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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1. 성경 (딤전4:6~10)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6)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7)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8)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9)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디모데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에게 빈번하게 상기시켜 줄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후에 이것을 두세 번 반복하는 까닭은 그 내용이 자주 명심해야 할 내용들 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추천하는 가르침을 거짓되거나 불경건한 교의들이 아니라 덕이 되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들과 대조하는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디모데에게 자신의 가르침만을 이루어나갈 것을 지적하고 이밖의 것들은 완전히 잊어버려 줄 것을 원하고 있다.

 

"선한 일꾼이 되어" ;  인간은 그리스도의 인준을 받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을 자신 앞에 세우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재치, 웅변, 또는 심오한 지식에 대해서 박수갈채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중의 칭송을 덜 가져오는 경향이 있는 기본적인 필수 사항에는 관심을 덜 쏟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되는 이 한 가지로 만족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수천번 고상하고 예리한 박사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로운 명함(title)으로 여겨야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목사에게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종으로 여김을 받는 것보다, 그리고 일생의 사역에 있어서 이 것만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것보다 더 크나 큰 영예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다른 야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인간 인준을 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처럼 큰 축복을 박탈당하지 않으려면 다른 무엇을 추구하거나 어떤 것일지라도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을,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도록 하자.

 

"양육을 받으리라." ;  이 동사가 헬라어에서는 중간태이므로 '양육하는' 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이 동사에 목적어가 따르지 않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귀절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나는 이 단어를 그가 디모데의 교육에 대해서 금방 말한 것을 확증하는 수동태로 보고자 한다. 이 내용은 다시 말해서 네가 어릴 적부터 올바르게 신앙을 배워왔으며, 즉 '네 어머니의 젖을 통해서 건전한 교의를 빨아먹고 자라왔으며, 지금까지 거기에 진전을 보고 있으므로 네가 아직도 그렇다는 점을 신실한 사역으로 입증하도록 힘쓰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해석은 또한 이 동사의 어조의 의미를 잘 드러내 주는 셈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기독교의 가르침 전체를 뜻하며, 선한 교훈이라는 귀절이 덧붙여지는 것은 신앙이 무엇인가를 좀더 명백하게 설명하려는 뜻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교의들이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리더라도 그것은 전혀 유익한 데가 없다는 말이다. '네가 좋은'--- 네가 지금까지 따르고 있는--이라는 귀절은 그의 견인을 시사한다. 소년시절부터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배웠지만 후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떨어져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디모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다.

 

"7. 오직~~~~~연습하라" ;  어떤 종류의 교의를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지시한 다음에 여기서는 어떤 종류의 본을 보여야 마땅한가를 이야기하면서 그가 경건에 힘써야 마땅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연습하라 는 말은 이것이 디모데의 본 업무, 그의 주요 관심사, 그의 첫째되는 염려사항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네가 쓸데없이 다른 문제로 시달릴 필요는 전혀 없다. 네 모든 정성과 능력을 다 기울여 오직 경건함에 힘쓰는 것만으로 가장 귀한 일을 하는 셈이니까 라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경건이란 순결한 양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영적인 하나님 예배를 뜻하는데, 이 점은 경건이 육체적 단련과 대조되는 다음 귀절에서 더욱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가 뜻하는 육체적 단련이란 사냥, 달리기, 캐내기(digging), 레슬링 또는 육체적 노동이 아니라 모든 외형적인 신앙 행위, 곧 철야기도 등으로 땅에 엎드려 오래 금식기도하는 것 등이다. 그는 여기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미신적인 준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이유는 그렇게 되면 골로새서(2:21)에서처럼 그는 이 모든 것을 전적으로 정죄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저 그런 내용을 얕잡아 이야기함으로써 혜택이 극소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음이 순결하고 동기가 올바르다 해도 외적인 행동에서는 높이 평가할 것이 전혀 없다는 바울의 견해이다. 이것이 필요한 경고인 까닭은 세상은 언제나 외형적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강한 성향이 있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장점이 있다는 그릇된 견해는 제쳐놓더라도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금욕적인 생활이 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마치 그것이 기독교 성화의 주요 부분이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강력하게 유혹한다.

