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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30)

1. 성경 (롬8:28 ~ 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8)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9)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

2. 묵상 (Calvin 선생의 주석)

"28 . 우리가 알거니와……" ; 바울은 그가 위에서 진술한 것들로부터 금생의 고통들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이제 결론 짓고 있다. 바울이 이유 불변화사를 사용한 것은 어떤 반론을 제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부사들을 아무 차별없이 사용 하는데 아주 익숙해 있다. 그러나 한편 그의 결론은 반론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서 내린 것이다. 육신의 판단에 의하면, 우리의 환난아 늘 갈은 방식으로 꼬리를 물고 계속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전혀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온,  이갈온 반론을 예상하고서 말하가를,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온 아니지만, 그는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계획에 의하여 자기 백성이 당한 재난을 바꾸어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도모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사,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역경들을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고통하거나 괴로와할 팔요가 없다는 것을 바울이 새로운 논증을 들어 입증하려고 하기나 한 것처럼, 본문을 따로 떼어서 읽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렇지만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비록 택함을 받온 자들과 유기된 자들이 구별없이 비슷한 악들을 범하계 되지만, 그러나 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경우는 고통을 통해서 깨우침을 주시고, 그리고서는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역경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그가 한 말은, ‘성도들에게 생기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해로 여기는 것이 결국은 그들에게는 유익이 된다' 고 한 것과 갈다. 어거스탄은 성도들의 죄마저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해를 끼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대 이바지한다고 말했다. 어거스탄의 이 말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과는 관련이 없다. 여기서 주의하여 관찰해 둘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온전한 참된 경건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참으로, 의를 온전히 추구하는 문제는 이것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십율 일은 자들에게는……" ; 이 문구는 보삽(補fifi)할 목적으로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의 역경에서 많은 유익을 얻는 이점이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아무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구원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먼저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차후에 생각하는 버릇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간주한 그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선택되었다 고 한 것이다. 바울이 이갈은 순서에 대해 유의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제일 원안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수양에 근거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합이다. 참으로,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다론 곳에서도 또한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들이 먼저 하나님에 게 아신 바 되었다고 말씀되어 있다(갈 4 : 9).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경우에만 환난이 구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요한의 말도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더우기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부르심은 넓은 의미로 쓰여 있다. 그것은 그가 곧 이어서 말하게 될 선택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과정에 다만 반대되는 것 뿐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경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선택하여 그의 특별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한 것이다.

 

'뜻'이라는 단어는 인간들이 그들이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선택받게 된 원인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시고 선하신 뜻 외에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1장과 디모데 후서 1장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가 또한 분명하게 대조되어 진술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곧 이어서 첨부하여 말하고자 한 주제, 즉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복케 하는 환난들이 하나님의 동일한 작정에 의해서 우리를 위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이 이갈이 진술하는 목적은 마치 필연의 사슬 ( chain of necessity)에 의한 것 처럼 우리의 구원을 십자가 지는 것과 연결지으려는 데 있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그러므로 신자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복케 하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울이 선택의 바로 그 순서에 의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필연성을 이전에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선택----우리는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정을 입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을 부인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우리는 이 형상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을 우리 몸에 지니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한  '우라는 환난으로 말미암아 슬퍼하거나 괴로와하거나 부담을 느낄 하동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 언급해 놓은 하나님의 예지는, 어떤 미숙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미리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재나 자기의 자녀들을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해 오신 수양을 의미 한다.

 

이와 갈은 의미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신 자들이 택함을 받아 성령의 거룩케 하심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방금 언급한 그 미숙한 사람들은 어리석게 결론 내리기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 것으로 그가 미리 아신 자들만을 선택하셨다고 했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모두 그들 개인의 공로 때문에 듣기 좋온 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회상하게 하여 그들에게는 선택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그가 앞에서 기술하였던 것들을 말을 바꾸어 반복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이 지식이 하나님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근거하고 있는대,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양자로 삼을 때,그 자신 외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아시는 것이 없으시며, 그가 선택하고자 계획하신 자들을 단지 선발하셨기 때문이다.  ‘미리 정하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헬라어 동사 '프로― 리 제인' 에 의하여 본 구절의 전후 사정을 알 수가 있다.

