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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9:8)

1. 성경 (롬9:1 ~ 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1-2)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4)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5)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6)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7)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8)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9)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0)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1)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2)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3)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이 장에서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서게 할 수도 있었던 범죄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율법의 언약에 의해 약속되었다 一그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몹시 미워했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약속에 아무런 진리가 없거나, 아니면 바울이 전파한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약속되었던 주님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던가 이 둘 중에 하나가 결론 지어졌던 것 같다. 바울은 이 두 가지 난제들에 대해 곧 바로 뒤이어 훌륭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유대인들을 향한 쓰라린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만일 그들에게 양보함으로 해서 복음을 손상시키는 것이 될 경우에는, 그는 한치 (寸)도 그들에게 양보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명예를 결코 떨어뜨리지 않는 방향에서 그들에게 그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본 주제를 논하고 있는 까닭에 그의 논술(論述)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도 그는 그가 앞에서 이미 그의 새로운 설명을 언급했기라도 한것처럼 그것을 시작하고 있다. 그가 주제를 이같이 갑작스럽게 바꾸어 새로운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갈은 이유 때문이다. 그는 그가 논하고 있었던 교리에 관한 주제를 다 다루고 나서, 그의 시선을 유대인들에게로 돌렸을 때에,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그들의 불신앙을 보고서 깜짝 놀란 나머지, 그가 앞서 이미 다루어 왔던 주제를 다루고 있기라도 한 것처럽 , 갑자기 항의를 터뜨린 것이다.  만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라고 하면, 어떻게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완악하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갖게 되지 않을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하여 지금까지 그가 말했던 모든 것들을 인하여 유대인들이 그에 대하여 굉장한 증오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같은 거침 돌로 인하여 복음의 전도가 방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거침돌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대체로 바울은 자기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되고 있었다. 그래서 믿음 의 형제들마저도 그가 모세를 저버리도록 가르치고 있다는 의심을 어느정 도 갖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그가 심중에 두고 있는 주제에 관하 여 논쟁을 벌이기 전에, 서론을 도입하여 그의 독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 고 있는 것이다. 이 서론 부분에서 그는 그가 유대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하는 그릇된 형의에서 자신을 풀려나게 한다.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맹세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맹세를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유대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인하여 그의 주장이 거 의 아무런 신용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찹 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 라는 표현의 말씀은 ‘그리스도로 알미 암아’ 를 뜻한 다. '거짓말을 아니하노라'고 첨부함으로써, 그가 거짓이나 속임이 없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이 말씀에 의하여 그는 그의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하여 세운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러다가 자기가 뜻하고 있는 것을 증거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성령의 이름을 삽입해 넣온 것은,그에게는 논쟁을 벌이고 싶은 부패한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영의 인도와 지시를 받아 그리스도의 대의 (大義)를 간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다 충분하게 증거 할 목적에서였다. 사람들은 육신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속일 수는 없지만, 그들은 혼히 알 고서도 고의적으로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는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하는 것은, 그 단어의 본래의 의미로 보면, 의심쩍은 것을 확증케 하고, 동시에 만일 우리가 말한 것이 거짓인 경우 그의 심판에 복종하기 위해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 세우는 것을 뜻한다.

 

