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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롬9:18)

1. 성경 (롬 9:14 ~1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4)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5)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6)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7)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육신에 속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듣게 될 때 필시(必是) 즉시로 복잡한 의문들이 생겨나 심란해진 나머지, 하나님께 해명해 달라고 졸라댄다. 그런 까닭에, 사도가 어떤 차원 높은 신비스런 문제를 다룰 때마다 그러하듯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을 많은 불합리한 생각들에 대해서 사도가 답변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은 많은 사소한 난제들로 인하여 넘어진다. 특별히 성경이 예정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을 들을 때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쳐나갈 수 없는 미궁(迷宮)이다. 그러나 사람의 호기심은 아주 끈질긴 까닭에 , 어떤 주재를 탐구하는 것이 위험하면 할수록, 더욱 더 무모하게 그렇게 해보려고 덤빈다.  그래서 예정 문제가 논의되게 되는 경우, 인간은 본연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수가 없는 까닭에. 즉시로 성급하게 깊은 바다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책이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 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까닭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만 않을 것 같으면, 예정에 관한 이 지식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거룩한 규칙으로 삼자. 주께서 그의 거룩한 입을 다물으시는 곳에서.  우리 또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주제들 이어서. 이같은 어리석은 의문들이 우리에게도 생겨날 것이 뻔하므로, 어떻게 그 의문들에 대하여 바울이 해답해 주고 있는가를 그에게서 들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 블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사람의 마음의 광기는 확실히 대단하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영안이 어두움을 인하여 자신을 비난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독자들의 기분율 상하게 하는 주제를 구하여 외도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따라서 모든 개인의 지위를 결정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듣는 순간에 그들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경건치 못한 의심에 대해 그는 논증하기 시작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생각해 내는 불의의 유형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야곱)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이면서도, 다른 한 사람(에서)은 간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같은 난재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전체 주재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처음 부분에서는 택함 받은 자를 다루고 있고, 둘째 부분에서는 유기된 자를 다루고 있다. 택함 받은 자의 경우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토록 했으나, 유기된 자의 경우에는 그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그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보는 생각이 가증스럽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서 택함받은 자에게나 유기된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혀 불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왜 유기하시는가 하는 이유를 오직 그의 작정에서만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이 구절의 말씀이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만일 두 사람간의 차이가 그들의 행위와 관련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바울이 하나님의 불의에 대한 이 문재를 논하려고 한 것은 전혀 헛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의 공로에 따라 다루시는 때에는 불의에 대한 아무런 의심이 생겨날리 없기 때문이 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은, 비록 이같은 예정 교리를 논하게 되면 필시 즉각적으로 사나운 반박과 지독한 욕설들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솔직하게 그리고 아무런 가식도 없이 그것을 소개하였다는 점이야말로,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의해서 그들 각자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되는 순간 화를 벌컥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성령의 지시를 받아 깨달은 것을 아주 명백하게 계속하여 선언한다.

