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로마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1. 성경 (롬 8:31 ~ 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1)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2)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3)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4)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5)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6)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7)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8)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9)

2. 묵상 (Calvin 선생의 주석)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바울은 이제까지 자기가 진술하고자 했던 요점을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에 , 이제 그는 일련의 감탄을 터뜨리고 있다. 그는 이 감탄에 의하여 신자들이 역경으로 인하여 절망할 수밖에 없는 중에서도 소유해야 하는 영혼의 위대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 말씀들을 통해서, 모든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무적의 용기는 하나님의 부성의 은총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에 대하여 우리가 통상적으로 판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우리의 현재의 상태를 참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사가 어그러지게 된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은 온통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고, 또한 모든 확신과 위로를 그 슬픔 때문에 상실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은 외치기를, 더 깊은 원리를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는 것과. 따라서 자신의 슬픈 현실만을 응시하는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채찍과 재앙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간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러나 그 채찍과 재앙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화된 까닭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명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부성애를 잘 이해하고, 그리하여 이 방패를 의지함으로 해서, 그들이 모든 악을 자신있게 극복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경우 우리가 모든 위험에 대하여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은 우리에게는 놋성벽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바울이 하는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장해도 없으리라는 뜻이 아니고, 모든 종류의 대적에 대하여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그가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이 말씀은 모든 시험 가운데서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제일되는, 그러므로 유일한 받침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 우리를 위하지 않으시면, 만사가 순조롭게 되어 간다고 할지라도, 전혀 확신을 갖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총만 있으면 어떠한 슬픔을 당할지라도 큰 위로를 충분히 받을 수가 있고, 모든 재난의 돌풍 가운데서도 강력한 보호를 충분히 받을 수가 있다. 이같은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많은 성경의 증거들이 있다. 그 증거들에 의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만 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역경에 대해서 전혀 겁을 먹지 않게 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 56 : 1.1).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 3' : 6 )",

 

하나님의 팔을 대적할·수 있는 권세는 하늘 아래나 하늘 위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모실 것 같으면,우리는 어떠한 해도 두려워할 팔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호로 만족하는 그 사람만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를 나타내 보일 수가 있으며.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도 흔히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나, 결코 완전히 낙담하지는 않는다. 요약하자면, 사도의 목표는 경건한 사람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튼튼히 서야 하고, 외적인 것들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다.

 

