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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딤전6:1)

1. 성경 (딤전 6:1 ~ 10)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2)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3)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4)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5)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6)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7)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8)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9)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복음의 초기 시대의 종들은 마치 그들의 해방에 대한 신호라도 주어졌다는 듯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귀절에서 바울이 이 욕망을 견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극도의 증오의 대상이 이 사실을 알 수 있 다. 사실 종살이는 그것이 되어도 당연할 정도로 지극히 힘든 상태였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인간들은 육신에 조금이라도 혜택이 되어 보이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무엇이든 붙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우리 모두가 형제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에 그러나 형제들의 종노릇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설령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비참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쓰라린 고통을 달래는 위로를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목을 자발적으로 구부려 기꺼운 마음으로 그처럼 힘든 멍에를 메게 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는 목표이다.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 인간 각자는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거짓된 확신을 품고 있으므로 남에게 자신의 주도권을 맡기는 데 자발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연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해 순종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투덜대고 분노를 터뜨리기 마련이다. 사도는 멍에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요청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모든 논쟁에 대해서 단 한 마디로 종지부를 찍고 있다. 그의 의미는 자신들이 그 처지에 적합한가 아니면 더 나은 처지에 적합한가 하고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런 상태에 묶여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는 명령을 통해서 그들이 충실하고 근면하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상전을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서 있는 사람들로 알고 진심으로 존경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어느 누구든 왕이나 상전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신하된 도리에서 그들을 존경하기 전에는 그들이 받아 마땅한 공경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에 따라서는 부적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그 권세가 그들에게 항상 존경을 돌릴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아무도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믿기 전에는 자발적으로 자기 상전들을 섬기며 순종하지 않는다. 복종이란 바울이 지도자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이 존경과 함께 시작하는 법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는 자신의 사리 추구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재치를 보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믿지 않는 주인을 두고 있는 믿는 종들은 항상 마귀를 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나쁘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바울은 동일한 이론을 사용해서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이 나쁜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려면 그들이 믿지 않는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역을 선동한다거나, 또는 복음이 다른 자들에게 복종해야 당연한 이들을 완고하고 불순종하게 만든다는 악평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  형제라는 명칭이 평등을 확립하고 주도권을 폐지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로 종들은 그의 주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을 알고 형제애라는 끈으로 그들과 묶여 있으며, 그들과 동일한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자발적으로 주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펴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이 지상의 상전들(lords)과 동일하게 하셨다는 것은 결코 작은 영예가 아니니, 그 까닭은 우리가 그들과 함께 동일한 입양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살이를 참을성있게 견디는 자극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더우기 종살이는 우리를 사랑하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부드러운 상전 밑에서 더욱 더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기반 (bond)으로 서로 다른 지위와 신분의 사람들을 화해한다는 말이다.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  그는 이것들을 끈질기게 강조하며,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는 뜻으로서 권면에 가르침이 동반될 것을 원하고 있다.  이것은 이런 종류의 가르침은 날마다 반복되어야 하며, 사람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빈번하게 권면해서 깨우치고 자극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다른 교의를 가르치며) " ; 이 말은 헬라어에서 복합 동사로 되어 있으므로  '다른 것들을 가르치다' 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의도에 있어서는 의심할 점이 없다. 곧 그는 건전한 교훈을 공공연하게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다.  전혀 불경건하거나 명백한 오류를 보이 지 않으면서 허황된 잔소리로 경건의 교의를 타락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가르침으로부터 진전이 없거나 교화받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규정에서 떠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바울이 불경건한 교의에 대한 공공연한 창안자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리추구나 탐심에서 단순하고 순수한 경건이 교의의 형태를 바꿔놓는 허망하고 불신앙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가 얼마나 통렬하고 신랄하게 그들을 공격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은 오직 허영과 헛된 결과만을 일삼는 자들의 위선적인 가르침이 끼치는 해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볼 때 그가 지목하고 있는 대상이 더욱 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곧 "내 바른 말에 착념치(동의하지) 않는"이라는 귀절은 '어리석은 호기심에 .끌린 나머지 유익하고 확고한 것은 무조건 마다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말처럼 괴상한 짓만 일삼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 말씀이 건전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건전함을 베푸는 데 그것의 효과가 있거나, 아니면 그것이 건전함을 증진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경건에 관한 교훈에~~~~~~" ; 역시 동일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하나님 경외와 예배를 확립시켜 주고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며, 우리에게 인내, 겸손, 그리고 사랑의 모든 임무를 단련시켜 줄 때만 그것이 경건과 일치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익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올바르게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곧 거기에 무슨 전시가 따르든 듣는 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데 이바지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가르침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사리 추구자들에 대한 최선의 처벌은 그들인 마냥 즐거워하고 그 누리는 모든 그것을  무지로 .정죄하는 것이므로 그는 비록 그들이 여러가지 교묘한 이론을 가지고  우쭐대지만 그들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로 이야기해 버리고 만다. 그들에게는 확고한 것이라고는 전무하고 오로지 허풍뿐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이런 헛된 과시에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복음의 순수성 속에 그대로 있을 그것을 경고 하고 있다.
 