 

이로 보건대. 교리상의 난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성령보다 더 분별력이 있는 체하는 자들의 위선은 감으로 꼴불견이다. 하나님께 아무런 허물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다만 고백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경건치 못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거나, 그들의 혀를 재갈 먹여 제 멋대로 지껄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 그들의 겸손과 절제는 칭찬받을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성령과 바울을 힐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주재넘는 짓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참된 교리가 아무리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교리를 고백하기를 경건한 교사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경건치 못한 자들이 어떠한 비방을 퍼부을지라도 그같은 비방을 반박할 수 있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홑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볼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 택함 받은 자들에 관한 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비난을 받으실리가 없는 것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 자기의 긍휼을 그들에게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여기서도 또한 불평할 이유들을 찾아내는데, 이는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푸시지 않는 그런 일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공로 없이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우대받는 것이 불합리게 보이기 때문에, 인간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며, 하나님께서 마치 부당하게 어떤 사람들에게 지나찬 은총을 베푼 것처럼 윽박자른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고 있는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첫째로, 바울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그가 알고 있는 교리를 결코 모호하게 말하거나 감추지 않고, 그것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한다. 둘째로, 그는 아무런 번거로움이 없이 그같은 교리가 귀에 거스르지 않게 되는이유들을 찾아내며, 공격적이고 성마른 반론들을 억누르는데 있어서 성경의 증거들을 재시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고 있다.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으신 것은,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를 궁홀히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바울의 변증은 얼핏 보아 온화한 맛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권위만으로도 충분하계 여기시며, 그래서 다른 아무의 변호도 그분에게는 필요치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권리의 옹호자가 되시는 것으로 바울은 만족해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가 온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당시에, 그가 주께로 부터 받은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고 하셨다(출33:19).  주께서 이같이 단언하여 말씀하신것은 그는 아무에게도 빛진 자가 아니요,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모든 것이 그의 자유로운 선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는 것이기에,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것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 끝으로,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나,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게 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뜻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이유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한번 긍휼을 베풀고자 작정한 자에게서 결코 나의 긍휼을 거두지 않을 것이며, 내가 사랑을 베풀기로 결정한 자에게 계속적으로 사랑을 베풀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최고의 원인을 자기 자신의 자발적인 작정에 둘리고 있으며, 동시에 그가 어떤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자기의 긍휼을 베풀 것을 작정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어휘를 정확하게 살펴보면, 모든 외적인 원인들이 배재되어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행동의 자유를 요구할 때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 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과도 갈다. 또한 관계대명사를:보면, 궁홀이 모든사람에게 무분별하게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라가 하나님의 선택을 외적인 원인들에 제한시키는 경우, 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구원의 유일한 참된 원인은 모세가 사용한 두 마디의 단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난' 이라는 단어는 ‘은총을 베풀다,  또는 ‘값없이 풍성하게 사랑을 베풀다' 를뜻하며 '라함' 이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를 뜻한다. 이처럼 바울은 그가 입증하고자 한 것, 즉 하나님의 긍휼은 값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얽매임이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베풀어진다고 하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알움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 암을도아니요." ; 바울온 우리가 받은 선택을 우리의 근면이나, 열심이나. 또는 노력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명백한 결론을 이 말씀에서 추론하고 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경우, 그들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그들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감동받아 택할 마음을 갖게될 만한 어떤 공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취해야 하는 단 하나의 견해는, 우리가 택함받은 자의 수(敬)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뜻이나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바울은 ‘애쓰다' 또는 ‘노력하다’라는 표현 대신에 ·달음박질하다’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같은 택함을 받으려고 원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생각하지 않은 자들을 거저 택하여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추리하기를, 우리에게는 택함받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하나님의 긍휼의 도움이 없이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하기보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배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얻기 위해 ‘원하거나' .달음박질 한다' 고 말하는 것이 생트집에 불과한 것은,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자가 택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나 달음박질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실로 하여 게으름을 피우거나 전혀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정죄받아 마땅하다. 비록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고취된 노력은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 속에 활기를 넣어 주시는 경우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이 소멸되지 않게 할 목적으로 하고, 또한 우리가 받은 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바라는 것과, 모든 것이 그에게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한편, 두렵고 떨림으로 힘써 우리의 구원을 추구해 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바울의 이갈은 주장을 궤변과 아주 무가치한 반론을 전개하여 반박하려고 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의 선택이 원하는 것이나 달음박질하는 것에만 달려있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 입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궤변을 효과적으로 빈틈없이 반박하였다. 