"2. 내게 큰 근십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  바울이 그가 심중에 두고 있는 주제를 밝히기 전에 그의 논술을 갑작스럽게 종결지온 것온 훌륭한 솜씨이다. 유대 민족의 멸망을 공공연하게 언급하는것은 아직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첨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온,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가 한층 더 깊온 슬픔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생략법이 연민의 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진실함을 보다 충분하게 확증한 연후에는, 그의 고통의 원인을 곧 당장 진술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하여 성취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유대인의 멸망을 보고서 바울이 몹시 심하게 느낀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배 울 수 있는 것은, 비록 방탕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이갈이 멸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하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방탕한 사람들의 타락을 보고서도 슬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지고 이갈온 두 가지의 감정들을 능히 가질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신 자들의 멸망을 보고서도 기꺼이 참을 수가 있지마는, 생각을 바꾸어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는, 죄 악 중에 사는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작정을 거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괴로움에 대한 금욕적인 무관심과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자들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 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바울은 그가 지금 한 이 말씀 이상으로 더 열정적으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사랑으로서, 친구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바울이 첨부한 `아나테마'(저주)라는 단어는 그가 이생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에게서' 라고 한 말을 보아서 그가 그같은 의미로 `아나테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아나데마’는 끊어지는 것을 일컫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임박해 있는 것으로 그가 알고 있는 정죄를 자신에게 주저함이 없이 요구한 것은 가장 뜨거운 사랑의 증거인 것이다.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바울의 열렬한 가슴은 불타올라 유대인들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여타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그의 기도에 덧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택을 도외시하고서, 유대인의 구원에만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바울의 이 기도가 적법하고 바람직한 것이겠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갈이 해결될 수가 있다."이것은 한(限)이 없는 사랑이기에 계속되어 죽음에까지도 이르는 법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결코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바울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사랑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순전히 선물로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많은 특전(特典)들을 베풀어 주셨음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물을 그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썩히우는 것을 볼 때 그는 큰 슬픔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그는 그의 마음이 착잡한 상태에서 이러한 국단적인 기도를 드렸다. 그러기에 바울이 이같은 말씀들을 말한 것은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 바울이 관심을 두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로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하나님의·영광을 위한 열심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직껏 바울의 주된 요지(要旨)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을 생각함에 있어서 나머지 인류와 그들을 구별지어 주는 많은 현저한 특징들을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연약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아주 높이 추어올려 놓았다.  그러기에 만일 그들이 전락할 것 갈으면,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과 진리가 또한 세상에서 약해져 버릴 것이다.  또한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한, 영원히 확고하게 서 있을(시 72 : 7) 그 언약이 무효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기에 온 세계가 격변하여 뒤집힐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폐기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인간들을 단순히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사실 온몸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한 지체가 멸망하는 것이 더 낫지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선민의 성격과 특질이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그가 간주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적합한 곳에서 곧 보게 될 것이지만 문맥으로 보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골육의 친척"이라는 말은 전혀 새로운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문의 뜻을 부연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첫째로, 유대인들과 다룰 기회를 의도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바울이 찾고 있었던 것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골육(骨肉)이 이처럽 끔찍스럽게 멸망해 가는 것을 보고서도 애절 마음을 갖지 않을 만큼 인간성이 매마르지 않았다는 점을 년지시 암시하고 있다. _

 