"4. 저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건전성과 이 '맹목적으로 좋아함' (doting)에 대한 간접적인 대조가 들어 있다. 요컨대 이 교묘한 변론자들이 그들의 장황한 허풍으로 스스로를 지치게 할 경우 그들의 모든 노력에 대한 결과는 그들의 질병이 계속적으로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공연한 일에 스스로를 허비할 뿐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은 호기심이 이런 맹목적인 좋아함을 낳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는 달리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올바른 유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변론과 언쟁'(질문과 언쟁)을 함께 묶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곧 그가 뜻하는 질문이란 온전하고 건전하게 배우려는 마음에서 우러나거나 유익한 점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지적 능력을 과시해 보려는, 소르본느 학파에서 오늘날 다루고 있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다. 그 학파에서는 질문에 끝이 없는데, 그 이유는 누구든지 필요 이상으로, 알고자 하면서 자신의 허영에 빠질 때 이 질문에 끝이 없으며, 여기서 끝없는 언쟁이 나오기 때문이다. 무더운 날씨에 우뢰가 없이는 짙은 구름이 흩어지지 않듯이 이 가시돋친 질문들은 언쟁으로 터질 수밖에 없다.

 

실제적인 것보다는 아무런 근거나 기초가 없이 진행되는 말과 관련되는 승부를 겨루는 논쟁을 그는 λοтоμαχα(로고마키아)로 부르고 있다. 궤변가들의 불타는 관심사인 질문을 세밀하게 검토해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공연한 것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의미도 없는 문제에 말려들게 할 모든 질문을 정죄하는 데 있었다.
 
"이로써 투기와~~~~~나며." ; 그는 결과를 통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야심적인 호기심을 피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야심이란 투기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투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곳에는 분쟁, 훼방, 다툼,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나열하고 있는 다른 악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는 5절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명백한 점은 그가 전혀 교화에 대한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은 장난거리와 기발한 토론의 근원으로 바꿔버리는 궤변가들을 정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 때문에 구원의 가르침이 무효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그의 의도가 있다. 그것 자체만 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모독이 되겠지만, 그는 여기서부터 치명적인 악과 해로운 재앙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더 심각한 견책을 내리고 있다. 이 귀절을 통해서 우리는 궤변이 하나님의 교회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해로운 것임을 알고 협오하는 법을 익혀야겠다.
 