 

바울이 의미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양자로 삼은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일 뿐이다. 그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본받아야 할 살아있고 두드러진 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에서였다. 본 구절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값없는 수양一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를 지도록 택정하셨다 고 하는 작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독생자를 본받지 않는 자들온 아무도 천국의 상속자가 된 수 없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부정사인 '에이 나이'는 현재나 과거 어느 것으로든 번역된 수가 있으나, 나는 현재 시제로 번역하고 싶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맏아들 '이 라고 부른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 중에서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가 우리에게 본으로서 주어지신 것은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가 기꺼이 당하신 일은 어느 것이나 우리가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단지 표현하고자 합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가 그의 아들에게 부여하신 권위와 지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증거하신 것 을 보면,  그는 '그가 자기의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신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다· 비록 경건한 자들의 상태가 외관상온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는 마치 인체의 기관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과도 갈다), 각 개인과 그의 머리 간에는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가문의 이름을 물려 받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탁월한 지위에 있는데, 이는 그가 모든 신자들을 형제라고 하는 공통의 기호 아래 자신 안에 포함시키기 위함이다.

 

"30. 또'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 바울이 이재 점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보다 더 분명한 논증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卑下)을 본 받을 때 우리의 구원이 참으로 가능케 된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소명. 칭의, 그리고 마침내는 영화 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도가 하는 말의 의미를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리 정하다'라는 단어가 선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십자가를 의무적으로 지도록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 또는 작정을 ·가리킨 말을 가리킨다고 하는 나의 앞서의 말을 되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 ‘ 부르심을 받았다' 라고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결정해 놓으신 것을 감추지 않으시고, 그것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고 하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침착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어전 상태를그들이 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부르심'은 그것보다 더 열등한 것으로 되어 있는 비밀로 가리위진 선택과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상태에 대해서 아무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이 그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공공연하게 그의 감추인 계획 (뜻)을 증거해 주시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같 증거는 외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포와 관련하여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어거하실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이끄시는 택함 받은 자들을 바울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의롭다 하심 ' 이란 신자가 부르심을 받는 시간부터 그가 죽는 순간까 지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이 단어를 공로없이 되는 의의 전가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 의미를 집어치울 팔요는없다.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보상이 너무나도 값전 것이어서 우리가 환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됨으로 해서, 우리가 당하는 재난이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의 표가 되지 않게 되고, 또한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멸망에 이르지도 않게 되는 것보다 무엇이 더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지금 십자가로 말미암아 억눌림을 받고 있는 자들이 장차 ‘영화롭게 됨 ' 으로해서, 그들은 고통과 치욕으로 인하여 더 이상 피해를 당하지 않게된다고 하는 것을 바울이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만 나타났지만,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영생의 기업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광에 대한 보증을 갖게 되며,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족히 비교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첨부해서 밝혀두어야 할 것온, 바울이 히브리 어법을 채택하여 그가 여기서 사용한 동사는 현재형 대신에 과거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의 계속된 행위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다음과 갈이 의역될 수가 있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에 따라 지금 십자가를 지게 하는 자들을 그가 부르시고, 동시에 의롭다 하시어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낮아집의 신분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영광을 전혀 잃지 않게 하셨다.  그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은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들의 영광을 볼품 없게 만드는 것 갈지만, 하나님과 천사들이 보실 때에는 그 영광은 언제나 완전함 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점충법에 의하여 나타내 보여주고자 하는 것온, 신자들이 고통― 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현재 낮아짐의 신분 가운데 있게 된 것임-----을 당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천국의 영광을 얻고 그리고 그들이 지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