둘째로는, 그가 전파하는 자로서 복음이 전하였던 시온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당연하였기 때문에 , 그가 자기 민족을 장황하게 힘주어 칭찬한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골육’이라는 표현은 내 생각으로는 유대인들을 비방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신뢰하도록 할 목적으로 첨부되어 있다. 비록 유대인들은 바울과 의절(義絶)해 버렸지만. 그 는 자기의 혈통이 그 민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비록 가지들은 시들어 버렸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뿌리는 계속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나테마’라는 단어에 대한 부대우스(Budaeus)의 해석은 ‘크리소스톰'과 상반 되는데, 그는 '아 나테 마/저 주' 를  '아나 테 -마/ 현물'과 혼동하고 있다.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 바울은 이제 그 자신이 죽음으로 해서 자기 백성이 구속(救讀)될 수 있기를 바랄 정도로 그들의 멸망이 그에게 그토록 고통을 주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이었다. 본문에는 관계 대명사가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 대신에 쓰여 있다. 그런데 이같은 근심으로 인하여 모세도 괴로와하여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기를 바랐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거룩하고 택함 받은 백성이 전멸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출 32 :32).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 인간적인 애정외에도 그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데에는 다른 차원 높은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천한 지위에 있는 인간과 구별되게 하는 고귀한 특권을 주셨다. 그들의 지위를 이갈이 높여준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주신 중거들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처럼 사랑스런 말로 말하는 것이 다. 유대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이같은 은혜들로 말미암아 존귀를 그들이 배은망덕함으로 해서 받을 만한 자격이 없게 되었지만, 바울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해주고 있다. 이 점에서 바울이 우리에제 가르쳐 주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을 악용하는 자들이 엄청난 악평외에는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지만, 경건치 못한 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을 손상시킨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높임을 받는 일과 존중히 여김을 받는 일에 있어서 결코 소홀히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자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사들을 우리가 멸시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또한 그 반대로 우리가 그들을 친절하게 존중해 줌으로 해서 그들의 자만심을 부채질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은 물론, 아첨하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특권을 인정해 주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곧 이어서 선언한다. 더우기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들을 칭찬하는 말 가운데 바울이 포함시켜 놓은 것은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기도할때에, 오히려 큰 축복보다는, 그들이 자기의 이름으로 칭함받게 되기를 간구 했었기 때문이다(창 48 :16)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 ; 바울의 전체 강화(講話)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비록 유대인들이 그들의 변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신성모독적인 것이지만, 로마서3:3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그들 가운데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비록 그들이 불신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불신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성이 헛되게 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전체 백성들 중에서 얼마간의 남은 자들을 종자(種子)로 남겨 두셨기 때문만 아니라, ‘교회 '라고 하는 이름이 그들에게 상속권이 있음으로 해서 여전히 붙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이 모든 특권들을 상실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불리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변질된 신앙으로 인하여 복음의 위엄을 감소시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받아야 마땅한 것들(형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복음이 하늘의 샘에서, 하나님의 지성소에서, 그리고 선택받은 민족에게서 이방인들에게 흘러내려 왔다는 것을 이방인들이 충분히 확신하게 되었을 때까지 유대인들의 부정과 수치스러운 행위를 겹겹으로 가리워 주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자주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거하신대로, 다른 모든 민족들을 그가 간과(看過)해 버리시고, 유대 민족을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그들을 자기의 자녀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아들들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그들을 자기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시는가 하면. 어떤 때는 그의 사랑하는 자라고 칭하신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출애굽기4:22 이하에서 말씀 하시기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섭기계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라고 하셨고. 또한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31:9),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 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 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홀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바울이 이갈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해 그가 베푼 관용을 드러내 보이려는데 있다기 보다는, 하늘의 기업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양자의 권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영광’은 주님께서 각종의 수단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 위에 그 백성을 뛰어나게 해주신 그 탁월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많은 표적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법궤를 통해서 그가 임재하신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는 그 법궤로부터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옹답해 주셨으며, 그의 능력을 나타내어 그들을 도우셨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법궤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웠다(삼상 4 : 22). 바울이 여기서 ‘언약들'과 ‘약속들'을 구별하여 사용했으므로, 다음과 갈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안다.