"32. 자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 신 이가.~~~~" ; 우리가 하나님의 부성애를 철저하게 확신함으로 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 사랑을 계속적으로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케 하시려고 치루신 대가를 언급 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무 주저함도 없이 주신 것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잘 입증해 준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논증을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끌어 간다. 즉. 하나님께는 자기 아들보다 더 귀중하고 아까운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가 미리 아시기를 우리에게 유익하리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 구절을 대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보증이시기에, 그는 아무런 축복도 갖은 것 없이 빈 손으로 우리에게 보내지신 것이 아니고,  모든 하늘의 보화들을 가득 가지고 오셨으며, 그리하여 그를 소유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완전한 행 복을 구가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어 주신다' 라는 말은 죽음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  경건한 사람들이 역경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얻는 제일되는 위로는 하나님의 이 부성애를 확신하는 데서 온다. 하나님의 이 부성애로부터 구원에 대한 확신과 모든역경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적어도 슬픔의 쓴맛을 덜어버릴 수 있는 영혼의 평안과 안정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 의를 베푸시며 위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온전히 인내할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 확신을 들어서 위로의 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 위로에 의하여 모든 악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이 처음에는 송사(松事)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그 다음에는 정죄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는 까닭에 바울이 먼저 송사의 위험을 제거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서야 하는 법정은 오직 한분 하나님의 법정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송사 받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조되는 문구들이 정확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바울이 대조시켰어야 할 두 부분은, '누가 송사하리요' 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이다. 그리고 나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의롭다·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의 두 마디를 첨부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면은 정죄와 연결되고, 그리스도의 변호는 송사와 연결아 된다. 그러나 바울이 문맥을 바꾸어 놓은 데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바울이 무장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송사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바울의 결론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변호자이시라고 그가 말했을경우보다 훨씬 더 그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송사하는 자가 형벌에 처해 달라고 끌고 온 죄수를 재판관이 완전 사면 한다고 선언하는 때에는 재판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버린다는 것을 그의 결론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있기 때문이다.  둘째 문구 34절에도 동일한 논증이 또한 적용된다. 신자들이 정죄를 받을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속량해 주심으로써 ,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조치해 놓으셨고. 또한 그가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심으로써 사망을 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가리위 주시고 사(敎)해 주심으로 해서 죄가 전혀 문제되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바울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논증의 요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나아갈 때에 유효한 구제책으로 말미암아 공포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시종일관하여 진술했던대로,여기서 유의할 점은 바울에 의하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하나님의 사형 선고를 면제받음으로 해서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단지 의미한다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이것을 입증하는 데에는 하무런 어려움이 없다.  바울은 본 구절에서 하나의 명제를 무효화시키고 있다. 즉,  죄를 면해 주는 것과 송사하는 것은 반대되는 명제들이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나·우리에게 불리한 송사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실 것은, 그가 우리에게 진 모든 죄의 책임을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확실히, 마귀는 모든 경건한 자들을 송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자체와 경건한 자들 자신의 양심도 그들을 책망한다. 그러나 이 것들 중에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그들을 의롭다 하시는 재판관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대적자도 우리의 구원을 뒤흔들 수 가 없으며. 더구나 파괴할 수는 전혀 없다.  바울은 또한 그들을 ‘택하산자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자기 자신도 그 들의 수에 들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가 그같은 지식을 갖게 된 것은, 어떤 궤변론자들이 거짓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특별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경건한 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지각력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택함받은 자들에 대하여 사용된 진술은, 바울의 예를 따라, 모든 경건한 자들의 경우도 자신들에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가 선택을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으로 간주하여 언급하지 않고 . 덮어 두어버렸다고 하면, 이 선택 교리는 아무런 열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생기(生氣)가 없는 교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건한 자들이 적용해 야 할 어 떤 것을 바울이 여기서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소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우리가 받은 부르심을 검토하도록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임에 틀림없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 . 재판관이 무죄를 선고하는 때에는 아무도 소송에서 성공할 수가 없는 것처럼, 율법이 충족되고 죄값이 이미 지불되어 버린 경우에는 아무런 정죄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을 한번에 받으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그가 우리를 대신하였노라고 고백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후로 우리를 정죄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 자신을 다시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망을 정복 하시는 자로 오셨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다. 바울은 또한 덧붙여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지금 앉아 계신다고 하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의 뜻은, 그가 에베소서 1 : 20 에서 말한 대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며. 