만일 인간의 뜻이 선택의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함에 있어서,  그것이 부분적인 원인이요 유일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다른 한 편으로는 선택이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지 않고, 원하는 것과 달음박질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호 협력이 있는 경우에는 서로를 칭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같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자가당착(自家擔着)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으로 결정 짓고, 전혀 인간의 근면에 의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자.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들이 경건치 못한 자의 입장에서 말씀되어진 것으로 보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찬성 할 수 없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의가 선포되어 있는 성경의 구절을 하나님을 폭군이라고 비난할 목적으로 곡해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  또한 바울이 그의 대적들을 손쉽게 반박할 수 있었을 경우에, 그가 성경을 크계 경멸하여 다루었을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비밀을 그들 자신의 그릇된 판단에 의하여 평가하는 자들이 포착한 탈출의 수단이다. 그들의 엷고 부드러운 귀에는 이 교리가 너무도 거칠었기 때문에 사도에게 어울리는 말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굽히어 성령을 따라 순종함으로써 그들이 그들 자신의 지독한 거짓에 중독되지 아니했었다라고 하면 좋았을 뻔하였다.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 바울은 이제 두번째 부분인, 경건치 못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에 대해서 다룬다. 여기에는 다소 합리적이지 못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자를 유기하심에 있어서 그가 왜 전혀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와 공평함이 기이하다는 것을 더욱 더 힘써 명백하게 바울은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기 9:16에서 인용하여 증명 구절로 삼았다. 그 구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바로를 일으켜 세웠다고 하나님이 선포하고 계신다. 바로는 완악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대적하기를 힘썼다. 그러나 바로가 연약하여 결국 굴복하고마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팔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것을 보여줄 목적에서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셨던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팔을 당해낼 수가 없으며, 더군다나 그것을 꺾을 수는 도저히 없다. 주께서 바로의 경우에서 보여주시고자 한 실례에 유의하기 바란다.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바로를 멸망에 이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 예정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온밀한 계획과 관련이 있다. 둘째는 이 예정의 목적인데, 이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점을 바울은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같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지게 하는 원인이라고 할 것 갈으면, 하나님을 불의하시다고 비난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많은 주석자들이 본문 말씀에 있는 귀에 거스르는 요소를 국소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본문의 의미를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히브리어에서  ‘내가 일으켜 세웠다’ 라는 표현이 '내가 너를 택정하였다?' 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유의해 두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바로가 아무리 완악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의 포악함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그 포악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장중에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실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바로가 포악하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단언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는대로, 바로를 당분간 살아남아 있게 하셨던  것은, 여기에 논의된 것이 처음에 일어났던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많은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목적한 바를 제지하기도 하고 그들의 행동을 촉진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바로를 이 땅에 내보내셨다는 것과 그의 성품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세웠다' 라는 말씀은 이 해석과 잘 부합이 된다. 그러나 어떤 보편적이고 혼돈된 자극에 의하여 바로가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무모하게 그 포악한 행동을 취하게 된 것으로 아무도 결코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바로의 행위의 특별한 원인, 즉 의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무엇을 행하려고 하고 있었던가를 알고 계셨었으나, 이 목적을 위해서 그를 일부러 택하여 세우셨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임의로 자진하여 나서서, 유기된 자------하나님께서는 유기된 자를 통해서 그 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시기를 원하신다-------가 하나님의 섭리의 은밀한 원천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선언하시어 사전에 인간적인 반론을 봉쇄하고 계시기 때문에, 마치 그가 사유를 제시할 의무가 있기나 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무익하다. ,.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 ;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에 관한 결과가 여기에 말씀되어 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사도가 단독으로 내린 결론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가 즉각적으로 그의 대적과 변론을 벌이고, 반대편에서 제안할 가능성이 있는 반론들을 재시하기 시작한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에서 방금 제시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뜻을 따라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그의 긍휼로 은총을 베푸시고, 그가 기뻐 하시는 자에 대해서 그의 준엄한 심판을 선언하신다고 바울은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목적하는 바는 우리가  다음과 갈은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데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멸망하도록 눈을 어둡게 하시기를 좋게 여기신 듯 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택함 받은 자와 유기된 자간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차이를 인하여 우리 마음이 만족해 하며, 하나님의 뜻 이상의 다른 원인을 문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에게와  ‘하고자 하시는자를' 이라는 말씀들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이 이상을 넘어가지 않도록.하고 있다.   ‘강팍케 한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되는 때에는, 허용 (몇몇 연약한\주석가들이'·그렇게 해석한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 진노의 행위를 의미한다. 유기된 자를 어둡게 하는데 기여하는 모든 외적 상황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이다. 사단도 강재적인 힘을 가지고 내적으로 역사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는 점에서 하나님 의 사역자(God':s minister)이다. 그러므로 예지에 관하여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론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치 않는 자의 멸망을 주님께서 예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하여 작정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솔로몬도 경건치 못한 자의 멸망이 미리 알려 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특별히 멸망할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참 1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