 

'연약'이란 명백하고 엄숙한 말로 표현되고, 상호간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는 바,예를들면, 아브라함과 맺어전 언약이 있다. 그러나 약속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옛 백성과 언약을 한번 맺으셨으면, 그는 수시로 새로운 약속들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다.  이로 보건대, 약속들의 유일한 근거가 언약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특별한 도움이 ‘선택 '이라고 하는 유일한 원천(源泉)에서 흘러나오는 것과도 갈다. 그리고 ‘율법’이란 그 언약을 단지 새롭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점을 보다 충분하게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 ‘율법을 세우신 것' 이 율법으로 명한 것들에 특별히 국한되어야 할 것 같다.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입법자로 모시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영예이다. 만일 다른 백성들이 솔론(Solon)이나 리쿠르구스( Lycurgus ) (역자주 : 솔론온 기원전 7세기의 아테네의 입법자이고, 리쿠르구스는 기원전 9세기의 스파르타의 입법자임 )와 같은 입법자들을 자랑할 것 같으면,  율법의 경우는 더욱 더 자랑할 만하지 않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신명기 4:32 이하에서 읽어 볼 수가 있다.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한 '예배' 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위해 규정된 의식에 관한 율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법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까닭에 적법한 것으로 간주 되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은 모두가 다 종교를 더럽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인 구약 성도들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 다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기를,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창 l7: 4), 그들의 자녀들에게 수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같은 혈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성별된 생활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에는 혈통 그 자체만으로는 헛되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이는 예언서들에 있는 많은 말씀들 중에 특별히 사사기 1 :11과  60:1, 그리고 예레미야 7:4이 보여주는 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서 바로 그와 같은 사례를 보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상들이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여 어느 정도 존귀케 됨으로 해서 하나님이 이같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신 까닭에 , 바울이 조상들의 혈통을 유대인들의 특권으로 간주한 것은 옳은 일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조상들의 혈통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들로 불리우고 있는것이다(행 3:25).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 ; 그리스도께서 조상들의 혈통을 물려 받았다는 것만을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 마냥. 이 혈통 문제를 조상들과만 관련지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울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찬양하여 말함으로써 그들의 탁월성에 대한 그의 진술을 결론짓는데 있었다. 세상의 구주되시는 분과 갈은 혈육에 속 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구주께서 우리의 육체를 입으시어 우리 가운데 거함으로 해서 온 인류가 영예를 입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가 밀접한 인척 관계를 맺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경우는 얼마나 더욱 영예를 입게 된 것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늘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 관계성이 만일  경건이 없다고 하면, 결코 유익 할 것이 없고 오히려 더 큰 정죄에 이르게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읽을 수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있는 두 가지의 성질들을 구분하되 또한 바로 그 분 안에서 양성을 결합시켜 놓고 있다.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그가 참 인간임을 선언하고 있다.  육신으로 하면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육신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여기서 ‘인성’과 '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들에게서 나셨지만,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그는 '양성'을 서로 결합해 놓고 있는것이다. 또 한가지, 바울이 전술한 이같은 찬양이 오직 한 분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구절(딤전 1 :17)에서 바울은 한분 하 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같은 분명한 증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재거할 목적 으로 이 문구를 나머지 문맥과 끊어서 생각하는 것은, 대낮에 암흑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소행과도 갈은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아주 분명 한 바,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들에게 나셨으나,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바울이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난관에 부딪히자,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본을 보여 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서 그들도 또한 그 영광을 바라보도록 할 목적에서였다.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바울은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한 까닭에 격앙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가르쳐 깨우치고 싶은 마음이 되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의 뼈에 사무친 고민을 억제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자기 백성의 멸망을 애통해 한 것온 하나님께서 아브라합과 맺으셨던 언약이 페해졌다는 어리석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잃게 되는 때에는 반드시 언약이 폐지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갈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선수를 써서, 유대인들의 영안(靈眼)이 아무리 어두워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그러기에 언약의 진리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헬라어 원문이 '호이온 테'로 되어있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질 수. 없도다’라고 번역하여 읽는다· 이문(異文) (reading)은 어떤 사본에서도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나는 일반적인 이문인, "폐하여진 것 갈지 않도다”를 더 좋게 여겨 다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내가 내 민족의 멸망을 슬퍼한다고 해서 옛날 아 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폐기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바울의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아브라함의 기업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구별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어떤 사람들의 허물로 인하여 그 언약이 폐하여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떠한 조건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기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셨는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 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그의 혈통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은, 그 약속이 예의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 공되어 있기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들이 아브라함과 맺어전 언약의 후사들 또는 성경에 진술되어 있는 대로,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호칭되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의 경우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이 할례의 표징으로 보증되는 것이 주의 뜻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할례를 무시하여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 할례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그들에게 행하여진 것이므로, 그들이 다같이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갈은 입장을 우리가 주장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 사도는 앞에서 전술하기를, 비록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언약들이 그들에게 있었다고했다(3:3). 사도행전-3:25에서, 베드로가그들을" 언약의 자손들"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선지자들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약속의 자녀'타는 호칭이 그· 약 속의 능력과 효력이 발견되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기를 비록 주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할지라도, 극소수만이 그 언약을 믿는 신앙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하나남의 자녀들인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에스겔 16장에서 그들이 모두 그의 자녀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온 백성이 하나님의 기업이요, 특별한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구원의 약속이 그들에게 제공되었고 할례의 표징으로 확증되었기에, 그들이 주님에 의해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의 양자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하여 전혀 양자의 특전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약속의 성취와 관련하여 그들 가운데 차이가 생겨나계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많은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지 아니한 것을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선택에는 포함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을, 오히려 말을 바꾸어 다음과 갈이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반적으로 선택하신 것(general election)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스스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단일 민족과 생명의 언약을 맺으시는 중에 보여주신 그의 겸양의 사랑은 분에 넘치는 긍휼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은혜가 두번째 선택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두번째 선택은 그 민족의 일부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자녀 가 아니 라”고 한 바울의 표현은 파로노마시아(paronomasia ; 말만 조금 바꾸어서 하는 화법)라고 하는 화법이다· 그는 첫 구절에서 모든 후손들을 포함시키고 있으나, 둘째 구절에서는 참 아들들만을 언급하고 있 는데, 이 참 아들들은 그들의 지위에서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다. 