만물을 지배하는 권세와 능력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보호하는 영원한 변호자와 대언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로 보건대,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를 정죄하고자 하는 경우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효로 만들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비교할 수 없는 능력과, 그같은 능력을 가지고 그에게 주신 최고의 권위에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된다. 마귀와 사망과 죄와 지옥의 문들에 대하여 능히 승리할 수 있는 이 위대한 확신이 모든 경건한 자들의 심령 속에 깊이 심어져야 하는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고, 성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양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불확실성을 운운하는 스콜라주의적인 교리처럽 유독하고 파괴적인 개념은 없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바울이 이같은 명백한 말씀을 부언할 팔요가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신적 위업으로 인하여 우리가 두려움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높으신 보좌에서 그의 발 아래 만물을 복종시키시지만, 바울은 그를 중보자로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의 임재를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어 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주 친절하게 자신에게로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 하여 대언자로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이 대언을 우리의 육신적으로 판단해서 안되는 것은, 그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벌려 가련하게 성부 하나님께 애원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해 주시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 하시어 —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대언을 대신하는 것임 一성부 앞에 계속적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그의 생기있는 기도가 성부를 화목케하고 우리의 소원을 성부께서 기꺼이 들어주시게 하는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옳은 것이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바울은 이제 이같은 안전감을 더욱 넓게 저 차원적인 것들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신적 자비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가장 절박한 환난 가운데서도 설 수가 있댜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같은 환난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크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 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나 그같은 환난들이 주어진 목적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더 나온 삶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와 비슷한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종류의 오류들이 마음에서 일소되는 때에는, 쉽게 마음이 가라앉아 평온해질 것이다. 이 말씀들의 뜻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간에, 자기의 사랑으로 우리를 한번 품어주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신앙으로 우리가 굳게 서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을 단지 말하지 않고, 그가 증거하고 있는 그 사랑에 대한 지식과 생기있는 의식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만개하여, 우리의 환난의 어두음 속에서 늘 빛을 발하기를 소원하고 있다.  구름이 비록 그것들로 인하여 태양을 똑똑하게 볼 수는 없게 되지만, 태양의 빛을 우리에게서 완전하게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두음을 통하여 그의 은혜의 햇살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그리하여 어떠한 시험에도 우리가 압도당하여 절망하지 않게 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은 날개를 달고서 훨훨 날아서, 모든 장애물들을 뚫고 하늘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역경이란, 그 자체만을 놓고 생 각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용서와 화목이 그것에 선행했을 때,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그가 결코 그의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형벌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강권하여 회개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목표임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의 자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성부께서 이처럽 자기의 연민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바울이 이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그리스도의 은혜의 햇살 안에서 성부 하나님의 평화로운 모습을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은 아주 잘한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때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는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역경에 의해서도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마치 바울이 무적의 용기를 갖도록 우리를 무장시키려고 하기나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수동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같은 그릇된 해석은 전체 문맥으로 보아 쉽게 반증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또한 이 사랑에 대해서 더욱 명확한 정의를 내리어 모든 의심을 곧장 제거 해 줄 것이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  바울이 바로 앞 문구에서 남성 대명사(누가 )를 사용한 것은 은연 중에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중성 대명사를 사용하여 "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생물적인 것 들을 의인화시킨 것은 우리의 신앙을 뒤흔드는 여러 종류의 시험들이 있는 바 그 많은 시험이라고 하는 투사들과 겨루어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합이었다· 환난,  곤고, 핍박 등 이 세가지의 시험 들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환난'은 모든 종류의 고통이나 손실을 포합하지만, '곤고’는 대면적으로 느끼는 것으로서, 곤경을 당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롯이 당한 불안과 걱정이 그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로 하여금 정조를 팔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 룻은 자기의 딸들로 하여금 타락하도록 해야만 했었는데, 이는 그들이 곤경과 난국에 처했을 때 아무런 피할 길이 전혀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핍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건치 못한 자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괴롭힘을 받는 폭력을 일컫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4 : 8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곤경에 처하여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본문의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바 그 진의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근심, 걱정도 없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에서 또한 나타나 있는 대로, 그들이 그같은 근심 걱정에서 건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6. 