 

여기에 대한 보다 명백한 증거는 바울이 이 명령을 제시하자마자 뒤이어서 헛된 육체적 단련이 온 땅의 무절제한 경탄을 차지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수도원의 금욕생활이 일어났으며, 초기 교회의 대부분의 규율, 아니면 최소한 대중에게서 가장 평판을 받았던 규율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수도사들이 그들의 엄격한 생활법칙에 신적 또는 천사적 완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서 그처럼 열성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사들도 당시에 지켜지고 있던 습관을 육체를 죽이는 수단으로 무리하게 과대평가하지 않았던들 그들이 그처럼 엄격하게 그런 내용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곧 그는 어떤 사람이 장기간에 걸친 이 단련 때문에 자신을 다 닳아 없앤다 하더라도 그 혜택이 극소하고 하찮을 것임은 그런 것들이 유치한 규율의 초보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8.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  경건이 있는 사람에게는 설령 이 금욕적 인 습관이 베풀 수 있는 작은 도움은 없다 '하더라도 부족한 점이 전혀 없다 는 뜻이다. 경건이란 기독교 생활의 시작, 중간, '그리고 이끌이 되며, 그것은' 완전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열등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결론으로 우리가』오 직 경건에만 힘써야 마땅한 가격은 일단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기만 하면 하나 님께서는 더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육체 적 단련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은 그만큼 경건의 생활을 방해하거 나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약속이 있느니라" ; 경건한 자들에게 어떠한 결핍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아주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완전이 경건함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하고, 여기서는 진정한 행복에서 경건이 성취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항복의 근 원이므로 그는 신령한 은혜의 약속을 또한이 세상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 신령한 은혜의 약속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요, 이것이 없 다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는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심을 밝히 말하고 있다. 그러 나 우리는 현재의 축복과 미래의 그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 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축복하시되 우리가 그의 친절하심에 대한 맛만 보도록 하며, 그 맛을 통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만족하게 될 하늘 의 축복을 사모하게 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 유 때문에 현세의 축복에 온갖 고통이 분석이고 또 그것이 이 수많은 고통 으로 파괴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처음부터 이 땅에서 호화롭게 살려는 생 각을 갖지 않는다면 현세에서 우리가 풍성하게 지내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 다. 더 나아가서 아무도 이 귀절에서 공로의 교의를 끄집어내는 일이 없도 록 하려면 우리는 경건에는 인간에 대한 선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뿐 아니라 신앙과 기도도 포함된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9. 미쁘다 이 말이여~~~~~~" ;  그는 그의 변론의 결론 부분에서 그가 맨 처음 에 이미 두 번이나 발했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도 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곧이어서 거기에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변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얼마든지 이 점을 그처럼 강력 하게 주장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모든 선한 것이 결핍되고, 사실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너 무 많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 세상에서의 축복 되고 행복한 생활에 필요한 .것을 보충하신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 육신적 으로 볼 때는 우리의 체험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가르침을 단순히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대한 모든 공격을 물리치면 서 :우리의 불신이 문을 닫고 쫓아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문을 열어젖힐 것 을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좀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축복 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다면 그는 우리를 더욱 너그럽게 대하실 것이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  그는 여기서 온갖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신자들은 더없이 비참한 인간이 아닌가를 고려하는 하나의 반론을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실제 상태가 외형적인 '모습으로 판단되는 일 이 없도록 '그는 그들의 고통의 원인과 결과와 관련해서 외형적인 모습과 다른 모습을 구별하고 있다. 그들이 역경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는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약속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상실하지 않는다고 결 론짓는다. 다시 말하지만 역경을 당하는 신자들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선한 양심이 그들을 지탱하고 있으며, 복되고 즐거운 결말이 '그들을 기다리고:있 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현세의 행복은 영예와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는 이 둘을 수고와 모욕과 대조하는데, 그 이것은 가난, 추위, 발가벗음, 배고픔, 망명생활, 노략질, 감금, :매맞기, ;그리고 다른 박해와 같은 모든 종류의 불편과 고통을 의미한다.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  이 위로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와 관련된다. 즉 우리가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경우,,우리의 고통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기는커녕 감사에 대한 훌륭한 .이유가 된다는 말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소망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고 정되기 마련이다. 그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터전이요, 우리를-결코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롬5: 5). 여기서 완경건한 가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득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곧~~~~~구주시라" ;  이 둘째 위로는 처음 것에 의존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기서 언급한 구출이란 곧 소망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논리는 적 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전개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σωτηρ(소-테르)는 경계하고 보존하는 자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다. 그의 변론은 하나 님의 친절이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친절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면, 자신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 경건한 자들은 이 친절을 어떻게 더 알겠는가 ?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겠는가 ? 하나님께서는 그의 풍요를 그들에게 더 거침없이 쏟지 않으시겠는가? 즉 그는 모든 일에서 그들을 끝까지 안전 하게 지켜주시지 않겠는가 ?