 

"7.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 바울은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 외적 부르심을 파기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 구절의 말씀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명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확정하고 완성하는데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이갈은 명제들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아브라함의 혈육의 후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과, 언약의 조건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나서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그는 가장 적합한 예를 들고 있다· 만약 그 언약에서 탈락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후손들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그 특권을 얻은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었고 언약도 새롭게 주어져 있을 동안에 아브라함의 처음 두 아들들 중에 하나(에서 )가 벌써 후손의 계통에서 이탈된 사실을 보만 그의 먼 후손들의 경우에는 이같은 이탈현상이 얼마나 더 심하게 일어났겠는가? 이 예언은 창세기 17 :20과  21:12에서 인용해 온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이스마엘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으나, 약속된 축복이 임할 자가 따로 있으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대답해 주시고 있다.  이로 보건데 일정 수의 사람들이 특별한 특혜를 받아 서민들 중에서 선택되어 있다는 것과, 이 사람들에게서 일반수양(一般 收養: general adoption )이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8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가 입증하고자 계획한 것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진술을 그 예언의 말씀에서 이제 연역해내고 있다. 만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씨로 여김을 받고, 이스마엘에게서 난 자는 씨로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리고 이삭은 이스마엘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고 하면, 육신의 아들들이 다 씨로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이 어떤 아들들에게서만 특별한 방법으로 성취되며, 그 약속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고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틀림 없다. 육신의 혈통 이상의 장점 (virtue )을 갖고 있지 못하는 자들을 바울은 ‘육신의 자녀'라고 일컫고 있다.  한편 주님에 의하여 특별히 인침을 받은 자들은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 성경에서 또 하나의 다른 중거를 들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성경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주께서 그가 오시라고'하신 것과 '사라 가 아브라합에게 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자기의 축복이 아직껏 베풀어지지 않았고, 장래에 임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 해 주셨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들을 다 진술하고 나서 그렇게 한·원인을 밝히게 된다·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 잉태하였는데.," ; 이 장에 보면 몇 몇 구절들이 단축형을 사용하여 표현되어 있는데, 본 구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주동사(主動詞)에 이르기 전에 중간에서 멈추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갈다· 약속의 기업에 관한 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삭과 이스마엘)에게서 이같은 차이(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를 찾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곱과 에서에게서는 보다 더욱 분명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이삭과 이스마엘)에는, 하나(이스마엘)가 여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들의 신분이 같지 아니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들은 사실 쌍동이였다. 그렇지만 하나는 주님에 의해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택함을 받았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육신의 자녀들에게서 구별없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알게 해주신 그 사람들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까닭에 , 나는, 에라스무스가 한 것처럼 중성 대명사보다는 남성으로 이해하는 편을 택하고 싶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계획이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리브가에게도 또한 계시되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녀는 쌍동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 바울은 이제 그의 논증을 한 단계 진 일보(進一步)시키고 있는데, 이는 이갈은 차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았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함이다· 그는 이갈은 차이가 생겨 난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그가 앞 서 언급하였었다. 즉, 비록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이 할례을 받음으로써 그 언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서 다 유효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들을 누리는 그 들이 약속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갈은 차이가 생겨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앞에서는 침묵하여 지나쳐 왔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연막을 쳐 살짝 암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모든 원인이 하나님의 공로없이 베푸는 선택에서 기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선택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경건한 자들이 구원받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이외의 다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되며, 유기된 자들이 멸망 받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엄정(嚴正) 이외의 다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된다. 즉, 경건한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버림받은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첫번째 진술은 다음과 같다. '언약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를 받도록 예정하심으로 해서, 그 민족에 속한 사람들 간에도 구별이 있게 되었다· 두번째 진술은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선택의 유일한 기초는 오칙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의. 긍휼일 뿐이며, 이 선택은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포함하되,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세째 진술은, ‘공로 없이 거저 선택함에 있어서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갈은 은혜를 동등하게 필연적으로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으시다.  오히려, 그는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간과하시고,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선택하신다' 바울은 이 모든 진술들을 한 구절에 간략하게 포함시키고 있으나, 뒤에 가서는 나머지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식들 간에 차별을 두실 때에, 아직 있지도 않는 행위들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실 수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들의 행위의 공로를 따라서 그들을 구별해서는 안된다는 하동의 이유가 없다 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장차 행할 행위로 미루어서 자기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미리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이들은 바울보다 통찰력이 무딘 자들이요,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야 하는 신학의 기본 원리에도 어긋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 나타난 대로, 인간의 부패한 성질에서 자기의 은총을 받을 만한 아무 것도 찾으실 수가 없다는 원리에 맞지가 않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아무도 그 때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했다고 바울이 말하는 때에, 그들이 둘 다 아담의 자손들이요, 본질 상 죄인들이며, 한 톨의 의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하는 바울의 가정(假定)을 우리가 또한 덧붙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바가 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궤변론자들이 바울의 단조로운 진술에 만족하지 않고, 경솔하게 다루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 바울이 그들이 주장하는 논증들을 결코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신앙의 기초 원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밝히고자 했을 뿐이다.   

