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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딤전6:14)

1. 성경 (딤전 6:11 ~ 16)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1)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2)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4)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5)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으로써 그는 그의 권면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의와 경건 믿음과 인내를 좇으라' 는 그의 요청을 그가 방금까지 말한 것에만 국한하는 것이 옳다면, 이것은 돈에 대한 탐욕을 교정하기 위한 그의 처방이 될 것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그가 마땅히 따라야 할 욕망은 영적인 것이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넓은 의미로 적용될 수도 있다. 디모데가 모든 허영에서 벗어나 그가 바로 앞에서 정죄한 헛된 호기심(πeptepriow 페리에르기안)을 피해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필요한 관심거리에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쓸데없는 것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그가 언급하는 특정한 종류의 도덕에는 다른 종류의 것도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를 추구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 경건을 신앙으로, 사랑을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탐심과 그것의 열매를 협오하고 기피할 수밖에 없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다음 서신에서 그는 군인인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소명과 생소한 일에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디모데에게 지상적인 걱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제지하라는 뜻으로 싸울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종들을 전쟁으로 부르시고 있는데도 무관심과 자기 기만은 마치 그것이 오락이라 도 되는 듯이 아무 괴로움이 없이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에게 이 싸움을 담대하게 싸우도록 격려하는 뜻에서그는 그것을 선한 것으로, 곧 복된 것으로 부르고 있는데, 따라서 이것은 결코 기피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의 군인들이 결과가 확실치 않고 그들이 죽을 위험에 처할 경우에도 서슴치 않고 나가서 싸운다면, 우리는 미리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안내와 깃발 밑에서 얼마나 더 담대하게 싸워야 마땅하겠는가!  특별히 우리에게는 보상이, 곧 지휘관들이 그들의 부하들에게 통상적으로 주는 상을 훨씬 능가하는 영광스러운 불멸과 천상의 복된 상태가 기다린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런 소망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들이 지치거나 기진맥진해 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계속해서 말하는 내용이다.
 
"영생을 취하라(붙잡고 있으라)"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너를 영생으로 부르시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무시하고 그것을 얻도록 힘쓰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붙잡고 있으라' 는 말에는 도중에 포기하거나 그것을 지겨워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즉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장차 생명을 얻기 전에는 아무것도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그는 그가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전진하려고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코오스를 지도하는 분으로 삼지 않을 경우에는 너무 성급하고도 무의미하게 싸우기 마련이므로 그들에게 적극성을 취하는 뜻에서 그는 또한 그들의 부르심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우리에게 용기를 채워주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지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도 아래 있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그의 손길을 내뻗고 있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불리하고 심각한 고발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영생으로 부르셨다. 네가 그것을 얻기 전에 다른 무엇에 홀리거나 '도중에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하는 말을 듣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강력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선한 고백을 하였다)." ;  바울은 ,자기의 .과거 생활을 언급함으로써 더욱 더 견인불발할 것을 자극하고 있다. 처음 시작을 잘 해놓고 다음에 실패하는 것은 아예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더 수치스럽다. 그는 지금까지는 용감하게 싸웠으며 칭찬을 받은 디모데에게 이 강력한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그의 종말이 시작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증거라는 말을 나는 말로 이야기된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된 것,것도 단 한 번이 아니라 그의 전체 사역에 걸쳐서 실천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 의미는 네게는 에베소와 다른 나라에 너의 명백한 증거에 대한 증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네가 신실하고 진지하게 복음대로 살아온 것을 보아온 자들이요, 따라서 이처럼 훌륭한 본을 보여준 지금에 와서 네가 그리스도의 선한 군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면 더없이 큰 수치와 치욕을 자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식이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탁월할수록 실패할 경우에는 그만큼 더 핑계할 수 없다는 점과 더욱 더 우리가 올바른 코오스를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일반적인 교훈으로 배우게 된다.
 
