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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딤전6:20)

1. 성경 (딤전6:17~21)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7)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8)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19)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0)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21) 
 
2. 묵상(Calvin선생주석)
"17. 부한 자들을 명하여" ;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흔히 그들은 부자들의 멸시를 받았는데,  특별히 풍요한 도시였던 에베소의 경우가 그러했던 것 같다. 풍요한 곳일수록 교만이 더욱 더 지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물질적 풍요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를 배우도록 하자. 바울이 특별히 부자들에게 그처럼 심각한 경고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항상 재물에 동반하는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재물에 잘못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들을 죄악의 계기로 삼는 우리 마음의 타락성 때문이다. 그는 부자들이 경계해야 할 특별한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교만과 거짓으로 안심하는 것으로 전자는 후자에서 나오는 것이다.
 
"~~~~에 소망을 두지 말고"라는 귀절은 바울이 그들의 교만의 근원을 지목하는 뜻에서 덧붙여지는 것으로 보인다. 부자들이 오만불손하게 되고 남들을 멸시하는 것으로 마냥 ,즐거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그리고 최고로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헛된 확신에서 오는 오산이다.바울이 이런 잘못들을 시정하고자 할 때 먼저 재물을 경멸하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곧 '이 세대에' 라는 귀절은 우리가 중히 여기는 재물을 낮추려는 뜻에서 덧붙여지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는 재물 소유란 너무나 순간적이라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줌으로써 재물에 두는 확신의 거짓과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그러한 것에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이것을 파악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재물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쉽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제공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요, 우리가 재물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을 재물에 양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풍성하게 주신다는 그의 말 속에 담겨 있는 대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의미는 설령 우리에게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넘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친절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오직 그의 후덕하심 뿐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양식과 그밖에 모든 것의 충족의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친절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재물에 매달리는 것이 크나 큰 실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재물을 신뢰하지 말라는 금지를 받고 있는 것은 재물이란 오직 이 유한 한 삶에 속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연기와도 같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도 양육을 받고 있다.  '후히' , els απбλανσιν (에이스 아폴라우신:; 풍성하게)이라는 .말을 써서 그는 우리와 모든 사람들, 그리고 말 못하는 짐승들에 대한 하나님의 큰 관용을 묘사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친절은 우리의 필요의 범위를 넘어 광범위하게 확대된다.
 
"18. 선한 일을 행하고~~~~~~" ;  그는 재물에 대한 타락한 집착을 시정하는 뜻에서 앞에서 이미 언급한 여러 대비책에 또 다른 것을 덧붙이면서 무엇이 우리 소유의 올바른 용법인가를 규정하고 있다. 남들에게 선을 행하는 기회는 각자의 재산의 풍요에 따라서 증대하기 마련이요, 우리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는 데 필요 이상으로 주저하기 마련이므로 그는 이 덕을 추천하는 데, 많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그는 보상에 대한 약속을 제시 함으로써 또 다른 자극을 덧붙이고 있다. 후하게 주고 나누는 데서 우리는 스스로 하늘에 보화를 확보하는 셈이니, 이것은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소유 할 수 있는 무엇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터' 란 확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뜻한다. 곧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 두는 영적인 재물은 벌레나 ,도둑이나, 불(fire)의 해를 입지 않고 영구히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는 까닭은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이 귀절에서 우리가 선한 일들에 의한 공로로 영생을 받 을 수 있다는 추론을 이끌어내는데,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어리석은 노릇이다. 물론 가난한 자들에게 소비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제 아무리 완전한 사람이라도 각자의 완전한 임무를 백분의 일이라도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의 관용은 하나님 앞에서 계산에 집어넣을 .가치가 없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계산하라는 요청을 하실 때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우리는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값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와 화해하신 다음에는 그가 우리의 봉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거기에 그것들이 받을 수 없는 보상을 베풀어 주신다. 따라서 우리의 보상은 공로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납에 의존하며, 믿음의 의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 ;  이 귀절은 다른 세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나의 견해는 그것을 단순히 디모데의 직무 수행을 위해 그에게 수여된 은혜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위임된 것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까닭은 다른 곳에서 재능(talent)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물들이 우리에게 수여되는 것은 만 약에 우리가 소홀해서 그것들이 의도된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을 경우에 우리가 언젠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조건 밑에서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것을 조심스럽게 보존해야지 그것을 더럽히거나 자신의 실수로 그것을 박탈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권고하고 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의 배은망덕이나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우리의 남용의 결과는 그것들의 철회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선한 양심 가운데 보관하고 제대로 사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망령되고 허한 말과~~~~피하라." ;  이 권면의 목적은 그가 확고한 가르침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모든 허식으로부터 돌아설 때에만 가능하다. 사실 즐겁게 해주려는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더 이상 교화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맡겨진 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쓸데없는 수다를 피하라는 경고를 바로 덧붙이는 것은 아주 적절했다. κενoфωνεαs(케노포-니아스)를 목소리들의 허영으로 번역하는 데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번역의 모호성 때문에 그릇된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목소리란 종종 운명이나 행운같은 단어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가 복음의 순수성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속된 철학으로 바꾸는 자들의 떠벌림과 '큰소리침'을 정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다. 따라서 κενοфωναι(케노포-니아이)는 어떤 특수한 한 단어가 아니라 교회의 발전보다는 스스로를 위한 '박수갈채'를 더 바라는 야심적인 사람들이 계속 역겹게 퍼붓는 장황한 허풍을 뜻한다.
 