"5.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 ; 이것은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기독교의 내용이 가져오는 이득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이 이득이나 이득을 삼는 방법과 동등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성령의 말씀이 오직 그들의 탐심을 채우는 뜻에서 허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사실 그 말씀이 장사하는 상품인 양 그것을 사업으로 일 삼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런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를 갖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는 디모데에게 그들을 본 받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그들을 해충(pests)으로 알고 피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복음을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않고 그것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그들과 사귄다면 전염성이 있다. 그뿐 아니라 대중들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이 친분을 구실로 내세워 자기들도 이 속에 파고 들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들과 전혀 다르며, 조금도 그들과 공통점이 없다는 점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수고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겠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  '이것은 내적인 성향이나 재물의 충족성, 그 어느 것과도 관련될 수 있을 것 같다. 곧 그것을 성향으로 본다면 그 의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만 자신의 가난으로 만족하는 경건한 자들이 이미 큰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재산의 충족성으로 본다면 이것이 내가 받아들이는 견해이다. 이것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 로다"라는 시편 34편 10절의 말씀과 같은 약속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항상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요구하는 대로 주님의 충만함으로 각자에게 그가 주시는 몫을 허용하신다.  따라서 이 진정한 복된 상태는 경건으로 이루어지며, 이 충족성은 이득의 증대와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다.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  아주 훌륭한 방법으로, 그리고 냉소적인 말씨를 섞어가면서 그는 정반대의 말로써 자기 적대자들에게 동일한 내용을 내 뱉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들의 경건이 마치 상품이라도 되는 양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품화함으로써 사악하고 그릇되게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이해하자면 경건이 위대하고 더없이 풍성한 이득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가 경건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충분하고 완전한 복된 상태(blessedness)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며, 경건을 자신들의 이득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자들은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경건 그 자체가 충분히 우리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의 상속자들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부요를 누릴 권리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 그가 이것을 덧붙이는 것은 우리에게 충족한 한계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려는 뜻에서이다. 우리의 탐심이란 억제되지 않을 경우에는 밑없는 수렁과 같고, 그것을 견제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필요로 하는 것 외에는 전혀 바라지 않는 데 있다. 우리가 이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불안이 공연히 스스로 상상하는 수천 회의 생애에까지 뻗치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말보다 더 자명한 이치가 따로 없지만 모두들 거기에 대해서 시인하면서도 각자는 자신의 결핍이 거대한 재산을 삼켜버리지 않을까 하면서 앞일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마치 자신에게 지구의 절반이라도 담을 정도로 큰 위(stomach)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라는 시편 49편 13절의 의미이다.

 

한 가지 충족으로 만족하는 우리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이상의 것을 바라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치와 넘치는 풍요를 제외하고 있다. 자연은 소량으로 만족하고 있으며, 이 자연스러운 용도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재산을 좀더 후하게 사용하는 것 자체를 악한 것으로 정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욕망이 항상 죄가 된다는 말이다.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 그는 디모데에게 자족할 것과 부를 무시할 것을 권면한 다음에, 여기서는 그 욕망이 그들에게 특히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악의 원인이란 부자들만을 지적함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만일 부자들과 같은 욕심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뿐 아니라 거의 언제라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사실 부요하고 싶어하는 이 야심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모두 악마의 종살이로 자신들을 내어주는 셈이다.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또 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이방 시인의 말은 참으로 사실이다. 따라서 과도하게 부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격렬한 성질에 사로잡히고 마는 자들이다. 후에 이들을 파멸로 집어던지고 마는 것은 바로 이 어리석은, 아니 광적인 충동이다. 이 악은 보편적인 것이지만, 교회의 목사들에게서 더욱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은이나 황금의 광채가 자신들의 눈을 황홀하게 하는 순간 아무도 막지 못할 정도로 탐심에 빠져버리 기 때문이다.
 
"10. 돈을 사랑함이" ; 이 악을 다른 악과 비교하는 데 너무 꼼꼼하게 나올 필요는 없다. 야심과 교만이 더 악한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야심은 탐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적인 정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탐심 속에 우리가 일컬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악을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헤아릴 수 없는 악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뜻이니 이것은 우리가 불화, 탐욕, 만취, 또는 이런 종류의 악이 모든 종류의 악을 낳는다고 말할 때 종종 사용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특별히 이것에 대한 비천한 탐심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날마다 모든 종류의 악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사기, 거짓, 위증, 속임수, 강탈, 잔인, 법정에서의 타락, 분쟁, 증오, 독살, 살인, 그리고 거의 온갖 다른 종류의 범죄를 낳는다. 이런 종류의 발언은 이방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여러번 반복해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호레이스나 오빗의 과장법을 칭찬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지나친 언어에 대해서 불평할 권리가 없다. 날마다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탐심에서 나오는 범죄는 또한 야심이나 시기, 또는 다른 악한 성향으로부터도 야기될 수(may) 있으며, 또 실제로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  dperoμevoc(오레고메노이)라는 헬라어를 써서 그들이 돈에 대한 사랑을 따라간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지장이 없으며, 탐심으로부터 더없이 큰 악, 곧 신앙으로부터의 배도가 따를 수(can)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전염병' 에 걸려 고생하는 자들은 점차적으로 타락하는 가운데 마침내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고 만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많은 근심'을 .나는 하나님께는 탐욕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들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를 고문 자로 삼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의 소망이 없게된 자들이 흔히 당하는 양심의 철저한 가책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