 

더우기 온 인류에게 퍼져 있는 죄의 오염은 그것이 악행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 자체로서도 정죄 당하기 충분하다.  이로 보건데 에서가 버림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서의 지위가 어떤 악행이나 허물 때문에 악화된 것처럼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미덕과 마찬가지로 죄들도 배제시켰던 것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선행이나 악행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낸 것이다.  유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저주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이 같은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갖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오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만을 의지하계 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택과 유기의 정당한 원인이 그 자신의 뜻에 있다는 교리를 확정해 놓기 위함이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들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만일행위가 선택 이전에 존재했다고 하면 '보상이 행위와 관련되도록' 이라고 바울이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행위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그 자신의 선하신 뜻에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 주제에 관하여 분쟁의 여지가 전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택하심을 따라’라는 구문과,‘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는 구문을덧붙임 으로 해서 모든 의심을 일소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 문맥을 좀더 면밀하게 생각해 보자,  만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는 버림을 받고 다론 하나는 선택을 받음으로 써, 택하십을 따라 하나님의 작정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하떤, 그들간에 있 는 차이의 원인을 그들의 행위의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 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또한 행위로 말미 암지 않고 오칙 부르시는 이 에게로 말미암아’라고 덧붙여 말한 것온,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칙 부읍i 심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체 행위에 대하여 고려하는 것을 배제하고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의 불변성은 오 직 하나님의 작정에 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공로는 전혀 소용이 없고, 다만 그것들은 사망을 초래할 분이다· 우리에게는 택함을 받을 만한 공로나 자격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유력할 뿐이다• 하나님 께서는 그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미리 아시는 까닭 에 선택하기도 하시고 유기하기도 하신다고 하는 교리도 그릇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된다·

 

"12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이삭의 아들들이 아직 모태에 있을 때, 주께서 그들을 구별하신 사실에 유의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에게 응한 것이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뜻은 작은 아들에게는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었고, 큰 아들에게는 그것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 약속의 말씀은 장차 상속권과 관련된 것이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자기의 어떤 더 큰 뜻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야곱이 육신적인 면에서 그의 장자권을 인하여 별다른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볼 때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오히려 그 장자권 때문에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기의 집과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비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그네 길에서 돌아올 때, 두렵고 자기의 생명이 남아 있을 것인가를 확신하지 못한 까닭에, 자기 형의 발에 꿇어 엎드려 자기의 허물을 용서해 줄 것을 비굴하게 간구했으며, 애서가 그에게 용서를 베풀어 줌으로 해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이로 보건데 야곱이 그의 형을 지배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는 형에게 애원하여 자기의 생명을 부지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장자권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십과 같으 니라·" ; 바울은 그가 현재 취급하고 있는 주제와 리브가에게 주어진 약속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더욱 강력한 증거를 들어 확증하고 있다.  야곱의 영적 지위는 지배하는 것이었는데 반하여 에서의 지위는 구속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의 애정을 통하여 이 같은 은총을 얻었으며, 그 자신의 공로에 의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이 말씀은 주께서 야곱에게 장자권을 부여해 주신 이유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이 구절은 말라기 1장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유대인들의 배은망덕함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기 전에,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고 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사랑의 근원을 덧붙여 말씀하셨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갈은 뜻이 있다. '내가 그를 그의 동생보다 더 낫게 한 특권이 무엇이 있었느냐?  아무 것도 전혀 없다.  그들의 권리는 동동하되, 다만 동생이 자연법에 따라 형에게 복종했어야 하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야곱을 택했고 에서는 버렸다.  오직 나의 긍홀에 의해서만 이렇게 된 것이며, 야곱의 행위에 무슨 공로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은 것은, 야곱의 후손에게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의 족속들은 내가 버렸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더 악한 것은, 이같은 은총을 회상하여 나의 위엄을 경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땅에 속한 축복들을 또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축복들은 그의 자비의 상징으로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