"13. 만물을~~~~~내가 너를 명하노니." ;  이런 진지한 간청을 통해서 바울은 복음사역에 있어서 곧장 끝까지 올바르게 고수한다(to persevere)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귀한 업적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가 디모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다지만, 여기서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합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살게 하시는' 것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사망의 모습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십자가의 수치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의미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사망의 위협을 제시할 때 우리의 눈을 감아야 하거나, 오직 홀로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만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체의 요점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곧이어 그리스도에 대해서 덧붙이고 있는 내용은 이 점을 훌륭하게 확증해 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플라토의 발 밑에 앉아서 철학이나 배우며 그늘에 앉아 쓸모없이 하는 그의 변론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거하고 있는 가르침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 비준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증거하시되 많은 말이 아니라 본질로써, 곧 죽음에 대한 그의 자발적인 굴종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거기에 이미 확고한 정죄를 받고 오셨다는 점을 생각하시고, 자신을 변호하기 보다는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래도 그의 침묵 속에는 주님께서 큰 목소리로 자신의 사건을 변호하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그의 가르침에 대한 변호가 있었다.
 
곧 주님께서는 어떤 일반보다  더 훌륭하게 그 자신의 보혈과 자신의 죽음의 제사를 통해서 그것을  비준하셨다. 소크라테 스 역시 죽었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은 그가 고수했던 교의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증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 하나님의 피가 쏟아졌다는 말을 들을 때,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날인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동요할 때마다 우리는 힘을 언기 위해 곧장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볼 것을 명심하도록 하자. 우리 앞에 가시면서 우리에게 길을 제시하는 지도자를 배반하는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비겁한 노릇이겠는가!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 당시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고정할 필요성을 얼마든지 강조한다 해도 그것이 과장이라고 할 수없었던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잘못'이 온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고 누구나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으며, 전반적인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날마다 그들은 새로운 고통에 직면해 있었을 뿐 그들의 모든 수고와  고통의 열매는 전혀 내다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남은 것이라곤 생각을 통해서 우리의 구속의 저 복된 날로 날아가는 것 이외에 따로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동일한 이유는 오늘날 똑같이 우리들에게 적용된다. 사단은 이 소망은 제쳐두고 몇 천번이고 우리를 올바른 길에서 이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불과 망명생활과 그밖에 우리 원수들의 모든 격정적인 공격, 중상모략과 그밖의 다른 고통은 접어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보다 훨씬 더 악독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야심적인 사람들은 우리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에피큐리안 파와 루시안파에서는 우리를 조소하며, 뻔뻔스러운 자들은 우리를 모독하며, 위선자들은 우리를 상대로 격분하고 있으며, 육신으로 현명한 자들은 '우리에게 간접적인 해를 입히고 있으니, 우리는 사방에서 수다한 '방법으로 괴롭힘을 받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처럼 무겁고 위험한 직분의 집에 짓눌려 있으면서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인내한다는 것은 크나큰 기적이다. 이 모든 어려움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하며 항상 거기에 우리의 신뢰를 두는 데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소원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지연하실 경우 그에게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 주시도록 하기 때문에 바울은 일찌기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너무 성급한 예상을 제지하고 있다. 이것이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 을 보이시리니"라는 귀절의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것에 대한 적당한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경우 더욱 더 참을성있게 그것을 기다리는 법이다. 자연의 순서를 우리들이 참을성있게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욕망이 거기에 대항해서 투쟁하도록 내버려둘 경우에 우리의 행동이 시기상조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제지를 받는 것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려야 마땅하다.
 
