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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딤전5:19)

1. 성경 (딤전 5:17~20)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7)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18)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19)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2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 ; 교회의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로들을 소홀히 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땅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전체 교회를 돌보는 그들을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다면 이것보다 더 몰인정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가 아니라 직분을 뜻한다. 나는 곱절의 영예를 지지함이나 존경으로 보는 크리소스톰의 해석에 반대하지 않으며, 원하는 사람은 그의 견해를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여기에 장로들과 과부들에 대한 비교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바울은 앞에서 과부들을 존경하라는 점을 명령한 바 있지만 장로들은 그들보다 더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들과 비교할 때 곱절의 영예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짜를 추천하 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뜻에서 잘 다스리는 자, 곧 자신들의 직분을 신실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 까닭은 비록 어떤 사람이 백 번이 넘게 어떤 지위를 차지하며 그 직함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만약에 그가 자기 직분의 여러 임무를 같이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교회의 부담으로 부양을 받을 권한이 전혀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의미는 직함이 아니라 그 직분에 임명된 자들이 수행하는 일에 영예를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곧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부지런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말씀 전파라는 말로 집약된다. 그러나 말씀이란 아무 의미 없는, 소위 말하는 그것에 대한 관념적인 연구가 아니라는 뜻에서 그는 가르침을 덧붙이고 있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장로들이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그들 모두가 가르치도록 임명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귀절의 명백한 의미는 영예롭게, 그리고 잘 다스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르치는 직분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지하고 잘 단련된 자들을 선출했으며, 이들은 공동의회에서 목사들과 함께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규율을 내리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감독자로 행동했다. 암브로스는 이 습관이 스스로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력을 원했던 교사들의 경솔, 아니 그보다 교만 때문에 폐지된 것으로 불평하고 있다. 다시 바울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는 특별히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생계를 조달해야 한다는 점을 명하고 있다. 요컨대 세상의 배은망덕이 어느 정도이든지 말씀의 사역자를 부양하는 데 있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며, 사단은 이것을 많은 사람들을 가난과 중립의 공포로 위협함으로써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박탈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 그들은 이 짐을 짊어지는 데 있어서 자발적이 아니다.
 
"18. 곡식을 밟아 떠는 소~~~~~~~" ;  이것은 우리가 이미 고린도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당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불친절해서는 안된다면, 우리 동료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친절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겠는가?  그의 의미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바치는 수고를 잘못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도리깨로 타작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곡식을 밟아서 타작하는 습관이란 생소하다. 오직 프로벤스 지역 사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 귀절의 의미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은 쟁기를 끄는 소에 대해서도 똑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귀절을 성경의 한 구절로서가 아니라 일반상식이 모두에게 지시하는 일종의 격언으로 인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일반의 동의에 의해서 사실로 인정되는 것을 표현하신 바 있다. 여기서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땀흘리는 가축을 배고프게 내버려 두는 자들은 잔인하고 형평의 모든 주장을 망각하는 자들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물며 그들을 위해서 도저히 값으로 되갚을 수 없는 일을 하는 목사들에게 생계를 거절하는 자들의 배은망덕이 어떻게 용납되겠는가 !
 
"19 장로에 대한 송사는~~~~~받지 말 것이요." ;  그는 목사들의 급료에 대해서 지시한 다음에 여기서는 디모데에게 그들이 모략적인 공격에 내맡겨지거나 근거가 없고 황당 무계한 여러 비난으로 괴로와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법칙을 특별히, 아니면 독점적으로 장로들에게만 적용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모순된 것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에 있어서 그 진상이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되어야 한다는 점을 요청하고 있다(신17: 6; 마1818 : 16). 그렇다면 왜 사도는 이 법칙을 장로들만 보호하는데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무고한 비난에 대해서 정직성을 보호받는 것이 그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  나는 여기에 대해 인간들의 악의를 이런 .방식으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하겠는 데, 그 까닭은 경건한 교사들만큼 중상모략과 멸시에 내맡겨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여러 임무의 어려움에서만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곧 그 임무가 너무도 커서 때때로 그들이 그 밑에 깔려버리거나, 비틀거리거나, 정지하거나, 발을 헛디딜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악한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할 수많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그 외에도 그들이 여러 임무를 완전하게 실천하고 가장 작은 실수도 범하지 않지만, 그래도 수천의 비난을 결코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단은 인간들과 사역자들 사이를 이간시켜 놓고 점점 그들의 가르침을 멸시받게 하는 것이 그의 술책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직한 사람들의 평판이 공연히 상처를 입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가르침의 권위 또한 감소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 단이 주로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대중은 악의적이요 자기들 위에 있 는 사람들을 시기한다는 플라토의 말이 여기에 적용될 뿐 아니라, 어떤 목 사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진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에 게는 더욱더 많은 어려움이 짐지워지며 그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더욱더 신 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어떤 협의가 제기되는 순간 그것이 이미 확고부동하게 입증된 것처럼 믿어버리는 것이 세상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에게서 보다 높은 수준의 정직이 요구될 뿐 아니 라 사단이 대부분의 사람들,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든 쉽게 믿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이 목사들의 평판을 마땅히 방어해야 옳은데도 그들을 적극적으로 정죄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그러한 큰 불의를 미연에 방지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으며, 그러기에 그는 장로들을 그들이 법적인 증거로 확실하게 정죄를 받기 전에는 악한 사람들의 악의에 내맡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꾸짖고 모든 사악한 욕망을 저지하며, 곁질로 가는 자들은 모두 엄하게 억제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에 게 그처럼 원수들이 많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 들에 대해서 퍼지는 모든 중상모략에 무분별하게 신경을 쓰다보면 그 결과 가 어떻게 되겠는가?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무슨 대책이 세워질 때마다 악한 사람들은 그것을 왜곡해서 자신들이 정죄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 이야기한 점을 완화함으로써 아무도 이런 핑계를 내세워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파피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실제 로 교황주의자들은 얼마나 무수한 특권으로 그것의 교직자단을 감싸고 있는지 모른다. 그 결과 그들은 더없이 수치스러운 생활을 한다 해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게 되었다. 사실이지만 그라티안(Gratian)이 이렇게 이룩해 놓은 보호 조건이 다 지켜진다면(Caus. ⅱ, q. 4 & q.7), 그들이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억지로 고백하게 될 위험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수치스러운 실베스터(Sylvester)의 칙령에 따를 경우 감옥을 정죄하는 데 필요 한 72명의 증인을 어디서 다 찾을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 은 어떠한 비난을 제기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으므로 하부 교직자단이 상급 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들이 그들에게 가 해지는 모든 심판을 가소롭게 여기고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가로막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은 바울의 정당한 지시를 더욱 신중하게 지키게 함으로써 오만불손한 장로들의 혀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함 부로 나팔을 불고 남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자들도 여러 사람 앞에서 공적으 로 모두 엄하게 바로잡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해이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공적으로 징계해야 한다는 이 지시가 장로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을 공적으로 징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들로 하여금 신분이 높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라도 어림없다는 점을 보고서 경고를 받고 더욱 더 두려워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장로들이 영예로운 생활의 본을 통해서 남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만약에 잘못 갈 경우에는 그들 모두에게 귀감으로 엄격한 규율을 행사하는 것이 옳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보다 훨씬 더 심각한 해를 끼치는 실수의 주인공들에게 더 큰 관용을 베풀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이해하고 넘어갈 것은 바울이 여기서 공적인 치욕으로 드러나는 범죄, 곧 극악한 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장로가 범한 실수가 이 범주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권면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