기록된 바……" ; 이 인용 귀철은 지금 논의 중에 있는 본 주제에 관 해서 아주 중요하다· 바울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공포도 우리가 타락케 되는 이유가 결코 될 수 없으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것이 하 나님의 종들의 운명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 시편은 안티오커스 (Antiochus ) 폭정 하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비참한 고난을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 른다• 왜냐하면 단지 참 종교에 대한 증오십을 이유로하여 하나님을 예배 하는 자들을 그가 그처럼 찬인하계 학대하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전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연 약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자랑스런 말씀이 또한 청부되어 있다 내 생 각에는 특별히 이 접을 바울이 영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편 ( 시 44편 ) 에서 성도들이 그 당시 그들이 너무도 가혹하게 당하고 있었던 재난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먼저 그들이 무최하 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혔고, 그리고 너무도 많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눌 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경건치 못한 자들의 포학을 성 도들이 부당하게 당하도록 하는 것 이 주님 께 는 전 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갈은 일은 오 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어난다고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 령이 가르쳐 주고 있는 바에 의하만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합께 멸 하시는 것은 그의 의와 모순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창18:23). 오히려 괴롭히는 자들에게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자들에게는 안 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 다( 살후1 : 6, 9)_ 그리고나서 그들은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 고 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자들을 복있 다고 선언하셨다( 마5 : 10 ). 그들이 ‘종일 ( 終日)죽임을 당케 ' 된다고 하는 말은 사망이 그들을 위협함으로 해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111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알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늘 싸우나 이겨내게 된다는 것이다 .• 이기느니타'는 단어는 라탄어( . . superv,nc,mus ) 로는 별 로 사용 되지 않지만 바울이 사용한 그 단어를 그대로 살려 번역했다· 때때로 신 자들의 경우 주께서 그들을 너무 지나치게 괴롭히거나 굴욕을 당하계 하신 까닭에, 낙담하거나 완전히 실의에 빠져버린 듯하계 보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갈은 일이 ’ 그들에게 늘 있게 되는 것은 그들이 승리를 얻게 하기 위합에서이다· 하지만. 신자들로 하여금 이 무적의 능력의 근원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 해서, 바울은 앞서의 그의 말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후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손을 내 밀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을 분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하여 동일하게 또한 말하고 있다· 이 한마디의 말을 보아서도·우 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품고 있는 뜨거운 사랑을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 고 있지 않고,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부성(父性)의 은종 또 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 냐 이갈은 부성애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십령 속에 깊이 뿌리박계 되떤, 우리는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지옥에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가 있으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것 이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능력이나." ;  바울온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더욱 힘있게 우리에게 확신시카 주기 위해서, 이재 또한 과장법을'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J 말하기를 생명에 관한 것이나 사망에 관한 어떤 것이 섣사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메어넬」수 있는 것처럽 보일지라도, 그렇게 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천사 자신 들도, 비록 그들이 이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해 (害)를 끼칠 수가 없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천사들이란 부리는 영들로서, 텍함 받은 자들의 구원을-위하여 택정된 존재들 (히 l•: 14)이라는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킬:라디아서 I:18 에서처럽,· 일어날 가망성이 없는 것을 가지고 여기서 논증하고 있기 때문 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영광과-바교할 때 모든 것이 우리 눈에 전혀 무가치하게 보여야 한다는」점이다. 왜니냐하면 하나님의 전리를1 옹호하기 위해서라면/천사들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까지 도 정 당하기 때문이 다 .• 권세자들 '과 ‘능력 ' 또한 천사들을 의 미 하는대, 그들이 신적 능력의 으뜸되는 도구들이기에 그렇게 이름지어전 것이다. 이 두 마디의 말이 첨부된 것은, ‘천사들'이라는 단어가 너무 시원찮게 들리 게 될 경우, 더욱 강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 천사들 이나, 아무 다른 높은 능력들이라도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는 번역이 며 좋을 듯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언급할 때에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  비록 바울이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여 말하 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환난의 기간이 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온 혜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사실상 단언하고 있다. 이 말씀을 첨 부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악들을 인하여 느끼는 술품 뿐만 아니 라, 철박한 위험들로 인하여 우리가 당황하게 될 수 있는 두 러움과 걱정과 더불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악의 세력들이 아무리 오래 버 티고서 우리를 괴롭힐지 라도, 우리 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그것에 의해서 결코 파괴되지 않 는다는 것을 확신하여 아무 영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귀절의 말씀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학자들의 주장과는 분명히 모순된 다. 그들은 어리석계 주장하기를, 특별 계시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 도의 최종의 견인을 확신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이 특별 계시는 아주 희 귀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갈은 교리는 전적으로 신앙을 파괴하며, 그리고 만일 신앙이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까지 미치지 못한다고2할 것 같으면, 그것은 확실히 무용지물(無用之物)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욘 반대 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주 예수의 달까지 그것율성 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 ,1 I

 

"39.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 율 수 없으리라." ;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매는 ‘줄'이기때문 에끊을 수가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저 크게 기뻐하 지는 사랑하는^아들이시다(마 3: 17).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앙아 접붙임을 받게 되면,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시 는 하 나님의 확고하고 지철줄 모르는 사랑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바 울은이제 위에서보다는 훨씬 더 명백하계 여기서 사랑의 근원아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훌러 내려 임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