그리고 이 단어를 써서 바울은 그것을 더없이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거만하고 고상한 무엇이 위에서 소리를 낼 경우에는 실제적으로 밑에는 아무것도 없고 다만 그가 속된 것으로 부르는 맹랑하고 요란한 소리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박사들이 그들의 나팔을 불어대면서 자신들의 웅변을 토로하기 시작 하는 순간 성령의 능력이 꺼져버리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처럼 뚜렷하고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은 계속 퍼지며 처음과 다를 바 없는데, 여기서 바울이 지적하듯이 교황들 가운데서 망령이 어찌나 증대했던지 '거기서 주도하고' 있는 신학의 목표는 헛되고 속된 케변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되고|말았다. 끝없는 논쟁에 무수하게 나오는 잘못들, 우매, 그리고 모독에 대해서는 접어 두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들의 전체 가르침이 장황한큰 소리뿐이기 때문에 설령 그들이 경건에 위반되는 무엇을 전혀 가르친 것이 아니더라도그들의 전체 가르침이 성경의 위엄; 조성령의 능력, '전지자들의'  "진실성, 사도들의성 실정과 위배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은 순수한 신학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묻겠는데, 그들은 신앙, 회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인간의 무능력, 성령의 도우심, 무상의 사죄,  그리스도의 업적에 대해서 가르치되 확고하게 사람들을 경건 안에서 세우는 데 가치가 되는 것을 가르쳐 본 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번째 서신을 취급하면서 더 상세히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사실 웬만한 지력이 있고 발견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황 비슷하게 큰 소리치는 자들의 신학 용어들은 그들의 학교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교리적인 모든 권위와  '정의들이 한낱 속된 κevodωνiαι(케노포니아이 : 잡담)에 지나지 않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들의 이 모든 것을 묘사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있을 수 없다.성경의 순수성에서 곁길로 벗어나는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그것을 모독하는 것으로 끝을 내는데, 처벌을 받는 것은 '더없이 공정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사들' 은 이런 종류의 타락을 피하고 젊은 사람들을 거기서 방어하는데 제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지나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벌게이트 역은 κενopwvias(케노포-니아스)-대신에 καιοοωνiαS(카이노포니아스)로 읽는 독법을 택하면서  그것을  '신기한 것들' 로 번역하고 있다. 교부들의 주석을 참고해 보자면 현재도 몇 헬라어 사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독법이 당시 대대적으로 용인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내가 따른 전자의 독법이 훨씬 더 적합하다.
 
"변론(반대되는 것들)." ;  이것 역시 아주 정확하고 우아한 표현이다. 영광을 노리는 자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교묘한 내용들이란 그 속에 음흉한 것이 내포되어 있어서 소박하고 겉치레가 없는 복음의 참된 가르침을 뒤엎고 만 다. 따라서 참된 지식에 반대되는 것들'이라는 귀절을 통해서 사도가 의도 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박수갈채를 사려는 허황된 과시이다. 야심이란 항상 분쟁적이요, 논쟁을 야기하기 때문에 과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고 무슨 주제에든 칼을 뽑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바울의 주된 요점은 :망상과 교묘함으로 빠져들기 마련인 궤변가들의 '헛된- 가르침은 [그 [복잡성 때문에 참된 가르침의 소박성을 흐리게 할 아니라, [그것을 억누르고 2007멸시의 대상 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요컨대 세상이란 흔히 외형적인 과시에 휩쓸리 기 마련이다.
 
바울은 디모데가 전혀 이런 종류의 것을 흉내내는 일이」없기를 바라고 있 다. 그러나 교묘하게 보이고 과시에 흐르는 것들이 [인간의 호기심에 더 홍 미있고 인상적인 것으로 보이는만큼 바울은 경건에 대해 소위 말하는 겸허 하고 소박한 가르침을 딛고 올라서는 복지식이란 전혀 지식이 아니라는 주장 을 펴고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용의주도하게 유의함으로써 온 세상을 경탄 과 칭송으로 가득 채우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확고한 교화를 주지 못 하는 모든 위장된 지식은 단호하게 잘라버리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바울의 권위에 따라서 참으로 지식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에 대한 확신과 두려움, 곧 경건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  그는 결과를 통해서 이것은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그것을 피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 다. 명성을 얻으려고 경건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흉측하게 만드는 자들의;오 만을 처벌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의 이해력의 건전성을 상실하도록 허용 함으로써 그들이 많은 터무니없는 오류에 .말려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 는대로 이것은 오늘날 교황 지배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진상 그대로이 다. 곧 그들이 우리 종교의 신비들을 속된 철학으로 바꾸기 시작하자 거짓 된 신앙의 무수한 괴물들이 따르고 있다
 
"믿음~~~~~" ;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의 믿음은 신앙심(religion)과 건전한 가르침의 개요를 뜻한다. 이런 본을 통해서 경고를 받고 믿음에서 떠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라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집착하며 경건에 대한 악의에 찬 와전인 궤변과 모든 교묘한 것들을 기피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