"이 명령을 지키라." ;  명령이란 그가 지금까지 디모데의 직무에 대해서 말한 모든 내용을 뜻하는데, 그것을 종합하자면 그가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신실한 사역자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율법 전체가 포함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것을 그에게 부여된 직분상의 여러 임무와 관련 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하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시는 모든 내용을 규정하신다는 조건으로 교회의 일꾼돌로 만들어 진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선한 신앙 속에 서 수행한다는 뜻이다.  나는 분명히 이것이 전적으로 디모데의 사역과 관련 되는 것으로 본다. 다음에 이어지는 두 형용사의 격과 변화 때문에 이 두 형용사가 계명과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디모데와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디모데와 관련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만일 자신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활의 성결과 자신의 태도의 순결성에 대해서 이주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15.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복되시고 유일 한 주권자)" ;  이런 존칭이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권세를 극찬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 왕들의 화려함 때문에 현흑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당시로 말하면 모든 왕국들의 위대함과 권세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던 때이므로 이러한 교훈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권세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지독한 원수들이었을 뿐 아니라 오만불손하게 하나님을 공격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기들 발 아래 짓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참된 종교에 대해서 멸시를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비참하게 패배를 당하고 짓눌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시세로의 〈Pro Flacco〉에서 그가 유대인들의 억압된 상태 때문에 얼마나 그들에 대해서 기고만장하게 굴었던가를 엿볼 수 있다. 선한 사람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처럼 번영으로 우쭐대는 그것을 때때로 낙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눈을 저 순간적인 광채로부터 돌리려는 뜻에서 바울은 하나님에게만 복, 주권, 왕의 권세가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유일한 왕으로 부름으로써 마치 이 세상에 위정자들이나 왕들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정치적인 통치를 전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권세로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설명 형식으로 덧붙여지고 있는 다음 귀절에서 .알 수 있는 대로이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그의 최상의 지배에 복종하며, 그에게 의존하며, 그의 뜻에 따라서 세워지거나. 쓰러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권위가 도저히 비교 불가능한 것은 나머지 모든 것은 그의 영광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들은 사라지고 재빨리 패망하지만 그의 권위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 .바울이 여기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행복도, 어떠한 가치나 탁월성도, 그리고 어떠한 생명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먼저 하나님만이 불멸하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와 그의 모든 피조물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생명을 빌어온다는 점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불멸이란 인간의 영혼과 천사들에게도 속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는 어떠한 피조물에게든 불멸을 수여하신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께서만 홀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이라고 나는 대답 하겠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권리상, .그리고  본질상 불멸할 뿐 아니라 불멸을 자신의 권세로 가지고 계시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 속에 주입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것은 당장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요. 천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불멸은 인간이나 천사들의 영혼 속에 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근원, 곧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부터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 : 28)라는 발씀 그대로이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토론을 원하는 사람은 어거스틴의 〈신국〉City of God) 제12장을 읽기 바란다. 
 
"빛에 거하시고" ;  여기에는 두 카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숨겨져 있지만, 그러나 그 원인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 께서 흑암으로 가리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지각의 연약성, 아니 우리의 마음의 둔함 때문에 그의 빛에 접근할 수 없는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빛이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접근하려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젖혀 주시지 않았더라면 선지자는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 34 : 5)"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유한한 육신의 제약을 받고 있는 한 아무것도 우리에게서 숨겨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하나님의 가장 깊은 비밀의 한가운데까지 파고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고전13 : 9~12). 따라서 신앙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빛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따라서 그것은 여전히 인간에게 접근 불가능한 빛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 이것은 동일한 내용, 곧 인간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뵈올 수 없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좀 더 뚜렷하게 설명하는 뜻에서 덧붙여 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것이 인간의 육안뿐 아니라 이해력과 관련 되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우리는 항상 사도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곰곰 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우리들이 현재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힘든 노릇이다.  '듣기만 할 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도대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 말인가?' 라는 생각이 항상 들기 마련이다. 사도는 이것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우리 감각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로써 이 위험 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뵙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시력이 그 높이까지 도달할 정도로 예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것이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라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이 발언에 대해서 길게 논의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여러곳에서 다루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그의 최선의 답변은 폴린이라는 과부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본 문맥의 의미에 관한 한 대답은 간단하다. 곧 그가 다른 곳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 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 50)고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현재의 상태로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뵙는 것이 허락되기 전에 우리는 새롭게 되고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의 호기심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점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자. 그리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하여 평안과 성결(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도무지 그를 볼 수 없다)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어거스틴의 현명한 경고를 명심하도록 정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