부하지 않는다는것과, 동시에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쾌히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품으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바울이 앞에서 선언함으로써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또 하나의 다른 위로를 더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규제하시는 우리의 기도는 결코 좌절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또한 여기에 대한 이유를 즉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뜻에 따르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그윈뜻-----만사가 그 위 뜻에 의하여 주관됨-----에 일치하는 기도는 효력이 없을 리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또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첫 부분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옹하는 것이라는 점과, 우리의 정욕대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결코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그의 뜻을 따라 우리의 기도를 규제하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Calvin선생주석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1) | 2022.09.18 |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1) | 2022.09.18 |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8:16) (1) | 2022.09.14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2) | 2022.09.13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1) | 2022.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